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8)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8화(8/608)
제8화
온통 물밖에 없는 공간에도 낮과 밤은 있었다. 단지 해가 지고 달이 뜨는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일 뿐. 일단 밤이 되니 주변이 어두워진 것만은 확실했다.
한 가지 신기한 점은 그렇게 뚜렷한 ‘어둠’ 속에서도 내 두 눈은 주변을 선명히 알아본다는 사실이었다. 물의 흐름이나 그 안에 속해 있는 미세한 물방울의 모양까지, 마음만 먹으면 현미경을 통해 들여다보는 것처럼 세세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거…… 굉장한데.’
과거의 난 선천적으로 시력이 나빠 바로 앞에 있는 사물도 잘 분간하지 못했다. 늘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쓰고 다녔지만 그것도 다른 도구에 비해 나았을 뿐, 눈뜬장님이나 다름이 없는 신세였다.
그맘때쯤 내 가장 큰 목표는 알바를 해서 모은 돈으로 라식 수술을 하는 거였다. 이미 중학교 시절부터 스스로 돈을 벌어 학비와 용돈을 충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통장에는 충분한 돈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나 같은 미성년자가 수술을 하려면 반드시 보호자 동의서가 필요했다. 부모님이 허락을 해 줄 리도 없었지만, 병원에 가서 개인 사정을 설명하며 애원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그래서 훗날 학교를 졸업한 뒤 성인이 되었을 때 수술을 받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나름 평생의 염원이었던 셈이다.
심지어 유령이었을 때도 내 눈에는 안경이 분신처럼 씌워져 있었다. 그런데 다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이렇게 훌륭한 시력을 갖게 되다니. 왜 진작 죽지 않았나 다시 한 번 후회(?)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돈은 다 어떻게 됐나 모르겠네. 뭐, 통장은 태진이가 가지고 있었으니까 녀석이 알아서 했겠지.’
가까이 어울리던 친구들은 여럿 있었지만 그중에서 내 개인사를 다 알고 있던 녀석은 하태진, 그 녀석이 유일했다. 그만큼 남모르게 뒤에서 나를 신경 써 주고 챙겨 줬던 고마운 녀석이다. 그에겐 통장에 있던 돈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았다. 물론 태진은 착하니까 아마도 그 돈을 자신이 쓰지 않고 내 부모님께 가져다주었을 것이다. 아니면 어디 좋은 기관에 기부라도 했거나.
확실한 건 그 돈이 내 장례 비용으로는 쓰이지 않았다는 거다. 그 녀석의 생각이야 뻔하다. 마치 내가 죽음을 예감해서 미리 돈을 모아놓은 것처럼 보이는 게 싫었던 거겠지. 실제로 내가 반대의 입장이었어도 그 돈은 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이제 이런 건 생각하면 안 돼. 하루빨리 정령왕임을 자각해야 하잖아.’
나는 급히 머리를 흔들며 머릿속을 채웠던 생각을 털어냈다. 그리고 두 정령왕이 돌아가기 전 마지막까지 나눴던 대화들을 다시 떠올렸다.
“저기, 그럼 이제 난 어떻게 되는 거야? 설마 계속 이대로 아무것도 못하게 되는 건가?”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건 바로 이럴 때 쓰기 위한 표현일 것이다. 자신의 능력을 좀먹는 정령왕이라니. 한순간의 잘못된 결정이 설마 이런 결과를 불러일으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미네르바는 단번에 내 염려를 일축했다.
“아니, 그렇지는 않아. 자각이 더디다 해도 네가 정령왕이란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시간이 흐르면 언젠가는 전부 해결될 거야.”
“어? 정말?”
“그래, 하지만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있을 정도로 이곳 사정이 좋진 않아. 지금 당장 네 능력이 절실한 상황이니까.”
본래 아크아돈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면 내가 정령왕으로서 자각이 더디더라도 그다지 피해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물의 정령이 모두 소멸한 상황이기 때문에 한시라도 빨리 능력을 자각하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것이 미네르바의 설명이었다. 하급 정령인 나이아스만으로는 작은 개울과 샘은 가능하더라도 강이나 바다같이 광활한 영역은 정화하거나 새로 생성하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정령을 만드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야.”
“그, 그럼?”
“우선 전 대륙에 골고루 비를 내려야 해. 미네르바와 함께 폭풍을 일으켜서 빠른 시일 내에 대륙을 횡단해야 하지. 그 사이에 나는 막힌 수맥을 뚫고 쏟아지는 폭우를 지면에 흡수시킬 텐데, 이때 수로를 제대로 자리 잡게 하는 것에도 네 도움이 필요해. 식물이 많이 사라져서 지면 자체의 힘이 너무 약해졌거든.”
뭣이라? 비를 내리고 폭풍을 부르고 수맥을 뚫어?
트로웰의 설명은 하나같이 기함하게 하는 것들뿐이었다. 설마 그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전부 다 정령왕이 관여하는 줄은 몰랐다. 그저 평범한 자연현상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이런 보이지 않는 노력이 있었다니. TV에서 보던 움직이는 무대장치가 사실은 전부 수작업인 걸 알았을 때만큼이나 충격적이었다.
“아마 한 달이나 두 달 정도 전력으로 힘을 쏟아야 할 거야. 그럼 예전만큼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회복되겠지.”
“저기…… 나 그런 거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데?”
“알아. 가장 기본적인 정령의 생성에서부터 애를 먹고 있으니 나머지 것들은 더 무리라고 보거든.”
“그럼 어떡해? 시, 신은? 신은 아무것도 안 하는 거야?”
“신? 이곳 아크아돈의 생태계는 전부 우리들 4대 정령왕의 소관이야. 주신이 직접 정해 준 우리들만의 영역이란 거지. 자연계 쪽의 일에 관해선 그들이 우리에게 참견하거나 개입할 권리가 없어.”
“그, 그래?”
“응. 설령 우리가 작정하고 이 세계의 자연 체제를 엉망으로 만들어도, 그게 우리들의 결정이라면 수긍하고 따라 주거든. 뭐, 덕분에 이번 사건의 처리도 그만큼 늦어지긴 했지만.”
아, 그래서 가뭄이 10년이나 지속할 때까지 모르고 있었던 건가. 어쩐지 절대 멸망해선 안 되는 차원이라는 것치곤 재앙을 너무 늦게 알아냈다 싶었는데 이런 사정이 있었을 줄은 몰랐다. 아마도 그때까진 정령왕들이 일부러 일으킨 재앙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너무 걱정하지 마, 지훈.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느긋하게 하지 뭐. 미네르바도 말했다시피 언젠가는 전부 자각하게 될 테니까. 일단 우리는 네가 태어난 것만으로도 충분하거든.”
“어? 하지만 당장 회복을 하지 않으면 아크아돈은 여전히 가뭄이 지속되는 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괜찮아.”
“괜찮다니…….”
산뜻한 대답에 얼떨떨해져서 말문을 잃자 트로웰은 해맑게 웃었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시절도 버텼는걸. 그때에 비하면 앞으론 훨씬 살 만할 거야. 어차피 서두른다고 우리한테 고마워하는 것도 아니고.”
“트로웰, 그런 말은…….”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미네르바가 조금 나무라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트로웰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대답했다.
“내 말이 틀린 건 아니잖아. 우리가 애써 봤자 공치사는 다 신들에게 돌아가는 게 사실이지.”
“어? 신들에게?”
“인간들은 우리가 하는 일도 전부 다 신이 하는 건 줄 알거든. 정작 이곳에 개입하는 신들은 역사에 분탕질이나 치는 놈들이 대부분인데 말이야. 하지만 어쩔 수 없지. 그들은 너무 나약해서 절대자에게 의존하고 싶어 하니까. 가끔 우리가 수고한 몫까지 신에게 치하를 돌리는 건 짜증 나지만.”
……가끔이 아닌 것 같은데?
분명 웃고 있는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트로웰에게선 묘하게 가시 돋친 느낌이 있었다. 내 착각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아마도 그는 신이나 사람들에게 그다지 호의적인 편은 아닌 것 같다.
그때 홀로 생각에 잠겨 있던 미네르바가 결심을 굳힌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지훈, 너에게 한 가지 제안할 것이 있어.”
“으응? 제안?”
“네 능력을 하루라도 빨리 각성시키는 방법이야. 전례에 없는 일이긴 하지만 지금은 이 방법밖엔 없을 것 같아.”
“어? 정말? 방법이 있는 거야?”
“그게 뭔데, 미네르바?”
나는 물론 트로웰 역시 그녀의 말에 관심을 보이고 물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다음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잔뜩 긴장하고 있던 상태에서 그대로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당분간 지훈이 우리에게 힘을 다루는 법을 배우는 거야.”
“……에?”
자, 잠깐 기다려. 망설이는 얼굴로 비장하게 내뱉은 말이 겨우 그것뿐? 나더러 힘을 다루는 법을 배우라고?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배워야 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 설마 안 가르쳐 줄 생각이었던 건가?
나는 황당한 심정으로 미네르바를 바라보았다. 농담하는 건가 했지만, 나를 응시하는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진지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조금 전의 제안이 진심이라는 건데…….
‘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빤한 결론을 도출하는 데 몇 분씩이나 걸릴 수 있는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설마 겉으로 보이는 저 어른스럽고 지적인 모습은 다 거짓이라는 건가? 그러나 당황스러운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우리가 지훈을 가르친다고? 그건 너무 극단적인 방법인 거 아니야, 미네르바?”
나로선 너무나도 당연한 그 제안에 오히려 트로웰이 난색을 표하고 나선 것이다. 미네르바 역시 죄책감을 느끼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어쩔 수 없다고 했잖아. 지훈만 괜찮다면 난 그렇게 하고 싶은데…….”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아닌 것 같아.”
“역시 무리일까?”
“당연하잖아, 미네르바. 지훈의 입장을 생각해 봐. 가능하겠어?”
“그야…….”
나한테 무언가를 가르쳐 준다는 것이 저렇게 유난 떨 정도로 큰일이던가?
미네르바에 이어서 트로웰까지 저런 반응을 하자 오히려 황당해하던 내가 더 이상한 놈이 된 것 같았다.
설마 정령계에선 뭔가를 가르쳐 주면 안 된다는 규칙이라도 있는 건가? 어처구니없지만 정황상 그게 가장 그럴듯했다. 결국 나는 그들의 원인을 알 수 없는 죄책감을 덜어 주기 위해 적당히 두 사람의 대화에 맞춰 대답했다.
“음,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좋은데? 정말 좋은 생각인 것 같아, 미네르바.”
“……뭐?”
“지훈! 너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예상했던 것보다 두 정령왕에게서 돌아온 반응은 더 컸다. 깜짝 놀란 표정의 미네르바와 마찬가지로 경악한 트로웰의 외침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의 경직된 얼굴을 보며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정말인데. 실은 내가 먼저 그렇게 부탁할 생각이었거든. 너희만 좋다면 난 당연히 찬성이야.”
“헤에, 지훈. 너 정말 좋은 녀석이구나?”
“아하하…… 그, 그래? 그 정도는 아닌데.”
“아니야, 상당히 어려운 결정이었을 텐데 정말 고맙다. 네 이해심에 감탄했어. 그렇지, 미네르바?”
“그래.”
동의를 구하는 트로웰의 말에 미네르바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조금 전보다 더 짙은 호의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나로선 이 모든 상황이 그저 이해가 되지 않을 뿐이었다. 겨우 이런 정도의 일로 고맙다거나 이해심 운운하는 소리를 듣다니. 오히려 이번 일은 내가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것도 모르는 날 위해 귀한 시간을 내어 가르쳐야 하는 건 오히려 저들 쪽일 텐데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입장이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내 예상은 어느 정도 적중했다. 정령왕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완벽한’ 존재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받는 걸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다. 때문에 지금과 같은 불가피한 상황에서도 이런 제안 자체가 상당히 실례되는 행동이라고 했다. 특히나 물의 정령왕은 대대로 자존심이 강해서 타인의 참견에 극도의 거부반응을 일으킨다나.
비슷한 일례로 내 바로 전대의 엘퀴네스의 경우, 과거 이프리트(이 또한 현재의 이프리트가 아닌 전대라고 한다)가 따끔하게 한마디 충고를 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엘퀴네스가 그에게 쳐들어가 그 자리에서 영역을 초토화한 적도 있다고 했다.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맞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서로 지적하고 그걸 고쳐 나가기도 했던 모양인데, 그 뒤로는 감히 충고나 조언을 할 생각을 버렸다고 한다.
결국 이 모든 암묵적인 룰은 전부 전대의 엘퀴네스에게서 비롯된 셈이었다. 그리고 그걸 이번 대의 엘퀴네스인 내가 다시 깨트린 것이다.
‘뭐, 어쨌든 공부는 내일부터 하기로 했으니까. 오늘은 실컷 놀아도 되겠지.’
이미 상당히 어두워진 시각이긴 했지만 주변을 돌아보는 덴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상관없었다. 게다가 정령왕은 유령과 마찬가지로 영체의 일종이기 때문에, 먹거나 잠을 자지 않아도 피로를 느끼지도 생명에 영향을 받지도 않는다고 들었다.
즉, 밤을 새워서 놀아도 내일 공부엔 전혀 지장이 없단 소리다. 나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주변을 둘러보며 앞으로 내가 생활할 곳을 익혀 두는 작업을 시작했다.
물 외엔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라는 처음 예상과는 달리, 조금 더 수면 밑으로 깊이 내려간 나는 여기저기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이 비치된 걸 발견할 수 있었다. 다만 흔히 나무로 만들어진 가구가 일반적인 것과는 달리, 이곳에 있는 가구들은 전부 돌과 바위가 그 재질이었다.
테이블과 의자, 침대, 심지어 서랍장까지 돌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것도 인공적으로 깎아 만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렇게 생긴 것처럼 표면의 느낌이 자연스럽다. 누가 물속 아니랄까 봐 군데군데 해초와 조개들도 박혀 있었다.
나는 무심코 서랍장을 열어 보았다. 안에는 종이 더미와(신기하게도 젖지 않았다) 깃펜, 자잘한 장신구 같은 것이 수북이 들어 있었다. 그중에서 나는 한구석에 처박힌 작은 손거울을 하나 발견했다. 거울의 표면은 오래 방치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듯 새까만 이끼들로 뒤덮여 있었다.
‘전대는 별로 자신의 외모엔 관심이 없었던 모양이지.’
무심코 내려놓으려는 찰나, 나는 퍼뜩 다시 거울을 집어 들었다. 아직 한 번도 내 모습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난 어떻게 생긴 걸까? 사실 새로 태어난 초반만 해도 과거의 외모에 여전히 미련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유독 화려한 다른 정령왕들의 모습을 보고 나니 생각이 조금 달라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내가 긍정적인 성격이라도 과거의 모습이 그다지 잘생기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가뜩이나 부족한 것투성인데 외모까지 현저히 차이 나면 상당히 비참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프리트가 여자같이 생겼다고 했었던가? 손의 모양이나 피부색을 보면 나쁘진 않을 것 같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확실히 확인해 보고 싶었다.
평범해도 좋다! 제발 추하지만 말아 다오!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조심스럽게 거울의 이끼를 걷어냈다. 그리고 마침내 표면이 드러나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