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eror of Demon Flames RAW novel - Chapter 8
마염의 황제 00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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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발길이 자주 닿는 마을 한복판에는 상가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중 2층짜리 건물. 간판에는 ‘PUB’이라고 적혀 있었다.
펍은 낮인데도 불구하고 꽤 많은 손님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펍에서는 요리도 판매하고 있었기에 비단 술자리를 찾지 않더라도 식사하러 온 손님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본연의 목적인 술자리를 위해 온 이도 있었다.
한 청년이 바에 앉아 리모스 15년산을 잔에 따르고 있었다. 목 언저리까지 내려오는 곱슬곱슬한 금빛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 아름다운 외모는 필경 귀족의 자제인 듯 보였지만 그가 입고 있는 망토와 가죽옷 차림이 그의 비범함을 가리고 있었다.
그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었다.
“술 맛이 좋군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이군요.”
영업용 미소로 답하는 바텐더의 말에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바르텐듀안 10년산에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하지만, 주 구매 대상의 수준이나 싸구려라는 걸 고려해 볼 때 충분히 맛있는 술이지요.”
“하… 하하, 그렇습니까.”
‘대낮부터 술이나 퍼마시는 놈이 무슨 수준이니 싸구려니 하는 거야?’
웬 괴상한 놈인가 싶지만 바텐더는 영업용 미소를 잊지 않았다. 어쨌거나 상대는 손님이니까.
술잔을 비운 청년이 상념에 젖은 얼굴로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가운데 커다란 붉은 보석을 박아놓은 목걸이는 그냥 보아도 고급품으로 보였다.
바텐더가 웃으며 물었다.
“애인이 준 선물인 모양이죠?”
청년은 쓰게 웃으며 답했다.
“어머님의 유품이오.”
“아! 이런 실례가… 죄, 죄송합니다.”
“괜찮소. 신경 쓰지 말고 술이나 한 병 더 주시오.”
청년은 다시 술잔을 채웠다.
조용히 술잔을 따르던 청년이 문득 입을 열었다.
“너희 셋, 방해하지 말도록. 지금은 내가 기분이 좋으니 조용히 사라지면 없었던 일로 하겠다.”
바텐더는 눈을 멀뚱히 떴다. 셋이라니. 바에는 청년과 자신 말고는 아무도 없는데?
‘설마 그거 먹고 벌써 취했나?’
그때였다. 주위에 아무것도 없던 바닥에서 인영 하나가 벌떡 일어났다. 그와 함께 천장에서도 그림자 하나가 뛰어내렸다. 마지막 인영은 바텐더의 옆에서 튀어나왔다.
바텐더는 흠칫 놀랐다. 바로 옆에 뭔가 있다는 기척 같은 건 느끼지도 못했는데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지? 하나같이 흑의로 몸을 감싼 세 명의 어쌔신. 위장을 푼 그들은 술잔을 기울이는 청년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들었다.
“죽어라!”
세 명의 어쌔신이 잔혹한 암수를 펼쳤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 제대로 공격도 취하기 전에 그들 셋의 몸이 하늘로 붕 떴다가 바닥에 처박혔다.
일순간 어쌔신들은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몰라 눈을 껌뻑거렸다. 그들의 타깃인 청년이 다시 술 한 잔을 따르며 물었다.
“아직 안 꺼졌나?”
“……!”
깜짝 놀란 어쌔신들은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다는 걸 깨달은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일부는 가게 밖으로 빠져나가기도 했다.
회심의 첫 기습은 이미 물 건너가 버렸다. 어쌔신들은 죽기 살기로 덤벼들었다.
청년은 피하지 않고 술을 마셨다. 대신 그의 왼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허리춤에 매어둔 검을 검집째 꺼내 든 그는 순식간에 양 옆에서 다가오는 어쌔신 둘의 옆구리를 찔렀다.
“크아아악!”
갈비뼈가 부러졌는지 어쌔신들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이놈!”
동료 둘이 쓰러지는 것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기회 삼아 마지막 어쌔신이 맹공을 날렸다.
청년은 살짝 옆으로 물러나며 망토를 풀어 어쌔신에게 던졌다. 순간 망토에 의해 시야가 가려진 어쌔신은 망토를 걷으려고 애썼다.
“주인장, 이 술통도 달아놓으시오.”
와직!
커다란 나무 술통을 들어 그대로 내리찍는 청년. 경쾌한 소리와 함께 술통이 산산이 터져나갔다. 어쌔신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처박혔다.
청년은 비틀거리면서 일어나는 세 명의 어쌔신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네 주군에게 전해라. 페이샨은 멸망했으니 그레이센은 조용히 살고 싶다 했다고 말이야. 조용히 사는 걸 방해하는 건 상관없지만 계속 이렇게 찔러대면…….”
그레이센의 눈동자가 싸늘한 빛을 뿜었다.
“그쪽도 결코 조용히 살아갈 수 없을 거라고.”
어쌔신들은 서로가 버팀목이 되어 비틀거리며 가게 밖으로 도망쳤다.
그들이 사라진 것을 본 청년은 손을 털고 다시 바에 앉아 술을 따랐다. 주변이 조용해지니 사라져 버린 술맛도 다시 돌아오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가게 안은 또다시 누군가의 목소리로 시끄러워졌다.
“또 여기 계셨던 겁니까! 그레이센 지그프리드 왕자님!”
펍의 문을 박차고 한 사내가 뛰어 들어왔다. 하얀 사제복에 검은 뿔테 안경을 낀, 다소 순박해 보이는 인상의 청년. 신성사제 론 바할트는 바에 앉아 술을 홀짝이는 자신의 군주를 향해 소리쳤다.
그러나 그레이센이라 불린 청년은 신경도 쓰지 않고 다시 술잔을 따랐다.
성큼성큼 걸어온 론 바할트는 그의 곁에서 험악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그렇게 말씀드렸는데도 또 이런 데서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계시다니… 왕국을 멸망시킨 적들의 눈과 귀가 도처에 깔려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걸 자각하고 계시긴 한 겁니까?”
“이미 왔다 갔어. 그리고 자각은 그렇게 큰 소리로 정체를 까발리고 다니는 네가 해야 할 거 같은데.”
듣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리며 술잔을 따르는 그레이센이다.
하지만 론 역시 오늘은 단단히 마음을 먹고 나왔다.
“왕국 페이샨은 힘이 없어 멸망했습니다. 선왕과 백성들은 모든 것을 왕자님에게 맡기고 마지막까지 싸웠습니다. 그런데 왕자님은 매일같이 이렇게 술만 마시고 계시다니……. 당신에게서는 그런 많은 이들의 희생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군요.”
론의 따끔한 질책에 그레이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훗! 이래서 내시들이란.”
“누가 내시입니까!”
발끈하는 론을 보며 그레이센은 깜짝 놀란 듯 물었다.
“음? 너 한 쪽은 달려 있었던 거냐?”
“두 쪽 다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전 사제입니다. 환관이 아니라!”
그레이센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게 그거지.”
“달라요, 전혀!”
악을 쓰는 론을 무시하며 그레이센은 술잔을 따랐다. 그는 안주로 내어놓은 과일을 하나 씹어먹으며 말했다.
“어쨌든 네 말은 그거잖아.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고 국왕과 백성들의 기대를 만족시켜야 할 내가 대낮부터 술집에서 술이나 마시고 있으니 한심하다는 거 아냐.”
너무 적나라하게 지적해 오는 그레이센의 말에 론은 고개를 끄덕였다.
“음, 뭐 대충은 그렇습니다.”
그레이센은 다시 어깨를 으쓱하며 비웃었다.
“훗! 이래서 내시들이란.”
큭! 내시가 아니라니까.
그레이센은 핏대가 오르는 론의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잘 들어, 론. 일이라는 것은 본디 순서가 있는 법이다. 왕국을 되찾을 방법은 하늘에서 떨어지나? ‘그것’의 행방을 찾을 때까지 이 여행이 앞으로 얼마나 길어질지 예상할 수 없어. 조급한 건 이해하지만 지금 내가 나대봤자 좋을 건 아무것도 없다구. 오히려 이 정도면 위장으로 그만 아닌가? 술에 전 망국의 왕자라… 어떤 병신이 위협이라고 생각하겠어?”
“하지만 왕자님.”
“그리고 그들의 희생을 잊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걱정 마라.”
그레이센의 푸른 눈동자가 증오로 가득 찼다. 너무나도 차가우면서 뜨거운 증오였다. 그레이센은 말했다.
“내 가슴속에, 내 눈에 단 한시도 그때의 일을 새겨놓지 않은 적이 없으니까.”
“왕자님…….”
망나니인 줄만 알았던 그레이센이 이렇게 무게 있는 말을 하자 론은 약간 놀랐다.
‘왕자님께서는 이미 다 생각하고 계셨던 거구나. 그런데 난 부관이면서도 그런 마음을 모르고…….’
그레이센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훗! 하여간 이래서 내시들이란.”
“그 소리 그만 좀 해! 이 미친 병신 새끼야!”
말을 내뱉은 론은 흠칫했다.
‘아차, 지문으로 쓸 말을 입밖에 내뱉어 버렸어!’
“…….”
그러나 이미 늦었다. 싸늘히 노려보는 그레이센의 시선에 론은 알아서 대가리를 박았다.
술잔을 빙글 돌리며 그레이센이 물었다.
“요즘 꽤 편한가보다? 성에서 기어나오니 왕자가 왕자로 안 보이니?”
“아, 아닙니다.”
“복창 소리 봐라.”
“아닙니다!”
그레이센은 혀를 찼다.
“하여간 요즘 내시 놈들은 개념이 없다니까.”
주군의 말에 론은 미칠 지경이었다. 전 내시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게 론이 땅에 머리를 박고 땀을 뻘뻘 흘리고 있을 때 또다시 입구가 열렸다.
“어서 오세요.”
펍 안으로 들어오는 것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새끈한 미녀와 크고 작은 짐을 어깨에 걸친 어린 소년이었다.
바에 자리를 잡고 앉은 미녀가 주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마을엔 변변한 식당 하나 없는 건가? 하나같이 허름한 곳뿐이네. 할 수 없네. 여기서라도 먹지, 뭐. 웨이터.”
“무엇을 드릴까요, 손님?”
반듯한 옷차림으로 나온 웨이터에게 로자리아는 주문했다.
“그냥 이 집에서 가장 맛있는 걸로 만들어줘. 참, 이애는 보기랑은 달리 잘 먹으니까 한 3인분으로 준비해 주고.”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주문을 받은 웨이터는 주방으로 사라졌다.
바에 앉아 무료한 얼굴로 주위를 보던 로자리아는 진열된 술병을 바라보았다.
‘리모스 15년산이라……. 흠. 모처럼 밖으로 나왔는데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 해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로자리아는 마지막으로 남은 리모스 15년산 술병을 잡았다.
“응?”
“음?”
술병은 하난데 붙잡은 손은 둘이다. 하나는 로자리아,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그레이센의 손이었다.
로자리아는 호호 웃으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제가 먼저 잡은 거 같네요.”
“미안하지만 난 아까부터 그걸 노리고 있었소. 그러니 내가 먼저요.”
슬쩍 치켜 올라가려는 눈꼬리를 내리며 로자리아는 다시 한 번 더 미소를 지었다.
“어머. 그래도 레이디 퍼스트라는 말도 있는데 신사 분께서 양보를 해주시죠?”
“레이디? 대낮부터 술 먹는 레이디도 있소?”
파치직.
둘 사이로 전기가 번쩍였다.
로자리아는 코웃음을 치며 병을 잡아당겼다.
“아무튼 이건 내가 먼저 잡았으니 내가 마시겠어요.”
“여자 주제에 팔 힘이 장난이 아니군. 나도 이 술은 마셔야겠소.”
끄응.
로자리아의 인상이 변했다. 그녀는 병을 잡은 반대 손으로 사내를 향해 주문을 걸었다.
“정말 귀찮게 구네. 돼지로 변해 버려.”
“음?”
뭔가 불길함을 느낀 사내는 재빨리 고개를 틀어 피했다. 공격선상에 있던 바텐더가 로자리아의 주문에 맞아 돼지로 변했다.
“쳇, 빗나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