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ergency Exit to Freedom RAW novel - Chapter 20
20] – 마지막회
지혁은 새벽의 구보 40km를 뛴 후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이번이 네 번째 받는 지옥주 훈련이었지만 힘든 것은 매한 가지였다. 하지만 지혁은 차라리 육체적으로 힘든 지금의 상황이 더 좋았다. 하루 종일 뻘밭을 구르고 갯벌, 시궁창, 물속에서 체력과 담력훈련을 받다보면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잠수, 사격, 폭파, 정찰 등 특전 기술을 익히는 과정에서 눈 깜짝하는 사이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 반복된다. 그 중 난이도가 가장 높은 잠수훈련은 수심 1백 30피트까지 잠수해 5분간 체류하는 훈련이었다. 압축공기를 사용하는 잠수의 경우 수심 1백 30피트가 제한선이다. 이 과정에서 고막이 터지고 체내의 질소가 마취현상을 일으켜 술 취한 것처럼 몽롱한 상황이 되기도 한다. 바로 이쯤 되면 많은 생도들이 탈락한다. 얼마 전 돌아온 무인도에서의 3박 4일간은 19주째 들어가는 훈련으로 생식주간이라고 불린다. 무인도에서 3박 4일간 생도들을 풀어놓고 일체의 음식물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러면 생도들은 교육과정에서 배운 대로 물고기나 나무뿌리, 파충류 등을 잡아먹으며 생존법을 터득하게 된다. 이런 훈련을 완벽히 통과하게 되면 생도들의 체력은 고도화 되고 교관들조차 생도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가 된다. 이미 3번의 지옥주 훈련을 완료한 전적이 있는 정지혁 소령은 어떤 교관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인간병기이자 철인이었다.
지혁은 지금처럼 식사를 하는 시간과 잠드는 시간만이 유일하게 그녀를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는 지옥주 21주째에 들어가는 지금보다 차라리 첫 주가 그리웠다. 지옥주의 첫 주는 거의 잠을 재우지 않는다. 식사는 갯벌과 물위에서 서너명이 70kg이 넘는 고무보트를 머리에 인 채 한다. 고무보트를 인 채 식사하는 이유는 밥을 주면 먹기보다 잠들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극기주를 거친 생도들의 눈빛은 비로소 독기와 살기를 내뿜고 인간병기로 재탄생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누우면 바로 잠들어 버려 그녀를 그리워할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 약 4주정도의 지옥주를 남겨둔 상태에서 이미 세 번의 지옥주를 거쳤던 지혁은 밤에 잠들지 않는 여유마저 가지고 있었다.
밤에 잠들지 않는 여유는 그녀에 대한 그리움으로 잠 못 이루게 만들었고 다음날 훈련에 지장을 주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다른 누구도 눈치 챌 수 없는 자신만이 느낄 수 있는 고충이었다.
지혁은 눈앞에 놓인 식판을 빠른 속도로 비우며 다른 생각이 머릿속에 파고들지 않도록 다시 훈련에 임할 준비를 했다.
“정지혁 소령님.”
지혁은 자신이 앉아있는 식탁 테이블 옆에 서있는 교관을 바라보았다. UDT 지옥주 훈련에 참가하는 사람의 계급은 장교부터 부사관, 그리고 일반 병들까지 다양해 아무리 교관이라도 생도에게 말을 놓지 않는다.
지혁은 자신을 부르는 그를 날카로운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지금은 공식적인 식사시간이었고 교관이 자신에게 볼 일이 있을 것이 없었다.
“방금 전 사무실로 소령님에게 전하는 급한 전갈이 와있습니다.”
“전갈?”
“네. 전갈의 내용은………”
지혁은 메모지를 펼치는 교관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입니다.”
!!
지혁은 교관의 말을 듣는 순간 모든 동작이 정지되었다. 날아갔던 새……….돌아와……..?
지혁은 갑자기 자신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자신을 부르는 교관을 뒤로 하고 해변에 세워져있는 종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그리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종을 세게 흔들었다. 독종, 인간병기라는 별명을 가진 정지혁 소령이 지옥의 24주를 중도 포기하는 순간이었다. 종소리가 울려 퍼지자 식사 중이던 모든 생도들이 누가 종을 울렸는지 보기위해 고개를 내밀었다. 겨우 4주를 채 남기지 않은 채 포기라니……근 20주를 잘 견뎌내고 포기를 하는 정신 나간 놈이 누군지를 확인하기 위해 생도들의 눈은 모두 커다란 궁금증을 나타내고 있었다. 종을 울린 생도가 정지혁 소령임을 확인한 생도들과 교관들은 놀란 숨을 들이키며 이 믿을 수 없는 상황을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지혁은 그들을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의 오직 하나 관심사는 돌아왔다는 그의 새를 향해 되도록 빨리 부대로 복귀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정현은 이제 며칠 후면 벚꽃 축제가 시작될 가로수 길을 천천히 걸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고 길 양옆에 세워진 벚꽃가로수가 하늘의 빛을 받아 눈부시게 하얀 빛을 발하고 있었다. 작은 꽃잎이 길 위에 흩뿌려져 마치 하얀 카펫을 밟는 느낌이었다.
정현은 두 눈을 감은 채 고개를 들어 하얀 꽃비가 자신의 얼굴에 닿는 느낌을 감상했다. 하얀색 작은 꽃잎이 하늘거리며 자신의 얼굴에 사뿐히 내려앉고 다시 바람에 날려가는 그 느낌은 마치 사랑하는 이의 손길이 부드럽게 자신을 쓰다듬는 느낌이었다.
아직은 차가움이 남아있는 바람이 벚꽃가로수를 살짝 흔들자 자신의 귀향을 축하하는 꽃잎들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공기 중에 떠올라 춤을 추듯 흔들리는 그 빛나는 아름다운 광경에 정현은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인적 없는 길 위에 깔려진 하얀 카펫을 밟으며 양옆으로 늘어선 아름답게 핀 벚꽃가로수들의 축하를 받고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들의 축하공연을 보며 저 길 끝에 있는 사랑하는 이를 만나기 위한 정현의 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지혁은 커다란 군용배낭을 어깨에 맨 채 그대로 자신의 부대로 복귀했다. 쉬지도 않고 동해에서 돌아온 채 그대로 부대로 들어온 지혁은 훈련을 하던 도중에 나온 것이 확연한 듯한 외모였다. 거뭇거뭇한 얼굴과 제대로 면도를 한지도 오래되어 보이는 짧은 수염으로 덮인 턱까지 그의 모습은 거친 야수의 모습이었다. 짙게 그을린 피부는 거친 그의 이미지에 더한 강인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필승!”
지혁은 자신의 부대복귀로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는 부대원들과 마치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거수경례를 하는 제 3팀 대원들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자신이 지옥주를 중도 하차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박상원 중위를 쳐다보았다.
“내게 한 방 먹였더군?”
박상원 중위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자신에게 질문하는 정지혁 소령에게 밝은 목소리로 대댭했다.
“해군 특수전여단 UDT/SEAL의 인간병기 정지혁 소령님을 한 방 먹이는 영광을 제게 주신 주인공은 현재 1시간째 면회소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지혁은 박상원 중위의 능글거리는 웃음 뒤로 그녀가 현재 자신의 부대 안에 설치된 면회소에서 한 시간째 기다리고 있다는 소리에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리고 박상원 중위의 어깨를 탁 치고 돌아서며 한마디 말을 남긴 채 순식간에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이 원수는 언젠가 꼭 갚지.”
그가 사라진 사무실 문을 바라보며 박상원 중위는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으며 중얼거렸다.
“얼마든지요. 소령님.”
지혁은 전속력으로 면회소를 향해 달렸다. 그의 주위로 벚꽃들이 춤을 추었고 하얀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면회소의 문을 힘차게 열고 들어선 지혁은 넓은 면회소 안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샅샅이 훑어보았다…………없었다. 그녀는 면회소 안에 있지 않았다. 혹시 기다리다 지쳐 떠난 것인가……? 지혁은 뒤돌아 면회소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언젠가 그녀와 다툰 적이 있던 면회소 뒤쪽 벤치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아……….그녀였다……….벤치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여자는 바로 그녀였다. 마지막 보았던 모습보다 더 건강해진 모습으로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녀가 앉아있었다.
지혁은 굳어있던 다리를 움직여 한 발짝 그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뚜벅.
정현은 낯선 발자국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그리고 그를 보았다. 더 거칠어진 모습으로……..기억보다 더 강한 모습으로………그리고 더……….더………그리운 모습으로………
정현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그가 다가올 때까지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더 어려 보이는군.”
정현은 가까이 다가온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굵은 저음에 살짝 눈을 감았다 떴다. 얼마나 그리워했던가……….저 목소리가 듣고 싶어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던가………
“……..아마……..음………머리카락을 잘라서 그럴 거예요………”
“그렇군. 머리를 잘랐어………..”
갑자기 그녀는 단발로 자른 자신의 머리 스타일이 그에게 어떻게 비칠지 몹시 신경이 쓰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화장에 신경 쓰고 좀 더 예쁜 옷을 입을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를 만난다는 기대에 박상원 중위에게 말한 시간에 맞춰 무작정 부대로 온 자신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그래서 그런가……..더 예뻐 보이는군………”
정현은 그의 마지막 말에 숙였던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를 기다리는 한시간여동안은 심장의 두근거림에 앉아있는 것조차 힘들었는데 이렇게 막상 그를 만나고 나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손만 뻗으면 그를 만질 수 있는데도 그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왜…….왜 내 편지에 답장 안했어요?”
“………….”
그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주위로 하얀 꽃잎들이 흩날리고 그녀의 머리위에도 꽃잎 하나가 내려앉았다.
“…………답장을 하면 네가 돌아오는 시간이 늦어질 거라 생각했다.”
그녀가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일부러 답장하지 않았다는 그의 말에 그녀의 두 눈에는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리고 그녀는 돌아오는 내내 궁금했던 한 가지를 물었다.
“아직도…….아직도 내가 당신의 여자인가요?”
지혁은 그녀의 눈에 고인 물기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바라는 답을 주었다.
“네가 내 여자이지 않은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어. 헤어져 있는 매순간, 네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는 그 긴 시간조차 네가 내 여자가 아닌 적은 없었다.”
정현은 눈물을 흘리며 그를 흘겨보았다.
“그럼 왜 안아주지 않는 거죠?”
“다시는……..다시는 나를 떠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지 전엔 네게 손대지 않을 거야.”
정현은 눈물을 흘리며 얼굴 가득 미소를 띠웠다.
“……..떠나지 않아요………절대로……..영원히………”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현은 그의 품에 가두어졌다. 힘껏 끌어안는 그의 힘에 눌려 정현은 숨쉬기조차 힘들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사랑하는 그의 품에서라면 죽어도 좋았다.
“사랑한다. 유정현.”
나지막한 그의 사랑고백에 정현은 두 팔을 들어 올려 그의 목을 힘껏 껴안았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해요……….나의 소령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