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78)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78화(78/608)
제78화
다행스럽게도 그 고통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기겁하여 달려온 일행들이 나와 대치하고 있던 베히모스의 뒤를 공격한 것이다.
“이 자식! 엘한테서 떨어져!”
“크와아앙!”
베히모스가 그들에게로 주의를 돌리자 자유를 되찾은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생전 처음 겪는 완력에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엘! 엘, 괜찮아? 괜찮은 거야?”
누군가 다급히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얼굴은 트로웰이었다. 따스한 황금색 눈동자를 보니 긴장으로 굳어졌던 몸이 스르르 풀리는 것 같았다.
“으응, 괜찮아. 좀 놀랐을 뿐이야.”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안심하는 한편으로 못 말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아찔한 상황이긴 했다. 일이 잘 풀렸기에 망정이지 만약 베히모스의 힘에 졌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역소환이 됐을 테니까. 하마터면 내 정체를 만천하에 공개할 뻔한 것이다.
“엄청난 녀석. 베히모스의 이빨 앞에 맨몸으로 달려들 생각을 하다니. 도대체가 무모한 건지 용감한 건지…….”
어느새 다가온 헤롤이 기가 찬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다른 쪽에 쓰러져 있던 이릴에게 다가가 몸을 부축했다.
“어이, 괜찮냐, 이릴?”
“으응.”
나만큼이나 많이 놀랐던지 그녀의 얼굴은 몹시 창백한 상태였다. 헤롤은 조마조마한 눈으로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평소 자주 다투긴 해도 이럴 때만큼은 진심으로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그 순간 퍼억,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이릴이 헤롤의 머리를 주먹으로 가격한 것이다.
“우왁! 뭐 하는 거야!”
“멍청아! 똑바로 못 해? 너 때문에 죽을 뻔했잖아!”
“에이, 씨! 그렇다고 다짜고짜 폭력이냐? 기껏 걱정해 줬더니!”
“이게 지금 뭘 잘했다고! 당장 엘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기나 해! 다 너 때문에 다친 거니까! 엘, 괜찮아? 세상에, 이 상처 좀 봐. 이렇게 다치다니…….”
“아니에요. 보기보다는 멀쩡해요. 그보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나는 다급히 내 몸을 살피는 이릴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솔직히 상처로 인한 아픔보단 무시무시한 괴물을 코앞에서 본 충격이 더 컸다. 지척에서 붉게 번뜩이던 안광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가급적이면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러고 보니 채찍이 끊어져서 어떡해요?”
“아, 그건 괜찮아. 여분이 있거든.”
하지만 대답과는 다르게 이릴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지금까지 수많은 몬스터들을 상대하면서도 한 번도 문제가 생긴 적이 없던 채찍이다. 그걸 베히모스가 간단히 끊어 버린 것에 내심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이게 말이 돼? 오거 가죽으로 만든 거라구. 오러도 견딜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한 거란 말이야. 뭐, 저런 무식한 생물이 있지?”
“베히모스잖아. 이빨이 강철보다도 단단할걸.”
“정말 짜증 나. 도대체 저런 괴물이 왜 하필 우리가 있는 곳에 떨어진 거야?”
그때 한창 싸우고 있던 일행들 사이에서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베히모스의 송곳니가 마이티의 허벅지를 처참하게 물어뜯은 것이다.
“아아악!”
“마이티!”
“이런, 빌어먹을!”
두 사람은 급히 무기를 휘두르며 달려 나갔다. 하지만 이미 물린 허벅지에선 시뻘건 선혈이 한가득 흘러내리고 있었다. 마이티는 다리를 부여잡으며 고통스럽게 땅을 굴렀다. 나는 얼른 그에게 다가가 피투성이가 된 부분을 살폈다. 뼈가 드러나지 않은 것이 다행일 정도로 심한 부상이었다.
“엘과 라이! 마이티를 부탁한다!”
“아, 네!”
나는 고통에 덜덜 떨고 있는 마이티를 부축해 전투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장소로 옮겼다. 그동안 이사나가 소매 부근의 천을 찢어 그의 상처 부위를 단단히 묶었다. 그러나 부상 부위가 너무 큰 탓인지 지혈이 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천 너머에도 붉게 배어 나오는 피를 본 이사나가 창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엘, 출혈이 너무 심해.”
“으음…….”
‘어떡하지? 치료를 해야 하나?’
잠깐 사이에 피를 많이 흘렸는지 마이티의 얼굴은 온통 파리하게 변해 있었다. 능력을 쓰면 안 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당장 쓰러진 사람을 눈앞에 두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곳엔 신관인 카이테인도 없었고, 그의 부상은 간단한 응급 처치만으로는 해결이 안 될 정도로 심각했다. 시간을 지체할수록 위험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입술을 악문 마이티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품…….”
“네? 뭐라고요, 마이티?”
“푸, 품 안에 성수가 있어. 그, 그걸 뿌려 줘.”
‘성수?’
나는 의아해하면서 그가 입고 있는 조끼 안을 더듬었다. 그러자 주머니 안에서 단단한 물체가 손에 잡혔다. 꺼내 들고 보니 그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작은 병이었다. 안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담겨 있었고, 단단한 마개로 입구를 봉해 둔 채였다.
미리 부탁받았던 대로 나는 마개를 뽑은 다음 상처에 액체를 부었다. 그러자 고통에 일그러져 있던 마이티의 얼굴이 한층 편해지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액체가 닿은 부위가 빠르게 아물어 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신관들의 치유 성력과 비슷한 효과를 지닌 액체인 듯했다.
“젠장, 완전 비싼 건데.”
치유되는 내내 마이티는 아까워 죽겠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몸이 낫는 것보다 병의 액체가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걸 더 집중해서 보는 것 같았다. 아마도 이런 일이 아니었다면 평생 쓰지 않았을 것이 분명했다.
이윽고 상처가 완전히 아물자 그는 곧장 몸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제 다쳤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는 모습에 나는 당황해서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마이티? 그렇게 바로 일어서도 돼요?”
“아아, 멀쩡해. 집 한 채 값을 고스란히 쏟아부었는데 당연히 멀쩡해져야지.”
“헉, 집 한 채 값이요? 이 작은 병 하나가 말인가요?”
“뭐야, 신관 지망생이라면서 그런 것도 몰라? 성수는 한 방울이 금 한 되 값에 버금간다고. 물론 목숨 값보다야 싸게 먹히는 거겠지만 말이야.”
그는 투덜거리며 치열한 전투가 한창인 장소로 걸어갔다. 그러자 알아본 일행들이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마이티! 당장 못 튀어 와? 그까짓 상처 치료하는 데 뭐 이리 오래 걸리는 거야! 너 성수 더 써 보겠다고 일부러 시간 끌었지!”
“너 이 자식, 귀한 성수를 썼으니 열 사람 몫은 해내야 돼! 안 그럼 내가 다시 다리를 아작 낼 줄 알아!”
……동료를 위하는 마음만큼이나 살벌한 환영이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일행들과는 달리 베히모스는 여전히 거칠게 날뛰는 중이었다. 여기저기 협공을 당한 증거로 온몸이 피투성이인 상태였지만 정작 큰 영향을 받지는 않는 것 같았다. 심지어 상처를 입는 것보다 치유되는 것이 더 빨랐다. 제아무리 큰 생채기가 생겨도 다시 돌아보면 어느새 아물어 있었던 것이다. 자체 치유력이 엄청난 녀석이었다.
촤악! 쿠우웅!
그 순간 휴센과 동시에 맞부딪친 베히모스가 강렬한 충돌을 일으키며 나가떨어졌다. 흩뿌려지는 피와 함께 바닥에 처박히는 마수를 본 일행들이 모두 환하게 안색을 밝혔다. 처음으로 마수의 움직임이 멎은 것이다.
“됐다!”
휴센 역시 거칠게 바닥에 부딪혔다. 정면으로 돌파한 만큼 그 역시 받은 충격이 큰 것 같았다. 비틀거리는 그를 향해 쉐리가 급히 달려갔다.
“휴센!”
“아아, 난 괜찮아. 그보다 놈은…….”
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저편에서 쓰러진 베히모스가 다시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크르르…….”
흉흉한 붉은 안광이 번뜩이자 일행들은 다시금 질린 표정을 지었다. 마치 죽지 않는 불사신을 보는 기분이었다.
“이대로는 끝이 없겠어. 뭔가 단번에 숨을 틀어쥘 만한 방법을 써야 해.”
“검날도 제대로 안 박히는 놈을 상대로 무슨 방법?”
“베히모스는 마수라서 찌르고 베는 공격만으론 한계가 있어. 이런 자잘한 공격들보다 파괴력이 강한 한 방이 필요해.”
“칫, 이럴 때 마법사가 있었다면…….”
그때 내 옆에서 주저하던 이사나가 입을 열었다.
“제, 제가 공격해 보겠습니다.”
“라이, 네가?”
“잠시만 마수의 움직임을 묶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의 말에 일행들은 잠시 머뭇거리며 서로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정령술을 못 미더워하는 것 같았다.
“좋아, 움직임을 봉쇄하기만 하면 되는 거지?”
“……!”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건 트로웰이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는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아, 네! 부탁드립니다!”
이사나가 크게 고개를 굽히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릴을 바라보았다. 이 상황에서 그 행동이 의미하는 것은 뻔했다. 무언의 시선을 받은 그녀는 잠시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지만 곧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해 볼게.”
그녀가 채찍을 들고 나서자 이사나는 호흡을 고르고 정신을 집중했다. 정령을 소환하기 위한 준비였다.
“운디네, 소환!”
파아앗!
그 순간 그의 주변에 새하얀 물안개가 퍼지기 시작했다. 빠르게 하늘로 솟구친 안개는 점차 하나로 모이기 시작하더니 곧 아름다운 소녀의 형상으로 화(化)했다. 처음 보는 정령의 모습에 놀란 건지 그때만큼은 일행들도 잠시간 멍해진 모습이었다. 그 즉시 이사나가 이릴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이릴! 지금이에요!”
“아, 알았어!”
그녀는 곧 채찍을 휘둘러 베히모스의 목을 휘감았다. 덕분에 마수의 움직임이 주춤하자, 이사나가 바로 운디네를 향해 공격을 명령했다.
“운디네! 저 마수를 공격해!”
명을 받은 즉시 운디네는 춤추듯 허공을 부드럽게 선회했다. 그러자 운디네의 머리 위로 수백 개의 화살이 형성됐다. 전부 얼음으로 이루어진 화살이었다. 운디네의 손짓에 화살은 빠르게 마수에게 날아들었다.
촤아아악―! 콰지지직!
“크와아아앙!”
살을 파고드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수백 개의 얼음 화살이 단번에 박혀 들었다. 동시에 베히모스의 몸 전체에서 새빨간 피분수가 솟구쳤다. 베히모스는 심하게 경련을 일으키며 허공에서 크게 몸을 뒤틀었다. 마치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동영상의 한 장면처럼, 그 순간의 시간이 멈춰 버린 듯했다.
찰나의 순간이 끝났을 때, 베히모스는 맥없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쿠웅! 둔탁한 소리가 바닥을 묵직하게 울렸다.
“…….”
“…….”
주위는 한동안 깊은 적막에 휩싸였다.
보이는 것은 바닥에서 잔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하얀 털 짐승과 그 앞에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이사나의 모습이었다. 일행들은 모두 굳어진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다. 방금 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그때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던 이사나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심한 기력의 소모로 정신을 잃은 것이다.
“라이!”
“괜찮아요. 탈진한 것뿐이에요.”
나는 얼른 그를 부축하며 일행들을 안심시켰다. 이사나가 쓰러지자 그의 주변을 배회하던 운디네도 그대로 사라져 자연체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것을 본 일행들은 다시 얼떨떨한 표정으로 베히모스를 돌아보았다. 축 늘어진 몸에선 이제 경련조차 일지 않았다. 완전히 숨을 거둔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듯 일행들의 입에서 나직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끝났다…….”
“맙소사, 정말 죽은 거야?”
“믿을 수가 없군.”
그토록 오랜 시간 고군분투했던 것에 비하면 정말로 허무한 종결이었다. 사실 나로서도 정령의 위력이 이렇게나 강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심지어 운디네는 상급도 아닌 중급 정령에 불과했으니까.
‘우와, 그럼 난 대체 얼마나 강하다는 거야?’
무심코 이런 뻘생각마저 들었다. 그러자 그것을 읽었는지 트로웰이 키득거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창피한 기분을 모면하기 위해 얼른 이사나를 보살피는 척을 했다.
그때까지도 일행들은 여전히 얼떨떨한 모습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마수를 잡았지만 여전히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 동료들을 대신해서 휴센이 쓰러진 베히모스의 앞으로 다가가 시체를 살폈다. 숨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맥을 짚고 안광이 꺼진 눈동자를 살핀 다음에야, 그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일행들은 긴장을 풀며 서로 자축을 건넸다. 내내 굳어져 있던 얼굴에도 처음으로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들 중 가장 흥분한 사람은 헤롤이었다.
“굉장해! 우리가 마수를 잡다니! 심지어 베히모스라고! 이거 진짜 현실 맞아?”
“물론 현실이야, 헤롤. 사실 우리가 아니라 라이 혼자 잡은 거나 다름없지만.”
“그러게. 솔직히 정말 놀랐어. 정령이란 게 그렇게 대단할 줄은…….”
“어허! 모르는 소리. 그게 다 이 헤롤 님이 열심히 밑밥을 깔아 둔 덕분이라고. 아무리 정령이 대단하다고는 해도 베히모스가 지치지 않았다면 한 방에 죽이진 못했을 거란 말이야. 그런 의미에서 내 공헌도 제법 크다는 말이지.”
이사나보다 존재감이 밀리는 것에 위기의식을 느낀 것일까. 헤롤은 냉큼 자화자찬을 시도했다. 그러자 당연히 그 꼴을 두고 볼 리가 없는 이릴의 타박이 이어졌다.
“흥, 다 같이 한 일에 유세 좀 부리지 마. 정작 위급한 상황에선 꼼짝도 못 하던 주제에.”
“뭐야?”
“사실이잖아? 내가 위험했을 때 바보같이 굳어져서 아무것도 못 하던 사람이 어디의 누구더라? 엘은 이 가는 팔로 날 구하느라 마수 앞에 뛰어들었는데 말이야.”
“윽! 그, 그거야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미처…….”
“됐거든? 엘이 아니었으면 난 바로 죽었다고. 명색이 몇 년을 함께해 왔다는 동료가 정작 위험한 순간에는 손을 놓고 말이지. 정말 실망이야, 헤롤!”
“뭐, 뭐야! 나도 한다면 하는 인간이라고!”
처음엔 미안했는지 말을 더듬던 그도 이릴이 도끼눈을 하고 쳐다보자 욱한 반응을 보였다. 물론 이릴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비웃었다.
“하긴 뭘 해? 입만 살았지 정작 중요한 순간엔 하나도 도움이 안 되는 헤롤 씨. 그 커다란 덩치가 아깝다.”
“이익, 이 마녀가! 그러는 너야말로 제대로 한 건 하나도 없잖아? 종일 허둥대기만 했던 주제에!”
“이거 왜 이러셔? 라이가 물의 정령으로 공격하는 동안 마수를 꼼짝 못 하도록 만든 게 바로 이 몸이시거든?”
“하― 몬스터도 단번에 가르는 채찍으로 했다는 게 겨우 고정 역할뿐이냐? 잘났다, 이릴! 너도 드디어 한물갔구나?”
“뭐가 어쩌고 어째?”
분노에 찬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전투를 마친 직후에 저렇게 열심히 다툴 수 있다니, 아무래도 힘이 남아도는 게 분명했다. 쉐리 역시 같은 생각인지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어휴, 이런 때까지 꼭 저래야 해? 정말 못 살아.”
나는 피식 웃은 다음 이사나를 편히 눕히고 몸을 일으켰다. 쉐리가 짜증을 내기 전에 슬슬 두 사람을 말릴 생각이었다. 그 순간 무언가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오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어?”
“응? 왜 그래, 엘?”
나의 반응에 덩달아 돌아본 쉐리가 입을 다물었다. 충격으로 얼어붙은 얼굴에 천천히 경악이 서리는 것이 보였다. 나 역시 눈에 보이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릴의 바로 옆에 있던 풀숲에서, 붉은 안광을 지닌 짐승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말도 안 돼…….”
설마 마수가 한 마리가 아니라 또 있었을 줄이야!
다투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두 사람은 바로 옆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들이 이상한 점을 깨달은 것은 마수의 그림자가 바로 지척에 이르렀을 때였다.
“어, 어라? 내가 지금 꿈을 꾸나?”
헤롤과 이릴은 멍하니 마수를 응시했다. 눈앞에 닥친 현실을 제대로 인지하기 힘든 듯 다른 때보다 더 반응 속도가 느렸다. 성난 짐승의 이빨이 그들을 향해 덮치는 것과, 내가 비명을 지른 것은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
“크와아앙!”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