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72)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72화(72/608)
제72화
“라피, 넌 이제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야?”
“어떻게 하긴. 네가 로드한테 이번 일 다 꼰지른다며. 그 불같은 성격에 날 가만히 두겠어? 한동안 레어에 돌아가서 잠이나 잘 거야. 불러도 나올 생각 없으니까 그 영감한텐 찾을 생각 하지 말라고 해.”
“후환이 두렵긴 한 모양이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그들은 네가 평범하게 유희를 나간 줄로만 알고 있더군. 덕분에 나까지 깜빡 속았어.”
“완전히 속인 건 아냐. 틈틈이 유희를 하긴 했다고. 최근까지도 수도에 있다가 온 참이고. ……말해 두지만 진짜 사실대로 말한 거니까 진위 파악하겠다고 내 속마음 읽지 마. 화낼 거다.”
“안 읽어. 나도 지금은 유희 중이거든.”
빙긋 웃으며 답하는 트로웰을 라피스라즐리는 찜찜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단순히 그의 말을 못 미더워한다기보다는 다른 부분에 문제를 느끼는 것 같았다.
“그렇게 방긋방긋 웃지 좀 마. 하나도 안 어울려.”
“서운한 소리를 하네. 그래도 난 나름 오랜만에 만난 대자가 반가워서 그러는 건데.”
“하, 반가운 녀석이 만나자마자 주먹질을 하냐? 나였으니까 이 정도 터지는 선에서 끝난 거지, 다른 놈이었으면 그 한 방에 두개골이 함몰됐을걸? 아까 네 손으로 죽였을 거라고 한 것도 진심이었지?”
“당연하지. 그건 네가 잘못한 거잖아.”
“그러니까 네가 이중인격이란 소리를 듣는 거야.”
트로웰이 이중인격이라고? 물론 생각지 못하게 과격한 모습이 있긴 했지만 선뜻 동의하긴 힘든 말이었다. 원래 얌전한 사람이 화가 나면 무섭다고 하지 않은가. 겨우 그 정도 화를 냈다고 해서 그런 말까지 들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정작 트로웰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도발해도 넘어오지 않는 것에 흥미를 잃었는지 라피스라즐리 역시 이내 대화를 중단했다.
“아무튼 난 갈 거야. 그리고…… 초면에 실례가 많았다, 엘퀴네스.”
“아, 으응.”
뜻밖의 사과에 나는 얼떨떨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피식 웃고는 몸을 돌려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당당하다 못해 뻔뻔하던 처음의 모습은 전부 어디로 사라진 건지, 처연할 정도로 어깨를 늘어트린 채였다.
그런데 보통 이럴 땐 공간 이동을 사용해서 사라지는 게 정상 아닌가? 왜 직접 걸어가는 거지?
나는 조금씩 멀어져 가는 모습을 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의문을 느낀 것은 트로웰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가 걸어가는 뒷모습을 향해 소리쳤다.
“라피! 네 레어는 이곳에서 한참 떨어져 있잖아! 설마 걸어서 갈 생각이야?”
“그럴 건데?”
라피스라즐리는 걸음을 멈추고 귀찮은 듯이 대꾸했다. 트로웰이 황당해하며 바라보자 그는 바로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나라고 정령왕을 가두는 결계를 만드는 게 쉬웠는지 알아? 게다가 그게 강제로 깨지는 바람에 지금 속이 말이 아니라고. 솔직히 걷는 것도 힘들어.”
“뭐야, 드래곤 하트라도 망가진 거야?”
“그랬으면 벌써 죽었지. 어쨌든 이 상태로는 마법이고 뭐고 아무것도 못 해.”
“자업자득이네.”
“시끄러.”
으음, 그러고 보니 결계가 깨졌을 때 피를 토했던가? 아무래도 그때 입은 내상이 꽤 심각했던 모양이다. 확실히 자업자득이긴 했지만 그래도 나로 인해 벌어진 일인 만큼 일말의 책임감이 느껴졌다. 할 수 없이 나는 라피스라즐리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그가 눈을 살짝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뭐야?”
어리둥절해하긴 해도 그다지 불쾌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나는 별다른 설명 없이 그의 몸에 기운을 밀어 넣었다. 곧 붙잡은 부분부터 하얀 물안개가 피어오르며, 점차 그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치유 능력이 발동한 것이다.
라피스라즐리는 조금 당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역시 지금 일어나는 현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윽고 물안개가 사라지자 나는 그에게서 손을 떼고 물었다.
“어때? 이젠 괜찮아졌어?”
“……아아, 정말 굉장한데. 그렇게 심하게 뒤틀리던 기류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어. 엘퀴네스의 치유 능력에 대해선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라피스라즐리는 신기한 표정으로 자신의 흉부를 더듬었다. 꼼꼼히 몸을 살피는 시선마다 기탄없이 감탄한 기색이 드러나고 있었다. 얄미운 녀석이었지만 그런 모습을 보니 내심 마음이 뿌듯했다.
다음 순간 그는 내게 의아한 눈길을 보냈다. 내가 자신을 도와준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괜히 쑥스러운 기분에 나는 서둘러 변명했다.
“그, 그냥 선심 쓴 거야. 그렇게 하염없이 걸어가다 중간에 쓰러져 버리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그게 왜? 네 입장에선 그게 더 통쾌한 거 아닌가?”
“뭐어? 나 참, 사람을 대체 뭐로 보는 거야? 그렇게까지 심보가 못되진 않았거든?”
“……그러게. 너 꽤 착한 녀석이구나.”
“…….”
아무렇지 않게 이어진 응수에 나는 조금 머쓱해졌다. 딱히 대가를 바란 것도 아닌데 뜻밖의 칭찬을 들으니 마치 처음부터 이런 상황을 노린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내심 민망했다. 그래도 기분이 썩 나쁘진 않은 걸 보면 내가 정말 단순한 성격이긴 한 모양이다.
라피스라즐리는 나를 빤히 응시했다. 지나치게 부담스러운 시선에 귓불까지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자 그는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흠. 이봐, 트로웰. 갓 태어난 정령은 원래 전부 이래? 아까부터 느꼈는데 반응들이 꽤 신선하단 말이지.”
“그건 그냥 그의 성향이야. 더 이상 그를 놀리지 마. 엘은 네가 함부로 대해도 되는 대상이 아니야.”
“놀리기는 누가. 그냥 신기한 것뿐이야. 아무리 후임이라지만 전대와 성격이 너무 다르잖아. 그 재수 없던 녀석과 같은 엘퀴네스라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걸.”
……아니, 근데 이 녀석은 왜 아까부터 엘뤼엔을 욕하는 거야? 왠지 욱하는 기분에 나는 그를 노려봤다. 마음 같아선 정정당당히 따지고 싶었지만 네가 그와 무슨 상관이냐는 말을 들을 것 같아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설령 사실을 밝힌다 해도 어차피 이 녀석에겐 비웃음이나 살 게 틀림없었다.
“왜 그렇게 봐?”
“……별로, 아무것도 아냐.”
개운치 않은 답변 탓인지 그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는 그 상태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이내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나랑 계약하는 건 싫어?”
“뭐?”
“약속을 번복하는 건 아냐. 그냥 한 번 더 기회를 줄 수는 없을까 해서. 내 방식이 지나쳤다는 거 인정해. 하지만 나로서도 꽤 절박했거든. 태어나서 원했던 것을 손에 넣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그런데 하필이면 가장 원하는 것을 가질 수가 없다니. 넌 이런 말이 기분 나쁜 모양이지만, 딱히 너나 정령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야. 솔직히 말해서 거절당할 때마다 기분이 정말 비참해.”
“기분 나쁜 줄 알면 그런 표현을 그만두면 되잖아?”
“그럼 계약해 줄 거야?”
한순간 밝아지는 얼굴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차라리 쭉 뻔뻔하게 나오면 괜찮을 텐데, 강아지처럼 반짝거리는 눈망울을 보니 거절의 말을 뱉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잠시간 망설이다가 그를 쳐다보았다.
“저기, 이름이 라피스라즐리라고 했던가?”
“그냥 라피스라고 불러, 라피라고 불러도 좋고.”
“좋아, 라피스. 나한테 원하는 게 정확히 뭐야? 그냥 단순히 계약만 하면 되는 거야?”
“물론 그런 걸로는 부족하지. 실은 계약을 하면 네가 해 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
“그게 뭔데?”
내 질문에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신이 나서 설명했다.
“내 레어에 가면 호수가 하나 있거든.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올시타에서도 가장 유명했던 호수지. 그걸 옮기느라 내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그때의 일을 글로 남기면 아마 책으로 엮을 수도 있을 거야. 아무튼 그렇게 힘들게 가져온 호수인데 지금 조금 문제가 있어.”
“무슨 문제?”
“호수 안에 물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다는 거지. 이미 오래전에 전부 다 말라 버려서 흙바닥만 볼품없이 드러내고 있는 상태야. 네가 그 호수에 물을 다시 채워 줬으면 좋겠어.”
뭐야, 겨우 그것뿐인가?
나는 긴장하고 있던 어깨에서 천천히 힘을 뺐다. 진지하게 말을 꺼내기에 얼마나 거창한 요구를 하나 했는데, 고작 호수의 물을 채우는 거라니. 물의 정령왕인 내게는 숨 쉬는 것보다 더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트로웰의 말이 이어졌다.
“라피의 레어는 용암지대에 있어, 엘.”
“어? 요, 용암?”
“레드 드래곤 일족은 주로 화산지대나 용암이 흐르는 지하에 살아. 본신에 화기가 강해서 몸을 편하게 뉘일 곳이 그런 장소밖에 없거든. 저 녀석이라고 예외는 아니지. 덧붙여 라피는 레드 일족 중에서도 불의 기운을 가장 강하게 타고난 드래곤이야.”
“…….”
나는 당황해서 눈앞에 있는 붉은 머리 남자를 바라보았다. 레드 드래곤이 불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로 인해 사는 지역까지 정해져 있을 줄은 몰랐다. 덧붙여 용암이 흐를 정도로 뜨거운 장소면 호수가 존재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다시 채운다 해도 금방 다시 증발해 버릴 것이 뻔했고, 설령 운이 좋아 남는다 해도 그건 호수라기보다는 이미 온천에 더 가까울 터였다.
“혹시 온천욕을 하고 싶은 거야?”
“설마. 난 평범한 호수를 원해. 여느 숲이나 계곡에서 볼 수 있는 차가운 물로 이뤄진 호수 말이지.”
“으음, 뜻은 알겠는데 그 지역에선 좀 힘들 것 같은데? 용암지대에선 물의 정령들이 지내는 것이 어렵거든. 다시 채울 순 있어도 유지하긴 어려울 거야.”
“그건 나도 알아. 하지만 정령왕이라면 경우가 다르지.”
“뭐?”
“물의 정령왕인 엘퀴네스, 너라면 어떤 환경에서든 호수를 쭉 유지시켜 둘 수 있잖아.”
빙긋 웃는 얼굴에 나는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그의 말을 종합해 보건데, 그 상황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날더러 거기서 지내라고?”
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기가 막혀 바라보았다. 라피스라즐리, 아니 라피스는 제 발언의 문제를 깨닫지 못한 듯 의아한 표정이었다.
“왜?”
“왜긴 뭐가 왜야. 내가 무슨 분수대에 설치되는 장식품인 줄 알아? 너희 집에 있는 호수를 유지하기 위해 날더러 그 안에서 살라니,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평생 그렇게 있어 달라는 건 아냐. 그냥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시간만 주면 돼. 어디 보자, 한 100년 정도면 괜찮을 것 같네.”
뭐라고? 몇 년?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규모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도리어 라피스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물었다.
“왜 그렇게 놀란 표정이야? 우리들 수명을 생각하면 100년 정도는 그리 긴 기간도 아니잖아. 게다가 내가 지금까지 기다려 온 시간이 얼만데, 나로선 그것도 상당히 많이 양보한 거라고.”
“……미안하지만 난 지금 유희 중이거든.”
“뭐? 아아, 그 소문과 관계된 계약자 말이지.”
그제야 라피스 역시 본질적인 문제를 깨달은 듯했다. 그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더니 이내 빙긋 웃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그 계약은 그냥 그만두는 게 어때? 어차피 인간과의 유희는 전부 한순간에 불과하잖아. 게다가 네게는 첫 유희겠지? 처음부터 굳이 그런 번거로운 일에 엮일 필요는 없지 않아? 여행이라면 나중에 나랑 같이해. 부족한 인간보다야 나와 같이 다니는 게 훨씬 편할걸?”
사탕을 주고 꾀는 유괴범처럼 그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나를 달랬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난 이미 녀석을 돕기로 했어. 내 맘대로 그 결정을 번복할 순 없어.”
“그럼 뭐야. 나와의 계약은? 내 호수는?”
“그건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잖아.”
“나한테는 중요해! 그리고 그 녀석보다 내가 먼저야! 내가 그 망할 인간 녀석보다 널 더 오래 기다렸단 말이야!”
으음, 순간 닭살이 돋는 것 같았지만 참았다. 그래도 처음처럼 비꼬는 말투로 협박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으니까. 아니, 이건 이것대로 피곤한 것 같긴 하지만. 왠지 두통이 이는 것 같아 나는 가만히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내 생각은 변함없어. 계약은 지금 당장이라도 해 줄 수는 있어. 하지만 네 요구에 맞추는 건 내 유희가 끝난 다음에나 가능할 거야.”
“그게 언젠데?”
“글쎄, 지금 계약자가 죽고 나면?”
“……날 피 말려 죽일 생각이야?”
이글거리는 붉은 눈동자에 나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정말 제멋대로인 드래곤이라고 해야 하나. 방금 전 제 입으로 100년은 짧다고 주장한 주제에, 정작 입장이 반대가 되는 건 용납을 못 하는 모양이다. 라피스는 잠시간 나를 노려본 다음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