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81)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81화(81/608)
제81화
“그의 말이 맞습니다. 상당히 드문 일이긴 합니다만, 저희 형벌의 사제들 중에선 간혹 정식 문장을 받기 전에 성력을 쓰기도 합니다.”
“……!”
“엥? 그게 정말이야?”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카이테인은 전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히려 응시하는 눈길에서 친근함까지 느껴졌다. 처음 내가 엘뤼엔을 언급했을 때만큼이나 반가운 표정이었다.
설마 즉석에서 지어낸 그 거짓말이 정말 가능한 일인 건가? 나조차 이 상황이 얼떨떨한데 코웰이라고 쉽게 받아들일 리 없었다. 그는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형벌의 신의 사제들은 그렇다는 거지? 그럼 저 꼬맹이도 사제님과 같은 교단이라는 거야?”
“예,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뭐야, 사제님은 이미 알고 있었어?”
“처음 인사를 드렸을 때 알려 주셨습니다. 성력을 갖고 계시다는 건 지금 알게 됐지만요. 엘, 왜 진작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처음부터 알았다면 당신은 당연히 신관이 되실 거라고 알려 드렸을 텐데요.”
“아하하…… 그, 그게 말이죠…….”
“하긴, 이해합니다. 오랜 세월을 옆에서 조언받을 일 없이 혼자서 수련을 해 왔다면 아무래도 남들 앞에서 내보이기 조심스러웠겠죠. 아무튼 큰일을 해내셨군요. 엘뤼엔 님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부드럽게 건네는 말에 나는 어색한 웃음으로 답했다. 덕분에 일행들은 이제 완전히 안심한 분위기였다. 경직된 공기가 풀리자마자 그들은 매서운 표정으로 코웰을 노려보았다.
“그것 봐. 사제님도 맞다고 하시잖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괜히 사람을 엄하게 몰아가고 그래?”
“아니, 뭐…… 난 그냥 뭐든 확실히 해 두자는 거였지. 사실로 밝혀졌으니 다행이네. 누가 뭐래?”
“쯧쯧. 너 말이다, 친구 없지?”
“뭐야? 누가 그래? 나 친구 완전 많거든?”
퉁명스럽게 쏘아붙인 그는 곧 사나운 눈길로 나를 훑어보았다.
“사실 난 아직도 좀 이해가 안 돼. 혹시 사제님이 저 꼬맹이 감싸 주려고 거짓말 하는 건 아냐?”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잖아. 형벌의 신은 아직 신도가 얼마 되지도 않은 작은 교파라고. 정식 교단 등록을 한 지 이제 십 년은 됐나? 게다가 포교 활동도 그리 활발하지 않은 편이지. 그런데 이 넓은 대륙에서 그 교단의 수련 사제와 사제 지망생이 우연히 만날 확률이 얼마나 되겠어?”
“아니, 그건…….”
“우연이 아닙니다.”
이번만큼은 정말 억울했기에 나는 제대로 반박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나보다 먼저 단호한 대답이 이어졌다. 바로 카이테인이었다. 나는 다시 당황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조금 전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우연이 아니라고?”
“예. 사실 저도 처음엔 그저 신기한 인연이라고만 여겼습니다. 하지만 오늘에서야 비로소 알게 됐지요. 엘과 제가 만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바로 저희를 관할하시는 형벌의 신, 엘뤼엔 님의 뜻이었습니다.”
“네? 엘뤼엔…… 님이요?”
여기서 왜 갑자기 엘뤼엔이 나오는 걸까.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카이테인을 똑바로 응시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의 얼굴을 주목하고 있었다.
“실은 이곳에 오기 전에 전 원래 엘을 찾아가던 길이었습니다.”
“저를요?”
내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자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에게 꼭 드려야 할 얘기가 있었습니다.”
“무슨…….”
“놀라지 말고 들으십시오. 사실은 조금 전 기도 중에 당신과 관련된 신탁을 받았습니다.”
“시, 신탁!”
탄성은 주위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터져 나왔다. 코웰은 물론 샴페인 용병단원들도 크게 놀란 표정이었다.
나는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잠시간 머리를 굴렸다. 내가 알기로 신탁이라는 건 신이 인간들에게 직접적으로 전해 주는 메시지의 한 종류였다. 카이테인이 믿는 신은 형벌의 신이고, 형벌의 신은 엘뤼엔이다. 그리고 형벌의 신이 조금 전 카이테인에게 신탁을 내렸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해, 엘뤼엔이 카이테인에게 메시지를…….
“……헐. 자, 잠깐만요. 그러니까 지금…… 엘뤼엔…… 님이 카이 씨에게 신탁을 내렸…… 아니, 내리셨다구요?!”
거대한 쇠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다면 이런 느낌일까? 스스로 판단하고도 믿어지지 않는 기분에 나는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카이테인은 그런 나를 이해한다는 듯이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제 방에서 홀로 조용히 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창가에 하얀 새가 날아 들어와 제 앞에 앉더군요. 그러자 갑자기 새의 입에서 전능하신 그분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제 평생에 이렇게 분명한 신의 음성을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죠.”
아직도 그때의 여운을 잊지 못한 듯 카이테인의 눈빛이 감동으로 일렁거렸다. 하지만 난 엘뤼엔이 직접 연락을 해 왔다는 사실에 놀라느라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신전에 가기 전까진 절대 그와는 연락이 닿을 수가 없을 거라고 여겼다. 설령 도착하더라도 만날 수 있을지 백 퍼센트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아무 때나 만나지도 못하는 관계, 한쪽에서 차단하면 언제든 끝이 날 이름뿐인 부자(夫子)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설마 그쪽에서 먼저 반응을 보이다니.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만 보던 배우가 실제로 눈앞에 튀어나온 듯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 그렇군요. 그, 그래서 그분이…… 뭐라고 하시던가요? 분명 저와 관련된 신탁이라고 하셨죠?”
“네, 맞습니다. 엘뤼엔 님께선 빠른 시일 내에 엘, 당신과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분께서 제게 당신을 신전까지 인도할 안내자의 역할을 내리셨습니다.”
“안내자요……? 저기, 그럼 엘뤼엔…… 님은 제가 신전으로 찾아가는 중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아니, 있으시다는 건가요?”
“당연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신은 만물을 다스리고 관장하시는 분. 하물며 당신의 종이 찾아오는 길을 모르실 리가 없잖습니까.”
“하아, 그래요…….”
그럼 내가 지금까지 그를 팔아(?) 연명하던 쇼들을 엘뤼엔이 전부 지켜보고 있었다는 건가. 엄습하는 쪽팔림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훗날 그를 만나면 어떤 얼굴을 하고 대해야 할지 벌써부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카이테인의 말은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내가 진심으로 기함을 토할, 엄청나게 충격적인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게다가 이것만이 아닙니다. 클모어에 있는 신전에도 당신이 신전을 방문한다는 신탁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네? 뭐, 뭐라고요?!”
“놀랍게도 대예배 시간에 대천사 나드엘이 직접 강림하여 신의 뜻을 전했다고 하더군요. 천사의 강림으로 현재 클모어의 신전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성력이 흐르고 있다고 합니다. 온몸이 썩어 가는 병을 앓는 자가 신전 입구에 이르기만 해도 그 자리에서 낫는가 하면 시들어 가던 작물이 되살아나는 등, 곳곳에서 갖가지 기적들이 펼쳐지고 있다는 겁니다. 지금 대사제님을 비롯한 모든 사제들이 당신의 방문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
맙소사, 대예배 시간에 신탁? 그것도 대천사의 강림?! 엘뤼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는 경악한 상태로 멀거니 입만 뻐끔거렸다. 그런 나를 향해 카이테인이 웃으며 말하는 소리가 귓가에 허무하게 스쳐 지나갔다.
“당신은 굉장한 행운아군요. 이렇게 엘뤼엔 님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존재라니, 정말 부럽습니다.”
“…….”
정말이지 앞날이 캄캄해지는 순간이었다.
* * *
사시사철 화창한 봄 날씨를 유지하고 있는 엘뤼엔의 성역은 오늘도 평화로웠다.
빛으로 빚어진 듯 아름다운 궁성. 그 안에 누군가 춤을 추듯이 날아들었다. 새하얀 은발에 보석같이 반짝이는 분홍색 눈동자, 발갛게 물든 뺨이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그녀의 어깨에는 고위 신족을 상징하는 새하얀 여섯 장의 날개가 기분 좋게 팔랑거리고 있었다.
“주군! 주군!”
소녀는 부산스럽게 소리치며 집무실 문을 열었다. 그 점잖지 않은 행동에 몇몇 선배 천사들이 가만히 얼굴을 찌푸렸지만 지금 소녀의 눈에는 한창 업무 중인 그의 주군 외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는 상태였다.
소녀의 하나뿐인 주군, 엘뤼엔은 소란 속에서도 아무런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응시하고 있던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맡긴 일은 제대로 처리하고 온 거냐, 나드엘.”
“네, 그럼요! 나드엘, 주군의 명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답니다!”
나드엘은 밝게 웃으며 노래하듯이 대답했다. 정식으로 업무 보고를 하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명랑한 태도였다. 선배 천사들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흔들면서도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웃었다. 천방지축이었지만 바로 저런 면이 나드엘만이 지닌 장점이기도 했다.
엘뤼엔은 보고 있던 서류의 마지막 장에 그의 직인을 찍은 후 들고 있던 깃펜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다음 안건을 준비 중이던 천사가 조용히 허리를 굽히며 서류를 물렸다. 그가 깃펜을 내려놓는다는 것은 잠시 휴식을 취하겠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내리뜬 푸른색의 눈동자가 곧게 자신을 응시하자 천하의 나드엘도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 보아도 정말 숨 막히게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내려가 보니 어떠하더냐?”
“앗! 네, 넵! 중간계는 처음 가 봤는데 생각보다 아름다웠어요. 물론 저희들이 사는 이곳 궁처만큼은 아니지만요. 제가 나타나니까 인간들이 굉장히 크게 놀라더라구요. 그 표정이 재미있었어요, 헤헤…….”
“내가 전하라고 한 말은?”
“물론 빠짐없이 전부 다 전했죠! 곧 엘이라는 이름의 귀한 손님이 방문할 테니 모두 몸과 마음을 정결히 하고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했어요. 그리고 그분이 머무는 동안 각별히 신경 쓰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어요.”
“그래, 빠트린 부분은 없는 것 같구나.”
“네!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속으로 계속 연습했거든요. 앗, 그치만 걱정 마세요! 제 평소 말투대로 하지 않고 언니들처럼 엄숙하게 말했으니까요! 나드엘, 주군의 위엄을 해치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답니다!”
‘아아, 나드엘.’
생글생글 웃는 얼굴에 선배 천사들은 다시금 머리를 짚었다. 대체 언제쯤이면 고위 천사다운 체통을 차릴 수 있을까. 순수하고 명랑한 모습이 귀엽긴 했지만 혹여 저러다 주군의 분노라도 사진 않을까 우려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엘뤼엔은 그저 가볍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래, 수고했다.”
“헤헤, 뭘요. 주군의 명으로 하는 일인데 하나도 힘들지 않아요. 그보다 주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여쭤 봐도 될까요?”
“뭐지?”
“엘이라고 하는 분이요, 혹시 물의 정령왕인 엘퀴네스 님이신가요?”
“그래, 그가 맞다.”
“헤에, 역시 그렇군요. 왠지 그런 것 같았어요. 주군께서 인간들에게 이렇게 대단위의 신탁을 내리신 일은 이번이 처음이시잖아요. 아드님이 걱정되신 거군요.”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는 언니들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나드엘의 질문은 거침이 없었다. 그리고 엘뤼엔은 이번에도 불쾌한 기색 없이 그저 미소 짓기만 했다.
만약 그를 아는 다른 신들이 지금 이 광경을 본다면 경악할 것이 틀림없었다. 평소 서리처럼 차갑고 엄격한 그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일 테니까. 그건 덩치 큰 남자에게 프릴 드레스를 입히는 것만큼이나 안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사실 엘뤼엔은 다른 때에도 이 작은 소녀에게만큼은 특별히 관대한 편이었다. 다른 천사였다면 분명히 문제 삼았을, 아무리 큰 실수를 저질러도 간단한 충고만 하거나 별다른 꾸중 없이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 본래 엘뤼엔의 성격상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은 잘 챙기는 편이긴 하지만 유독 나드엘에게 더 애정을 보이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상한 건 다른 천사들 또한 그녀가 받는 특별대우를 당연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처럼 철없이 굴거나 버릇없이 나설 때에도 화가 나는 게 아니라 혼이 날까 걱정이 더 앞섰다. 엘뤼엔의 궁처에 있는 천사들이라면 모두 나드엘을 딸처럼 예뻐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아, 그러고 보니 나드엘은…….’
그 순간 천사들은 모두 머릿속에 똑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신족의 성격은 첫 탄생 때 관여한 존재의 영향을 받아 형성이 된다.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그들을 ‘불러낸’ 신의 성격을 닮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우연스럽게도 나드엘의 탄생 때는 그 자리에 엘뤼엔 외에 한 사람이 더 있었다. 요즘 신계 전체에 파다한 소문의 주인공, 바로 그가 얼마 전에 양자로 맞아들인 물의 정령왕 엘퀴네스 말이다.
매일 산더미처럼 서류가 쏟아지는 피 말리는 일정 속에서도 그가 틈틈이 양자의 일정을 살핀다는 건 궁처 내에서 모르는 천사들이 없었다. 그때가 바로 얼어붙은 가면처럼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서 희미한 미소라도 볼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기도 했다.
주위에선 단순히 변덕을 부린 것뿐이라고 술렁거렸지만 궁처의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 친히 신탁을 내릴 정도이니 여기서 더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심지어 그가 그런 결정을 한 이유 또한 매우 간단했다.
내 아들이 인간들에게 무시당하면 안 되니까.
그렇게 귀애하는 아들의 성향을 받은 소녀다. 이제야 엘뤼엔이 그녀에게 관대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또한 그녀들이 나드엘에게 한없이 약한 이유 역시.
결국 팔불출도 유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