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eror of Demon Flames RAW novel - Chapter 88
마염의 황제 088화
그곳에는 푹신한 의자에 기대어 앉아 수정구로 상황을 지켜보던 루시펠이 있었다. 그는 지겨운 듯이 연신 하품을 하며 바라보고 있었다.
“분발하라고, 이터. 그런 녀석들을 상대하는데 그렇게 오래 걸린다는 건 수준 미달이라는 이야기잖아. 기다리고 있는 나도 생각해 줘야 할 거 아냐?”
흥.
루시펠의 입가에 짧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너를 박살내 버리는 건 내 몫이니까 말이야.”
Chapter 4-2. 전력승부
자욱한 연기들이 걷혀가는 콜로세움. 마주한 이터와 베가스 사이로 긴장된 분위기가 흘렀다. 하지만 단순히 분위기만 무거워진 것은 아니었다. 작은 공기의 떨림 하나까지 전해졌다. 베가스는 직감적으로 지금부터가 이터의 진면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훗.”
베가스는 미소를 지었다. 진정한 이터의 힘을 마주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흥분에 몸이 절로 떨렸다. 그는 디바이더를 땅에 박으며 손으로 털었다.
“그거 알아? 난 처음부터 네 녀석을 베어버리는 것보다 주먹으로 박살내고 싶었다는걸.”
“기대되는군.”
그 말이 시작이었다. 이터와 베가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서로의 주먹이 정면에서 맞부딪치며 응축된 투기를 폭발시켰다.
쿠르르르.
주먹을 맞대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두 사람. 서로를 바라보는 둘은 동시에 씨익 웃음을 지었다.
“지워라, 불!”
주먹을 떼고 물러서기가 무섭게 이터는 베가스를 향해 폭염구를 날렸다. 하지만 베가스는 침착하게 흑투기를 전개해 날아드는 폭염을 허공에서 터트렸다. 그 사이를 파고 들어오는 이터.
“어딜!”
베가스는 자신의 품을 파고드는 이터를 향해 망설임 없이 주먹을 뻗었다. 그러나 주먹의 끝에 이터는 닿지 않았다. 이터는 어느새 그의 손등 위에 올라서 있었다.
“이…….”
퍼억!
이터가 올라선 것을 깨닫기가 무섭게 이터의 발이 턱을 후려 찬다. 그 충격에 베가스의 고개가 뒤로 꺾이며 균형이 흐트러졌다.
이터는 그런 베가스를 향해 왼손을 뻗었다.
“큭.”
“중압.”
터엉!
폭발하듯이 터져 나온 무형의 힘의 파도가 베가스의 몸에 작렬했다. 그 힘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베가스는 뒤로 밀려나가 한쪽 모퉁이 벽에 처박혔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벽. 이터는 그 곳을 향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이터가 벽 앞에 도착하려는 순간, 무너진 잔해 안에서 거대한 흑투기가 일어나 이터를 집어삼켜 버렸다.
“……!”
씨익.
흑투기가 이터를 삼키는 것을 보며 잔해를 헤치고 일어난 베가스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누군가가 위에서 그의 머리를 두드렸다. 베가스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자신의 어깨를 밟고 올라선 이터의 얼굴이 보였다.
이터는 짧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안녕.”
퍼억!
이터의 주먹이 베가스의 머리에 정통으로 작렬했다. 고개와 함께 앞으로 고꾸라진 베가스는 바닥에 처박혔다.
“이 자식!”
노성을 터트리며 벌떡 일어나 주먹을 휘두르는 베가스. 하지만 이터는 어느새 물러난 뒤였다. 그리고 베가스의 틈이 보이기가 무섭게 다시 전광석화처럼 작렬하는 주먹.
“크…크윽!”
한 번 발동한 주먹은 멈추지 않았다. 속사포처럼 연달아 뻗어나가는 일격. 베가스는 그저 그 주먹에 맥없이 유린당할 뿐이었다. 마침내 마지막 일격을 맞고 바닥을 굴렀을 때, 그는 다시 육체의 제어권을 찾을 수가 있었다.
쓰러져 먼지투성이가 된 그를 보며 이터가 웃었다.
“꽤 더러워졌는걸.”
“이놈!”
퍼억!
베가스의 눈이 팽창했다. 복부를 치고 들어오는 이터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대신 엄청난 통증이 복부를 찔러 들어왔다.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을 정도의 충격. 베가스가 할 수 있는 것은 신음을 내뱉는 것뿐이었다.
“우… 으윽.”
주춤하는 베가스 앞에는 이터가 있었다. 이터는 인상이 일그러진 베가스를 보며 말했다.
“왜 그래? 아까처럼 웃어봐.”
동시에 번개처럼 움직이는 이터의 주먹. 베가스는 감히 피할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주먹이 그리는 궤적에 따라 베가스의 고개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 이!”
퍼어엉!
정신없이 두들겨 맞던 베가스가 괴성을 토하며 이터를 향해 달려들었다.
“이 빌어먹을 자식이!”
하지만 이터는 베가스의 공격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래로 눕듯이 움직여 공격을 피해낸 이터는 양손으로 땅을 받치고 일어나며 발로 베가스의 얼굴을 찍어버렸다. 베가스의 코가 완전히 눌려져 내렸다. 코피가 터진 베가스의 얼굴은 순식간에 피떡이 되어버렸다. 이터는 그런 베가스를 재밌다는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크으… 으윽!”
얼굴을 부여잡고 신음성을 토해내는 베가스. 동시에 기습적으로 가만히 서 있는 이터를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이거나 먹어라!”
퍼억!
근거리에서 펼친 기습적인 발차기, 하지만 이터는 가볍게 팔을 들어올리는 것만으로 그것을 간단히 막아버렸다.
“아니?”
씨익.
이터는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베가스와 똑같이 몸을 옆으로 돌려 발차기를 날렸다.
퍼억!
“크윽!”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발차기인데 위력은 비교도 되지 않는다. 이터의 일격에 얻어맞은 베가스는 볼썽사나운 모습으로 바닥에 처박혀 버렸다.
아직도 1%의 데미지도 입지 않은 이터가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말도 안 돼. 이럴 수가… 이럴 수가!”
다가오는 이터를 보며 베가스는 두려움과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따라갈 수가 없다. 그렇게 힘을 전개했는데도, 그렇게 공격했는데도.
‘녀석에게는 나의 단 하나의 일격도 미치지 못한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없어. 난… 난 분명 루시펠님께 받은 모든 힘을 개방했다. 그런데도 이기지 못할 리가 없다!”
“분명 파워는 비슷해.”
오열하는 베가스를 마주하며 이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승부를 결정짓는 것은 힘만이 아니다.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도 영향을 미치지. 즉, 네가 나와 대등할 수 있었던 것은 힘뿐. 나머지는 모두 미치지 못했다는 거다.”
“…….”
힘은 대등했지만 실력이 받쳐주지 못했다는 말인가.
베가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한심하군. 그렇게 날뛰었는데도 이것뿐이라니.”
‘하지만…….’
콰아아아!
바닥에 꽂힌 디바이더를 뽑은 베가스가 남아 있는 투기를 몽땅 전개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네 녀석을 상대로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확인하고야 말겠다. 바로 이 일격으로!”
다시 하늘이 어두워진다. 태양을 가리고 밀려오는 검은 먹구름.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구름이 초전압의 낙뢰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더 베가스는 번개의 마법검을 움켜쥐었다.
“폭뢰검!”
이미 분열하기 시작한 그의 몸에선 아까보다 더 많은 검은 입자들이 뿜어져 나왔다. 이터에게 당한 상처와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폭뢰검이 그의 생명력을 더 빨리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베가스는 물러나지 않았다. 생명의 불은 꺼져가고 있었지만 그는 이터와 싸우는 길을 택했다. 그런 베가스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조르네는 눈살을 찌푸렸다.
“베가스… 저 바보.”
베가스의 의도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폭뢰검은 베가스가 할 수 있는 최강의 일격, 최후의 발악인 것이다. 말릴 수는 없었다. 이미 목숨을 버리기로 작정한 저 남자에게 자신이 뭐라 말할 자격은 없었다.
단 하나 할 수 있는 거라곤 그의 승리를 빌어주는 것뿐이다.
베가스의 폭뢰검을 묵묵하게 지켜보던 이터가 손을 뻗었다. 그러자 바닥에 박혀 있던 기간틱 블레이드가 이터의 손에 날아들어 잡혔다.
“좋은 각오다. 그렇다면 나도 그에 걸맞는 답을 주지.”
우우웅.
순백의 섬광이 검날을 휘감으며 뻗어나간다. 기간틱 블레이드를 감싸고 터져나가는 날카로운 검기. 베가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순수한 마나로 만들어진 날카로운 검. 검기의 극에 달한… 말 그대로 궁극의 검기, 오러 블레이드(Aura Blade)!
기간틱 블레이드에 오러를 맺은 이터는 왼손으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지워라, 불. 부러져라, 천풍.”
순백의 오러에 서로 다른 두 개의 주문이 섞여들었다. 불꽃과 바람. 그리고 오러가 만들어내는 열풍의 검. 이터는 검을 들며 외쳤다.
“진폭마검(眞暴魔劍)!”
쿠르르.
열풍과 낙뢰. 두 개의 마법검. 서로 다른 에너지를 뿜어내는 두 개의 검이 한자리에 모였다. 베가스가 물었다.
“그것이 네 최고의 일격인가?”
“그렇다.”
베가스는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거면 된다. 그거면 충분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는 미소를 지운 채 폭뢰검을 쥐고 돌진했다. 이터 역시 진폭마검으로 마주 달려나갔다.
“하아아앗!”
동시에 터져나오는 둘의 기합성. 그와 함께 두 개의 마법검이 부딪혔다.
콰르릉!
작렬하는 위력을 견디지 못한 콜로세움의 외벽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관중석은 마법이 걸려 있어 그 충격을 받지 않았지만 그 외의 곳은 모두 붕괴하고 있었다. 치솟는 열기 사이로 붉은 섬광과 푸른 뇌전이 맞붙는다. 나선을 그리며 뻗어나가던 두 개의 빛은 어느 순간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자욱한 연기가 사라지는 콜로세움의 정중앙에는 이터와 베가스가 서로 등을 마주한 채로 검을 내리고 있었다.
“스, 승부는 어떻게 됐지?”
베가스가 미소지었다.
“멋지군. 진… 폭마검은…….”
촤아악!
베가스의 가슴이 갈라지며 검은 피가 허공에 흩어졌다. 산산이 부서진 디바이더가 바닥을 굴렀고 베가스의 몸이 천천히 대자로 무너져 내렸다.
“베가스!”
[베가스 데미지 37% 체력 0 패배.]들려오는 데미지 판정을 들으며 베가스는 실소했다.
‘패배인가…….’
쓰러진 그의 눈에 푸른 하늘이 담겼다.
“결국 나는 단 한 점도 닿을 수 없었군.”
“아니.”
이터가 자신의 어깨를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에는 아주 가는 날카로운 혈선 하나가 그어져 있었다.
“한 점 정도는 닿았다.”
[이터 데미지 1%]퍼엉.
판정과 함께 베가스와 이터의 데미지를 계산한 수의 마을사람들이 먼지로 변해 사라졌다. 이터는 그들을 뒤로한 채로 베가스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넌 대단했다. 네 투혼은 잊지 않겠다.”
“닿았던 건가. 크큭. 강한 상대와 싸워 죽을 수 있는 것만큼 전사에게 영광스러운 일도 없지. 하지만 각오해 두는 것이 좋아, 이터.”
몸이 바스러져 간다. 마지막 남아 있던 생명력을 쥐어짜낸 검은 입자가 베가스의 몸을 뒤덮는다. 그의 육신이 서서히 소멸해 갔다. 먼지처럼 사라지는 베가스의 육신 너머로 그의 마지막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펠님은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분이시니…….”
“기억해 두도록 하겠다.”
베가스는 사라졌다. 콜로세움의 중앙에 남은 것은 이터 하나뿐. 이터의 승리였다. 엘리스가 환한 얼굴로 웃으며 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