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eror of Demon Flames RAW novel - Chapter 58
마염의 황제 058화
이터가 일행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루시펠을 쓰러뜨리거나 그가 가진 조각들을 파괴하면 이데아로크가 부활할 수 없다는 뜻도 된다.”
“……!”
일행의 얼굴이 굳어졌다. 지금 이터의 말은 바로 루시펠과 정면으로 결전을 벌이겠다는 말과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힘으로 상대를 쓰러뜨리겠다는 건가.’
소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가. 너다운 생각이로군.”
“그럼 이제부터는 조각을 모으는 게 아니라 정의의 사도가 되는 여행을 떠나는 건가요? 엘리스는 왠지 흥분돼요.”
엘리스가 호들갑을 떨면서 소리쳤다. 이야기책에나 나오는 정의의 영웅이라니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하지만 이터는 그녀의 기대를 깨뜨렸다.
“아니. 이데아로크의 부활을 막는 건 나 혼자 한다.”
“네에?”
혼자서 한다?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
일행의 당혹스러운 시선이 모두 이터를 향했다. 이터는 로자리아의 시선을 마주하며 말했다.
“알 제라드의 보고(寶庫)를 이용하면 로자리아는 마녀의 탑을 지을 수 있다.”
이터는 소류를 돌아보았다.
“알 제라드는 이제 없다. 루시펠이 남아 있지만 펜릴을 내가 가지고 있는 이상, 더 이상 호아족에게 위협은 없을 거다.”
그레이센과 론에게로 시선을 돌린 이터는 고개를 갸웃했다.
“너희 둘의 본래 목적은 뭔지 모르니까 넘어가고.”
뜨끔.
찔리는 게 있는 두 사람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눈치를 살폈다. 이터는 동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너희가 여행에서 원하던 목적은 이루었다. 그러니까 루시펠과의 싸움은 나 혼자 한다. 나와 함께 갈 필요는 없어.”
“그렇지 않아요!”
보고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앙칼진 목소리. 엘리스였다. 그녀는 고집스러운 얼굴로 소리쳤다.
“전 아직 제 여행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어요. 전 이터 씨의 여자가 되기로 한걸요. 그러니까 이터 씨가 뭘 하든지 끝까지 따라갈 거라고요.”
로자리아가 인상을 팍 구겼다.
‘쳇, 엘프 꼬맹이 녀석… 저런 과감한 발언을…….’
말할 선수를 빼앗겨 버렸다. 로자리아는 곰곰이 생각했다.
‘나는 어떻게 하지?’
확실히 이터의 말대로 그녀의 목적은 조각을 모아 마녀의 탑을 세우겠다는 거였다. 그것이 해결된 이상, 사실 위험을 무릅쓰며 여행할 이유는 없는데.
‘없는데…….’
로자리아는 팔짱을 꼈다. 가늘어진 눈 속으로 이터에게 알랑방귀를 뀌고 있는 엘리스의 모습이 비쳤다.
‘묘하게 신경 쓰인단 말이야… 저 엘프 꼬맹이.’
“흠, 흠. 뭐… 나도 따라갈 거야. 여기까지 왔는데 끝이 어찌 되는지도 모르고 그냥 돌아가고 싶지도 않고, 게다가 날 지켜줄 거란 약속 남아 있잖아.”
일부러 엘리스 들으라는 듯 살짝 찔러보는 로자리아. 하지만 엘리스는 이터를 목 뒤에서 끌어안으며 호호 웃을 뿐이었다.
“호호, 괜찮아요, 이터 씨. 전 절 만나기 전의 과거 여자는 전혀 신. 경. 쓰. 지. 않거든요.”
찌릿찌릿!
엘리스와 로자리아 둘 사이로 묘한 전기가 튄다. 그런 두 여자를 뒤로하고 소류가 입을 열었다.
“나도 따라가겠다. 녀석들에게 당한 부족의 원한… 한 방은 먹여줘야 직성이 풀릴 거 같으니까.”
이걸로 소류까지 참가 확정.
아직 속내가 결정되지 않은 것은 그레이센과 론이었다. 눈치를 살피던 론이 조용히 그레이센에게 속삭였다.
“왕자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죠?”
“크흠, 예상치 못했던 전개로군.”
그레이센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이 로자리아 일행을 쫓아다니는 것은 그들이 이데아로크의 조각을 모으는 것을 기다렸다가 가로채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행이 이데아로크의 조각을 찾아나서야만 의미가 있는 것. 이터 들이 이데아로크의 조각을 파괴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지금은 의미가 없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지.’
여기까지 와서 이데아로크의 조각을 파괴하는 것에 반대하면 그들은 이터 일행과 헤어져야 한다. 그것은 곤란하다. 지금부터의 싸움에서 이터 들을 따라다녀야 자연스럽게 기회도 따라온다. 그리고 이 기회에 일행 앞에서 잘 어필해 놓아야 만에 하나 이터 들의 손에 의해 조각이 파괴되어 이데아로크가 부활할 수 없다고 해도 나중에 이터나 로자리아를 고용하는 등의 새로운 기회를 노릴 수 있다.
그레이센은 자신들의 행로를 결정했다.
“일단은 계속 녀석들의 편에 붙는다. 그 외의 행동은 상황에 따라 결정하도록 하지.”
엘리스가 들뜬 얼굴로 소리쳤다.
“좋아요, 그럼 결정. 다 같이 이데아로크의 부활을 막자고요!”
서로간의 목적은 달랐다. 하지만 일행은 다시 함께 여행을 시작하기로 결정했다. 이데아로크의 부활을 막기 위한 여행을.
소류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류, 어디 가는 거야?”
로자리아의 물음에 소류는 묵묵히 대꾸했다.
“수련하러 간다. 앞으로 더 강한 상대들이랑 붙게 될 것 같으니까.”
루시펠과 정면대결을 펼치겠다는 건 알 제라드 이상의 강적과의 싸움을 의미했다.
이터는 석실에 기대어져 있던 펜릴을 소류에게 던져주었다.
“소류, 이걸 가져가라. 이제 알 제라드도 쓰러뜨렸으니 그 창은 다시 네가 써도 좋아.”
“흥. 사양하지 않겠다.”
그 말과 함께 함께 소류는 석실 밖으로 나갔다.
상황이 정리되자 로자리아는 보고의 보물들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엘리스는 이터에게 집적거렸다.
론이 그레이센에 물었다.
“저기, 왕자님. 그런데 왜 우리한테는 아무도 의견을 안 물어보는 걸까요?”
“글쎄.”
전혀 일행의 관심 밖인 두 사람이었다. 그리고 각자의 생각과 함께 또다시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근데 엘리스, 내 여자라는 게 대체 뭐냐?”
“아잉! 몰라요.”
“……?”
홍당무가 되는 엘리스를 보며 이터는 고개만 갸웃할 뿐이었다.
***
“으악! 따가워. 제기랄!”
어딘지 알 수 없는 성 안. 창문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이 어둑어둑한 실내를 아슬아슬하게 밝히고 있었다.
방 안의 작은 왕좌에 앉아 있던 루시펠은 뺨의 상처를 만지며 역정을 냈다. 이터에게 베인 상처는 쉽게 아물지도 않았다.
손끝에 묻어나는 검은 피를 보며 루시펠은 곁에 있는 기둥 하나를 깨부쉈다.
“젠장. 원래는 파파팟! 하고 단숨에 쓰러뜨리고, 펜릴까지 빼앗아 오는 거였는데, 이거 오늘 스타일 완전히 구겼네.”
루시펠의 눈앞에 이터의 모습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치욕적이다. 밀리는 승부였던 데다 상처까지 입었다. 이데아로크의 육체로서, 그 권능을 가지고 살아오던 그로서는 처음 당해 보는 굴욕에 절로 이가 갈렸다. 펜릴을 빼앗지 못한 것의 열 배는 열 받는 일이었다.
“기대하고 있는 게 좋아, 이터. 난 당하고는 못사는 성미거든. 이 빚은 마흔 다섯 배로 갚아줄 테다.”
‘그럼 조금 장난을 쳐보도록 할까?’
루시펠은 히죽 웃으며 손을 저었다. 허공에서 다크 로드 캘릭스가 나타났다. 루시펠은 팔에 살짝 상처를 내어 성배 안에 떨어뜨렸다. 성배 안에 가득 찬 검은 기운에 루시펠의 피가 스며들었다.
“우선 다크 로드 캘릭스가 만들어내는 암흑의 기운에 내 피를 더하고…….”
쿠우우.
루시펠의 피가 섞인 검은 기운이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루시펠은 그것을 바닥에 부었다. 검은 기운이 순식간에 바닥에 스며들며 검은 공간을 만들었다. 허공에서 나타난 악령의 지팡이가 루시펠의 손에 들렸다.
“이 솔 이터의 마력을 주입하면…….”
검은 공간의 지면에 솔 이터가 닿았다. 동시에 방 안을 휩쓰는 무시무시한 마나의 돌풍. 주변의 기둥이 흔들릴 정도로 강렬하게 뿜어져 나오는 바람 사이로 무언가가 몸을 일으켰다. 그것은 크고 작은 네 명의 인형이었다.
어둠에 가려 그 모습이 잘 보이지 않는 넷을 보며 루시펠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짜잔! 루시펠님의 부하 완성. 날림제작이긴 하지만 이 정도면 꽤 쓸 만하게 만들어졌지?”
“날림제작이라니… 상당히 무책임한 말입니다, 보스.”
네 인형 중 하나가 불만 어린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런 불만을 루시펠은 가볍게 씹어버렸다.
“시끄러. 너희의 임무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
루시펠의 질문과 함께 네 존재들은 합창하듯 입을 모았다.
“가즈 블레이드, 그리고 펜릴의 탈환.”
“거기에 덧붙여서 이터라는 꼬맹이의 말살.”
“단, 루시펠님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만큼 실컷 장난치고 괴롭혀준 다음에 없애버릴 것.”
그들의 대답이 만족스러운지 루시펠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잘 알고 있네. 그럼 가서 이터에게 인사해 주도록 해. 내 성의를 듬뿍 담아서. 알겠지?”
“네.”
그들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요란한 폭발음이 일어나며 성이 뒤흔들렸다. 자욱하게 깔린 먼지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걷혔다. 네 명의 인형은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콜록! 요란한 녀석들, 센스 없긴. 보통은 이럴 때는 소리 없이 사라지는 거라고. 뭐, 상관없나?”
다시 적막에 잠긴 방 안에서 루시펠은 왕좌에 몸을 기대앉았다.
“그럼 나는 느긋하게 앉아서 기다려볼까?”
그렇게 루시펠이 푹 쉬려고 할 때였다.
[루시펠…….]파치직.
검은 어둠 한가운데에서 푸른 뇌전이 일어났다. 어둠을 찢은 그것은 곧 갑주를 입은 기사의 형체를 이루었다. 루시펠이 눈을 번쩍 떴다.
‘이 목소리는?’
“부르셨습니까.”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난 루시펠이 기사를 향해 한 쪽 무릎을 꿇었다. 긴장 어린 그 얼굴에 늘 보이던 장난스러운 미소는 온데간데없었다. 루시펠이 머리를 조아리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위대하신 나이트여!”
푸른 뇌전이 위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 모양이로군.]“그, 그렇지 않습니다. 명하신 일은 문제없이 진행 중입니다. 예상치 못한 방해가 있지만 이미 나머지 조각들의 위치는 모두 확인했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시면 곧 모든 조각을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루시펠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뇌전의 기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래, 그 예상치 못한 방해라는 건 계획에 지장 없는 것인가?]루시펠은 황송하다는 듯 머리를 조아리며 답했다.
“작은 오차일 뿐입니다. 심려치 마옵소서.”
[네가 하는 일이니 더는 묻지 않겠다. 하지만 이 이상 지체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명심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푸른 뇌전의 기사는 처음 나타날 때처럼 강렬한 푸른빛을 터뜨리며 흩어졌다. 흩어지는 뇌전 사이로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때가 다가오고 있다, 루시펠. 이데아로크의 힘을 깨워라. 우리 주인의 염을 실현하는 거다.]“복명!”
푸른빛의 뇌전은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그 빛이 사라졌음에도 루시펠은 한참을 무릎 꿇은 자세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맡겨만 주십시오, 나이트여. 마스터의 염원은 반드시 이 루시펠이…….”
짙은 어둠 속에 루시펠의 맹세가 낮게 울려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