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581)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581화(581/608)
제581화
“전부 떠난 거야?”
“일단 마을은 깨끗하게 비워졌어. 생활한 흔적도 다 지우고 가서 지금은 평범한 숲이야.”
“그렇구나…….”
숲이라니. 그들이 떠나고 나면 빈 마을이라도 둘러볼 예정이었는데 끝내 서클렛을 찾기는 어려울 모양이다. 내가 담담하게 반응하는 것에 안심했는지 이프리트는 자기가 더 서운하다는 얼굴로 툴툴거렸다.
“참 의리 없는 녀석이야. 네가 걱정하는 거 알 텐데, 아무리 급해도 작별 인사 정도는 할 것이지 말이야. 내가 신계 쪽에 연락해서 확인해볼까?”
“아냐, 이프리트. 그렇게까진 안 해도 돼.”
트로웰이 뭔가 말을 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무는 것이 보였다. 그는 아마 대강의 미래를 보았을 테니까, 시벨리우스가 어떻게 됐는지도 알고 있을 거다. 내게는 그 사실을 알리지 않기로 한 것 같았다. 알아봤자 속만 상할 거라고 여긴 건지도 모른다.
그 뒤로는 평범하게 잡담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어느 정도 식사를 마쳤을 무렵, 가볍게 헛기침한 디아곤이 입을 열었다.
“실은 모두에게 중대 발표가 있어.”
“중대 발표?”
고개를 끄덕인 디아곤은 세상 비장한 얼굴이었다. 정작 정령왕들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다는 듯 무심한 반응들이었지만.
“돌아오는 봄에 나와 란타샤가 영원을 언약하기로 했어.”
“……!”
이어진 말엔 절로 기침이 터져 나왔다.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자 디아곤과 란타샤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웃었다. 누가 봐도 행복한 연인의 얼굴이라 더 놀랐다. 아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속마음을 모르겠다고 하지 않았나? 언제 이렇게 진도가 나간 거지? 메세테리우스가 태어난 시기도 있고 해서 어느 정도 짐작이야 했지만 그래도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라피스, 너네 엄마 아빠 결혼한대.’
“……시끄러.”
대꾸하는 목소리가 유독 쌀쌀맞았다. 태어나기도 전 부모님의 연애 시절을 보고 있으니 이 녀석도 기분이 참 복잡하겠다 싶었다.
“어, 음, 일단 축하합니다.”
“헤헷, 고마워. 그래서 말인데, 언약식 올리는 자리에 너도 초대할까 해.”
“어, 정말? 나도 가도 돼?”
“당연하지. 친구잖아.”
대답한 건 란타샤였다. 괜히 가슴 안쪽이 간지러운 기분이라 헤헤 웃었다.
“선물 꼭 준비해서 갈게요.”
“선물은 무슨. 그냥 와. 와서 축하해주는 것만으로 충분해.”
그래도 결혼식인데 빈손으로 갈 순 없지. 둘 다 재물은 넘칠 테니 정성이 들어가는 쪽으로 마련해야겠다. 뭘 준비해야 할지 생각하기 시작하니 벌써 마음이 설렜다. 기뻐하는 내 모습에 디아곤은 감동한 것 같았다.
“그래, 이거지! 누가 혼약한다고 하면 이렇게 축하해주는 게 정상이지! 너희도 엘 좀 본받아!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잖아!”
“난 이미 다 알고 있었는걸.”
“관심 없어.”
이프리트와 트로웰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엘뤼엔은 애초에 대화를 듣고 있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북적북적한 시간이 흘러갔다.
무료한 일상에 뜻밖의 행사가 생긴 탓일까. 모두가 돌아간 후에도 붕 뜬 기분을 쉽게 진정할 수가 없었다. 온종일 즐거운 상상으로 가득해진 나를 보고 라피스는 혀를 찼다.
“남의 언약식에 왜 네가 더 호들갑이야?”
“그치만 나 친구 결혼식에 가보는 거 처음이란 말이야.”
전생에선 결혼할 나이가 아니었고, 여기서 태어난 후에도 왠지 주변에 결혼하는 사람이 없었다. 소식을 듣는다면 크리스나 다비안 쪽에서 얘기가 들려오지 않을까 했는데, 설마 란타샤와 디아곤이 먼저 할 줄이야. 기분 좋은 반전이었다.
“결혼식장을 내가 꾸며보겠다고 할까?”
“네가 사는 집 꼴을 봐라. 그걸 잘도 맡기겠다.”
“이거야 그냥 귀찮아서 대충 사는 거지.”
“그러니까.”
음, 역시 좀 그런가. 하긴 생각해보니 딱히 공간을 잘 꾸미는 재주는 없는 것 같다. 일찌감치 단념하고 다른 쪽으로 노선을 틀기로 했다.
“조각을 배워볼까. 아님 금속 공예? 직접 만든 조각상이나 장식품 어때? 너무 소박한가?”
“그걸 왜 나한테 묻냐고.”
“소설 작가를 섭외해서 두 사람의 일대기를 책으로 만들어 본다거나? 삽화들을 넣어서 사진첩처럼 만들어 볼 수 있으려나? 이것도 좀 소박한가?”
“야, 너 내 말 듣고 있는 거긴 한 거지?”
이것저것 궁리해보는 동안 어느 순간 그대로 잠들어버렸던 것 같다. 다시 의식을 차렸을 땐 누군가가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었다. 깨지기 쉬운 것을 다루는 듯한, 무척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엘, 엘? 그만 일어나야지.”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익숙한 듯하면서도 낯설다. 내가 깨우러 올 만큼 오래 잠들었던가? 아직 나른하기도 하고, 왠지 상대를 곤란하게 하고 싶은 짓궂은 마음도 들어서 일어나기 싫었다. 베개에 더 깊숙이 고개를 파묻자 낮게 신음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에 실실 웃으려니 또 다른 목소리가 이어졌다.
“깨울 생각이 있는 건가? 조금 더 크게 불러라.”
“음, 하지만 너무 기분 좋게 자고 있어서 깨우기가 미안한걸.”
“더는 지체할 시간 없다.”
“그건 그렇지만…….”
흐려지는 목소리에 난처한 기색이 가득하다. 아, 혹시 뭔가 급한 상황인 건가? 아무래도 슬슬 일어나야 할 모양이다. 힘겹게 몸을 뒤척이며 억지로 잠기운을 밀어냈다. 달라붙기라도 한 것처럼 떨어지지 않는 눈꺼풀을 가까스로 들어 올리니 환한 빛이 기다렸다는 듯 쏟아져 들어왔다. 그 눈부심 속에 누군가가 있었다.
“아, 엘! 일어났어?”
“어? 응? 누구?”
이제 막 일어났더니 아직 뭐가 뭔지 상황파악이 하나도 되지 않았다. 거의 반사적으로 대꾸하며 정신을 차리려는데 서운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벌써 날 잊어버린 거야?”
“응? 어?”
얼른 눈을 비비고 상대의 모습을 확인했다. 뿌연 기운이 사라지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 선명해졌다. 흐르는 듯이 살랑거리는 흑발에 짙은 색의 피부, 선명한 금안까지. 내가 기억상실에 걸린 게 아니고서야 도저히 농담으로라도 잊어버렸다고 말할 수가 없는 모습이었다. 바로 어제도 봤으니까.
“트로웰.”
“응, 엘! 나야.”
그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너무 기뻐하는 게 느껴져서 도리어 어리둥절했다. 목소리나 얼굴이나 그가 분명한데, 왠지 미묘하게 평소랑 다르다. 트로웰이 왜 이러지? 최근 들어 많이 부드러워지긴 했지만 아직까진 서로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그런데 그 벽이 갑자기 단숨에 허물어진 기분이었다.
“왜 그래? 무슨 좋은 일 있었어?”
디아곤이 언약하는 게 기뻐서 그런가? 아니, 하지만 정작 그 대화를 나눌 땐 굉장히 심드렁한 얼굴이었는데. 본인 앞이라 쑥스러워서 그랬던 건가. 아니면 그 사이에 뭔가 또 좋은 소식이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 혹시 미네르바의 봉인이 풀린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였다.
“당연히 좋은 일이 있지. 널 이렇게 찾았잖아.”
“어? 날 찾았…다니?”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반문하니 그의 눈동자가 휘어졌다. 착각일까. 왠지 물기가 서린 것 같았다.
“그동안 잘 지냈어, 엘? 너무 보고 싶었어.”
“……!”
순간 심장이 쿵 울렸다.
이게 뭐지? 이게 뭐야. 정확히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데 기분이 굉장히 이상했다.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 같은 그런 기분. 누워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내가 경계하며 바라보는데도 트로웰은 여전히 다정한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마치 예전의 그처럼. 내가 원래 알던 트로웰인 것처럼.
“트, 트로웰, 너 설마…….”
“응? 왜 그래, 엘?”
아니, 설마 그럴 리가.
내가 생각하면서도 이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가 싶으니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설마 아직 꿈을 꾸는 건가? 그래, 그런 건지도 모른다. 꿈에서 깼더니 여전히 꿈이었다는 거야 생각보다 흔한 일이다. 그러니 꿈이 맞을 거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상황이 설명 되지가 않잖아.
이제 별 해괴한 망상을 다 하는구나. 일단 잠에서 깨야겠다는 생각으로 숨을 크게 삼켰다. 그때 머리 위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나도 여기에 있다, 아들.”
“……!”
다시금 몸이 굳었다. 이번에도 모를 수가 없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분명히 다르다. 트로웰보다 더 확실히 느꼈다. 왜냐면 엘뤼엔은, 이곳의 내 아버지는, 날 아들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저 뒤에 있는 사람은 분명…….
‘아, 말도 안 돼…….’
돌아보려는 충동을 억지로 참았다. 마른세수하는 손이 덜덜 떨렸다. 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돌아봐선 안 된다. 이건 꿈이니까. 고개를 돌려 확인하면 꿈에서 깰 테니까. 지금은 그 허망한 순간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진정하고 난 후에.
“나를 봐, 아들.”
“…….”
“이쪽을 보라니까.”
자꾸만 채근하는 걸 보니 현실이 다가온다는 신호인가 보다. 서러움을 삼키고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조금만 더.
“정말 보지 않을 건가?”
중얼거리듯 묻는 목소리에 나직한 한숨이 섞였다. 그 묵직한 숨소리가 체념한 것처럼 느껴져서 심장이 철렁했다. 돌아봐야 하나? 하지만 그럼 꿈에서 깨버릴 텐데. 아니, 여기서 깨어나도 어차피 그게 그거잖아. 망설이는 동안 트로웰과 다시 시선이 마주쳤다. 미소지은 그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
다음 순간 팔을 뻗어온 그가 나를 꽉 끌어안았다. 선명히 와 닿는 체온에 숨이 턱 막혔다.
“미안해, 엘.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혼자 있게 해서, 널 외롭게 해서 정말 미안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슨 말을 꺼내야 하는지 머릿속이 온통 새하얬다. 덜덜 떨리는 팔을 들어 그의 등을 마주 안았다. 부드러운 천 자락과 그 아래를 채운 단단한 근육이 같이 느껴졌다. 원래 꿈에서도 이렇게 감각이 선명했나? 꼭 진짜인 것 같다.
멍해 있는 동안 살짝 떨어진 그가 다시 나를 응시했다. 괜찮다고 말하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 나도 모르게 홀린 듯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엔 예상한 그대로의 광경이 있었다. 물의 정령왕 고유의 푸른색이 아닌, 금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엘뤼엔이.
“……아버지?”
“이제야 겨우 돌아보는군.”
금발의 엘뤼엔이라니. 이젠 꿈에서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지 이게 그의 본모습이라는 걸 알면서도 생경했다. 엘뤼엔이 이렇게 생겼었구나. 과거의 아버지도 아버지니까, 쭉 괜찮다고 생각했던 기분이 사실은 자기 암시라는 걸 깨달았다. 두 사람은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존재였다. 품고 있는 기운도, 분위기도, 바라보는 시선의 느낌조차 달랐다. 쓴웃음을 지은 엘뤼엔이 손을 뻗어 내 눈가를 쓸었다. 그의 엄지손가락 끝에 물기가 맺혔다.
“그새 울보가 다 되었나.”
조금 괴로운 듯한, 어떻게 보면 화난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내가 지금 울고 있는 건지 뭔지는 잘 모르겠다. 그저 그림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보는 듯한 기분으로 하염없이 그의 모습만 살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으니 이제 현실로 돌아갈 차례였다. 그런데 왜일까. 아무리 봐도 그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상하네. 이럴 리가 없는데.”
“뭐가 이상하지, 아들?”
의아하게 묻는 얼굴에 무심코 손을 뻗으려다 멈칫했다. 그러자 가까이 다가온 그가 직접 내 손을 잡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댔다. 손바닥 한가득 와 닿는 피부의 감촉에 숨을 삼켰다. 조금 전 트로웰이 끌어안았을 때처럼 이번에도 모든 감각이 전부 선명했다. 이렇게 실감 나는데. 이게 진짜가 아닐 수가 있나?
“설마… 정말 아버지야?”
마른침을 삼키며 물으니 미간을 찡그린 그가 살짝 웃었다. 이번엔 트로웰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 역시 거의 비슷했다. 조금 전보다 더 젖어 있는 눈동자가, 내뱉는 숨결이 와 닿았다.
내가 아무리 둔해도 이렇게까지 확실한 상황을 착각할 수는 없을 거다. 맙소사,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꿈이 아니었다. 정말 현실이었다.
“어, 어떻게……?”
“금방 다녀오겠다던 녀석이 하도 안 와서 데리러 왔다.”
다급히 손을 뻗자 그들도 기다렸다는 듯 마주 안아왔다. 단단히 받아안는 품을 느끼니 그때부터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매달리다시피 두 사람을 꽉 끌어안고 끝없이 울었다.
온몸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떨렸다. 통곡하고 싶은 기분인데 이상할 정도로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죽어버려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죽어도 괜찮았다.
“이제 좀 진정했어?”
얼마나 오랫동안 울었는지 모르겠다. 흐느낌이 겨우 사그라들자 내내 토닥여주던 트로웰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뒤늦게 민망해져서 어색하게 웃으니 엘뤼엔이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기분이 너무 이상해.”
돌아가서나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두 사람이 지금 내 눈앞에 있다니. 아직도 현실이 아닌 것 같다. “나도 기분이 이상해.” 웃으며 답한 트로웰이 이채를 띠고 찬찬히 내 모습을 훑었다. 한창 같이 울어서 그런지 그의 눈가가 발갰다.
“정말 금발이었네.”
“이 모습 기억나?”
“아주 조금. 가물가물한 느낌으로만.”
“그렇구나.”
흐리게 웃는 트로웰은 하고 싶은 말을 억지로 삼키는 얼굴이었다. 그때 가만히 들여다보던 엘뤼엔이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물의 인장이 찍힌 부근이라는 건 조금 늦게 자각했다.
“그 녀석은 찾은 거 같은데. 왜 돌아오지 않았지?”
“어? 아, 그게, 귀환할 방법을 몰라서…….”
“방법을 모르다니?”
의아해하는 그에게 지난 일들을 간략히 설명했다. 정체가 들키면서 주술이 풀릴 뻔했고, 그 뒤로 부작용이 생겨서 돌아가겠다는 마음을 먹어도 귀환의 주문이 떠오르지 않았노라고. 자초지종을 들은 엘뤼엔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렇군. 여러 상황을 가늠하고 설계한 건데, 하필이면 가장 나쁜 쪽으로 틀어질 줄이야.”
“미안해, 아버지. 나는, 난 정말 돌아가고 싶었는데…… 뭘 어떻게 해도 키워드를 모르겠어서…….”
“사과하지 마라. 네 잘못이 아니다.”
고개를 저은 그가 문득 시선이 미쳤는지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누가 뭐라고 해도 한 번도 창피하게 여겨본 적이 없었는데 그가 살피는 것엔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 집이 이렇게 후줄근했었나? 이럴 줄 알았으면 라미아스가 잔소리할 때 말을 들을걸. 이제 와선 한참 늦은 후회였다.
“저기, 오해하지 마. 내가 가난해서 이렇게 지낸 게 아니라…….”
“여기서 얼마나 기다린 거지?”
그 순간 이어진 질문엔 가슴이 뭉클해졌다. 아, 그렇구나. 난 그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거구나. 내가 왜 떠나지도 못하고 계속 이 장소에 집착했는지 내내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여긴 내가 처음 떨어진 곳이니까. 이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 데리러 올 거라고 생각했던 거다. 그래서 집을 장만하거나 세간살이를 늘리는 데도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떠난 후엔 모두의 기억에서 잊히는 장소일 테니까. 언제든 미련 없이 버릴 수 있는 공간으로 두면 족했다. 나도 모르고 있던 내 기분을, 엘뤼엔은 한눈에 알아봤나 보다. 대답을 기다리는 시선에 어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으음, 글쎄. 한 1년은 된 것 같은데…….”
그러자 둘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이런 곳에서 그렇게 오래 있었던 거야?”
“……좀 더 빨리 오지 못해서 미안하다.”
“아, 아냐! 데리러 와 준 것만으로도 너무 기뻐. 여기 생활이 그리 나쁘지도 않았어. 말했다시피 가난해서 이런 게 아니라 그냥 귀찮아서 방치한 거야. 나 잘 지내고 있었어. 진짜야.”
황급히 손사래를 쳤지만 둘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얘기를 들어보니 조금 더 빨리 올 수도 있었는데, 중간에 길을 잘못 들어서게 되는 바람에 더 늦어졌다는 듯했다. 시공간이 얽힌 궤적을 추적하는 게 쉬울 리는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이해했다. 1년이 아니라 10년이 걸렸어도 이해했을 거다. 둘 다 본래의 몸으로 움직이는 거라 제약도 더 컸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