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eror of Demon Flames RAW novel - Chapter 103
마염의 황제 103화
“꽃구경 가기 좋은 날씨로군.”
그와 같은 일이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인간들을 먼저 치기 시작한 마물들이 어찌된 영문인지 모두 전선에서 물러나고 있었다. 조직적인 행동을 하던 그들이 어느새 흩어져 자신들이 원래 숨어살던 땅으로 되돌아가 버렸다.
다시 한 번 세상을 피로 물들일 뻔한 마물들과의 전쟁은 이렇게 시시하게 막을 내렸다.
원래의 푸르름을 되찾은 하늘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엘리스가 입을 열었다.
“끝… 끝났다.”
끝.
그 단어의 의미가 실감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엘리스는 벅찬 얼굴로 단번에 이터를 향해 달려갔다.
“해냈어. 해냈어요, 이터 씨. 이데아로크가 소멸했어요. 이긴 거예요. 이터…….”
흥분해서 웃음을 터트리던 엘리스가 주춤했다.
“…씨?”
이터는 아무 말이 없었다. 언뜻 보면 그냥 지쳐서 앉아 잠이 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딱딱해진 그의 몸은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가슴에 박혀 있는 라그나 블레이드. 엘리스는 급히 그것을 뽑아내려 했다. 하지만 이데아로크가 혼신의 힘을 다해 박아 넣은 검은 좀처럼 쉽게 뽑히지 않았다. 간신히 뽑아낸 검을 치우며 엘리스는 회복 주문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터의 상처만을 아물게 할 뿐, 그를 깨어나게 하진 못했다. 엘리스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거짓말… 거짓말인 거죠? 네? 이터 씨. 저 놀리려고 그러는 거죠? 눈 좀 떠봐요. 네?”
이터는 이데아로크라는 적과 대등하게 싸우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불태웠다. 기력 한 줌 남기지 않고 모두…….
그런 이터에게 이런 상처는 너무나도 절망적이었다. 회복 마법을 사용할 줄 알기에 엘리스는 이터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
엘리스는 굳어버린 이터의 곁에서 오열했다.
“싫어-!”
***
내면.
팔짱을 낀 붉은 눈의 이터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해할 수 없군. 정말 이대로 돌아가지 못해도 괜찮은 거야?”
이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모든 힘을 개방해 버리고 나면 이제 돌이킬 수 없다.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돌아간다는 건 네가 깨어난다는 의미야.”
붉은 눈의 이터는 한심하다는 듯 소리쳤다.
“멍청하긴. 그건 내가 아니라 바로 너야. 우린 하나라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야. 그게 대체 뭐가 문제가 된다는 거야?”
잠시 말없던 이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아. 원래의 나에 대해선.”
“그거야 당연히 네가 나와 하나가 되지 않아서…….”
이터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 엘프가 말했어.”
이터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손을 들어 가슴에 가져다대며 말했다.
“추억은 머리에 남는 게 아니라 가슴에 남는 거라고.”
하지만 원래의 자신에 대한 추억 하나조차 이터에겐 남아있지 않았다. 이터는 쓸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작은 따스함의 추억 하나 없는 원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네놈…….”
인상을 찡그리는 자신과 마주하며 이터는 웃었다. 후회는 없었다. 자신이 여기에 있는 대신. 그 대신에…….
“적어도 하나는 지켜냈으니까.”
“…….”
이터가 말하는 그 하나가 무엇인지 붉은 눈의 이터는 잘 알았다. 그 역시 이터의 또 다른 모습이었으니까. 이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꿰뚫어볼 수 있었다. 이 녀석은 정말 이렇게 막을 내릴 생각이다.
자신의 죽음으로 스스로의 각성을 막음으로써.
붉은 눈의 이터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아, 정말 짜증나는 녀석이로군. 내가 졌다. 돌아가.”
“무슨 뜻이지?”
큭.
붉은 눈의 이터가 불쾌한 얼굴로 침을 뱉으며 답했다.
“무슨 뜻은 무슨 뜻이야. 돌아가라는 거지. 내 힘은 다시 내 스스로 갈무리 하겠다. 그러니까 너는 잠드니 뭐니 쓸데없는 소리 말고 다시 돌아가라고.”
이터는 이해할 수 없었다. 누구보다 완전한 기억을 가지고 되살아나고 싶어했던 것은 바로 붉은 눈의 이터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왜?
이터는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몰라서 묻냐. 네 녀석이 여기서 영원히 잠들어버리면 나도 잠들어버린다고. 그렇게 되느니 네 눈으로나마 세상을 보는 게 낫지. 그것뿐이야.”
“너…….”
물러나기 위해 등을 돌린 붉은 이터가 걸음을 멈추고는 충고했다.
“추억이니, 기억이니 웃기는 소리만 하고. 뭐, 네가 선택한 길이니 알아서 해보라고, 하지만…….”
그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이터의 곁으로 다가와 조용히 속삭였다.
“그 대가는 지금부터 시작될 거야. 네가 너이길 포기한 순간, 그들의 목표는 네가 될 테니까.”
“그들?”
이터는 그들이라는 말에 의문을 가졌지만 붉은 눈의 이터는 더 자세한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알 필요 없어. 들키지 않게 꼭꼭 숨어 있어. 어차피 지금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해도 머지않아 전 세계가 변할 일이 벌어지고 말 테니까. 그 흐름 속에서 넌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해. 그러니 절대 나서지 마. 이건 진심 어린 충고야.”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모를 소리만 늘어놓던 붉은 눈의 이터는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서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럼 아디오스. 다음에 또 보자고. 이터.”
그리고 이터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
벽에 등을 기댄 채 굳어버린 이터. 엘리스는 그 앞에서 쉴새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터는 여전히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터 씨… 흑… 흐흑.”
그의 뺨에 떨어진 눈물 한 방울. 그것이 흘러 이터의 입가에 닿는다. 그리고 울고 있는 엘리스를 깜짝 놀라게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맛없어.”
“이터 씨?”
이터가 입을 열었다. 희미하게 눈을 뜨는 이터. 엘리스는 이터의 양 어깨를 움켜잡으며 소리쳐 물었다.
“괘, 괜찮은 거예요? 이터 씨, 무사한 거죠?”
“엘리스.”
이터가 조용히 엘리스를 불렀다. 그의 뱃속에서 꼬르륵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터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배고파.”
엘리스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그리고 동시에 다시 울상이 되었다.
“흐… 흐윽…….”
그는 살아 있었다. 죽지 않았다. 다시 돌아왔다. 그는…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엘리스의 눈에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엘리스는 목놓아 울음을 터트렸다.
“으아아앙. 아아앙. 흐아아앙.”
엘리스가 울음을 멈추지 않자 이터는 당황했다.
“자, 잠깐. 울지 마라. 왜 그러는 거야?”
“몰라요, 이터 씨. 바보!”
엘리스는 이터의 품에 와락 안겼다. 그녀는 그의 허리를 꼭 잡은 채로 울먹였다.
“절대로, 이제는 절대로 놓지 않을 거예요.”
“엘리스…….”
당황을 감추지 못하던 이터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졌다. 그는 엘리스를 마주 안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응. 나도 이젠 놓지 않을게.”
‘절대로.’
싸움은 끝났다.
그리고 폐허가 되어버린 성 위에서는 엘프와 인간 하나가 언제까지고 그렇게 서로를 안고 있었다.
***
“이데아로크가 실패한 모양이군.”
어딘지 모를 공간 안.
감정의 격양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하나가 조용히 운을 뗐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구석의 누군가가 조소 어린 투덜거림을 내뱉었다.
“하여간 그 오랜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제대로 한 적이 없군.”
“쓰레기는 쓰레기라는 건가.”
잠시 소란스러운 주위.
감정 없는 목소리는 한마디로 그들의 말을 일축했다.
“아니. 녀석의 죽음에서 느껴진다. 우리와 같은 힘이…….”
그 말에 잠깐이나마 술렁이던 장내가 조용해졌다. 누군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격양된 어조로 말했다.
“뭐? 설마 그렇다면 ‘그’ 가 아직 살아 있다는 건가?”
“그럴 리가. ‘나이트’들은 우리만 남은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아니, 설사 그런 것이 가능하다고 해도 어째서 나이트가 이데아로크를 쓰러뜨렸단 말이냐. 이해가 되지 않는데.”
저마다 한마디씩 내뱉던 목소리들이 점점 소란스러워진다. 그 소란을 꿰뚫고 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푸른 번개의 형상을 이루고 있는 그는 일전에 루시펠의 앞에 나타났던 그 남자였다.
“좋아. 그렇다면 내가 확인해 보도록 하지.”
감정 없는 목소리가 그를 말렸다.
“잠깐. 아직 마스터의 명령이 내려지지 않았다. 독단으로 움직일 셈인가. 우리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걸 잊은 건 아니겠지?”
푸른 번개 형상의 사내는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무슨 소리야. 이데아로크 놈을 쓰러뜨린 게 ‘나이트’라면 다른 세계의 존재들이 알아채기 전에 우리 손에 넣어야 하지 않나.”
“놈은 이데아로크를 쓰러뜨렸다. 그가 우리편이 아니라면?”
감정 없는 목소리의 질문에 푸른 번개 형상의 사내는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그때는 소거한다.”
푸른 번개의 사내는 그와 함께 사라져버렸다. 감정 없는 목소리도 더 이상 그를 말리려 하지 않았다.
구석에서 누군가가 웃으면서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겠군. 새로운 나이트의 등장이라. 그는 순풍일까? 그렇지 않으면… 혼돈을 몰고 올 폭풍일까?”
그의 말에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공간 안에는 죽음 같이 긴 침묵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Chapter 4-6. 또다시 닥쳐오는 위협
새파랗게 익은 하늘 아래로 청명한 빛이 대지를 비춘다. 날씨는 불쾌할 정도로 덥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웅크리고 있어야 할 정도로 춥지도 않았다. 기분 좋은 베이컨 굽는 냄새가 거리에 풍겼고 아이들은 마을 광장을 뛰놀았다. 따뜻한 미소를 짓는 사람들이 거리에서 대화를 나누고 자신의 일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많은 노점상인들은 서로 목놓아 자신들의 물건을 팔려고 애를 쓰고 있었고 장에 나온 사람들은 그들의 상품을 유심히 바라보며 지갑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전형적이고 평화로운 마을의 풍경.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시원한 분수대에는 한 명의 엘프가 아이처럼 물장난을 치고 있었다.
“와앗. 시원해. 이터 씨도 이리 와봐요. 물이 정말 시원해요.”
엘프의 금발 머리가 물방울 사이로 부서졌다.
어린 아이 같은 순수한 얼굴로 활짝 웃는 그녀는 바로 엘리스였다. 그리고 마을 광장 한편에서 붉은 머리의 소년이 그녀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소년의 얼굴은 무뚝뚝했지만 간간이 엘리스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거나 손을 흔들어주곤 했다. 등 아래로 흘러내리는 망토 차림의 소년은 바로 이터였다. 엘리스를 향해 손을 흔들어주던 이터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벌써 일 년이 지났나…….”
일 년.
그 악몽과도 같던 이데아로크와의 싸움이 끝나고 흘러간 시간이었다. 그레이센과 론의 희생… 그리고 로자리아를 잃었던 그날의 싸움.
많은 것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