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eror of Demon Flames RAW novel - Chapter 81
마염의 황제 081화
“베가스!”
바닥에 엎드린 루시펠이 몸을 일으키며 손을 휘휘 저었다.
“괜찮아, 괜찮아.”
일어난 루시펠은 턱을 쓰다듬으며 베가스를 내려다보았다.
“흐음! 이터를 상대하고 싶다라. 나쁠 건 없겠지만 난 결과를 알아. 몇 번을 덤벼봤자 네 실력으로 쨉도 안 될 텐데, 괜찮겠어?”
“그래서 한 가지 더 간청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베가스가 머리를 조아리며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 몸에 가해져 있는 금제를 풀어주십시오.”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그런 짓을 하면…….”
쉐드가 새파래진 얼굴로 소리쳤다. 루시펠이 당황하는 그를 흘겨보며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만있어 봐. 내가 이야기를 듣고 있잖아.”
“죄송합니다, 보스.”
“흐음…….”
루시펠은 골똘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네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민지 알고 있어? 너희는 원래 형체가 없는 존재야. 그걸 주술을 써서 그릇을 만들고 그 안에 담아 움직이고 있는 거란 말이지. 그 그릇은 네 몸. 즉 금제라는 건 네 몸뚱이. 그걸 풀어버리면 네 몸은 결국 사라져 버리고 말아. 어떻게 잘 싸워서 이터를 쓰러뜨린다고 해도 너 역시 결국 흔적도 없어져 버린다고. 그래도 상관없는 거야?”
“…….”
베가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각오 어린 모습이 재미있는지 루시펠은 키득거렸다.
“헤에, 꽤 맺힌 게 많았었나 보네, 베가스. 얼마나 쥐어터졌기에. 쯧쯧, 좋아. 원하는 대로 해주지. 금제를 푸는 것을 허락하겠어. 이터를 상대로 마음껏 힘을 사용해 봐.”
“감사합니다, 주인이시여…….”
“그럼 여기서 이야기는 끝. 자, 다들 빨리 움직이라고.”
루시펠 나이츠들은 공손히 인사를 올리며 물러났다. 그들의 기척이 멀리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루시펠은 혼잣말 했다.
“죽어도 좋으니까 이터와 싸울 수 있게 금제를 풀어달라라…….”
루시펠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나야 아쉬울 것 없어.”
‘이번 게임이 끝나면 너희의 역할도 이제 끝날 테니까.’
이터와 싸우다 소멸해 버리든 말든 이미 흥미를 잃은 장난감이었다. 루시펠은 조용히 주먹을 움켜쥐며 미소 지었다.
“그럼 불러볼까?”
***
타닥타닥.
싸늘한 밤공기가 숲을 감싼다. 짐승들의 울음소리마저 잠들어 버린 깊고 고요한 숲. 마치 온 세상이 침묵에 쌓여버린 것 같은 지독한 적막. 오직 홀로 어둠을 비추는 작은 모닥불만이 이 적막과 싸우고 있었다.
불씨가 꺼져가는 모닥불을 살리며 로자리아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도 야영인가? 이제 그만 푹신한 침대에서 자고 싶은데.”
“서쪽 방면에는 숲밖에 없으니까요. 지도에도 이 근방에 마을은 없으니.”
곁에서 엘리스가 거들었다.
로자리아는 피곤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다시 불씨를 살렸다.
일주일.
에이다 마을을 벗어난 이터 일행의 여행은 일주일간 계속되었다.
서쪽에서 느껴지는 루시펠의 흔적을 찾기 위해 일행은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숲은 끝날 줄 몰랐다.
마을도, 푹신한 침대도, 따뜻한 식사도 없었다. 목욕도 마찬가지다. 시냇가에서 대충 씻고 때우는 것도 정도가 있지, 남자들이야 대충 씻어도 된다지만 로자리아 그녀는 여자였다. 이런 여행이 계속되면 피곤한 건 당연한 일이다.
“이터, 뭔가 느껴지는 건 없니?”
로자리아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터에게 물었다. 루시펠의 위치만 알아낼 수 있다면 일행이 이렇게 사람 흔적이라곤 하나도 없는 음침한 숲을 헤맬 일도 없다.
하지만 이터는 그녀의 기대를 깨뜨렸다.
“펜릴은 아직까지 서쪽만 가리키고 있다. 그 이상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휴우! 아직도 한참 남았구나.”
길게 탄식하며 자리에 침낭을 덮고 드러눕는 로자리아. 아무래도 이 딱딱한 바닥과는 당분간 더 친하게 지내야 할 모양이었다.
“……?”
휘이잉!
로자리아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이터의 왼손에서 환한 빛이 터져나왔다. 나무에 기대어 세워놓았던 펜릴이 블레이드를 떨며 날카로운 울음을 토했다.
“깜짝이야! 이게 갑자기 왜 이래?”
“펜릴이 떨고 있어?”
펜릴이 울고 있다. 그리고 이터의 왼손에서 공명하듯 터져나오는 빛. 이터는 그 손으로 펜릴을 움켜쥐었다. 펜릴과 자신이 이렇게 반응할 존재는 단 하나뿐이다.
“놈이다.”
이터가 일행을 바라보며 말했다.
“펜릴이 루시펠의 기척을 느낀 거야.”
말을 맺음과 동시에 이터는 화살처럼 숲 속을 쏘아져 나갔다. 난데없는 상황에 놀라고 있던 일행은 이터가 달려가자 허겁지겁 뒤를 쫓았다.
“이터, 기다려! 같이 가자고!”
수풀을 헤친 이터는 끝이 탁 트인 절벽 앞에 섰다. 펜릴의 울림과 공명은 처음보다 더 커져 있었다.
이터는 펜릴을 허공에 들어 기척이 느껴지는 위치를 찾았다. 일행은 그가 파악을 마쳤을 때가 되어서야 겨우 절벽에 도착했다. 이터는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깝지는 않아. 하지만 빠르게 움직이면 내일까지는 당도할 수 있는 거리다.”
“정말 루시펠의 기척을 느낀 거야? 틀림없어?”
이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느낌, 이 떨림… 틀림없는 녀석이다.”
“그럼 이런 곳에서 시간을 더 낭비할 때가 아니군. 서두르는 게 좋겠어.”
그레이센의 말에 일행은 모두 동의했다. 루시펠의 기척은 언제 다시 사라져 버릴지 알 수 없다.
이터 일행은 잠자는 것도 잊은 채 숲길을 헤치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펜릴을 쥔 이터는 선두에서 일행을 이끌었다.
하지만 루시펠의 기척을 발견한 것이 무조건 좋은 일은 아니었다. 이터는 미간을 좁혔다.
‘어째서지? 어째서 루시펠은 지금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거지?’
그 전에 루시펠이 이런 기운을 내놓고 있었다면 자신이 못 느꼈을 리가 없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났다는 것은 두 가지 가설을 유추할 수 있었다. 하나는 지금까지 루시펠은 펜릴이나 자신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거의 완벽하게 기척을 감추고 있었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그렇다면 루시펠은 지금 일부러 일행을 유인하기 위해서 갈무리했던 기운을 꺼냈다는 사실이었다.
일부러 유인한다는 것은 목적이 있다는 의미.
‘하지만 그렇다고 가지 않을 수는 없다.’
꽁꽁 숨어 있던 루시펠이 마침내 직접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함정이라고 해도 동시에 루시펠을 쓰러뜨릴 수 있는 기회도 되는 것이다.
장난스럽게 자신을 도발하는 루시펠의 모습이 떠오른다. 펜릴을 쥐고 있는 이터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좋다. 어떤 함정이든 내놔봐라, 루시펠.’
이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모조리 박살내 주겠다!’
루시펠을 추적하는 일행의 걸음은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그렇게 밤을 꼬박 숲을 헤치고 나온 일행은 마침내 산을 벗어나 넓게 펼쳐진 평원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 거대한 성과 마을이 보였다. 펜릴은 그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곳인가?”
로자리아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저기가 루시펠의 본거지…….”
일행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토록 찾던 곳이지만 막상 마주하자 주눅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저곳에 루시펠 나이츠와 이터조차 고전했다는 루시펠이 있다. 곧 이어 벌어질 싸움은 얼마나 대단할까. 자신들은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일행의 머리는 복잡했다.
“마지막이다. 별거 없어. 루시펠 녀석만 해치우면 모두 끝난다.”
“이터…….”
“후다닥 해치우고.”
이터가 일행을 바라보며 히죽 웃으며 말했다.
“맛있는 밥 먹으러 가자.”
이터의 여유 있는 한마디가 일행에게 활력을 불어넣었다. 엘리스는 환하게 웃으며 외쳤다.
“넵!”
마지막 싸움. 이것만 끝나면 이데아로크를 둘러싼 길었던 싸움도 막을 내린다. 다른 일행도 고개를 끄덕였다.
로자리아는 팔을 걷어붙이며 기합을 넣었다.
“좋아, 여기까지 와서 쫄고 있을 순 없지. 단번에 쳐부수자고!”
그 말과 함께 이터 일행은 전력을 다해 루시펠의 성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후.
“그런데…….”
로자리아가 멍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정말 여기가 루시펠의 본거지?”
거대한 날개를 펼치며 입에서 불을 토하는 괴물들은 없었다. 기분 나쁜 언데드 해골 병사도, 흔하디흔한 고블린 같은 마물들도 없었다.
손으로 입을 가린 중년의 부인들이 웃는 얼굴로 수다를 떨며 지나간다. 손님들에게 배달할 물건들을 잔뜩 짊어진 소년이 거리를 가로질러 달렸고, 길가에 노점을 펼쳐놓은 상인들은 앞 다투어 자신들의 물건을 사라고 소리를 질렀다. 어딜 봐도 지금까지 지나왔던 마을과 달라 보이는 점은 없었다.
엘리스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주위를 보며 말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마을 같은데요.”
우우웅…….
이터는 펜릴을 바라보았다. 빛과 함께 공명은 계속되고 있었다.
“하지만 펜릴은 이곳을 가리키고 있다. 여기가 틀림없어.”
“그럼 루시펠은 이 마을 안에 본거지를 만들었다는 거야? 안 어울리네, 정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인상을 찡그리는 로자리아의 곁에서 누군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저런. 너무 틀에 갇혀 사는 것은 좋지 않아, 로자리아.”
흠칫.
로자리아는 재빨리 옆으로 물러났다. 언제 다가왔는지 그녀의 곁에는 이조르네가 서 있었다.
“이조르네!”
“악당들은 언제나 음침하고 아무도 살지 않을 것 같은 성에 틀어박혀 있어야 한다… 그건 그저 고정관념이라고. 주위를 둘러봐. 얼마나 좋아? 사람 사는 냄새도 나고, 활기도 넘치고. 정말 좋은 마을 같지 않아?”
이조르네가 혼자 말을 잇는 동안 일행은 재빨리 그녀를 빙 둘러싸 포위했다. 그 모습을 보며 이조르네는 항복했다는 듯 양손을 드는 시늉을 하며 웃었다.
“이런, 이런. 너무 서두르신다.”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냐, 너희.”
이조르네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글쎄? 그야 나도 모르지. 너희를 초대한 건 내가 아니라 루시펠님이니까 말이야. 난 그분의 명령으로 너희를 마중 나온 것뿐이라고. 알았으면 이제 그만 손님답게 예의를 차려주지 않겠어?”
웃으면서 말했지만 일행, 특히 로자리아는 더욱 험악한 표정으로 으르렁거렸다.
“예의 좋아하네. 너희한테 당한 게 한두 번이야? 이번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이것 참.”
이조르네는 웃으며 부채를 활짝 펼쳤다. 부채의 끝에 희미하지만 불길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해볼 생각이야? 뭐, 상관은 없지만.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까지 휩쓸려 버릴 텐데 괜찮겠어?”
그러나 로자리아는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알 게 뭐야. 진짜 사람이라는 증거도 없잖아. 이것도 너희가 만들어낸 가짠지 어떻게 알아?”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좋을 대로.”
이조르네와 일행 사이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것을 깨뜨린 것은 이터였다. 이터는 이조르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