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eror of Demon Flames RAW novel - Chapter 17
마염의 황제 017화
“야, 이 정신 나간 마녀야! 나 혼자 여기에다 두고 가면 어쩌라는 거야! 야!”
악을 쓰고 발광해도 돌아오는 것은 메아리뿐이다. 가즈 블레이드는 그렇게 버려졌다.
***
가즈 블레이드가 발광하는 사이, 로자리아는 슈페른의 품에 안겨 산을 내려가는 중이었다. 원래 로자리아는 숲길에서 뭉그적거리며 적당히 시간을 끌 생각이었지만 슈페른이 그녀를 안고 경공을 펼치는 바람에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질풍이 무안할 정도의 무시무시한 속도로 산을 내려가는 슈페른. 헤이스트로는 흉내도 못 낼 수준이었다. 이대로라면 금세 산을 다 내려가 버릴 것 같았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돼. 이런 잔인무도한 녀석에게 끌려가서 고문당할 수는 없어.’
로자리아는 미인계를 생각했다. 자객이라고는 하나 놈도 남자. 그래도 얼굴이랑 몸매는 나름대로 인정받고 있었으니 마음먹으면 유혹 못 할 것도 없었다.
로자리아는 어깨와 가슴이 드러나게 살짝 옷을 내리며 입을 열었다.
“저기…….”
“……?”
홍조를 띤 얼굴과 뭔가 갈구하는 듯한 표정, 흘러내린 옷 사이로 터질 듯한 가슴이 살짝 드러난다. 뇌쇄적인 시선과 미소. 제대로 거기가 달린 남자라면 못해도 군침 정도는 흘릴 법한 자세였다. 예상대로 슈페른의 시선이 로자리아의 가슴에 박혀 떠날 줄을 몰랐다. 하여간 남자들은 다 똑같다니까.
“이봐.”
“왜… 무슨 용무라도?”
일부러 더 색기 어린 목소리로 묻는 로자리아.
슈페른이 답했다.
“옷 흘러내린다. 올려.”
“응? 아… 응. 알았어.”
심드렁한 반응에 오히려 들이민 쪽이 머쓱해진다.
‘뭐야, 벗은 쪽 무안하게끔.’
옷을 올리며 로자리아는 미간을 좁혔다.
‘조금 더 수위를 높여야 하나?’
로자리아는 살며시 슈페른의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며 물었다.
“저기… 당신은 악랄하니까 여자라고 봐주는 것도 없겠지?”
“그렇지. 난 프로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한다. 로자리아는 굳어지는 얼굴을 감추고 최대한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
“고문당하면 몸도 다 망가질 텐데 아쉽지 않아? 나도 명색이 여자인데 하룻밤 정도는 살려놓고 즐겨보는 건 어때?”
“싫어.”
고민 한번 해보지 않고 튀어나오는 거절. 로자리아는 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왜? 내가 맘에 안 들어서?”
“아니. 난 안 서거든.”
“안 선다면……?”
로자리아의 눈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향했다. 다음 순간, 그녀의 얼굴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뭐야, 이 자식? 성질도 나쁜 게 고자라니! 재수없어.’
그런 표정의 로자리아가 혹시나 오해할까 싶어 슈페른은 설명을 첨부했다.
“참고로, 고자나 뭐 그런 게 아니라 평범한 발기부전이다.”
“그게 그거야! 그리고 절대 평범하지 않아, 그런 건!”
어떻게 미인계를 이용해 틈을 만들어보겠다는 방법은 대실패다. 숲은 벌써 끝을 향하고 있었다. 로자리아는 초조해졌다.
‘어떻게 하지? 미인계도 실패고. 빠져나갈 구멍이 안 보여.’
안고 있는 틈을 노려 기습한다는 건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이 남자의 실력이라면 자신이 뭘 하려 해도 먼저 제압당할 것이다. 정말 방법이 없는 것인가? 로자리아는 도리질 쳤다.
‘아니야. 포기하면 안 돼. 녀석도 인간인 이상 분명히 틈이 있을 거다. 분명히 찬스는 올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숲은 사라지고 숲 아래 마을이 나타났다. 날듯이 입구를 지난 슈페른은 마을 한가운데에 내려섰다.
“그럼 난 더러워진 옷을 좀 바꾸고 올 테니까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도록.”
“응?”
길거리에 로자리아를 내려놓은 슈페른은 옷가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로자리아는 저벅저벅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가버렸다? 혼자 내버려두고?’
찬스가 올 거라고 생각은 했었지만, 설마 이렇게 금방 찾아올 줄이야!
‘기다리긴, 너 같으면 미쳤다고 기다리겠냐!’
로자리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을 밖으로 쏜살같이 줄행랑쳤다. 혹시 몰라 헤이스트를 사용하고 일부러 인적이 드문 길을 골라 정신없이 내달렸다.
얼마를 달렸을까. 한참을 수풀을 헤치며 달린 로자리아는 파김치가 되어 나무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다. 다행히 따라오는 기척은 없었다.
“하아! 하아! 어떻게 벗어나긴 한 것 같네.”
“여!”
안도하기가 무섭게 들려오는 목소리. 낯익은 목소리에 로자리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로 앞에서 슈페른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 어느 틈에!”
스윽.
로자리아가 무슨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다가온 슈페른의 손이 그녀의 목을 감싸쥐었다. 소름 끼칠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가 뒤를 따랐다.
“허튼 생각하지 말라고 했지. 한 번만 더 튀면 그때는 가즈 블레이드고 뭐고 바로 목을 부러뜨려 버릴 거야.”
“아…알았어.”
슈페른은 그제야 로자리아의 목에서 손을 거두며 등을 돌렸다.
“좋아. 그럼 다시 가보도록 하지. 따라와.”
슈페른은 로자리아는 쳐다보지도 않고 등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로자리아는 갈등했다. 겨우 도망쳤는데 다시 잡혀 끌려갈 수는 없다. 마침 슈페른은 등을 돌리고 있다.
‘무방비. 지금 기습하면 어쩌면…….’
“할 수 있으면 해봐.”
담담한 슈페른의 목소리. 그는 로자리아의 속내를 꿰뚫고 있었다. 로자리아는 감히 기습할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도망칠 수가 없어.’
이 녀석에게서는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이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로자리아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끝장이야.’
Chapter 1-7. 이터, 부활의 역습
툭툭툭.
아무도 없는 숲 속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잠시 잠잠해지는가 싶더니 다시 들려온다.
툭툭툭.
“제길! 어떻게 하라는 거야!”
그리고 들려오는 앙칼진 외침. 숲에 홀로 남은 가즈 블레이드의 목소리였다. 바닥에 날을 박아 선 가즈 블레이드가 숲 주변을 뜀뛰기를 하며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개념 없는 인간, 나 혼자 놔두고 가버리면 어쩌라고!”
슈페른과 사라진 로자리아는 네 시간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뜀뛰기로 어떻게 움직일 수는 있다지만 혼자 숲을 내려가는 건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설령 할 수 있다고 해도 그 자신이 얼마나 섬세한 검인데 진흙과 자갈투성이인 산을 뜀뛰기로 내려간단 말인가. 만약 이대로 로자리아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면 혼자 계속 이 숲에 있어야 한다.
‘그건 안 돼!’
이런 깊은 숲 속에 처박혀 있다면 누구도 알 수 없다. 누군가의 눈에도 띄지 못한 채 평생을 이 산에 처박혀 있게 될지도 모를 노릇이다. 비 맞아도 손질해 줄 사람도 없을 테고 시간이 지나며 쓸쓸히 녹슬어 버리겠지. 불결한 짐승들은 고귀한 자신의 무덤에 똥오줌을 아무렇게나 갈길 게 뻔했다.
‘이터.’
이럴 때 그 꼬마라도 있었다면 자신을 데리고 여기서 나가줄 텐데.
“그 꼬마는 정말 죽었을까?”
가즈 블레이드는 물끄러미 이터가 떨어진 낭떠러지를 바라보았다. 까마득한 것이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런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는데 죽었겠지.
“하지만 그렇게 무지막지한 꼬마였는데 그리 쉽게 죽었을까? 살아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한번 내려가 볼까?”
절벽 아래로 뛰어 내려가 보면 이터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조각이 났다면 그 조각이라도 보이겠지.
가즈 블레이드는 다시 낭떠러지를 내려다보았다. 높다. 떨어지면 더럽게 아플 것 같다.
“끄응… 어쩌지?”
내려갔는데 만약 이터가 죽었다면? 오히려 로자리아가 나중에 돌아와도 자신을 찾지 못하게 되는 게 아닐까? 가즈 블레이드는 한참을 낑낑거리며 고민했다.
“에잇, 모르겠다. 올 수 있으면 벌써 왔겠지! 에라잇!”
가즈 블레이드는 바닥을 딛고 낭떠러지로 뛰어들었다. 까마득한 낭떠러지 안으로 가즈 블레이드가 빨리듯 떨어져 내렸다.
“꺄아아아아아……!”
씨이이잉… 팍!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살벌하게 들려온다. 보이지 않을 것 같던 절벽 아래 바닥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가즈 블레이드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으악! 으으… 아프다. 대체 얼마나 떨어진 거야.”
날을 부르르 떨면서 힘겹게 일어나는 가즈 블레이드. 가드를 들어 하늘을 보니 위에서 봤던 것만큼이나 까마득하다. 날이 부러지지 않은 게 용했다.
“이럴 때가 아니지. 이터는?”
가즈 블레이드는 뜀뛰기를 하며 절벽 아래에 떨어졌을 이터를 찾았다. 우려와는 달리 가즈 블레이는 금세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앗, 찾았다!”
다행히 얼음 덩어리가 되어 산산조각이 나거나 하진 않았다.
그러나 쓰러진 이터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야말로 쥐 죽은 듯이 조용하다. 가즈 블레이드는 실망한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죽은 건가.”
자기는 그나마 고귀한 검이니 멀쩡하지만 인간이 저 정도 높이에서 떨어졌으면 즉사다. 슈페른의 말과는 달리 산산조각 나지 않아 시체라도 찾을 수 있었던 게 다행인 걸까. 그래도 며칠 함께 다닌 정이 있어 가즈 블레이드는 이터의 명복을 빌어주었다. 부디 다음에는 배 터지게 먹을 수 있는 세상에서 태어나기를.
“휘유우.”
“……?”
무슨 바람소리 같은 게 들렸다? 가즈 블레이드는 숙이고 있던 가드를 들었다. 주위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소리는 다시 들려왔다. 이터가 있는 방향이었다. 정확히는 얼굴.
“드르렁! 휘유우… 쿨쿨.”
“…….”
자고… 있다? 가즈 블레이드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죽지 않았다! 살아 있어! 이 꼬마 살아 있다고!”
“드르렁! 쿨쿨.”
“꺄하하하! 이런 곳에서 떨어져서 늘어져 자고 있을 줄이야. 역시 괴물 꼬마다워! 나도 이제 살았다. 꺄하하!”
이터가 돌아누우며 웅얼거렸다.
“우웅… 시끄럽다.”
“이럴 때가 아니지. 이터, 얼른 일어나! 로자리아, 그 허접 마녀가 위험하다구!”
가즈 블레이드가 계속해서 떽떽거리며 소리를 지르자 이터는 그제야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응? ‘가즈 쓸모없는 검’이다.”
“‘가즈 블레이드’야.”
이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그랬지. 그런데 여기서 뭐 하냐?”
“그건 내가 할 말이라고. 이런 곳에서 태평스럽게 자고 있을 때가 아니란 말이야.”
가즈 블레이드는 이터가 슈페른에게 당한 뒤부터 로자리아가 끌려간 것과 자신이 혼자 숲에 남겨진 것까지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그 중 절반은 자신을 숲에 남겨두고 떠난 로자리아에 대한 불만과 신세한탄이었지만, 설명을 다 듣고 난 이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이터는 로자리아를 지키기로 했다. 당연히 구하러 간다.”
예상했던 대답이다. 가즈 블레이드도 가드를 끄덕였다.
“좋아. 나야 이 숲만 빠져나갈 수 있다면 어찌 되든 상관없으니까. 그럼 지금 당장 출발하자고.”
“응.”
그렇게 로자리아 구출을 위해 이터와 가즈 블레이드가 출발하려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