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ergency Exit to Freedom RAW novel - Chapter 15
15]
이른 새벽 인적 없는 부둣가에 검은 자동차 두 대가 나란히 서있었다. 이제 겨우 해가 떠오르려는 듯 주위에 어렴풋이 밝은 기운이 살아나고 있었고 겨울이 성큼 다가온 듯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옷깃을 여밀 만큼 차가워져있었다.
“그래서 발을 빼시겠다?”
“처음부터 발을 담근 적도 없소.”
“훗. 자의든 타의든 당신은 이미 공범이오.”
“아니 난 빠질 것이오. 만약 당신이 여기서 일을 끝내준다면 돈은 다시 당신에게 돌려줄 것이고 문서는 태우겠소. 하지만 계속해서 나를 협박하거나 일을 진행하려 한다면 돈과 문서 모두 군법에 의해 처리될 거요.”
박용섭은 여유 있게 웃으며 옆자리에 앉아있는 유철웅 준장을 바라보았다.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여유롭게 하는지 몹시 궁금하군.”
“훗. 여유? 아마 나 자신이 결백하다는 이유일 거요.”
“글쎄. 당신 말대로 군법이나 법에 호소하게 된다면 난 파멸이겠지. 하지만 당신은 무사할까? 유철웅 준장. 준장 계급은 혼자 힘으로 달았나? 그리고 준장에서 그만하고 제대할 거요?”
“이것 보시오. 박의원. 우리 말은 바로 합시다. 내가 당신에게 청탁을 넣었고 준장 계급을 다는데 크게 영향력을 행사해 준 것은 사실이오. 허나 그게 다는 아니오. 이미 승진 리스트에 내가 포함되어 있었고 거기에 의원은 살짝 힘을 실어준 것뿐이란 말이오. 그리고 난 준장에서 제대할 생각이 없소.”
박용섭은 자신만만해 하는 준장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당신이 말한 그 소령이 사위가 되기로 한 모양이군?”
유철웅 준장은 그의 질문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박용섭은 이를 악물었다.
이제 새 동아줄을 잡았다 이거지………후후……..준장. 당신 혼자 발을 빼시겠다. 그렇게는 안 되지. 죽으려면 다 같이 죽던가………살려면 다 같이 돈 많이 벌고 완전한 악인이 되어야지. 매국노가 되어서라도.
이미 여러 나라에서 접촉을 해왔다. 서로 많은 돈을 내겠다 하고 있었다. 물론 정보를 사겠다는 모두에게 팔 것이다. 그리고 받은 돈을 들고 이 나라를 떠나 평생을 호화롭게 살 수 있었다. 해군의 군사력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만들어진 그 기밀문서. 차세대 잠수함과 만약의 경우 전쟁 발발 시 해군의 움직임과 미군의 지원력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있는 전쟁 시나리오까지 들어있는 1급문서였다. 그 문서 하나면 엄청난 부를 손에 쥘 수 있었다.
몇 달전 파일로만 저장되어있던 기밀사항이 해군참모총장과 작전사령관에게 최종 결재를 받기 위해 문서로 출력되었고 그 문서가 기밀문서함으로 들어간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안 순간부터 박의원은 모든 계획을 짜기 시작했고 이제 문서만 빼내면 되었다. 문서를 사겠다는 조직도 나섰고 돈이 수중에 들어오면 한국을 떠날 만반의 준비도 끝났다.
그런데 저 놈이 망치려하고 있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1급비취인가를 가진 행정병을 만나고 설득할 사람은 준장뿐이었다. 이제 한 번의 만남을 가진 행정병을 다시 만날 기회마저도 박용섭 자신에게는 없었다.
박용섭은 준장을 향해 비열한 웃음을 내보였다.
“좋소. 어쩔 수 없지. 준장이 그만두겠다면 나도 말릴 수 없지. 내가 강요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럽시다. 없었던 일로 합시다……….그리고 축하하오. 소원대로 그 소령을 사위 삼게 되었으니 준장의 앞길은 탄탄대로겠군. 그 소령의 부친이 공군작전사령관이라고 했던가? 훗. 아주 큰 대어를 낚았소.”
유철웅 준장은 너무 쉽게 포기하는 박용섭 의원을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았다. 하지만 더 깊이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포기해 준다면 모든 골치 아픈 일은 사라지고 자신은 이제 정지혁 소령을 사위로 맞고 그 배경을 등에 업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럼 내가 가지고 있는 문서와 돈은 어떻게 했으면 좋겠소?”
“흠. 돈은 그냥 준장이 가지시오. 처음에 말한 것처럼 준장으로 승진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해 준장이 주었던 돈의 일부를 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하시오. 그리고 문서는………내가 보는 앞에서 함께 태웁시다. 그게 가장 깨끗하지 않겠소?”
“좋습니다.”
“그럼 당분간 물건은 준장이 가지고 있는 걸로 하고 내 다시 연락하겠소.”
유철웅 준장은 의외로 얘기가 쉽게 풀리는 지금의 상황이 무척 반가웠다. 무엇보다 이로서 승냥이 같은 박용섭 의원과의 인연을 끊을 수 있어 무엇보다 기뻤다.
박용섭은 유철웅 준장이 탄 차가 왔던 길을 되돌아 부두를 떠나자 밖에 대기하고 있던 비서를 불렀다.
“네. 의원님.”
“준장의 딸에게 사람을 붙여.”
“딸 말씀입니까?”
“그래. 내가 지시하면 어디에 있든 잡아들일 수 있도록.”
“네. 알겠습니다.”
*
지혁은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나무상자들 중 한곳에 걸터앉아 박상원 중위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지혁이 이끄는 제 3팀은 부두가의 사용하지 않는 창고를 하나 임대해 비밀 아지트로 쓰고 있었다.
“준장과 박의원의 통화내용을 도청한 녹음테입이 확보되었고 박의원이 준장에게 송금한 통장 내역서도 입수했습니다. 그리고 제주도에서 박의원이 준장에게 물건을 건네는 장면을 찍은 사진까지 모든 증거자료가 확보되었습니다. 이제 물건만 찾으면 박의원과 준장은 도망칠 구멍이 없습니다.”
“1급비취인가를 가진 행정병은?”
“만나봤는데 별다른 이야기 없이 저녁만 먹었답니다. 국회의원을 소개받는 자리라 이상한 생각은 들었지만 다른 낌새는 눈치 채지 못했답니다. 아마도 그날의 만남은 서로 얼굴을 익히고 행정병이 자신들의 요구를 들어줄 인물인지 정도를 파악한 것 같습니다. 다시 준장으로부터 연락이 오면 우리에게 연락한 후 자연스럽게 만남을 가지라고 일러두었습니다.”
지혁은 박중위를 보고를 들으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물건이 없었다. 이미 모든 확실한 증거자료가 확보되었지만 물건은 더욱 확정적인 증거자료가 될 것이다. 물론 현재 잠수함을 타고 있는 그 행정병의 증언이 있겠지만 그 또한 물건이 실제로 존재해야했다.
어디로 갔을까………? 서울 청담동의 박의원의 자택, 그리고 별장에도 유철웅 준장의 서재에도 없었다. 그렇다면 물건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박상원 중위는 아무 말 없이 생각에 잠겨있는 정지혁 소령을 보았다. 그날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분명 준장의 딸이 무언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들을 보고도 그렇게 궁금하지 않은 얼굴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태연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공범인가……..? 그녀 또한 이 일에 관여된 또 다른 공범일 수도 있었다. 자의든 타의든 아버지의 강요에 의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가 이 사건을 전혀 모른다고 하기에는 그날 밤의 그 표정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박중위는 다시 대장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자신이 그녀를 의심하듯 그 또한 그녀를 의심하고 있을까?……….자신도 그날 밤의 그녀에게서 이상함을 눈치 채었는데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어쩌면 그녀의 손에 물건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때 갑자기 창고의 입구에서 약간의 인기척이 나더니 보초를 서고 있던 이강석 중사가 문을 열어주었다. 곧이어 최철균 소위가 안으로 들어와 정지혁 소령에게 거수경례를 붙였다.
“필승.”
“음. 어떻게 됐나?”
“네. 방금 전 준장이 부두를 떠나고 얼마 후 박의원의 차도 출발했습니다. 이건 그들의 대화 내용입니다.”
지혁은 최소위가 내미는 서류봉투를 받아들었다.
“들어보시면 알겠지만 준장이 박의원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발을 빼려하고 있습니다.”
최소위의 말에 지혁은 굵은 눈썹을 치켜 올렸다. 그리고 최소위의 보고가 이어졌다.
“둘의 대화로는 모든 계획을 없었던 일로 하자는데 합의를 했지만 뭔가 꺼림칙합니다. 준장이야 이해가 가지만 너무 쉽게 동의하는 박의원이……….”
뒷말을 줄이는 최소위의 말에 모든 대원이 동조하는 눈빛이었다.
“우선 모든 증거자료는 1부씩 카피를 한다. 원본은 나에게, 한부는 중장님께 드린다. 그리고 물건을 찾을 때까지 박의원과 유철웅 준장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말도록. 중위.”
“네. 소령님.”
“인원을 충원시켜 박의원의 별장 주위를 세세히 살피도록. 박의원이 무언가 일을 꾸미는 게 확실해.”
“네. 알겠습니다.”
*
정현은 온 몸이 뜨거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열이 올라 정신은 혼미해졌고 코와 입에서 새어나오는 숨결은 거친 호흡으로 뜨거워져있었다.
“하아. 하아.”
원룸에는 은영이 여름에 쓰지 못한 휴가를 내어 집으로 내려가고 정현 혼자뿐이었다. 도저히 집에 있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얼굴도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고 언제 그가 찾아올 지도 모를 집에 있고 싶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다시 그를 만날 자신이 없었다. 그를 만나지 않은 채 생각할 시간을 가져야했다. 어머니는 그런 그녀의 심정을 아는지 당분간 은영의 집에 있겠다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해 주었다.
뜨거운 호흡으로 입술은 바싹 말랐고 목이 말랐다. 하지만 열에 들뜬 멍한 정신에서도 차라리 육체의 아픔이 자신이 현실에서 겪어야 할 모든 고통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뜨거운 몸이 불타올라 자신의 몸을 흔적도 없이 태워버렸으면 하고 바랐다.
정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런 상태에서도 그가 그리웠다. 그의 품이 그리웠고 그의 다정함이 그리웠다. 자신을 바라보던 사랑이 가득한 그의 눈빛이 못 견디게 그리웠다.
어딘가에서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정현은 뜨거운 혀를 내밀어 마른 입술을 적시고 고개를 돌려 식탁위에 있는 자신의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휴대폰이 쉼 없이 울리고 있었다.
정현은 팔꿈치로 자신의 몸을 지탱하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어머니의 전화일지도 모른다. 전화를 받지 않으면 걱정을 하실 테고 그러면 내내 혼자 속을 태우며 괴로워하실 것이 분명했다. 정현은 겨우 다리를 침대 밑으로 내리고 흔들리는 몸을 가누며 한발 한발 식탁으로 향했다. 겨우 팔을 뻗어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대었다.
“하……네……..”
“!…………”
“하아……여보세요….”
“왜 그러지? 어디 아픈가?”
“!!………..”
“유정현.”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고 있었다. 거친 호흡을 내뱉는 그녀의 목소리에 전화기 너머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을 그가 보이는 듯 했다.
“……….괜찮아요. 감기예요.”
“………..지금 그리고 갈테니 기다려.”
“아니. 하아……..아니………집이 아니에요.”
“………그럼 어디지?”
그의 목소리가 불길하게 낮아졌다.
“………..”
“유정현!”
“…………..당분간 혼자 있고 싶어요. 그렇게 해줘요…….”
“빌어먹을!”
그가 거친 욕설을 내뱉고 있었다. 한동안 거친 숨을 내쉬며 숨을 고르던 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어디야?……..내가 갈 테니 거기가 어딘지 말해.”
화난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려왔다.
화내지 말아요………당신마저 나한테 화내지 말아요………당신은 그저 내게 다정하게만 대해줘요…….당신마저 내게 화를 내면 난 더 이상 설 곳이 없어……….
“미안해요………”
“정현……..”
그가 급히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지만 정현은 휴대폰의 전원을 꺼버렸다. 그리고 밧데리도 빼버렸다. 다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를 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지혁은 끊어진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 그녀가 앓고 있었다. 쉰 듯한 목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그녀의 몸 상태를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그녀가 떠나려하고 있었다. 분명 자신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혁은 두 눈을 꼭 감았다.
안 돼. 유정현………..너를 놓아주기에는 넌 이미 나에게 너무 큰 존재가 되어버렸다. 널 잃고 난 뒤의 나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지혁은 차키를 움켜쥐고 빠른 걸음으로 현관을 벗어났다.
*
“어디 있습니까?”
“휴……..이봐요. 소령……..”
“그녀를 사랑합니다.”
여진은 대문 앞에 우직하게 서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첫 만남에서부터 마음에 쏙 드는 청년이었다. 지금 저렇게 확고한 목소리로 자신의 딸을 사랑한다 말하는 그가 욕심났다. 만약…….만약 그가 남편과 연관된 사람만 아니었다면 주저 없이 딸을 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잊어요. 두 사람은 악연이에요.”
“정현이 생각입니까?”
여진은 슬픈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그 아이도 결심을 했어요. 소령이 놓아준다면 정현이도 좀 더 쉽게 소령을 잊을 수 있겠죠.”
“……………그럴 수 없습니다. 그녀를 놓아주는 일은 없습니다.”
“이것 봐요. 소령……..”
“그녀가 아픕니다.”
“!!……..무슨?”
“전화 목소리가 앓고 있는 목소리였습니다. 누군가 지켜 볼 사람이 있습니까?”
“아니………”
여진은 계속해서 통화가 되지 않는 딸을 떠올렸다. 어젯밤에도 통화를 시도했지만 딸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딥니까? 제가 가겠습니다. 가르쳐주시지 않겠다면 제 힘으로 찾을 수도 있습니다.”
여진은 갈등하고 있었다. 괜히 고집을 부려보았자 그가 찾으려 마음먹는다면 찾아낼 것이다. 이 작은 소도시에서 UDT/SEAL 대원이 마음만 먹으면 못할 짓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리고 그의 저 간절한 표정이 너무 슬펐다. 둘의 애절한 마음이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한번쯤………그래. 이번 한번만 마지막으로 만나게 해줘도 좋을 것이다. 두 사람에게도 정리할 수 있는 만남이 있어야했다. 다만 딸에게 그를 설득시킬 수 있는 용기가 있기만을 바랄뿐이었다.
여진은 자신에게서 원룸의 위치를 알아내자마자 서둘러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딸도 안쓰러웠고 딸을 사랑하는 그도 가슴이 아팠다. 무엇보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모든 이유가 자신의 남편이라는 것이 못 견디게 슬펐다.
*
정현은 멍한 귓속으로 어디선가 들려오는 벨소리를 들었다. 한동안 계속되던 벨소리가 그치고 곧이어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도 얼마가지 않아 멈추었다.
그리고 얼마 후 현관의 손잡이가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곧이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정현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은영이 돌아온 건가……..?
!!
정현은 흐린 눈 사이로 들어오는 그를 보았다. 잠겨있는 문을 열고 개선장군처럼 들어오는 그의 표정이 굳어있었다. 정현은 그런 와중에도 웃음이 났다.
풋. 그까짓 잠긴 현관문 따위가 그에게 무슨 문제가 될 것이라고………마찬가지로 자신의 마음 또한 꼭꼭 닫아 잠그고 이중 삼중으로 철통같은 방어벽을 치더라도 그에겐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더불어 그녀가 어디에 숨어도 그는 자신을 찾아낼 것이다. 지금처럼……….
그가 그녀가 누워있는 침대로 다가와 화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는 것도 잠시 얇은 이불을 꺼내어 그녀를 감싸고 가뿐히 들어올렸다. 그리고 아무런 망설임 없이 현관을 벗어났다.
정현은 그의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원룸을 빠져나온 그는 곧장 그녀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고 심한 몸살감기라는 의사의 진단에 링겔을 맞고 그의 아파트로 왔다. 아파트로 온 후 하루가 지나도록 그는 쭉 말이 없었고 그건 정현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무엇을 묻고 무엇을 답해야 할지 몰랐다……….그도 마찬가지리라. 그도 자신처럼 입 밖으로 내어 이 무서운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지도………
정현은 침실입구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그가 작은 쟁반을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죽이야. 먹어.”
정현의 자신의 무릎위에 놓여있는 하얀 쌀죽을 바라보았다. 하얀 쌀죽 한 그릇과 김치가 전부였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죽을 바라보며 정현은 불 앞에 서서 이 쌀죽을 끊였을 그를 떠올렸다.
죽을 바라만보는 정현의 손에 숟가락을 쥐어주며 그가 속삭였다.
“아무 생각 말고 먹고 푹 쉬어.”
“난………음……”
정현은 자신의 의도와 달리 갈라져 나오는 목소리에 목청을 가다듬으며 무릎위에 있는 쟁반을 옆의 탁자에 올려놓았다.
“…….당신이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요.”
정현은 물기 가득한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날 포기해요……….내가 당신을 포기했듯이……….”
“왜?”
정현은 고개를 번쩍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알잖아요?”
“뭘? 내가 뭘 알지? 내가 아는 건 넌 내 여자라는 것뿐이야.”
그가 악문 잇새로 내뱉듯 속삭였다.
“………그날 밤. 서재에서 당신이 무얼 찾고 있었는지 알아요……..우리 아버지가 어떤………”
“그만!”
그가 소리치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충혈 되어 있었다.
“………네가 뭘 알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널 포기하는 일 따위는 없어.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결혼할 거니까 그런 줄 알아.”
“훗. 범죄자의 딸과 결혼을………?”
“!!…………”
그녀는 비꼬듯 말하며 냉소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게다가 아버지가 원하는 건 나와 당신이 결혼을 하고 자신의 모든 죄를 덮어줄 당신의 대단한 배경을 이용하는 게 목적이죠. 그럴 수 있어요? 나와 결혼해 아버지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 줄 건가요? 아니면 범죄자의 딸과 결혼해서 불명예제대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군에서 나라를 팔아먹으려던 매국노의 딸과 결혼한 당신을 인정해 줄까요? 모른 체 해 줄까요?”
어느새 그녀의 볼 위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난 알아요………당신이 해군인 자신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당신은 군을 떠나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한동안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던 그가 몸을 돌려 침실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자신을 망치지 말아요. 그냥……..나 하나만 포기해요……..”
돌아선 그의 등에 대고 정현은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흐느끼며 속삭였다.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그들의 주위로 흐르는 슬픈 정적은 시간의 흐름마저 잊게 만들었고 그들의 현실에 고통의 무게를 더욱 크게 느끼게 하고 있었다. 드디어 굵고 낮은 목소리가 정적을 가르고 들려왔다.
“너 하나가 내 전부야. 너 하나 포기하면 내 전부를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의 목소리가 젖어있었다. 정현은 자신의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목 어딘가에 커다란 무언가가 꽉 막혀 목이 따끔거렸다.
“지금 날 애원하게 하지 마……….”
좀 더 후에……..나중에 너에게 애원할 것이다. 애원하고 빌게 될 것이다.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고 이해해달라고 빌 것이다.
지혁은 이를 악물고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지금은 그녀에게 애원할 수 없었다. 더 큰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자신을 떠나겠다하더라도 막을 수 없을 만큼 큰일…….유철웅 준장 그를 파멸시킬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를 자신의 손으로 파멸시킬 것이다……….
그때가 되면……..그때 그녀에게 애원할 것이다. 무릎 꿇고 빌 것이다. 그녀를 가지는 길이 군을 떠나야하는 길뿐이라면…….그 방법뿐이라면……….
지혁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것마저도 할 것이다!
*
정현은 사흘째 그의 아파트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가 해주는 죽을 먹고 그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아무생각 말고 그냥 쉬라는 그의 말에 순종적으로 따랐다.
가끔 그가 전화기를 들고 베란다 밖으로 나갈 때면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말하지 않으면 모를까………곧 다가올 파멸의 그림자는 짙고 어두웠다.
지금도 정현은 베란다 밖으로 나가 문을 닫는 그를 슬픈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중장님께서 왜 미적거리냐고 하신다. 어떻게 된 건가? 이미 모든 준비는 갖추었다고 하지 않았나?] “아직 물건을 찾지 못했습니다.”[크게 문제는 없잖나. 이미 처음 문서를 빼냈던 행정관의 증언이 확정되어 있고 거기다 1급비취인가를 가진 행정관의 증언까지 확보된 상태야. 이 정도면 충분해. 우선 중장님께서 보자고 하시니 내일 오전 9시까지 중장님 댁으로 와.] “알겠습니다.”
지혁은 대령의 전화를 끊으며 그녀가 있는 침실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녀를 혼자 두고 하는 잠깐의 외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몸은 거의 회복되었지만 그녀가 자신이 없는 사이 떠날까 두려웠다. 이런 식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그녀를 설득해야했다.
지혁은 베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가 있는 침실로 향했다.
!!
“지금 뭐하는 거지?”
정현은 그의 물음에도 아랑곳없이 자신의 옷을 가방에 넣었다. 자신이 병원에서 링겔을 맞고 있는 사이 그가 다시 은영의 원룸으로 가 자신의 짐을 가져왔었다.
그가 다가와 가방을 빼앗아 안에 있는 옷가지를 다시 꺼내기 시작했다.
“이러면 당신이 없을 때 말없이 떠날 거예요.”
“빌어먹을. 항상 떠난다는 말뿐이군!”
“!………”
그가 드디어 화를 터트렸다. 그가 그녀에게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처음부터 넌 날 떠날 생각뿐이었어. 아니. 넌 떠날 계획을 모두 세워놓고 날 만났지. 내게 제안을 했던 그 날도 넌 날 이용해 떠날 생각뿐이었어. 아닌가?”
정현은 놀란 눈으로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자신을 변명하기 시작했다. 그를 떠날 테지만……….그를 떠나더라도 그와 함께였던 시간들 모두가 가식이었다고 그가 믿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신이 오직 그를 이용했다고 생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자신의 사랑마저 거짓이라고 믿게 할 수는 없었다.
“아니에요…….당신이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런…….”
“얼마 전 네 남동생이 LA 한인 타운으로 떠났고 너 또한 여권과 비자를 완벽히 갖추고 있더군. 언제 떠날 생각이었지? 언제까지 날 이용할 생각이었어?”
“!…………당신이 어떻게……..? 날………날 감시했나요?……….그러는 당신은 언제부터 알았죠? 내가 떠날 거라는 걸 알았다면 왜 날 옆에 두었어요? 왜 내 제안을 받아들였죠……….?”
정현은 순간 무너지듯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침대 아래로 눈길을 떨어트렸다. 그를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하……..날 이용한 건 당신이었어. 당신 말대로 난 처음에 당신을 이용하려했어요. 정후를 직업군인으로 만들려는 아버지 몰래 정후를 제대시키고 미국으로 보내려고 당신을 이용했어요. 당신을 만나는 동안은 아버지가 그래도 정후에게 신경을 덜 쓸 것 같아서……..하지만 난……..당신을 이용하려고만 했는데………사랑 없는 아버지의 독재에서 벗어나고 싶었어요……..모든 사람을 구속하려 들고 억압하려고만 하는 아버지를 벗어나 꿈에도 그리던 자유로운 삶을 살아보고 싶었어요…………머리도 짧게 잘라보고 싶고 예쁜 미니스커트도 입고 싶었어. 머리카락에 물도 들여 보고 싶었고 밤늦게 친구들과 어울려 술도 먹어보고 싶었어요. 매 시간 계획대로 움직여야 하는 순간순간이 미치도록 갑갑해서 시간 같은 것 보지 않고 계획 같은 것 세우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다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그렇게 살아보고 싶었어.”
어느새 정현의 손등으로 뜨거운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내렸다.
“정후를 보내고 나도 곧바로 떠날 생각이었는데……..당신한테 빠질 계획 같은 건 없었어…….당신을 사랑할 계획 같은 건 없었다고!”
지혁은 비명을 지르듯 그에게 악다구니를 퍼붓는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놔요! 이거 놔. 당신이야말로 날 이용했어. 처음부터 아버지의 비밀을 알고 내 제안을 못이기는 척 받아들인 거야! 날 사랑한다고 거짓 맹세를 했어. 처음부터 모두 계획된 거야……..모두…….. ”
“아니야!……..빌어먹을……..아니야………”
그가 그녀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정현은 그에게 안긴 채 공허한 눈을 들어 맞은편의 벽을 바라보았다.
“나도 의심했나요? 그런 아버지의 딸이니 나또한 의심했겠죠? 그래서 뭘 알아냈죠? 아직 더 남았어요? 날 이용해야할 무언가가 더 남았어요?”
지혁은 그녀의 양팔을 붙잡고 자신의 품에서 떼어내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른 모든 사실을 의심하고 비난해도 내가 널 사랑하는 건 의심하지 마. 널 이용하는 목적이 다였다면 이렇게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아픔도 온몸의 피가 솟구쳐 오르는 슬픔도 느끼지 않겠지. 네가 떠난다는 말을 할 때마다 미칠 것 같은 두려움도 없을 테고……..널 의심한 순간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널 내 머릿속에 떨쳐내려고 노력했어. 하지만 매번 실패했지. 준장의 비리를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었어. 널 내 인생에서 밀어내기에는 네가 내 심장에 너무 깊숙이 박혔어. 이젠 널 잃으려면 내 심장도 함께 잃어야 해……….더불어 내 목숨까지도.”
정현은 눈물이 가득한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가가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그의 말을 믿었다. 그의 사랑을 한순간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는 억지를 부렸다. 그에게 왜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였냐고 억지를 부린 것이다. 그가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만 않았어도………..
정현을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그가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여주어서……….그래서 그를 사랑할 수 있게 되어서 너무나 다행이었다.
“사랑해요……….”
그의 목이 생명줄이라도 되는 듯 꽉 끌어안았다. 떠나고 싶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자르지 못해도 짧은 치마를 입지 못해도 좋았다. 오직 그의 옆에만 있을 수 있다면 자유 같은 것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었다. 이렇게 사랑하지만 않았어도………자신보다 더 그를 사랑하지만 않았어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하지만 자신보다 그를 더 사랑했다. 그래서 떠나야했다. 자신으로 인해 무너질 그를 볼 수는 없었다.
그가 그녀를 끌어안고 키스하기 시작했다. 그의 부드러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삼키며 그녀의 입가에 흐르는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의 입술에 간절함이 묻어났다. 그의 손길에서 절박한 무언가를 느꼈다.
그가 그녀에게 온 마음을 다해 키스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술에 눈가에 그리고 점점 아래로 내려가 그녀의 몸에 자신의 뜨거운 입술을 미끄러트렸다.
정현은 그의 단단한 몸이 자신의 몸을 가득 채울 때 깨달았다. 평생 그를 잊지 못할 거라고…….평생 그를 사랑한 만큼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을 거라고………
*
그의 품에 안겨있던 정현은 살짝 몸을 움직여 그에게서 돌아누웠다. 그러자 그가 뒤에서 그녀를 끌어안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잠이 안 오나?”
“……..내일 집으로 돌아갈게요……”
그녀의 팔을 쓰다듬던 그의 손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냥 있어. 여기 이대로 있기 힘들면 다른 곳에 가있어. 너만 좋다면 우리 어머니께 말씀드려서……..”
“엄마가 걱정 되요. 정후가 있는 곳으로 엄마라도 먼저 보내드려야 해요.”
“……..”
“내가 돌아가지 않으면 엄마도 떠나지 않으실 거예요.”
한동안 말이 없던 그가 조용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정현은 돌아누운 등 뒤로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내가 설득해서 보내드린다. 그러니 넌 그냥 있어.”
정현은 시트로 벗은 가슴을 가리며 그를 따라 조용히 일어나 앉았다.
“엄마만 보내드리고 나면 당신 말대로 할게요.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할게요…….”
그가 그녀의 얼굴을 감싸 자신을 보도록 했다.
“떠나지 않겠다는 뜻인가?”
“…….네.”
그가 가만히 그녀를 자신의 품속에 가두었다.
“아무 걱정도 하지 마. 모든 건 내가 알아서 할 거야. 넌 그냥 날 믿기만 하면 돼.”
“………네…….네…….”
정현은 그의 품에 안겨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잠시라도 평화와 안정을 주고 싶었다.
“……..그리고 어머니는……..그래. 네가 가서 보내드려. 대신 너에게 사람을 붙일 거다. 감시자가 아닌 널 보호해 줄 사람이니 싫다는 말은 하지 마.”
정현은 그의 품에서 살며시 벗어나 그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내가 당신 곁에 있으면 결과가 무엇으로 돌아올지 알죠? 아니. 대답하지 말아요. 당신도 알아요. 부정하지 말아요. 그럼에도………당신이 그 모든 걸 감수할 만큼 내가 가치 있는 존잰가요?”
“………난 내 목숨을 가치로 따지지 않는다. 유정현……….넌 내 목숨이야.”
정현은 그의 말에 결국 눈을 감고 말았다. 곧이어 다가온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내어주며 자신이 떠난 뒤에 그가 조금만 아주 조금만 괴로워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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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잘 보내셨나요……..이 글을 보고 계신 기혼님들은 모두 살아오신듯 하군요….ㅋㅋㅋ
저도 살아돌아오긴 했지만 심신히 피폐해져서 돌아왔습니다. 역쉬 시집은 시집입니다.
오늘과 내일 최대한 쉬며 피폐해진 심신에 힘을 주고 월욜부터 더욱 박차를 가해 완결을 짓도록 하겠습니다.
미혼님들 기혼님들 모두 그동안 먹은 거 이틀동안 정리해서 월욜부터 다시 다요트 돌입합시다. 아자! 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