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bracing Magic RAW novel - Chapter (101)
마법을 품다 (101)
운이 좋았다. 벽 너머의 상태로 봐서는 몇 달이면 여기까지 용암이 넘어올 것 같았다. 바닥에 수북하게 쌓여 있던 책의 운명은 굳이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집중해서 한쪽 벽면을 모두 살폈다. 10시간 이상은 지난 느낌이었다.
“다른 쪽은 같구나.”
한쪽 면을 봤더니, 다른 쪽은 볼 필요가 없었다. 모두 같은 마법진이 사면에 새겨져 있었다.
강화는 벽 자체에, 마나 흡수는 외부에서, 상태 보존은 내부로, 방어는 안팎으로 작용하는 마법이었다. 그 외에 복원을 뜻하는 마법진도 있고, 여전히 파악이 안 되는 마법진도 많았다.
어찌 됐든 벽에 새겨진 마법진을 머릿속에 다 넣어 두긴 했다. 모르는 마법진과 룬어는 나중에 기억을 떠올리면서 연구해 보면 되었다.
“밖에서 들어오는 기미는 안 보이고.”
이제 남은 일은 하나였다. 로딘은 사면의 마법진을 보며, 몇 군데를 머릿속에 새겼다.
“벽을 무너뜨린다.”
물리적으로 벽을 무너뜨린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벽에 새겨진 마법진 중에 마나를 흡수하고 저장하는 마법진을 없앤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되면 과거 매튜가 당했던 때처럼 어마어마한 마나가 사방으로 퍼져 나갈 것이다. 로딘은 마법진을 살짝 건드려서, 방향만 안쪽으로 바꿀 생각이었다.
“7서클은 안되어도, 그 직전까진 닿을 수 있을 거야.”
매튜의 몸속에 쌓인 마나를 마력으로 바꿔 쌓으면서 한순간에 큰 성장을 이뤘다. 평소라면 1년은 연공실에서 살아야 할 정도의 마력을 한 번에 얻었다.
그런데 이 공동의 벽에는 매튜의 몸속보다 훨씬 많은 마나가 응축된 채로 쌓여 있었다. 그때보다 더 빠른 성장도 가능했다.
다만 7서클로 바로 올라가는 건 어려웠다.
3서클, 5서클, 7서클은 마력만 쌓는다고 닿을 수 있는 경지가 아니었다. 7서클에 오르기 위해서는 특별한 깨달음과 경험이 필요했다.
특수군 위원회의 크레이트 위원장은 끝끝내 한 끗을 채우지 못해서 결국 6서클로 늙어 죽었다. 그 외에도 수많은 6서클 마법사들이 그 한 걸음이 부족해서 닿지 못하는 경지가 7서클이었다.
“깨달음까진 모르겠지만, 경험은 필요할 테니까.”
마법사에게 깨달음은 모호했다. 사소하게 얻을 수도, 특별한 일을 해야 얻을 수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7서클에 필요한 깨달음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고, 어떤 사람은 깨달음이 대체 뭔지도 모른 채 죽는다.
하지만 하위 서클 마법사로의 경험 없이는 상위 서클로 올라갈 수 없다는 건 확실했다. 로딘이 7서클 마법사가 되려면 6서클 마법사로서 경험이 어느 정도는 쌓여야 했다.
“카리스, 제나. 안으로 들어가 있어.”
[예. 마스터.] [또 불러 주세요, 마스터. 조심하시고요.]카리스와 제나는 목걸이 안으로 들여보냈다.
카리스와 제나는 마나로 움직이는 전투 인형이다. 좁은 곳에서 마나 폭풍이 둘의 기능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
혼자 남은 로딘은 사면의 벽을 느긋하게 돌았다. 그리고 벽의 마법진 곳곳을 확인하고, 몇 군데를 강제로 잘라 냈다.
“이제 여기만 남았는데.”
사면 중 삼면의 마법진을 건드렸다. 한 면만 남은 상태인데, 그 한 면의 마법진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면의 벽이 감당해야 할 마나를 혼자서 흡수·저장하려니 한계가 온 것이다.
“시작하자.”
남은 한 면의 마법진마저 조작했다.
벽 전체가 불안하게 흔들리더니, 이내 어마어마한 마나를 공동의 내부로 쏟아 냈다. ‘저장’을 뜻하는 마법진의 기능을 정지시켰기 때문이다.
“으윽!”
감당할 수 없는 마나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머리가 멍해지더니, 몸이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안 돼.’
순간적으로 아득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았다. 이러다가는 몸뿐 아니라 정신도 붕괴할 것 같았다.
매일 두 번 이상 해 오던 마력 연공법의 룬어를 무의식적으로 읊조렸다. 양팔은 축 늘어뜨린 채, 손가락으로는 연신 룬어를 그렸다.
‘수인법. 수인법.’
머릿속으로 되뇌며 손가락에 좀 더 집중했다. 물론 입으로도 연신 룬어를 영창했지만, 지금은 수인을 정확하게 그리는 게 더 중요했다.
‘좀 더.’
마나는 폭풍처럼 몸속을 파고들었다. 몸이 가득 채워졌는데도 바깥의 마나는 더 들어오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었다.
‘빠르게.’
마나를 빠르게 움직였다. 수인의 도움으로 마나를 유도하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몸 전체를 휘돈 마나는 머리를 찍고 아래로 내려와 마력으로 변했다. 순식간에 6개의 서클에 골고루 흩어져, 기존의 서클을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또.’
아직 마나는 많았다. 몸 바깥에 있는 엄청난 양의 마나가 탐욕스럽게 육체를 노리고 있었다.
잔뜩 들였다가 마력으로 변환하기를 서너 차례.
더 기다리기 지친 걸까. 순서를 기다리는 듯하던 마나가 일제히 몸으로 파고들었다.
“크윽!”
몸이 터질 것 같았다. 압력과 압박감에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운다인.’
반사적으로 운다인을 불렀다. 운다인은 딱히 명령을 내리지 않았음에도 바라는 걸 바로 알아챘다.
운다인은 로딘과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물을 만들었다. 최대한 많은 물을 만들어서, 여기저기 마구 쏴 댔다. 그렇게 해서 로딘의 마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더, 더.’
로딘은 마나를 받아들여 마력으로 쌓았다. 운다인은 최대한 힘을 써서, 로딘의 마력을 끌어 썼다.
운다인이 사용한 마력은 어디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힘을 사용하고 나면 잠깐 잠을 자는 것뿐이다.
마력 일부를 재우고, 로딘은 계속 마나를 마력으로 바꿨다. 바꾸고 또 바꾸기를 수십 번 반복하니, 어느새 몸이 자동으로 반응했다.
입은 룬어를 말하고, 손가락은 룬어를 그렸다. 사람이 숨을 쉬는 게 당연한 일인 것처럼 마나를 마력으로 바꾸는 연공 행위 역시 당연한 일이 되었다.
시간의 흐름을 잊었다. 밤과 낮이 수없이 반복되었다는 것만 어렴풋이 짐작되었다.
감정이 뒤죽박죽이었다. 너무 불행해서 이대로 생의 끈을 놓을지 몇 번이나 고민했고, 때로는 너무 큰 행복에 현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급격한 감정의 변화를 여러 차례 반복하면서, 육체와 정신은 점점 마모되었다.
이젠 한계라고, 도저히 버틸 수 없다고 포기를 떠올릴 무렵. 그간 맺은 인연들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엄마보다 더 따듯했던 누나 시에라.
벌써 10년이 흘렀는데, 어떻게 변했을까? 그때의 곱던 모습이 아직 남아 있을까?
먼저 중앙 대륙으로 넘어온 코리.
무사히 도착한 걸까? 대륙 최고의 정령사가 되겠다는 녀석인데, 과연 명성을 떨치고 있을까?
헤들러와 랜트도 생각났다. 녀석들은 크세르 위원, 하비뇽 위원과 함께 배를 탔을 텐데. 문제가 생기진 않았을까? 지금은 자유를 되찾았을까?
래리와 비앙카도 떠올랐다. 이 녀석들은 아직 어렸다. 자신이 보살펴 주지 않으면 세상에 이용만 당할지도 몰랐다. 몇 년은 더 자신이 옆에 있어 줘야 했다.
맛있는 요리를 해 주는 마가렛과 든든하게 집안일을 찾아서 하는 매튜. 기껏 고용해 놓고 책임감 없이 떠나 버리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불끈.
의지를 다시 세웠다. 룬어를 다시 영창했고, 손가락을 열심히 움직였다.
긴 시간이 흘렀다. 정확하게는 모르지만, 수백 년은 흐른 느낌이었다.
“후우우.”
로딘의 입에서 탁한 공기가 터져 나왔다. 꽉 감았던 눈도 서서히 떠졌다.
“드디어 끝났구나.”
힘든 시간이었다. 그래서 더 뿌듯했지만, 같은 경험을 두 번 하고 싶지는 않았다.
“끄으응, 엉망진창이군.”
자리에서 일어나며 주변을 돌아봤다. 몸에서 떨어져 나온 것들이 사방에 쓰레기처럼 널려 있었다.
“희한한 상황이 벌어졌네. 아직도 6서클인데, 신체가 재구성되다니.”
서클은 늘어나지 않았다. 전보다 더 힘차게 돌고 있지만, 여전히 6개였다.
그런데 신체가 재구성되었다. 육체만큼은 가히 완벽해졌다.
게다가 서클을 이루는 마력의 밀도가 엄청나게 높아졌고, 또 양이 늘었다. 서클만 6개일 뿐, 서클 하나하나에 담긴 마력의 힘은 대마법사 이상이었다.
“나쁜 건 아닌데, 힘 조절에 신경을 더 써야겠어. 운다인?”
―히.
“이건 또 뭔 반응이야? 아무튼 운다인, 시간이 얼마나 흘렀어?”
물로 이루어진 운다인이 한 손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그리고 손가락 개수를 하나씩 추가하기 시작했다.
운다인은 모두 12개의 손가락이 달린 이상한 손 모양을 만들고는 흐뭇하게 웃었다. 마치 자기 작품에 만족한 예술가처럼.
“12일이라. 그전에도 이틀을 보냈으니, 14일이군.”
그르르!
그때 벽이 흔들리더니, 먼지가 후드득 쏟아졌다.
벽 아래쪽에 쌓인 먼지가 제법 많았다. 연공이 끝나기 한참 전부터 흔들림이 있었던 모양이다.
“오래 못 버티겠네.”
벽이 무너지는 순간 벽 건너편에 있는 용암이 이곳을 덮칠 것이다. 6서클 마법사인 로딘도 용암에 빠지면 살아남기 어려웠다.
그래도 당장 무너지진 않을 것이다. 벽을 살짝 밀어 봐도, 아직은 견고하게 버티고 있었다.
마나를 저장하는 마법진만 없앴을 뿐, 아직 마나를 흡수하는 마법진은 남아 있었다. 흡수한 마나를 바로바로 방어로 돌리면, 몇 달 정도는 용암을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얼굴이 이상하게 바뀐 건 아니겠지?”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이질적이었다. 신체가 재구성되면서 목소리가 변한 것이다.
“미러 이미지.”
마법을 사용해 얼굴도 확인해 봤다. 아주 조금 여성스러움이 줄어들었다. 여전히 여자로 착각할 얼굴이긴 하지만, 남자다움이 한 스푼 정도 더해졌다.
“얼굴은 만족스럽고. 용건이 끝났으니, 이제 돌아가긴 해야 하는데.”
밖에 있는 자들이 문제였다. 왠지 아직도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만반의 준비를 한 이들과 부딪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1명은 아닐 테고. 분명히 단체일 텐데, 어디일까? 아니, 몇 명일까?”
혹시나 하는 생각에 벽면을 좀 더 꼼꼼하게 살폈다. 이곳에서 나가는 다른 길이 있는지 살펴본 건데, 아쉽게도 탈출로 같은 건 없었다.
“그냥 나가야 한다는 건데.”
마냥 이곳에서 살 수는 없었다. 자신만 기다리고 있을 동생들도 생각해야 했다. 마가렛이 챙겨 준 음식도 무한하진 않으니, 위험하더라도 나가야 했다.
“일단 좀 먹자. 배 좀 채우고.”
* * *
페나일 장로는 슬라본의 탑주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건 사람을 보내라는 뜻이 아니라, 직접 와서 도와 달라는 의미였다.
슬라본의 탑주인 베이너스는 대외적으로 에크로트 마탑의 탑주였다. 실력은 6서클로 지방의 작은 마탑치고는 대단하지만, 대륙 전체에서 주목받는 강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베이너스의 실제 실력은 무려 8서클 마법사. 7서클을 넘는 마법사는 없다는 현재의 상식을 무너뜨린 존재였다.
바로 그 인물에게 연락이 왔다.
“장로 페나일입니다. 지금 어디쯤인지?”
―페나일 장로. 얼굴이 안 좋은데,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슬라본의 탑주 베이너스가 페나일 장로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보는 것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나이 차이가 꽤 컸다.
페나일 장로는 올해 66세. 장로 중에서는 평균 수준의 나이였다.
하지만 슬라본의 탑주인 베이너스는 올해 47세밖에 안 됐다. 7서클도 아니고 무려 8서클의 마법사임을 생각하면, 놀라울 정도로 젊은 나이였다.
“강제로 문을 열다가 공격받았습니다. 회복이 더뎌서…… 그래도 차츰 나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마도 제국의 공격은 무서운데. 몸조리 잘하세요. 아! 도착 시간이요? 자정 전에 도착할 것 같네요.
“아! 그렇습니까? 준비하고 기다리겠습니다.”
페나일 장로의 태도는 깍듯했다. 나이 따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듯, 비굴하기까지 한 모습이었다.
―준비는 됐어요.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길만 깨끗하게 열어 주세요. 아시죠? 제가 몸이 더러워지는 걸 싫어한다는걸.
“알고 있습니다. 깨끗하게 정리해 뒀습니다.”
베이너스 탑주의 유일한 단점이 결벽증이었다. 몸에 묻은 작은 오염도 용납하지 못했다.
길을 가다 누군가와 부딪혀 티끌이라도 묻으면 최대한 빠르게 몸을 씻어야 했다. 그리고 그날 안으로 몸에 오염을 묻힌 상대를 반드시 죽였다.
―페나일 장로의 준비성은 이미 알고 있지요. 그러면 곧 뵙겠습니다.
“예. 마스터.”
마법 통신을 끊고 페나일 장로가 의자에 늘어졌다. 잠깐의 대화로 진을 다 빼 버린 모습이었다.
“후우, 힘들군. 그래도 탑주께서 오시면 문은 쉽게 열 수 있겠지.”
탑주 베이너스는 8서클 마법사. 7서클 마법사와는 격을 달리하는 존재였다. 공격 마법의 위력이든, 공격 속도든. 페나일 장로보다 월등했다.
하지만 페나일 장로가 탑주 베이너스를 부른 건 위력적인 8서클 마법 때문이 아니었다. 금속제 문의 반응을 보건대, 8서클 마법사라 하더라도 쉽게 열 수 없는 아티팩트였다.
그런데도 탑주를 소환한 이유.
그건 탑주인 베이너스가 마도 제국 황실의 후손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마도 제국 시절의 아티팩트나 유적은 베이너스 탑주 앞에서 자연스럽게 해제되곤 했다.
“분명히 마도 제국 황실과 관계된 곳일 거야. 확실해.”
콰아아아아아앙!
그때, 페나일 장로의 귀에 청각을 마비시킬 정도로 강렬한 소리가 들려왔다. 귀에서 위잉 하는 이명이 울릴 정도였다.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