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80)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80화(80/608)
제80화
“이, 이릴?”
“흐윽, 흑흑…… 네가 아니었으면 이 자식 죽었을 거야. 그렇게 바보같이 가 버렸을 거라고. 정말 고마워, 엘. 흐윽…….”
긴장이 풀린 탓일까. 이릴은 나를 끌어안은 상태에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녀의 등을 툭툭 토닥여 주었다. 많이 놀랐을 테니 진정이 될 때까지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다른 일행들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때 휴센이 다가와 내게 악수를 청했다.
“정말 고맙다, 엘. 형제가 돌아가면서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하다니. 너희 형제는 우리들의 은인이야. 오늘 일에 대한 보답은 충분히 하마.”
“아, 아니에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당연한 일을 한걸요.”
“하지만…….”
“정말 괜찮아요. 잠시간이지만 저희도 동료잖아요. 이런 걸로 사례를 하시면 오히려 제가 서운해요.”
그 말에 휴센은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마이티가 불쑥 소리쳤다.
“앗! 그러고 보니 그런 능력이 있으면서 내가 다쳤을 땐 왜 치료를 안 해 준 거야? 그땐 그냥 지켜만 봤잖아.”
“네? 윽, 그건…….”
“치사해! 사람을 차별하다니!”
거기까진 미처 생각을 못 했기에 나는 어떻게 변명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런 나를 구해 준 건 의외로 쉐리였다. 그녀가 찌푸린 얼굴로 그를 타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마이티. 너랑 헤롤의 상황이 같아? 도와줘서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망정 그렇게 몰아붙이는 게 어딨어?”
“그, 그치만 성수 값이……!”
“흥, 그렇게 비싼 걸 공짜로 받겠다는 심보가 더 못됐거든? 엘, 신경 쓰지 마. 우리 중에서 고작 성수 값 따위에 벌벌 기는 사람은 없으니까. 어느 이름 모를 수전노만 빼면 말이야.”
“아, 아냐! 쉐리! 좀 전의 그건 그냥 장난친 거야! 네가 오해한 거라고!”
“장난? 장난을 칠 게 따로 있지, 무슨 그런 장난을 해? 아무튼 정말 매력 없는 남자라니까.”
“커흑!”
나는 무너지는 마이티를 바라보며 속으로 조용히 동정을 표했다. 저렇게 착실히 마이너스 점수를 쌓기도 쉽지 않을 텐데, 절대 이뤄지기 힘든 관계라는 게 바로 저런 게 아닌가 싶었다. 그리고 휴센은 흐뭇한 시선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미안하다, 엘. 마음에 담아 두지 마. 우리들 모두 네게 고마운 마음뿐이니까. 아무튼 마이티 저 녀석은 쓸데없는 말을 해서는…….”
“아, 아뇨. 이해해요. 성수가 굉장히 비싸다면서요. 거의 집 한 채 값이라던데…….”
“물론 그렇긴 하지. 하지만 우리들 평균 수입을 생각하면 아주 비싼 편도 아니야.”
“그, 그래요?”
“물론이지. 자랑은 아니지만 우린 용병단 중에서도 꽤 벌이가 좋은 편에 속해. 은패 정도만 돼도 고급 의뢰가 많이 들어오기 때문에 생활에 곤란을 겪는 일은 거의 없어.”
그렇게 대답한 후 휴센은 느긋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은 바닥에 너부러진 베히모스들의 시체를 향해 있었다.
“……게다가 간혹 생각지 못한 부수입이 있거든.”
* * *
휴센이 한 말의 의미는 곧 밝혀졌다. 계기는 돌아갈 준비를 시작한 일행들이 베히모스의 시체를 챙기는 모습을 보게 되면서였다. 사냥한 증거를 보이기 위한 거라면 그냥 머리만 잘라 가도 될 텐데, 그들은 굳이 거대한 시체를 전부 등에 짊었다. 심지어 수염 한 올, 발톱 하나라도 빠트릴세라 주변을 샅샅이 살피기까지 했다. 의아해하던 나는 그 이유를 듣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헉! 시체를 판다구요?”
“응. 상위 몬스터는 마법 연구나 각종 제작 재료로 제법 수요가 있거든. 특히 이런 마수 같은 것들은 걸어 다니는 보물 창고나 마찬가지야. 몸에서 버릴 게 하나도 없어. 가죽과 안구는 물론이고, 내장과 피까지 전부 비싼 값에 팔리는 편이지.”
“헤에, 그렇군요.”
설명을 해 준 사람은 이릴이었다. 내가 신기해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는 빙긋 웃어 보였다.
“몰랐구나. 그래서 전문적인 헌터 중에선 부호가 꽤 많아. 덕분에 헌터 길드도 상당히 입지가 큰 편이고. 하지만 거기서 내로라하는 녀석들도 마수 두 마리를 한꺼번에 잡아 본 적은 없을걸? 그것도 베히모스를 말이야.”
“드문 일인가요?”
“드물다마다. 원래 마수라는 게 이곳의 생물이 아니잖아. 일부러 찾아다녀도 만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해. 게다가 마수는 보통 단독으로 행동하거든. 그중에서도 베히모스는 특히 개체 수가 적은 편이야. 보통 사람들은 평생 한 번이나 볼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라고.”
“음, 그럼 여기에 두 마리가 나타난 건…….”
“정말 엄청난 일인 거지. 아마 이 사실이 알려지면 헌터 길드가 발칵 뒤집힐걸?”
그렇게 말하는 이릴의 표정은 매우 신 나 보였다. 아무래도 헌터 길드를 이겼다고 여기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마수의 시체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트로웰을 발견했다. 모두가 돌아갈 채비로 바쁜(정확히는 마수의 시체를 챙기는 일로 바쁜 거지만) 와중에 그는 홀로 서서 어딘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매튜? 왜 그래?”
“……아아, 벌레가 좀…….”
“벌레?”
“아니, 아무것도 아냐.”
어리둥절해져서 되묻자 그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곤 전혀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성가시긴 하지만 딱히 큰 영향이 있을 것 같진 않네.”
“으응? 뭐가? 벌레를 말하는 거야?”
“응, 벌레 말이야.”
모호하게 답한 후 그는 이번에도 의미 모를 미소를 지었다. 나는 열심히 주위를 살폈지만 딱히 어느 곳에도 그가 말하는 벌레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겨울에 접어든 날씨인 만큼 아직까지 밖에서 활동하는 벌레가 있을 리도 없었다.
트로웰에게 다시 시선을 보냈을 땐 그는 이미 관심이 멀어진 듯 아무렇지 않게 일행들을 돕고 있는 중이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알아 가면 알아 갈수록 그의 속은 도무지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잠시 후 돌아갈 준비를 마친 일행들은 마지막으로 마수에게 희생된 일꾼들의 시체를 수습했다. 앞서 마수의 시체를 챙길 때와는 다르게 정중하고 엄숙한 분위기였다. 그들은 수습한 시체들을 한자리에 모은 다음 눈을 감고 짧은 기도를 마쳤다. 지키지 못한 자괴감 탓인지 저마다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우리가 좀 더 빨리 왔다면 좋았을걸.”
“그런 소리 마. 우리도 최선을 다했어.”
“그건 쉐리의 말이 맞아. 이들의 일은 안타깝지만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어. 여기서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에 만족하자.”
리더답게 휴센이 우울해하는 일행들을 독려했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그 역시 낯빛이 어둡기는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분위기가 진정되자 나는 그에게 질문을 건넸다.
“이 시체들은 이제 어떻게 하는 거예요?”
“아아, 다 들고 가서 유족에게 돌려보내면 좋겠지만 그것까진 우리가 나설 일이 아니야. 이곳의 경비대가 알아서 하겠지.”
“그럼 그냥 놔두고 가는 건가요?”
“일단은 그렇게 해야지. 하지만 피 냄새를 맡고 몬스터나 들짐승이 내려올지도 모르니 조치는 해야겠다. 마이티, 네가 이 자리를 지키고 있어라.”
“내가? 윽, 알았어.”
지목받은 마이티는 싫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머지 일행들은 마수의 시체와 함께 아직 의식이 없는 헤롤을 부축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로 이사나를 등에 업었다.
그렇게 돌아갈 모든 준비를 마쳤을 때였다.
“피 냄새다!”
“여기, 이쪽이야, 이쪽!”
“……?”
갑자기 수풀 저편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병장기를 움켜쥔 남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눈에도 낯익은 그들은 칵테일 용병단의 단장인 빌트와 코웰이었다.
“모두들 무사합니까! 우리가 도우러……!”
비장한 외침이 이어지길 잠시간, 굳은 얼굴로 나타난 그들은 이내 멀뚱히 서 있는 우리를 발견하고 입을 다물었다.
곧이어 그들의 뒤에서 무장한 사람들이 잇따라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모두 익숙한 얼굴로, 이번 상단 여정을 함께하고 있던 용병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낡은 신관복을 입은 청년의 모습도 함께 있었다. 엘뤼엔의 사제 카이테인, 바로 그였다.
“엘!”
“어라? 카이 씨?”
뒤늦게 나타난 그들 역시 이쪽의 상황을 발견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치열한 전투는커녕 평화롭게 맞이하고 있는 모습에 당황한 것 같았다.
“뭐야? 왜 다들 살아 있어?”
기묘한 침묵을 깨고 질문을 한 사람은 코웰이었다. 그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머리가 앞으로 크게 숙여졌다. 옆에 있던 빌트가 그의 뒤통수를 때린 것이다.
“큽! 아프잖아! 뭐 하는 거야?”
“네 녀석이야말로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왜 살아 있냐니! 말을 해도 꼭!”
“신기하니까 그렇지! 마수를 처리하러 간 녀석들이 멀쩡해도 너무 멀쩡하잖아!”
“이 녀석이 그래도!”
“다들 어떻게 된 겁니까? 어떻게 이곳까지…….”
그때 옥신각신하는 그들 앞으로 휴센이 다가갔다. 그제야 다툼을 멈춘 빌트가 민망해하며 그가 내민 손을 덥석 붙잡았다.
“아아, 휴센 씨. 너무 늦은 게 아닌가 걱정했었는데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여러분만으로 마수를 잡으러 갔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 말이죠. 그래서 부랴부랴 사람들을 모집해서 달려오던 참이었습니다.”
“그러셨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사실은 더 일찍 올 수 있었는데 성문 앞에서 병사들이 만류하는 바람에 이제야 겨우 도착했지 뭡니까? 그보다 마수는 대체 어디에…….”
그 순간 조심스럽게 이쪽을 살피던 빌트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일행들 사이에 있는 마수의 시체를 발견한 것이다. 사실 너무 덩치가 커서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서, 설마 마수를 잡은 겁니까? 게다가 두 마리? 맙소사. 지금 제 눈에 보이는 광경을 믿을 수가 없네요. 정말 두 마리가 맞는 겁니까?”
“보신 그대로입니다.”
휴센이 긍정하자 빌트를 비롯한 사람들은 모두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세, 세상에! 정말 굉장하군요. 역시 샴페인 용병단입니다. 정말로 마수를 잡다니!”
“심지어 그냥 마수도 아니고 베히모스잖아. 그걸 두 마리나 잡았다고? 당신들 정말 인간 맞아?”
감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코웰은 황당한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그러다 의식이 없는 헤롤을 발견했는지 얼굴을 굳히고 다가왔다.
“뭐야, 이 형님은 얼마나 심하게 다친 거야? 옷이 온통 검붉잖아.”
“아아, 그 녀석은…….”
“뭐라고? 다치신 겁니까?”
“사제님! 어서 이쪽으로!”
일행들이 대답하기도 전에 사람들은 서둘러 카이테인을 앞으로 이끌었다. 그는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헤롤을 바라보았다.
“환자분을 눕혀 주시지요. 제가 상처를 보겠습니다.”
그러자 당황한 휴센이 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괜찮습니다! 그냥 피가 묻어 있는 것일 뿐, 부상은 이미 치료했습니다.”
“치료를 했다고요?”
“네, 다행히 여기 있는 엘이 신관 지망생이라 성력을 쓸 수 있지 뭡니까? 덕분에 완전히 치료한 참입니다.”
‘……윽!’
설마 이런 식으로 내 거짓말이 위기를 맞을 줄이야. 가슴이 철렁해지는 순간이었다.
정식 사제라면 방금 전 휴센의 대답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말인지 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예상대로 카이테인은 조금 굳은 낯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차분히 응시하는 시선에 온몸이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엘, 당신이 치료를 하신 겁니까?”
“윽, 네…… 그, 그렇긴 한데요…….”
“성력을 쓰셨단 말이지요?”
“……네.”
나는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무난히 넘길 수 있을지 속으로 맹렬히 고민했다. 그때 옆에서 듣고 있던 코웰이 의아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뭐야, 저 꼬맹이가 신관 지망생이라고? 근데 지망생이 성력을 쓸 수도 있어?”
“응, 그렇다던데?”
“에이, 그런 게 어딨어? 지망생은 아직 신의 문장도 받지 않은 상태라는 거잖아. 문장을 받은 정식 신관들도 잘 다루지 못하는 게 성력인데, 그걸 지망생이 쓸 수 있다고? 그게 말이 돼?”
“하지만 엘이 그렇게 말했는걸? 실제로 헤롤도 이렇게 치료했잖아.”
“그거 정말 확실한 거야?”
“뭐?”
“저 꼬맹이가 쓴 능력이란 게 성력이 확실하냐고. 사실이 아니면 이건 거의 종교 재판 회부감 아닌가?”
“조, 종교 재판?”
놀란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퍼졌다. 일행들의 얼굴 역시 파리하게 질린 상태였다. 코웰은 코웃음을 치며 보란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렇잖아. 문장도 없는 가짜 신관이 사람을 치료했다, 이걸 어느 교단에서 용납하겠어?”
“멋대로 생사람 잡지 마! 아무리 그래도 종교 재판이라니!”
“그러니까 제대로 짚고 넘어가려는 거잖아. 저 말이 사실이야, 사제님? 정말 그런 일이 가능해?”
“…….”
1초의 시간이 몇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앞으로 이어질 참담한 시간들을 생각했다. 머릿속에선 온통 종교 재판이라는 네 글자만 둥둥 떠다녔다. 마치 사형 선고를 앞둔 죄수가 된 심정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예상을 가르고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