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63)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63화(63/608)
제63화
그날 저녁 불침번은 샴페인 용병단이 맡았다. 전원이 밤을 새울 필요는 없었으므로 휴센은 일찌감치 조를 만들어 각자 담당할 시간대를 정해 둔 상태였다. 나는 트로웰, 휴센과 더불어 가장 마지막 시간으로 배정되어 있었다.
“엘, 일어나. 우리 차례야.”
“으음?”
가볍게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눈을 뜨자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트로웰의 모습이 보였다. 사방은 아직도 한밤중인 것처럼 어두컴컴했다. 새벽녘의 공기를 흠뻑 머금은 풀 냄새, 그 사이에서 가는 풀벌레 소리가 찌르르 울렸다.
“아, 미안해, 매튜. 잠깐만 눈을 감는다는 것이 정말로 잠들어 버렸네.”
“괜찮아. 휴센도 방금 일어났어. 모닥불 쪽으로 갈까?”
“응.”
겨울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날씨는 밤보다 새벽이 더욱 쌀쌀했다. 정령인 탓에 추위를 느끼진 않았지만, 괜한 의심을 받을 필요는 없었으므로 나는 모포를 어깨까지 걸친 채 미적미적 모닥불 옆으로 기어갔다. 꺼질 줄 모르는 장작이 이따금씩 작은 불똥을 튀며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비교적 잠기운이 가신 얼굴의 휴센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근처에서 나뭇가지를 가져와 모닥불 안으로 던져 넣고 있던 그는 나와 트로웰이 다가가자 ‘여어.’ 하고 짧게 웃어 보였다.
“피곤하지 않아? 아무래도 불침번은 견디기 힘들지?”
“괜찮아요. 휴센이야말로 힘들지 않아요?”
“나야 이런 생활이 숨 쉬는 것만큼이나 익숙한걸. 이젠 아무렇지 않아.”
그가 용병이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십오 년 전이었다. 부모님이 모두 용병이셨기에 어릴 때부터 용병의 삶에 익숙했던 그는 제 집보다 오히려 용병 길드에서 노는 일이 더 많았다고 했다.
또래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용병들을 따라다니며 잡일을 자청했고, 사냥법과 싸우는 방법을 배우는 것을 더 즐겼다. 그런 그가 훗날 그의 부모님과 같은 길을 가게 될 거라는 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예감하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도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위험하잖아요? 특히 휴센은 금패를 가진 용병이니까 위험한 의뢰가 많이 들어올 텐데.”
“그렇긴 하지. 하지만 난 내가 용병인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 거칠고 싸움밖에 모르는 삶이라고 해도, 동료들과 어울리고 함께 여행을 다니는 지금의 생활이 좋아. 뭐, 그래서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지 못하지만 말이야.”
“헤에…….”
그때 트로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의아해져서 바라보자 그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잠시 이상이 없는지 근처를 돌아보고 올게.”
“아, 그런 거라면 나도 같이…….”
“아니, 나 혼자서도 충분해. 엘, 너는 여기서 휴센이랑 같이 있어.”
트로웰은 어정쩡하게 일어난 나를 다시 자리에 앉히곤 느긋하게 걸어갔다. 나는 어둠이 그의 모습을 삼키는 것을 구경하다 문득 휴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장작을 집어넣다 만 자세로 무언가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나는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누워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있었다. 모포를 얼굴까지 덮은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쉐리였다.
‘설마…….’
황당한 기분에 나는 다시금 휴센을 바라보았다. 그는 쳐다보는 내 시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쉐리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 모습만 보면 그가 평소에 쉐리를 냉정하게 대한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질문을 건넸다.
“혹시 쉐리의 마음을 받아 주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에요?”
“뭐, 뭐?”
휴센은 나쁜 짓이라도 하다 들킨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눈에 띄게 당황한 얼굴을 보니 순간 짓궂은 마음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나는 애써 눌러 참으며 최대한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용병 생활이 좋아서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기 힘들다고 했잖아요. 혹시 쉐리의 마음을 받아 주지 않는 이유가 그 때문인 건가 싶어서요. 안정되고 평화로운 생활을 약속할 수 없으니까.”
“따, 딱히 그런 이유는…….”
“그럼 왜 거부하는 건데요? 쉐리는 귀엽고 예쁘잖아요. 뭐, 아무리 예뻐도 마음에 없으면 어쩔 수 없긴 하죠. 하지만 이대로는 쉐리가 너무 가여워요. 좋아하는 상대한테 자꾸 거절당하면 분명 상처가 클 거예요.”
진지하게 건넨 말에 무언가를 느낀 건지 휴센은 잠시 고심하듯 미간을 찡그렸다. 잠든 쉐리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내쉰 그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쓸어 올리며 고개를 푸욱 파묻었다.
“휴센?”
“아아, 미안하다. 그러니까 나는…… 뭐랄까. 그다지 쉐리가 싫다는 건 아니야. 충분히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아이지. 아마 누구라도 돌아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그런데 왜?”
의문이 담긴 표정으로 바라보자 휴센의 얼굴이 더욱 복잡해졌다. 울고 싶은 건지 웃고 싶은 건지, 그것도 아니면 화를 내고 싶은 건지, 도무지 의도를 짐작하기 힘든 표정이었다. 그때 불쑥 그가 엉뚱한 말을 꺼냈다.
“쉐리를 용병으로 키운 건 나야.”
“에?”
“고아원에서 도망쳐서 거리를 방황하고 다니던 작은 여자아이였지. 그 고아원 원장이 쉐리를 상인의 첩으로 팔려고 했던 것 같더라고. 알다시피 쉐리는 예쁘게 생겼잖아? 그래서 호시탐탐 노리는 작자들이 많았던 모양이야. 그래 봤자 아직 열 살도 안 된 어린아이를 첩으로 달라는 놈이나, 그걸 내주려던 놈이나 미친놈이긴 매한가지지만 말이야. 도저히 그냥 둘 수가 없어서 집으로 데리고 와 밥을 먹이고, 그때부터 한식구로서 보살폈어. 틈틈이 검술도 가르치고 용병으로서 필요한 여러 가지 요령도 알려 줬지. 소질이 뛰어난지 뭐든지 금방 배우더군. 그래서 나를 따라 용병이 되겠다고 했을 때도 말리지 않았어.”
“저기, 지금 그게 무슨 상관…….”
“알겠어? 나와 그 아이는 열한 살 차이야.”
“……!”
그때서야 나는 휴센이 말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가 고뇌하고 있는 진정한 이유에 대해서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입이 멍하니 벌어진 게 느껴졌다. 그는 침울한 표정으로 한탄을 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쉐리는 겨우 아홉 살이었고, 나는 성인식까지 치른 스무 살이었어. 엘, 너라면 네가 키우다시피 한 여자아이가 사랑을 고백해 오면 어떻게 하겠어?”
“쿠, 쿨럭. 으음…… 확실히 당황스럽긴 하겠지만…….”
“그렇지? 네가 생각해도 굉장히 당황스럽지?”
“그래도 너무 깊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사실 열한 살 차이가 많긴 해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 걸로 사랑을 가로막을 수는…….”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휴센의 두 눈이 시퍼렇게 빛났기 때문이다. 그는 무시무시할 정도의 기세로 내 어깨를 덥석 부여잡았다.
“휴, 휴센?”
“그래, 알지! 알고말고! 사랑하는 데 그깟 나이 차이가 무슨 상관이야? 제국 여인들의 결혼 적령기는 열다섯부터고, 쉐리는 충분히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여자니까 혹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엘, 생각해 봐. 내가 정말 쉐리한테 마음이 있어서 그 아이와 결혼한다 했을 때 주변에서 뭐라고 생각할 것 같아? 아니, 주변까지도 필요 없어. 당장 이곳에 있는 헤롤이나 마이티 자식을 생각해 봐!”
“네에?”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한 휴센의 눈에는 들어오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는 평소의 차분한 이미지 따위는 완전히 날려 버린 채 풀린 눈동자로 실성한 듯 중얼거리고 있었다.
“뻔하지? 뻔할 뻔자지! 그 자식들이 가만히 있겠어? 미친 듯이 놀려 댈 거라고. 특히 마이티 자식은 공공연하게 쉐리에게 마음이 있다고 떠들고 다녔으니 날 죽일 듯이 노려보겠지! 헤롤이 할 말은 뻔해! 다 늙은 영감탱이가 회춘한다고 떠벌릴 거라고! 나, 나는!”
“휴, 휴센! 진정해요!”
“난 아동성애자가 아니야!”
“…….”
어딘가에서 썰렁한 바람이 불었다.
결국 모든 원인은 그들이었던 모양이다. 헤롤과 마이티, 그 두 사람의 놀림을 감당할 수 없어서.
새삼 그동안 그가 단장으로서 동료들에게 얼마나 많은 심적 부담과 고통을 안고 살아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평소 어떤 언행에 시달려 왔는지도.
굳어 있는 내 모습에 정신을 차렸는지 휴센은 서둘러 표정을 수습했다.
“미안하다. 아무 상관 없는 널 붙들고 이런 말을 할 건 아닌데. 내가 잠깐 정신이 나간 모양이야. 그냥 해 본 말이니까 방금 들은 건 잊어 줘.”
“그렇지만…….”
“아니, 정말 괜찮아. 부탁인데 이 문제에 관해선 앞으로도 신경 쓰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이건 내가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인 것 같거든.”
씁쓸하게 웃으며 말한 휴센은 다시 평소의 무뚝뚝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아직도 그가 마지막에 외쳤던 처절한 한마디가 메아리치고 있었다.
‘난 아동성애자가 아니야, 라니…….’
그 어떤 말도 이보다 더 그의 심정을 절절히 표현할 순 없으리라.
가능하다면 그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 그의 말마따나 스스로 해결할 문제였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가 주변 사람들의 놀림 따윈 아무렇지 않게 넘길 만큼 열렬한 사랑에 불타오르기를 바라는 것 정도일까. 물론 자존심 강해 보이는 휴센이 과연 타인의 시선에 꿋꿋해질 수 있을지는 의문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쉐리를 여자로 보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게 유일한 수확이었다. 아마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쉐리는 하늘을 날아오를 것처럼 기뻐할 것이다. 물론 내가 알려 줄 수는 없는 일이니 당분간은 아무것도 변하는 게 없겠지만 말이다.
정말이지, 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커플이 어찌 될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 * *
날이 밝자 행렬은 서서히 아침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이른 시각부터 시작했지만 인원이 워낙 많다 보니 준비하는 과정만 해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배급된 식사를 본 용병들은 모두 하나같이 불만을 드러냈다.
“쳇, 또 이거야?”
“이거야 원, 간에 기별도 안 가는 걸로 배를 채우자니 죽을 맛이군.”
“이놈의 의뢰가 얼른 끝나든지 해야지. 보수는 좋지만 식사가 이렇게 형편없어서야.”
“아아, 뜨끈한 고깃국이 그립다. 단팥이 잔뜩 들어간 흰 빵에 노릇노릇 구워진 거위 요리를 뜯고 싶어.”
피닉스 상단을 이끄는 상단주는 유렌이란 이름을 지닌 중년의 남성으로, 심성이 나쁜 사람은 아니었지만 경비를 아끼기 위해 간간이 치사한 수법을 쓰는 편이었다. 코앞에 마을을 번듯이 남겨 두고 굳이 길에서 노숙을 한다거나, 며칠에 한 번은 건어물과 육포 따위로 끼니를 지급하는 것이 바로 그 예였다. 그렇다 보니 용병들 사이에서는 늘 크고 작은 잡음이 끊이질 않았는데, 그럼에도 딱히 개선되지 않는 걸 보아 상단주는 그런 문제를 전혀 모르고 있거나 알아도 무시하는 듯했다.
반면 식사 시간이 되면 나는 적당한 틈을 타 자리를 떠나 있다 돌아오곤 했다. 딱히 필요하지도 않은데 굳이 거친 음식을 억지로 먹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트로웰도 종종 사라지는 걸 보면 나와 같은 생각인 게 분명했다.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식사를 하는 틈을 타 나는 홀로 한적한 곳을 서성거렸다. 그때 주변에 세워져 있던 마차들 중에서 한 남자가 내리는 것이 보였다. 깔끔한 옷차림을 보아하니 아마 상단 일행 중의 한 명인 듯했다. 잠시간 굳은 얼굴로 주위를 살피던 그는 내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저기, 실례합니다만 혹시 유렌 님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네? 유렌 님이요? 아, 상단주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내 질문에 남자는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소피를 보러 가신다고 나가시더니 지금까지 소식이 없으십니다.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서 찾아보는 중입니다.”
“저런, 언제 나가셨는데요?”
“그게…… 아마 한 반 각 정도…….”
반 각이라면 삼십 분쯤인가. 화장실을 다녀오기엔 충분하다 못해 넘치는 시간이다. 아직 돌아오지 않는 것이 염려가 될 만도 했다.
‘설마 몬스터를 만난 건 아니겠지?’
이 근방은 전부 수풀과 나무들로 우거진 숲이었다. 이 세계에서 숲은 그다지 안전한 장소가 아니다.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사나운 짐승들도 그렇지만 자칫 방향을 잘못 들었다간 몬스터의 군락에 이를 수 있었다.
“잠깐만 여기서 기다려 주실래요? 제가 한번 찾아볼게요.”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럼요. 어차피 그리 멀리 나가시진 않았을 거예요. 제가 찾아서 모시고 올게요.”
나는 따라나서려는 남자를 만류하고 서둘러 몸을 돌렸다. 무엇에 근거한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혼자서도 무난히 그를 찾아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최근 들어 점점 똑똑해져 가는 중이니, 아마 이번에도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대책 없는 믿음도 있었다.
그리고 막연하기만 했던 내 예상은 숲으로 들어선 순간 현실이 되었다. 주변을 좀 더 자세히 살펴야겠다고 생각하자 눈앞에 낯선 풍경들이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울창하게 뻗은 나무들과 듬성듬성 드리운 바위들, 그 사이에 자리 잡은 비탈길. 이곳과는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것이 분명한 장소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헉, 이거 뭐야?”
생경한 경험에 나는 걷는 것도 잊고 멈춰 섰다. 마치 타인의 시선을 통해 주위를 둘러보는 기분이었다. 멋대로 쏟아지는 장면들이 정신없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그것이 이끄는 방향은 한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시선들의 정체를 알지도 못한 채 홀린 듯이 길을 따라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그렇게 이동했을까. 수풀 사이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악! 사람 살려! 누가, 누가 좀 도와주시오!”
‘……찾았다!’
설마 정말로 찾게 될 줄이야. 빠르게 수풀을 헤치고 다가가자 수 마리의 고블린들이 보였다. 나는 그 사이에서 떨고 있는 중년 남자의 모습을 발견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넘어지고 굴렀는지 엉망이 된 몰골이었지만 상단주 유렌의 모습이 틀림없었다.
다행히 그는 지저분하기만 할 뿐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물론 그렇다 해서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당장에라도 고블린들이 공격할 태세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