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eror of Demon Flames RAW novel - Chapter 90
마염의 황제 090화
그래봤자 그 기술도.
“쓰기 전에 막아버리면 그만이다!”
“크아아아!”
쉐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닥을 박차고 나아가는 올가. 순식간에 그레이센과 거리를 좁힌 올가의 손톱이 어두운 통로 위에서 번쩍였다.
“위험합니다, 왕자님!”
“…….”
통로를 울리는 론의 비명소리. 하지만 그레이센은 당황하지 않았다. 대신 무척이나 침착하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힘차게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검 끝에 피어오른 푸르스름한 검기가 올가의 몸을 베었다.
“카앙!”
콰앙!
갑옷에 부딪힌 투기가 폭발을 일으켰고 동시에 올가의 몸이 통로 한편을 무너뜨리며 처박혔다. 부서지는 잔해가 올가의 몸을 뒤덮어 버렸다.
“아니?”
설마 그레이센이 올가를 날려버릴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쉐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레이센은 그런 쉐드를 향해 검을 겨누며 말했다.
“얕보지 않는 게 좋아. 나도 기본적으로는 검기를 다룰 줄 아는 검사니까.”
그렇게 말한 그레이센은 아직도 자신을 보고 있는 이터들을 재촉했다.
“뭘 꾸물거리고 있어. 빨리 가라니까.”
잠시 망설이던 엘리스는 빛의 활을 꺼내들었다.
“전 남겠어요.”
“엘리스?”
“저 역시 그레이센 씨의 생각과 같아요. 루시펠 앞에서는 지금의 제 힘은 이터 씨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겠죠. 제가 할 수 있는 건 이터 씨가 나갈 길을 열어드리는 것뿐. 그것뿐이에요.”
론도 그레이센의 곁에 섰다.
“저도 왕자님과 함께하겠습니다.”
“흥.”
그레이센은 짧게 코웃음쳤다.
“마음대로 해.”
“그렇다면 나도…….”
로자리아도 남으려 했다. 그런 이유라면 자신 역시 이터에게 방해가 될 뿐이니. 하지만 엘리스는 고개를 저었다.
“로자리아 씨는 안 돼요. 가즈 블레이드를 가지고 있는 건 로자리아 씨잖아요? 이터 씨와 함께 있어야 한다고요.”
“그거야 이터에게 줘버리면 되잖아.”
이터가 무뚝뚝하게 답했다.
“내가 가지고 있으면 루시펠과 싸우는데 방해가 된다.”
“실례네! 멋대로 곤란한 물건 취급하지 말란 말이야!”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는 가즈 블레이드의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로자리아는 고민했다. 확실히 그 말이 틀리진 않다. 별다른 능력이 없는 가즈 블레이드는 이터에게는 짐이 될 뿐이니까.
“하지만…….”
“가자, 로자리아.”
이터가 로자리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여행의 마지막. 함께 보러 가자.”
“이터.”
그때와 같았다. 자신들이 제일 처음을 여행을 떠났었던 순간. 그때도 이터와 자신 그리고 가즈 블레이드가 있었다. 그 셋이 다시 여행의 종착점을 찍으려 하는 것이다. 엘리스가 웃으며 시위를 당겼다.
“로자리아 씨, 이터 씨를 부탁해요.”
“크르르.”
무너진 잔해가 들썩였다. 올가가 다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레이센은 이터와 로자리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놈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려면 서둘러.”
로자리아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이렇게 물러나는 건 싫지만 어쩔 수 없지.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겠어. 쓸데없이 죽지나 말라고. 추하니까.”
로자리아는 이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둘은 쉐드를 지나쳐 통로의 너머로 힘차게 달려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그레이센은 차갑게 웃었다.
“죽을 정도로 몰리면 알아서 도망친다. 쓸데없는 걱정이다.”
그리고 그레이센은 론에게 신호를 보냈다.
“론.”
“네.”
우우웅.
론의 손이 천천히 허공에 진을 펼쳤다. 은은하게 흘러가는 빛의 궤적이 허공에 빛의 성스러운 진을 만들어냈다.
론은 그 빛의 진을 완성하며 주문을 외웠다.
“나 여기에 서서 당신을 부르니. 미천한 몸에 거해주옵소서. 빛의 자락 속에 울려 퍼지는 열두 아리아보다 더 거룩하신 분이여. 디센트 프럼 헤븐(Descent From Heaven).”
휘이이이!
강렬한 빛이 그레이센의 몸을 휘감았다. 성령의 빛, 디센트 프럼 헤븐. 온몸에 충만한 힘을 느끼며 그레이센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어느새 잔해를 헤치고 일어난 올가가 자신을 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검기로 작렬한 갑주 부분에는 작은 상처 하나 없었다. 그레이센은 표정을 굳히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터… 그리고 로자리아, 만약 여기서 살아난다면 그때는 부탁 하나만 하도록 하지.’
멸망해 버린 왕국, 페이샨을 되살리기 위해 힘을 빌려달라고.
“간다, 론. 엘리스!”
“네!”
그리고 그레이센은 올가를 향해 돌진했다.
***
탁. 탁. 탁.
통로는 계속 되었다. 한참을 앞을 향해 달려나갔는데도 끝이 보이질 않는 통로. 숨이 턱 끝에 닿기 시작했지만 로자리아는 멈출 수 없었다. 지금 이러고 있을 때도 그레이센이나 다른 이들이 사투를 펼치고 있다. 서두르지 않으면…….
그때, 저 멀리 앞에 누군가가 비쳤다.
‘누가 있어?’
붉게 흘러내리는 가운으로 아슬아슬하게 몸을 가린 요염한 여인. 불의 정령, 프리야를 어깨에 앉히고 부채를 펼쳐든 그녀는 불꽃의 마법사, 이조르네였다.
로자리아는 제자리에 멈춰 서며 눈을 크게 떴다.
“이조르네!”
로자리아가 자신을 알아보자 이조르네는 부채를 접으며 짧게 미소를 지었다.
“이제 오는 거야? 생각보다 조금 시간이 걸렸네.”
통로에 단신으로 나와 자신과 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가? 로자리아가 눈을 부릅뜨고 날카롭게 물었다.
“네 녀석도 원수를 갚으려는 건가?”
훗.
이조르네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나를 쉐드가 올가 같은 그런 불량품인 녀석들과 비교하지 말아줘. 나는 주인이신 루시펠님의 의지가 있을 때만 움직인다. 결코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않지. 내가 여기에 나온 것은 너희들을 마중하기 위한 것뿐이야.”
바로…….
이조르네는 말을 이었다.
“루시펠님이 계신 장소에.”
이조르네의 말에 로자리아의 표정이 흔들렸다. 우리를 안내하러 나왔다고? 루시펠이 있는 장소에?
“진심으로 하는 소리냐?”
“속고만 살았니? 내가 왜 너희들에게 거짓말을 하겠어.”
“…….”
그 말에 로자리아의 얼굴은 더욱더 불신의 표정으로 바뀌었다. 지금까지 해온 것을 생각해 보라고.
‘아무래도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거 같은데.’
하지만 고민하는 로자리아에 반해 의외로 이터는 간단히 답했다.
“좋아, 안내해라.”
“이터!”
이조르네는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역시 현명해, 이터는. 함정이 아니면 그걸로 OK. 만약 함정이라고 해도 여기까지 들어온 이상 돌아나갈 길은 없다. 피할 수 없다면 정면으로 깨부숴 버리겠다는 건가? 과연 루시펠님이 겨뤄보고 싶어할 만해.”
그리고…….
“베가스도.”
베가스의 이름을 부를 때의 이조르네의 표정이 미미하게 떨렸다. 하지만 그것은 곧 사라졌다. 얼음처럼 표정을 지운 이조르네는 등을 돌려 앞으로 나아갔다.
“쓸데없는 잡담은 이만하고 서두르지. 루시펠님께서 무척이나 기다리고 계시니까. 빨리 따라오라고.”
이조르네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미로 같은 통로를 거침없이 걸어나갔다. 그녀의 뒤를 따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위의 어둠은 걷혀가고 어느샌가 통로의 끝이 보였다.
통로의 밖으로 나왔을 때 제일 먼저 보인 것은 푸른 하늘과 날카롭게 솟아 있는 크고 작은 첨탑들이었다.
그리고 저 멀리 앞에서 작은 날개와 꼬리를 가진 푸른 머리의 꼬마 악마가 잘 익은 사과 하나를 움켜쥔 채 자신들을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하하. 기다리고 있었어. 어서 오라고, 이터.”
악의 없어 보이는 천진난만한 미소. 하지만 이 소년이야말로 악신 이데아로크의 육체이자 세계를 파멸시키려는 장본인이었다. 이터는 그를 발견하기가 무섭게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자세를 잡았다.
“루시펠.”
“워, 워. 진정해. 그렇게 서두를 건 없잖아? 느긋하게 가자고. 시간은 아직 많이 있으니까.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고.”
“하고 싶은 이야기?”
루시펠은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잠시 뜸을 들이던 그는 곧 이터의 눈을 마주하며 질문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이터, 내 부하가 되어볼 생각 없나?”
이터는 생각도 할 것 없다는 듯 답했다.
“거절한다.”
너무 빠른 대답에 루시펠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큭. 이거 한 방 먹었네. 예상은 했지만 너무 그렇게 잘라서 대답하진 말라고. 질문한 쪽이 무안해지잖아.”
루시펠은 장난스러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물론 나도 얼른 널 박살내 버리고 싶어. 사실 그런 순간을 고대해 오기도 했고. 하지만…….”
“하지만?”
“아깝단 말이야.”
“아까워?”
루시펠은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푸르게 펼쳐진 하늘이 그의 눈 안에 쏟아져 들어왔다. 루시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힘은 놀라울 정도야, 이터. 내게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인간들 중에서는 가히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봉인을 푼 베가스를 그렇게 박살낼 수 있는 녀석은 지상은 물론 천계, 마계를 통틀어도 그리 많지 않단 말이야. 너라면 충분히 써먹을 수 있는 전력이 될 수 있어.”
로자리아가 이터와 루시펠 사이로 끼어들며 말했다.
“이터의 힘을 얻어서 무슨 짓을 할 생각이지? 세계를 파괴하는데 써먹기라도 할 셈인가?”
“훗. 너 같은 인간들에게 보여지는 그림은 그 정도겠지.”
루시펠은 짧게 미소를 지으며 검지손가락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세계 파괴는 시작일 뿐이야. 모든 어긋난 것들을 정방향으로 돌리는 것. 이 일은 위대한 ‘그분’의 뜻이다.”
‘그분?’
그분의 뜻이라니.
‘설마 루시펠… 이데아로크의 뒤에 또 다른 뭔가 배후가 있다는 건가?’
하지만 루시펠은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미소가 가지 않은 얼굴로 이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너에게 기회를 주는 거야, 이터. 나에게 대항하면 너와 네 동료들을 기다리는 건 죽음뿐. 하지만 네가 내 부하가 된다면 닥쳐올 환난에서 적어도 네 동료들만은 무사할 수 있게 해주마. 너와 그들에게는 최고의 대우를 약속하지. 물론 너에게는 원하는 만큼의 강자들과 싸울 수 있는 기회도 선물하겠어.”
로자리아가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말도 안 돼. 그런 걸로 이터가…….”
섬뜩.
온몸을 에워싸는 살기에 로자리아는 순간 움찔했다. 루시펠이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난 지금 네가 아니라 이터에게 묻고 있는 거야. 마녀 아줌마는 잠깐 기다려주겠어?”
“으…….”
그녀로서는 루시펠을 제대로 마주하는 것도 할 수 없었다. 로자리아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루시펠은 다시 이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 이터. 어떻게 할래? 이대로 뻔히 보이는 승부에 목숨을 걸겠어? 그렇지 않으면 내 부하가 될래?”
짧은 침묵.
이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예전에도 그런 제의를 한 녀석이 있었지. 대답은 똑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