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queeness RAW novel - Chapter (95)
정령왕 엘퀴네스[개정판] 정령왕 엘퀴네스-95화(95/608)
제95화
“아, 역시! 당연히 그러신 줄 알았습니다. 하긴, 요즘 세상이 아무리 달라졌다고는 해도 다 큰 성인 남녀들이 한방에 머무는 건 좀 그렇죠. 부군과 함께 가족 여행 중이신가 보군요. 클모어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
이제야 뭐가 문제인지 알았다. 소녀의 시선이 급격히 싸늘해진 이유도.
그러니까…… 날 여자로 생각한 건가? 심지어 양손에 잘난 남자들을 거느린 채, 그들과 한방을 쓰는 문란한 여자라고?
‘맙소사! 누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줘!’
그러나 자신이 핵폭탄을 터트린 걸 알 리가 없는 여관 주인은 금세 다른 일이 생각났는지 유유히 사라졌다. 나는 억울함을 하소연할 겨를도 없이 종업원의 안내를 따라 멀거니 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렇게 해서 들어온 특실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괜찮았다. 방의 크기도 클뿐더러 고급스럽게 꾸며진 내관이 마치 귀족의 저택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내 노숙 생활만 하다가 지나치게 화려한 방에 들어온 탓인지 이사나는 어린애처럼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다른 때였다면 나 역시 기탄없는 감탄을 퍼부었을 것이다. 조금 전 그 일만 없었다면 말이다.
“뭐, 나쁘진 않네.”
방에 들어오자마자 라피스는 마치 제 집에 온 것처럼 편하게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그러곤 여전히 멍하게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고 서 있어?”
“에에잇! 지금 그걸 말이라고 물어? 이게 다 너 때문이잖아! 어떻게 책임질 거야? 왜 그딴 말을 해선!”
“뭐? 아아, 여자로 오해받은 것 때문에 그러는 거냐? 뭐 어때, 그럴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지이?”
“어차피 넌 헷갈리게 생겼잖아. 이참에 그냥 자신이 여자라고 생각하면 간단하겠네.”
“하나도 안 간단하거든? 누구 맘대로 내 성별을 바꾸는 거야?”
“성별을 바꾸긴. 애초에 넌 무성이잖아. 사실 지금 모습도 남성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아? 난 네가 왜 그렇게 남성체에 집착을 하는지 오히려 이해가 안 되는데.”
“그거야…….”
“그거야 뭐?”
나는 바로 대답하려다 조금 망설였다. 이런 개인적인 사정을 다 털어놔도 되는지 걱정이 됐기 때문이다. 말을 하다 멈춰서인지 라피스는 더 궁금해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내가 전생에 남자여서 그래.”
“하?”
라피스는 무슨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하느냐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사나 역시 대놓고 내색하진 않았지만 꽤 당황한 표정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속 시원하게 털어놓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담담히 내 과거를 밝혔다.
“난 여기서 태어나기 전에 17년간 남자로 산 기억이 있어. 그때 굳어진 습관이 있기 때문에 여자로 오해받는 게 익숙하지 않아. 그러니까 너희들도 좀 배려해줬으면 좋겠어.”
“그게 무슨…….”
그제야 진담이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라피스의 표정이 변했다. 그는 진지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아는 거냐? 영혼의 탄생과 윤회는 신의 관할이지만 나도 어느 정도는 들어서 알아. 정령왕은 윤회의 기억이 없는 가장 처음 창조된 순결한 영혼으로만 탄생하는 거다. 그런데 어떻게 네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나도 자세한 사정은 몰라. 그냥 태어나는 과정에 실수가 생겨서 잠시 엉뚱한 차원으로 떨어졌다 돌아온 거라고밖에는…….”
“다른 곳에 떨어졌다가 돌아와? 뭐야, 그럼 가뭄이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어?”
“…….”
난 대답 대신 조용히 이사나의 눈치를 살폈다. 그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당사자이니만큼 어떤 반응이 돌아올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금 놀란 듯했지만 다행히 생각보다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오히려 라피스가 더 당황한 듯 연신 헛바람을 들이켰다.
“거참. 믿을 수가 없네. 난 그냥 정령왕들이 작심하고 재앙을 일으킨 건 줄 알았는데…….”
“그럴 리가 없잖아. 내가 태어나지 않는 바람에 정령계도 완전 비상이었다고. 다들 굉장히 힘들었다고 들었어.”
“쳇, 어쩐지 로드 영감이 트로웰과 자주 의논을 나눈다 했지. 성룡들이 종종 자청해서 인공우를 뿌리러 다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군. 뭐야, 그럼 혹시 나만 빼고 전부 알고 있었던 건가?”
“넌 전혀 몰랐어? 트로웰은 네 대부이기도 하잖아.”
“별로 관심이 없었거든.”
그게 자랑이냐?
나는 황당해져서 라피스를 바라보았다. 당장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원인조차 알아볼 생각이 없었다니, 무심한 것도 저 정도면 병이 아닐까 싶었다.
“아무튼 신들이 그런 실수를 할 때가 있다니 정말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군. 특히 정령왕의 탄생 같은 특별한 일은 과실을 범하기도 힘들 텐데 말이야.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이전 생의 종족은 인간이었나 보지?”
“아, 응. 어떻게 알았어?”
“묘하게 행동이 인간 같았거든. 인간 종족은 상당히 많을 텐데, 그 사이에서 널 찾아낸 것도 용하네. 혹시 신과 친분을 쌓은 것도 그 일과 관계된 거냐?”
“뭐, 비슷해.”
“흐응…….”
라피스는 납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이해를 받는데도 불구하고 뭔가 찝찝한 이 느낌은 뭘까? 고백을 들은 건 둘 다 마찬가지인데 어쩐지 라피스에게선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걸 보면 내가 어지간히 그에게 신의가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찝찝한 심정과는 다르게 라피스는 의외로 순순히 말했다.
“좋아. 여성으로 인식되는 게 싫다는 말이지? 앞으로 좀 더 신경 쓰도록 할게.”
“헤에, 정말?”
“싫으면 관두고.”
“아, 아냐!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황급히 대답하자 라피스는 피식 웃었다. 사실 어느 정도는 놀림도 감수할 예정이었는데 이렇게 쉽게 내 입장을 헤아려줄 줄이야. 정말 예상 밖의 모습이었다.
“참, 그러고 보니 난 널 뭐라고 부르면 되지? 엘퀴네스라고 대놓고 부를 순 없잖아. 보아 하니까 트로웰도 그렇고 다들 널 엘이라고 부르는 것 같던데. 애칭이냐?”
“응, 맞아. 트로웰이 지어준 거야.”
“흐응, 그렇군. 그럼 나도 엘이라고 할게.”
“좋아.”
고개를 끄덕이자 라피스는 다시 웃으며 내 머리를 툭툭 쓰다듬었다. 잠시 후 그는 가볍게 일어나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
“눈이 그쳤군. 내일 바로 출발할 수 있겠어.”
“그래? 다행이다.”
그의 말대로 조금 전까지 펑펑 내리고 있던 눈이 어느새 그쳐 있었다. 창문을 열자 한기를 가득 머금은 바람이 빠르게 들이닥쳤다. 눈이 내린 탓에 더 온도가 내려간 것 같았다. 그때 잠시간 바깥을 바라보던 라피스가 문득 뜬금없는 질문을 던져왔다.
“근데 너 말이다. 신 말고 또 친분을 쌓은 녀석이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예를 들면 마족이라든가.”
“마족은 구경해본 적도 없는데?”
“그래? 그럼 말고.”
의도를 알 수 없는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라피스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날의 밤이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 * *
휘이잉.
세찬 바람이 일 때마다 나무숲이 크게 전율했다. 라피스는 쏟아지는 한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사람이 모두 잠든 깊은 시각이었다.
이미 엘과 이사나는 한창 단꿈에 빠져 있었다. 일반적이라면 함께 잠들었어야 할 그가 이 시각에 나와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엘 일행과 마주쳤을 때부터 느낀 기묘한 감각 때문이었다. 잠시간 미간을 좁히고 있던 라피스가 입가를 살짝 비틀었다.
“시커먼 마기가 두 개…… 엘 녀석, 달고 다니는 게 뭐가 이렇게 많은 거야? 이래서야 유희라고 해도 상당히 피곤하겠는걸.”
그러나 투덜거리는 말과는 다르게 그의 눈동자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빛나고 있었다. 처음엔 엘이 이들의 존재를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는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그 충격적인 고백을 듣고 나니 어쩌면 그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쪽으로 생각이 굳어졌다.
마족이라는 단어를 대놓고 언급했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걸 보면 그의 예상대로임이 분명했다. 이 정도로 절제된 기운은 어지간히 감각을 개방하지 않고서는 알아채기 힘든 것이었으니까. 그만큼 저편의 기운 운용이 뛰어나단 소리였지만 엘 본인의 능력 자각이 더디다는 의미기도 했다. 아마도 지금까지는 함께 있던 트로웰이 교묘하게 그들의 시야를 방해해 왔을 터였다.
‘인간의 전생을 가진 정령왕이라…… 어쩐지 지나치게 성격이 특이하더라니. 한동안 지켜보는 재미는 있겠어. 그나저나…… 이 정도로 짙은 기운이라면 공작급은 될 것 같은데. 마계의 공작이 둘씩이나 움직인다? 게다가 왜 공격은 하지 않고 주시만 하고 있는 거지? 탐색전이라도 벌이는 건가?’
상대방의 의도는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지금 엘의 주위가 결코 안전하지는 않다는 것. 그것은 결국 평탄한 유희 생활은 애초에 글렸다는 말과 다름이 없었다. 라피스는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나직이 투덜거렸다.
“마계 공작이 움직일 정도면 마왕도 배후라는 소린데…… 거참, 태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주제에 왜 이렇게 사방에 거물급이 꼬이는 거야? 벌써 신계에 아는 신까지 만들어 놓질 않나, 트로웰의 신임을 한몸에 받고 있질 않나. 다른 의미로 만만하지 않은 녀석인지도 모르겠어.”
자그마치 3천 년을 기다려 손에 넣은 존재다. 그저 단순한 소유욕이라고 해도 이쯤 되면 애틋한 마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에게 엘은 더욱 특별하고 애착이 가는 존재였다. 더구나 도도하고 오만하던 전대에 비하면 상당히 다루기 쉬운 편이다. 이러니저러니 따지는 것은 많아도 결국 마음이 약한 성격인 것도 마음에 들었다.
모처럼 만에 흡족한 시간이었다. 그런 만큼 그는 자질구레한 방해에 휘말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걸어오는 싸움엔 기꺼이 응하되, 아예 뿌리까지 뽑아버릴 작정이었다.
“어디 보자. 굳이 지금 나서서 초를 칠 필요는 없겠지? 저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모르니 우선은 지켜보는 편이 좋겠군. 저들 쪽에선 아직 내 정체가 뭔지도 파악 못 하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이야.”
혼잣말로 중얼거린 그는 이내 느긋한 걸음으로 몸을 돌렸다. 지루한 듯 기지개를 켜는 그의 입가엔 회심의 미소가 슬며시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바로 같은 시각. 멀찍이서 그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는 한 쌍의 남녀가 있었다. 마도 공작 데르온과 세르피스였다. 그들은 여관으로 돌아가는 라피스의 뒷모습을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람이 활동하지 않는 야심한 시각이다 보니 이런 때 돌아다니는 그의 모습이 상대적으로 더욱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별다른 기색 없이 다시 돌아가는 것에 안심했지만 그들은 한동안 경계의 눈으로 살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이미 자신들의 정체가 발각되었을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만큼 라피스의 행동이 태연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야밤에 홀로 산책이라니, 꽤 취향이 특이한 인간이 일행으로 붙었네.”
황당한 표정으로 세르피스가 중얼거리는 말에 데르온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인간이 아닐 거다.”
“그게 무슨 말이야, 데르온?”
“너도 조금 전에 봤으면 알 텐데? 사람들이 많은 장소인데도 누구도 알지 못하게 대단위 마법을 펼치더군. 그렇게 정교하게 마나를 다루는 솜씨는 마계에서조차 흔치 않아.”
“흐음, 그런가? 뭐, 제법 수준급이긴 했지만.”
“그 정도가 아니야. 인간의 능력으론 불가능한 경지다. 게다가 저치와 합류한 이후부터 황제 일행의 윤곽이 더 흐려졌어. 멀리 떨어져 있다지만 고작 이 정도 거리에서 우리가 저들의 동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나?”
그제야 세르피스 역시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얼굴을 굳혔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러네. 그럼 저 녀석의 정체가 뭔데?”
“그것조차 알 수가 없으니 문제라는 거다. 아무튼 평범한 놈은 아니야.”
어쩌면 황제의 일행들 중에서 가장 위험한 상대일지도 모른다. 데르온은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말을 꿀꺽 눌러 삼켰다.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고 손이 떨려왔다. 정령왕이 황제를 돕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충격을 받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어차피 정령왕은 그들이 전부 힘을 합쳐도 감히 상대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렇기에 섣불리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물론 황제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언젠가 정령왕을 상대해야 하는 순간도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반드시 죽음으로 이어지겠지만 그것이 두렵지는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저 붉은 머리의 남자는 다르다. 정령왕의 힘이 실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것을 헤매는 기분이라면, 그에게선 뚜렷한 호기가 느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이 강렬한 생명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잠자고 있던 호승심을 몹시 자극하는 힘이었다. 만약 적으로 만난 게 아니더라도, 데르온은 그를 발견하는 순간 죽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애써 살의를 억눌렀다. 비단 은밀히 주시하라는 마왕의 명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충동이 일었지만, 몸이 나서려는 걸 본능이 저지했다. 시선이 마주칠 뻔한 것을 반사적으로 피한 뒤 데르온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거야 마치 웅크린 맹수 앞에 선 사냥감이 된 심정이었다. 마도 공작인 자신이 이런 기분을 느끼다니. 그로서는 이 모든 것들이 생경하기만 했다.
마족은 타고난 전투 종족이다. 그들의 육체는 인간은 감히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견고했으며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마족들이 우글거리는 마계에서도 그는 언제나 포식자의 위치였다. 마왕과 일부 공작들을 제외하면, 그를 위협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런데 미개인들이나 산다고 여기던 중간계에서 설마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이야. 어이없긴 했지만 오히려 그는 기분이 좋아졌다. 마족 특유의 파괴 본능이 끓어올랐기 때문이다. 자신의 발밑에서 피투성이로 나뒹구는 남자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전신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는 탐욕스러운 눈으로 황제 일행이 머무는 여관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저자를 죽이는 것이 마왕이 되는 것보다 더 짜릿할지도 모르겠어.”
“어머? 그런 말을 함부로 해도 괜찮아? 그럼 마왕 자리는 내가 차지해버린다?”
“마음대로.”
어차피 세르피스의 힘으론 마왕의 자리를 차지하는 건 역부족이다.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 데르온은 다시금 여관으로 시선을 돌렸다. 붉은 머리칼을 지닌 남자의 모습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지만 아직도 그의 눈앞엔 마지막으로 보았던 남자의 오만한 눈빛이 자꾸만 어른거리고 있었다.
남자의 정체는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리 강해 봤자 결국 중간계의 생물일 뿐이다. 그의 상상에서 마족인 자신이 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겠지만 결국 패배하는 것은 붉은 머리칼의 남자일 것이다. 데르온은 그렇게 확신했다.
‘네 상대는 나다. 가장 고통스럽게 죽여주마.’
결전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이 오늘만큼 지루했던 적이 있었던가? 다가올 그날을 생각하며 데르온은 비릿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