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58)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58화(58/608)
제58화
“응? 어디서 이상한 소리 들리지 않아?”
잠이 들려는 순간 창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마치 윙윙거리는 스피커의 잡음 같기도 했고, 누군가 대화를 나누는 소리 같기도 했다.
트로웰도 관심을 보이고 다가왔다.
“근처에 마나의 장막이 펼쳐져 있어. 침묵마법 같은데.”
“마법?”
“어설픈 수준이라 우리에게 통할 정도는 아니야. 소리에 집중해 봐. 들릴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인 다음 창가에 귀를 갖다 대고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자 크고 작은 고성과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여자의 것으로 들리는 음성 하나와 굵고 낮은 다수의 남자 목소리였다. 그것을 깨달은 즉시 나는 앉아 있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여자의 목소리가 귀에 익었기 때문이다.
“설마 쉐리?”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아. 밖에서 시비라도 붙은 건가? 거리가 생각보다 떨어져 있어. 서둘러야겠는걸?”
그렇게 말한 트로웰은 곧장 창문을 열고 그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나 역시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쉐리가 다수의 남자와 같이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더구나 소리를 차단하는 마법을 썼다면 별로 좋은 용건일 리 없었다.
웅성거리는 소리는 마을의 가장 한적한 곳에 위치한 숲 속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트로웰은 내게 따라오라는 눈짓을 보낸 뒤 망설임 없이 어두운 숲 속을 달려가기 시작했다. 다행히 숲 안쪽으로 향하는 산책로가 있어, 풀과 나무들을 일일이 헤치고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허리밖에 오지 않는 고만고만한 나무들을 지나 몇 걸음 걷지 않아 드디어 눈앞에 우람한 덩치를 자랑하는 나무가 드러났다. 트로웰은 한 손을 들어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러자 나무 저편에서 이전보다 더욱 선명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싫어! 건드리지 마! 다가오지 마앗!”
“이거 왜 이래? 다 같이 즐기자는 건데. 그렇게 대담하게 남자를 꼬시고 다니는 주제에 설마 처녀라고 둘러대려는 건 아니지? 큭큭!”
“원망하고 싶으면 동료를 따돌리고 혼자 멋대로 군 자신을 탓하라고, 흐흐흐.”
“아아, 이거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즐겨 보겠군. 걱정하지 마, 아가씨. 지금 여기서 얌전히만 굴어 준다면, 다른 사람들한테는 절대로 이야기하지 않을 테니까.”
비열한 행동만큼이나 비열한 대사였다.
그가 한 말에서 저들이 쉐리에게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깨달은 나는 얼굴을 굳혔다. 텔레비전이나 인터넷 기사로만 접하던 추악한 짓거리를 눈앞에서 목격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 순간, 화가 나서 주먹을 부들거리는 내게 트로웰의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진정해, 엘. 섣불리 움직였다간 쉐리가 더 위험해질 수도 있어.』
이번에도 머릿속에서 직접 울리는 느낌이었지만 이번엔 당황하지 않았다. 그가 요령을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이 대화법은 성대를 통한 목소리가 아닌 마음속의 의지를 발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과거 언령을 사용한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다.
『그, 그럼 어떡해? 저러다 쉐리에게 큰일이라도 생기면…….』
『괜찮아. 아직은 몸을 움직일 수 없는 것 말고는 무사한 것 같으니까. 바로 이런 때를 위해서 정령술이 필요한 거 아니겠어?』
생긋 웃은 트로웰은 조심히 손을 내밀어 딛고 있던 땅을 툭 때렸다. 그러자 그의 손길이 닿은 부분부터 바닥이 꿈틀거리기 시작하더니, 쉐리가 포박된 장소까지 빠르게 쏘아져 가기 시작했다.
“히이이익!”
“으아악! 이, 이게 뭐야!”
순식간에 치솟아 오른 흙 줄기는 마치 뱀처럼 남자들의 몸을 감았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황한 그들은 반항조차 하지 못하고 허공에 떠올랐다.
“근처에 마법사가 있어!”
“제기랄, 어떤 자식이야! 이거 내려놓지 못해!”
화가 난 남자들이 난동을 피웠지만, 그래 봤자 그들을 단단히 얽어맨 흙덩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 곳에서 이 모든 일을 기획한 트로웰은 서운한 듯이 중얼거렸다.
『흐음. 이왕이면 정령사라고 오해받는 게 좋은데 말이지.』
『킥킥. 근데 쉐리는 저대로 둬도 괜찮은 거야? 트로웰이 흙을 다룬다는 걸 들키면 안 되잖아.』
『아아, 그러고 보니 그렇군. 그렇다고 저 상태로 그냥 끝낼 수도 없으니…… 그냥 기절시킬까?』
『엥? 기, 기절? 잠깐만 트로웰!』
『미안. 이미 해 버렸는데.』
“…….”
그가 한 일은 아주 간단했다. 근처에 있던 돌멩이 하나를 들어 쉐리의 머리에 던진 것이다. 갑자기 벌어진 광경에 어리둥절해하던 그녀는 날아온 돌에 맞고 그대로 쓰러졌다.
내가 황당한 심정으로 바라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어색하게 변명했다.
『일행들을 걱정시킨 벌을 준 셈 치지, 뭐. 어차피 다친 건 엘이 치료해 줄 수 있잖아.』
『아하하…….』
알고 보면 트로웰은 상당히 무서운 성격이 아닐까. 단언컨대 이런 방식으로 여자애를 기절시킬 수 있는 건 그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식은땀을 흘리는 동안 트로웰은 느긋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허공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던 남자들이 그를 알아보고 소리쳤다.
“너, 너는 샴페인 용병단의!”
“이 자식! 이거 네가 한 짓이냐! 당장 풀지 못해?”
“흐음, 풀라고?”
“그래, 이 비겁한 자식!”
“갑자기 나타나 기습을 하다니! 당장 이거 풀어!”
“원하신다면.”
트로웰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와 동시에 그들을 고정하고 있던 흙덩이가 순식간에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그 순간 남자들은 후회하는 표정이 되었다. 지탱할 곳을 잃은 그들의 몸이 하강을 시작한 것이다.
쿠웅!
“컥!”
“으악!”
“크아악! 파, 팔이!”
떨어질 때 받은 충격이 컸는지 그들은 크게 비명을 질렀다. 그 중 마법사로 보이는 사람이 팔을 부여잡고 고통을 호소했다(그것을 알아본 이유는 그의 몸에서만 유독 마나의 유동이 컸기 때문이다). 기괴하게 뒤틀린 모양을 모아 아무래도 부러진 듯했다.
그러나 신음에 가득한 남자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트로웰의 표정은 담담했다. 아니, 무심하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그는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은 채 나른하게 중얼거렸다.
“다행이네. 팔을 다쳤으니 당분간은 마법 따위는 못 하겠지? 사실 지금 안 다쳤으면 내가 직접 손보려고 했어.”
“크… 크윽! 너, 너엇!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하냐고? 물론이지. 이건 정당방위거든. 우리 단원을 먼저 건드린 건 너희잖아. 난 정당하게 벌을 주고 있는 것뿐이야.”
“그, 그런 억지가!”
“억지? 어떤 것이? 강간당할 뻔한 일행을 구하려고 했던 게? 그 와중에 약간의 무력이 동원된 일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하는 트로웰의 모습은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트로웰과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이것도 그가 설정해 둔 ‘매튜’의 일부인 걸까? 아니면 트로웰의 본심? 차게 웃은 그는 자신을 노려보는 남자들에게 다가서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이게 뭐야. 전혀 반성들이 없네. 와아, 굉장해라. 자신들이 어떤 죄를 저지른 건지 전혀 자각을 못 하는 건가?”
우두둑―
가볍게 깍지 낀 그의 손가락에서 기괴한 소리가 울렸다. 남자들의 얼굴이 희게 질리는 순간이었다.
“그럼 할 수 없네. 뉘우칠 때까지 상대해 줄 수밖에.”
“히이익!”
그 뒤의 상황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뻔했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그들은 모질게 맞았다. 매우 신 나게 맞았다. 그것도 모자라 또 맞았다. 마른 북어를 패도 저렇게 두들기긴 힘들 것 같았다.
저러다 죽는 게 아닐까?
그 사이 나는 조심스럽게 쉐리에게 다가갔다. 기절한 채 축 늘어진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 하는데, 마치 뭐에 걸린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끈끈한 마나의 덩어리가 그녀의 온몸에 잔뜩 눌어붙어 있었다.
“저기, 매튜. 쉐리가 마법에 걸려서 꼼짝도 못 하는 것 같아. 이거 어떻게 제거하지?”
그제야 트로웰이 하던 일을 멈추었다. 그리곤 포박된 쉐리와 쓰러진 남자들을 한 번씩 돌아가며 보더니 아쉽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지금 제거하게 할게.”
이윽고 그는 늘어져 있던 마법사의 멱살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곤 언제 꺼냈는지 모를 단검을 그의 목 언저리에 가져다 대며 생긋 웃어 보이는 것이었다.
“쉐리에게 건 마법 풀어. 지금 당장.”
“히익! 아, 알았으니 진정해! 제발 목숨만은 살려 줘, 부탁이야!”
마법사는 한쪽 팔이 부자연스러운 상태에서도 용케 마법을 해지했다. 자유로워진 쉐리가 아무런 저항 없이 바닥으로 쓰러지자 나는 얼른 그녀를 부축하며 상태를 살폈다. 다행히 기절만 한 것 같았다.
“으응…….”
그때 정신을 차린 듯 감겨 있던 쉐리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찌푸린 얼굴로 머리를 감싸 쥐던(아마 돌에 맞은 통증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내 목소리를 듣는 순간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쉐리, 정신이 들어요?”
“어? 에, 엘? 매튜? 너, 너희가 여긴 어떻게? 그, 그놈들은?”
“사람들이라면, 저 녀석들?”
당황한 쉐리의 질문에 트로웰이 자신의 뒤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곳엔 이미 정신을 잃은 세 남자가 축 늘어져 있었다. 그들을 발견한 쉐리가 헛숨을 삼켰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주, 죽었어?”
“설마요. 그냥 약간 훈계를 해 준 것뿐입니다. 죽을 정도로 때리지는 않았어요. 그보다 쉐리, 당신이야말로 어떻게 된 겁니까? 어디까지 기억하죠?”
“모, 모르겠어. 저 녀석들이 날 묶어 놓는데 갑자기 이상한 기둥 같은 게 솟구친다 싶더니…… 저놈들이 하늘로…….”
“그건 제가 한 거예요.”
“어? 매, 매튜가? 어떻게?”
“비상용 마법 스크롤이 있었거든요. 그보다 저들이 쉐리를 묶어 놓았다고요?”
다소 곤란할 수 있는 질문을 어색하지 않게 넘긴 트로웰은 추궁하듯 질문했다. 그러자 쉐리는 흠칫 어깨를 움츠리곤 손톱을 깨물었다.
“나, 난 도망치려고 했어. 하지만 포박마법 때문에 꼼짝도 할 수 없어서…….”
“그러게 왜 함부로 아무나 따라갑니까? 때마침 우리가 근처에 있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잖아요.”
“미, 미안. 나…… 나는 그냥…….”
“변명하지 말아요. 쉐리에게 어떤 사정이 있다 해도 이번 행동은 너무 경솔했어요. 질투심을 유발하기 위해 위험하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질 나쁜 남자를 유혹하다니. 다신 이런 어리석은 짓 하지 말아요.”
“……미안.”
엄격한 트로웰의 모습은 평소보다 훨씬 더 냉정해 보였다. 그 상태로 놔두면 울어 버릴 것 같아 나는 얼른 웃으며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저기, 쉐리. 휴센의 어디가 그렇게 좋아요?”
“에……엣? 앗! 그, 그건…….”
“물론 잘생기고 검술도 뛰어나긴 하지만, 말수 없고 무표정하고, 남자로서의 매력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트, 틀려! 그는 상냥한 사람이야!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정말 멋있는 남자라고!”
그 순간 나는 내가 쉐리의 내면에 잠재된 격동의 스위치를 건드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흥분해서 붉어진 얼굴로 장황하게 설명했다.
“나는 그처럼 검을 아름답게 쓰는 사람을 이제껏 한 사람도 보지 못했어. 말수는 조금 없어도 쓸데없이 주절거리는 헤롤이나 마이티에 비하면 훨씬 낫다고. 무표정한 건 오랜 용병 일을 하다 보니 생긴 버릇이야. 그래도 가끔가다 웃을 때면 얼마나 멋있는데? 아이들한테도 자상해서 가끔 길드에 갈 일이 생기면 근처 신전의 아이들에게 꼭 사탕이며 과자 같은 걸 사다 준단 말이야!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나 따위를 소질 있다고 칭찬해 주고 격려해 줘서 이렇게까지 이끌어 준 것도 그 사람뿐이었어. 그가 얼마나 상냥한 사람인데!”
“에…… 그, 그런가요.”
“그래! 그래서 정말 좋아했어. 아니 지금도 좋아하고 있어. 하지만 바보 같은 휴센은 돌아봐 주지도 않아. 이렇게 좋아하고 있는데! 왜 나는 안 된다는 거야? 흐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