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eror of Demon Flames RAW novel - Chapter 3
마염의 황제 003화
‘그럴 리가 없어. 우연이야. 우연히 피한 것뿐이라구.’
그녀는 다시 검을 조종해 날렸다. 혹시나 싶어 이번에는 다섯 개를 날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소년은 검이 닿기 전에 모두 피해 버렸다.
“말도 안 돼.”
“혼내준다는 건 언제부터 하는 거냐?”
역시 이번에도 소년은 진실로 궁금해 묻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로자리아의 화를 돋웠다. 장난을 그만둔 그녀는 온 힘을 담아 무서운 기세로 검을 날리기 시작했다. 바람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다섯 개의 그림자 검이 소년에게 날아들었다.
촤악! 촤아악! 쿵!
폭풍이 무색할 정도로 몰아치는 검격. 하지만 그것은 전부 임자 없는 하늘을 벨 뿐이었다. 검의 폭풍 속에서도 소년은 처음과 똑같은 자세로 살짝 움직이면서 모든 공격을 피하고 있었다. 오히려 주위 숲의 나무들이 잘려나가 바닥을 쿵쿵 굴렀다.
로자리아는 열두 개의 검을 모두 움직였다.
“에잇! 맞아. 맞으라고, 이 꼬맹아!”
소년도 이제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공격은 무위. 쥐새끼처럼 요리조리 잘도 빠져나가는 소년을 잡기 위해 로자리아는 정신없이 검을 휘둘렀다. 약간 혼내주고 말겠다는 본연의 목적은 사라진 지 오래다. 어떻게든 맞히지 않으면 알센데린 마녀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는다.
그렇게 날린 마지막 검이 소년을 비껴나 나무에 맞았다. 거대한 나무가 로자리아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아차!”
흥분해서 주위를 살피지 못했다. 로자리아는 떨어지는 나무를 피하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쿵!
“……?”
나무가 떨어졌는데도 아무런 고통도 없었다. 로자리아는 살짝 눈을 떴다. 자신은 무사했다. 소년이 자신을 안고 있었다. 나무가 떨어지기 전에 그녀를 낚아챈 것이다.
‘이 꼬마가 나를 구해 주었구나.’
생각만 해도 신기한 꼬마다. 열두 개의 그림자 검을 피하느라 꽤 멀리 떨어졌을 텐데 이곳까지 순식간에 다가와 자신을 구하다니.
바닥에 내려선 로자리아는 궁금함을 참지 못해 물었다.
“보였니? 내 열두 개의 검이?”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약간 기대한 로자리아는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럼 그렇지. 내가 너무 과민하게 생각했나?’
“그럼 어떻게 피했어?”
“보지 못해도 공기의 진동, 떨림만으로 알 수 있다.”
그 말에 로자리아는 더 놀랐다. 공기의 뭐로 알아낸다고?
‘이 꼬마…….’
진짜잖아! 이런 실력이라면 아까의 기사를 가지고 놀았던 것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야. 검기를 날려버린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야. 대체 정체가 뭐지?
‘나, 뭔가 엄청난 것을 주워와 버렸나?’
로자리아는 궁금한 것을 하나 더 물었다.
“그런데 왜 날 지켜준다는 거니?”
소년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나한테 밥을 줬으니까.”
“그게… 전부?”
소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로자리아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황당한 꼬마네.”
단지 밥을 먹여줬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을 지켜주겠다니. 좀 황당하기는 하지만 생각해 보니 나쁘지는 않을 것도 같다.
‘실력 하나는 좋으니까.’
생각해 보니 기사가 자신을 노렸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이제 이 근방에서 그녀의 목에 걸린 상금이 좀 올라갔다는 이야기다. 물론 기사 급의 인재가 자신을 쫓은 것은 알량한 현상금이 아니라 ‘마녀를 잡았다’는 명예 때문이었겠지만. 어쨌거나 중요한 건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생기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사를 때려잡을 정도의 경호원이 곁에 있다면?
생각을 정리한 로자리아는 호호 웃으며 말했다.
“좋아. 그렇게 원한다면 받아주지. 그렇지 않았어도 종자 하나는 필요했거든. 호호. 흐음… 그것보다, 이제 함께 지내기로 했으니 앞으로 부를 이름이 필요할 텐데.”
로자리아는 소년의 이름을 생각했다. 부를 때마다 ‘꼬마야’라고 할 수는 없지 않는가.
“본명은 모른다고 했고… 아, 그래. 먹는 걸 좋아하니까 ‘이터(Eater)’라고 부르면? 이터… 이터… 어때? 좋지?”
“아니.”
“시끄러워. 앞으로 이터라고 부를 테니까 그렇게 알아.”
로자리아는 멋대로 정해 버렸다.
“그러지.”
귀염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이터를 보며 로자리아는 조금 불안해졌다. 이거 생각보다 골치 아픈 녀석을 받아들인 거 아냐?
어쨌거나 그렇게 이터는 로자리아와 함께 살게 되었다.
그날 밤.
콰앙!
멀쩡히 서 있던 나무 한가운데가 갑자기 뻥 뚫리며 가루가 되어버렸다. 난데없이 허리를 잃어버린 나무는 무게를 지탱하지 못해 쓰러졌고 한밤중에 일어난 요란한 소동에 숲 속에서 자고 있던 동물들은 놀라 달아났다.
쓰러진 나무의 맞은편에 서 있는 것은 낮에 마녀 로자리아가 주운 소년, 이터였다.
그러나 지금의 이터는 낮과는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가 달랐다. 만월 아래로 비치는 이터의 눈빛은 그의 머리카락만큼이나 붉었다.
말없이 쓰러진 나무와 자신의 주먹을 바라보던 이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의 내 힘은… 고작 이 정도인가.”
이터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붉은 눈에 만월이 담겼다.
“좀 더 시간이…….”
Chapter 1-2. 말하는 검, 가즈 블레이드
다음 날, 노을이 지고 있을 저녁 무렵. 로자리아는 탑의 자신의 방에서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부산히 준비하는 그녀를 보며 이터가 물었다.
“어디 가나?”
“응. 간만에 영주 저택이나 찾아가 보려고.”
“왜? 먹을 거 달라고?”
“넌 모든 걸 그쪽에 연관시켜서만 생각하는구나.”
어깨를 으쓱하며 로자리아는 설명을 시작했다.
“아직 꼬맹이인 너는 잘 모르겠지만 이 세상에는 먹을 것 말고도 필요한 게 많단다. 흑마법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야. 마석이 있어야 한다고. 마석은 어떻게 구할까? 당연히 돈이 있어야겠지. 하지만 난 가난한 예술가야. 연금술사도 아니니 돈 만들어내는 재주도 없지. 그래서 영주 댁으로 가는 거야.”
이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그러니까 영주라는 사람한테 돈 빌리러 가는 건가?”
“호호, 순진하긴. 영주 같은 애들은 나 같은 사람은 만나주지도 않는다고. 그냥 보물창고에서 보석 몇 개만 슬쩍 가지고 나오는 거야. 어차피 산처럼 쌓여 있으니 별로 티도 안 날 테고, 서민들 등쳐먹는 부자 돈이니까 좀 뺏어 써도 괜찮겠지?”
이터는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마녀란 건 도둑놈이구나.”
“‘놈’이라니! 나는 여자라고.”
“그럼 도둑년.”
“…….”
로자리아는 이마에 오르는 핏대를 가라앉히며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잔말 말고 따라올 거면 얼른 채비나 해. 너랑 떠들고 있다간 날 새겠다.”
***
이트니아스의 영주 바우른 레서스의 응접실. 사방이 방음용 주문의 힘으로 둘러싸인 방 안은 평소와 다르게 어두웠다. 방 한구석에서 검은 후드를 깊게 눌러쓴 세 명의 사내 중 가운데에 있는 이가 입을 열었다.
“물건은 잘 준비되어 있겠지요?”
맞은편에 앉아 있는 바우른 레서스가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환히 웃었다. 그의 옷은 돼지처럼 살이 오른 몸매 때문에 당장에라도 터질 듯 위태로웠다.
“물론입니다. 처음 발견했을 때의 모습 그대로 흠집 하나 없이 보관 중입지요.”
“수고하셨습니다.”
“별말씀을. 그것보다 제가 받을 액수 말인데…….”
군침을 흘리며 눈을 빛내는 영주를 보며 사내는 짧게 미소를 지었다. 그가 고개로 신호하자 뒤에 서 있던 또 다른 사내가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가 열리자 방 안은 빛으로 가득 찼다. 온갖 진귀한 보석이 그 안에 다 들어 있었다. 하나같이 엘프의 눈물로 드워프가 세공해 만들었다고 해도 믿을 만한 아름다운 보석들이었다.
“오, 아름답군. 아름다워.”
보석을 보고 넋이 나간 바우른을 깨운 것은 후드의 사내였다.
“그럼 이제 물건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
바우른의 저택. 철통같이 경비를 서고 있던 경비병 둘이 스르르 바닥에 주저앉았다. 갑자기 곯아떨어진 그들 옆으로 흑의의 마녀, 로자리아와 이터가 지나갔다.
“호호. 그렇게 푹 쉬고 있어.”
“왜 재우지? 그냥 쓰러뜨려 버리면 되잖아.”
슬금슬금 저택으로 침투하는 로자리아에게 이터가 물었다.
“바보 같은 소리. 일이 잘못되면 같은 편들을 끌어올지도 모르잖아. 그러면 귀찮아진다고. 이런 건 소리 소문 없이 처리하는 게 상책이야.”
이터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럼 전부 다 처리하면 되잖아.”
가만히 생각해 보니 기사도 때려눕히는 이터라면 경비병들이 다 몰려와도 아무 일도 없을 것 같긴 하다.
“됐어. 그런 식으로 거창하게 들어갈 필욘 없어. 이래봬도 난 평화를 사랑하는 마녀라고.”
뒤뜰을 통해 들어간 저택 안은 조용했다. 로자리아는 저택 내부에 깔린 경비병들 몰래 지하의 보물창고로 향했다.
“그러니까 그게 어디쯤이었더라…….”
열한 걸음, 열두 걸음. 방위를 잡고 걸어나가던 로자리아가 어느 지점에 서서 손을 저었다.
“여기군.”
지직.
침입자가 나타났음을 알리는 알람 마법이 디스펠되어 사라졌다.
로자리아는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 저택은 지금까지도 몇 번을 이용했던 곳이다. 어디에 알람 주문이 자리하고 있는지, 함정은 얼마나 되는지 이미 다 꿰고 있었다. 그럼에도 영주가 함정을 교체하지 않은 것은 로자리아가 워낙 조금씩 보석들을 가지고 나갔기에 눈치 채지 못해서일 게다. 로자리아는 욕심 없는 마녀였다.
“이게 마지막이군.”
마지막 함정이 디스펠 되어 사라지자 휘황찬란한 보고가 모습을 보였다. 일개 작은 영지의 영주 재산이 이렇게나 많은가 싶을 정도로 방 안은 진귀한 보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저번보다 더 늘었네. 어지간히도 긁어모았군.”
그럼 오늘은 뭘 가지고 가볼까. 로자리아는 적당히 괜찮은 보물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응?”
보물들을 뒤지는데 바닥에 뭔가 이상한 것이 보였다. 마법으로 감춘 흔적이 역력한 비밀통로였다.
“호오, 이건 전에 못 보던 건데? 호호, 이런 걸로 내 눈을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지.”
새로운 보물이라도 들어온 것일까? 호기심을 느낀 로자리아는 디스펠로 락을 지우고 통로를 열었다.
통로를 열자 또다시 지하로 통하는 길이 나타났다. 기다란 나선형의 계단을 타고 내려가자 어두컴컴한 지하굴 속에 5m 정도 되는 크기의 거신상이 한 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정교한 암석으로 다듬어진 거신상 아래에는 새하얗게 빛나는 늘씬한 검이 박혀 있었다.
“이게 영주의 새 보물? 확실히 고가품처럼 보이네.”
로자리아는 호기심에 눈을 빛내며 검 자루를 쥐었다.
“꺄아! 불결해, 불결해. 어디다가 손을 대는 거야?”
갑자기 동굴 안을 울리는 날카로운 비명소리. 놀란 로자리아는 검 자루에서 손을 뗐다.
그러나 목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너무해. 날 만지려면 최소한 흰 장갑 정도는 껴야 할 거 아냐! 지문이 묻어서 지저분해졌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