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eror of Demon Flames RAW novel - Chapter 82
마염의 황제 082화
“쓸데없는 싸움에는 관심 없다. 우리가 찾는 것은 루시펠과 루시펠이 가진 나머지 조각. 너희 역시 노리고 있는 것은 우리가 가진 조각일 터. 장난은 집어치우고 결판을 내자.”
훗.
이조르네는 부채를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
“역시 와일드하다니까, 이터는. 난 이렇게 화끈한 남자가 좋더라. 로자리아가 부러운걸.”
“시끄러워.”
로자리아가 투덜거렸다. 엘리스가 그녀를 거들었다.
“맞아요, 시끄럽습니다. 이터 씨는 로자리아 씨가 아니라 엘리스의 남자라구요. 그러니까 엘리스가 부러운 게 맞는 겁니다.”
“…….”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로자리아는 이마가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들에게서 시선을 거둔 이조르네는 이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 말이 맞아, 이터. 우리도 쓸데없는 데 힘을 빼고 싶지는 않아. 그러니까 조용히 따라와 주지 않겠어? 루시펠님은 오랜 여행에 지친 너희가 쉴 자리를 마련해 주시려는 것뿐이니까.”
“그런 말을 누가 믿겠어! 지금까지 해온 게 있는데.”
소리치는 로자리아를 보며 이조르네는 미소를 지었다.
“믿든 말든 마음대로 해. 하지만 이건 알아둬. 너희와 결판을 내는 건 그 누구보다도 루시펠님께서 바라고 계시다는 걸 말이야. 그분께서 너희를 초대하는 이유는 단 하나.”
이조르네는 부채로 이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최상의 컨디션인 이터를 쓰러뜨리고 싶다’ 그것뿐이야.”
이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따라가도록 하지.”
“말도 안 돼. 이터, 넌 저런 말을 믿겠다는 거야?”
깜짝 놀란 로자리아가 이터를 말렸지만 이터는 고개를 저었다.
“믿고 안 믿고는 둘째 문제다. 이런 곳에서 실랑이 벌여봤자 피차 시간낭비일 뿐이다.”
“하지만 그래도 함정이면…….”
“괜찮다.”
만약에 함정이라면…….
이터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이조르네를 바라보았다.
“다 쓸어버리면 된다. 루시펠까지 합해서 이 녀석들 전부 다.”
“…….”
이조르네는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등줄기에 오한이 일었다. 이터의 끝 모를 자신감. 그것이 그녀를 위축되게 만들었다.
그녀는 애써 그 기분을 털어내며 부채를 펼쳤다.
“기고만장하군. 호호. 하지만 지금은 싸우러 온 것이 아니니까. 그럼 따라오도록 하렴.”
이조르네가 일행을 이끈 것은 마을 너머에 위치한 거대한 성이었다.
마을만큼이나 성 역시 일반적인 영주들의 성과 다를 것이 없었다. 성문에 앉아 불을 뿜는 흑룡이나 철기사들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속살이 훤히 비치는 가운 차림의 아리따운 여성들과 새끈한 제복 차림의 남자들이 일행을 맞이했다. 이조르네가 그들을 소개했다.
“이 성의 하인들이다. 이들이 너희의 시중을 들 거야. 필요한 게 있으면 얘들을 통해서 주문하라고.”
시녀들이 합창하듯 웃으며 입을 모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조르네가 로자리아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늘씬한 미남도 붙여놨으니까 즐겁게 즐기라고.”
“뭐, 뭔 소리를 하는 거야!”
“후훗, 내숭 떨긴. 그럼 푹 쉬도록 해.”
퍼엉!
짤막한 윙크와 함께 요란한 폭발을 일으키며 사라지는 이조르네. 그와 함께 하인들이 일행을 이끌었다. 금발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귀족 타입의 하인이 로자리아의 손을 이끌며 치아가 환히 드러나는 미소를 지었다.
“전 라쉬펠트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 아, 네.”
벌어진 와이셔츠 사이로 속이 다 들여다보인다. 로자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벌게진 얼굴로 그의 뒤를 따랐다.
‘이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겠군.’
“아가씨, 제 이름은…….”
“꺄악! 안 돼요. 저리 가요, 훠이! 훠이! 엘리스에게는 이터 씨가 있단 말이에요.”
막 자신의 소개를 하려던 남성은 식은땀을 흘렸다.
“아니, 저… 그게 안내를…….”
“시끄러워요. 뿌뿌. 아무것도 안 들려요, 뿌!”
엘리스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장로님, 어째서 저는 이렇게 인간들의 관심을 받는 걸까요? 단순히 엘프이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미모 때문인가요?”
“후자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두 분은 저희를 따라오세요.”
그레이센과 이터를 아름다운 시녀들이 안내했다. 론이 무거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죠…….”
그는 자신의 팔짱을 끼고 콧소리를 내는 남자 하인을 가리키며 물었다.
“어째서 저는 남자가 안내해 주는 겁니까?”
남자 하인이 론의 뺨을 꼬집으며 수선을 떨었다.
“어머! 신관님은 피부가 어쩜 이리도 고우세요? 팩이라도 하시는 건가요? 화장품은 뭐 쓰세요?”
“…….”
그것도 뭔가 남자가 아닌 것 같은 남자가!
그레이센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어느 쪽이든 상관없잖아. 내시 주제에 따지기는.”
“내시가 아니라니까요!”
그 말에 남자 하인은 론의 팔짱을 풀며 비웃는 듯한 얼굴로 콧방귀를 뀌었다.
“뭐야, 당신? 내시였어?”
“당신한테까지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아!”
뭔가 어수선한 분위기는 계속되었다.
일행에게는 특별한 내빈들에게만 지급되는 호화로운 방이 제공되었다. 한 명씩 서로 다른 방이 주어졌고, 각 방마다 넓은 침대와 보석들로 장식된 화려한 가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향이 나는 마법이라도 걸어두었는지 방에는 피로가 풀릴 것 같은 은은한 향기가 풍겼다.
“일단 오랜 여행을 하느라 고단하실 테니 짐은 여기에 두시고 먼저 목욕이라도 즐기지 않으시겠습니까? 성 안에 온천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성 안에 온천이라니. 그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해 꼬질꼬질해져 있던 일행에게는 반가운 소리였다.
뜨끈한 탕 안에 몸을 담근 엘리스가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감탄했다.
“따뜻해! 여기 탕 굉장히 따뜻한걸요. 목욕이라는 건 이렇게 좋은 거였구나. 그렇죠, 로자리아 씨?”
“으…응.”
엘리스의 곁에서 몸을 담근 로자리아는 손에 쥔 가즈 블레이드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얼떨결에 나도 씻고는 있지만… 이게 대체 뭐 하는 건지. 일단 혹시나 해서 가즈 블레이드는 들고 왔는데…….’
그녀는 탕 안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적진 한가운데에서 목욕이라. 전혀 실감이 나질 않는단 말이야.”
“꺄악! 그렇다고 날 탕 안에다가 집어넣으면 어떻게 해. 날이 녹슬기라도 하면 니가 책임질 거야?”
탕 속에서 고요한 주위를 돌아보며 론이 입을 열었다.
“정말 아무 일도 생기지 않으니까 더 신경 쓰이는군요. 이 적막이.”
그레이센은 말없이 눈을 감은 채 탕에 등을 기대었다.
“생각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오히려 더 둔해진다. 일이 벌어지면 그때 생각해도 늦지 않다. 지금은 그냥 쉬도록 해.”
“그런 것보다 말이야.”
로자리아가 꿈틀거리는 미간을 치켜 들며 물었다.
“도대체 왜 너희가 우리랑 같은 탕을 쓰고 있는 거야?”
그레이센은 웃으며 손을 저었다.
“신경 쓸 것 없어, 신경 쓸 것 없어. 그냥 편안히 쉬라고.”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있나! 아무리 여자같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지, 한 탕을 남녀가 같이 쓴다는 건!”
엘리스가 조용히 로자리아를 끌어당겼다. 그녀의 시선은 탕 안에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이터를 향하고 있었다. 얼굴이 붉어진 그녀는 쌍코피를 흘리고 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
한편, 그레이센은 론을 보며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그는 론의 거기(?)를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네 녀석, 꽤 튼실했구나. 이런 녀석이 내시라니. 하녀들이 많이 아쉬워했겠군.”
“이건 성희롱이라고요. 적진 안에서까지 이러깁니까.”
“그것보다, 근본적으로 여자들 앞에서 그런 거 드러내지 마!”
로자리아가 발끈했다. 도대체 이놈의 남자들은 여자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야? 탕 안에 앉은 이터는 배를 쓸어내렸다.
꼬르르륵!
“배고프다.”
론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제일 긴장감 없는 사람은 따로 있는 모양이군요.”
여행의 묵은 때를 지워낸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저녁 만찬이었다. 여전히 수상해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로자리아와 느긋하게 여행을 즐기는 그레이센. 엘리스는 소풍이라도 나온 듯한 표정으로 복도를 뛰어다녔다. 물론 그 중에서 식사 시간을 가장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이터였다.
하지만 넓디넓은 식당 안엔 이미 일행보다 먼저 와서 식사를 하는 이가 있었다. 그것은 단정하게 빗어내린 푸른 머리와 복장의 어린 소년이었다.
“누구야, 이 꼬마는?”
처음 보는 아이의 모습에 로자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를 보는 이터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이터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루시펠.”
“뭐라고?”
일행은 깜짝 놀랐다.
“이 녀석이 루시펠?”
“이런 꼬마가?”
이터에게 이야기로만 들었지, 실제로 루시펠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던 일행이었다. 하지만 설마 이터만큼이나 어린 꼬맹이일 줄은. 이런 꼬마가 이데아로크의 다섯 번째 조각이라는 말인가.
식사를 하던 그가 고개를 들고는 웃는 얼굴로 일행을 맞이했다.
“안녕, 어서들 와. 내가 루시펠이야. 하지만 꼬마라는 말은 안 좋아하니까 하지 마. 죽여버릴지도 몰라. 훗.”
저런 살벌한 말을 잘도 웃으면서 하는군. 그는 식탁에 앉는 이터를 보며 입을 열었다.
“무척 오랜만에 보네, 이터. 그동안 이조르네 들에게서 이야기는 듣고 있었지만. 어때, 잘 지냈나?”
아차.
루시펠은 이터 일행을 보며 깜빡했다는 듯 머리를 두드렸다.
“아, 이런! 내가 실례를 했네. 다들 먼 길 오느라 배가 고플 텐데 일단 식사부터 해. 식어버리면 맛없을 테니까.”
로자리아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태평하게 식사나 하고 있으라고? 독이 들어 있을지 어떻게 알고 먹으라는 거야?”
우걱우걱.
이터는 무척 맛있게 접시를 비우고 있었다. 로자리아는 식은땀을 흘렸다.
“네가 먹고 있으면 어떻게 해?”
루시펠은 싱긋 웃으며 포크를 마주 들었다.
“그럼 나도 먹고 있던 게 있어서 마저 먹을게. 너희도 얼른 식사해.”
우걱우걱.
그 말과 함께 루시펠도 식사를 계속했다. 이터와 루시펠의 접시 비우는 소리가 식당 안에 가득 울려퍼졌다. 론은 합장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음… 그럼 저도 실례.”
“와아! 대단한 진수성찬이네요. 엘리스, 숲에선 이런 거 본 적이 없어요.”
이터 일행을 만난 뒤에도 싸구려 여관에서는 맛보지 못한 먹거리들이다. 그레이센은 와인을 한잔 마시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흠. 만찬 풀코스에는 못 미치지만 나쁘지는 않군.”
오직 로자리아만 불편한 얼굴이었다.
‘정말 하나 정도는 같이 긴장 좀 해줘.’
지익. 지익.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자르며 루시펠이 입을 열었다.
“그래, 그동안 어땠나. 실력은 좀 늘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