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eror of Demon Flames RAW novel - Chapter 96
마염의 황제 096화
“걸렸구나.”
빛나는 주먹이 올가의 인중을 정확히 노리고 날아들었다. 그리고 작렬했다.
퍼어억!
“정말 이것 참…….”
그레이센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올가의 인중에 작렬한 자신의 주먹을 바라보았다. 성스럽게 빛나던 광채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디센트 프럼 헤븐이 해제된 것이다.
“정말 결정적인 순간에만 이 모양이라니까.”
그와 함께 그레이센의 가슴에 올가의 손톱이 작렬했다.
투화아악!
“와…왕자님!”
새빨간 피를 뿌리며 그레이센은 뒤로 튕겨나갔다. 바닥에 처박힌 그는 기침을 토했다. 고개를 들려고 했지만 올가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젠 눈까지 흐릿해졌나. 한심하게 됐군.”
끝이다.
움직이기는커녕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몸 안의 힘이 급격히 빨려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 그레이센을 향해 올가는 걸음을 옮겼다. 이제 자신을 막을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움직이지 못하는 그레이센을 끝장내려 했다.
“크아아아!”
“멈춰.”
순간, 올가의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 동시에 그의 머리에 무언가가 닿았다.
“……?”
퍼어억!
자신의 머리에 닿는 힘의 정체를 깨닫기도 전에 올가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올가의 머리에 일격을 가한 청년이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미안. 원한은 없지만 그만 잠들어줘야겠어.”
순백의 빛으로 타오르는 검을 뽑는 청년. 그러나 그가 검을 뽑기가 무섭게 올가가 무서운 기세로 손톱을 뻗었다.
“크아아!”
“이크. 얼굴이 저렇게 망가졌는데 아직도 움직이다니?”
설마 얼굴을 찔리고도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 못 한 청년은 피해내긴 했지만 올가의 손톱에 레더 아머가 길게 베여나가 버렸다. 올가는 그가 균형을 채 잡기 전에 끝장을 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무언가 예리한 것이 그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가 몸에서 떨어져 내린다.
올가의 의식은 거기서 끝났다.
“땡큐. 덕분에 살았어.”
청년은 몸을 일으키며 자신의 동료인 여자에게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녀는 딱딱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러니까 네가 무르다는 거야. 힘쓰는 거 말고는 쓸모도 없는 남자.”
“시끄러워. 남자는 힘이란 말이야.”
입을 불퉁하게 내밀며 투덜거리던 청년이 일순 히죽 웃으며 말했다.
“아직까지 노처녀인 너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겠지만.”
“닥쳐.”
나타나자마자 순식간에 올가를 박살내 버리고는 티격태격 거리는 남녀. 그레이센은 그들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너희들은…….”
“용케 그런 몸으로 여기까지 했군.”
청년과 여자 사이로 또 다른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여자 역시 일행이 알고 있는 자였다.
얼마 전, 성기사들의 함정에 빠져서 이터와 싸웠던…….
“그때, 그 히스테리 광신녀?”
퍼억.
여인은, 아네스는 그레이센의 얼굴에 조용히 주먹을 먹였다.
“그냥 잠들어 있는 편이 좋겠군.”
“구, 구해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당신들이 어째서 여기에?”
설마 그들이 여기에 등장하리라고는 엘리스와 론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아네스는 딱딱한 어조로 답했다.
“특별히 너희들을 찾아온 건 아니야. 조사할 게 있어서 들린 것뿐. 그런데 그 꼬마는 어디 있지?”
쿠르르.
또 한 번 통로가 흔들린다. 아네스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대답은 필요 없겠군.”
아네스는 일행에게서 등을 돌린 채 통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그때까지도 티격거리던 맥스와 세레나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엘리스가 물었다.
“잠깐만요. 뭘 하시려는 거죠?”
“우리가 무엇 때문에 나타난 건지는 이미 알고 있을 텐데?”
그렇게 말한 아네스는 바닥에 쓰러진 그레이센을 힐끗 바라보며 고개를 돌렸다.
“당신들은 그곳에 있도록 해. 그런 몸으로 따라와 봤자 방해밖에 되지 않을 테니까.”
아네스 일행은 그렇게 통로를 향해 나아갔다. 그레이센은 진득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훗. 딱딱한 미녀로군. 쿨럭!”
“왕자님, 괜찮으세요?”
그레이센의 곁을 지키고 선 론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괜찮을 리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말밖에는 물어볼 것이 없었다. 할 수가 없었다.
그레이센은 피식 웃었다.
“몇 번이나 말했잖아. 난 악운이 좋다고. 이런 걸로 죽지는 않아. 하지만… 힘은 없군. 잠시 쉬어야겠어.”
그레이센은 무너진 벽 한 귀퉁이에 몸을 기댔다. 그를 바라보는 엘리스의 얼굴이 침울해 보였다.
“그레이센 씨.”
“엘프 아가씨. 여자는 나긋나긋하고 얌전한 게 최고라고.”
그레이센은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 눈에는 이미 초점이 없었다. 허나, 그레이센은 최대한 밝은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너무 기다리게 하는 것도 좋진 않겠지? 가봐. 다른 녀석이 꼬맹일 채가기 전에 캐치하라고.”
“네.”
그레이센은 눈을 감았다. 몸이 무겁다. 어서 빨리 쉬고 싶다. 따뜻한 욕조가 있는 방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문득 눈앞에 오랫 동안 보지 못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그레이센은 목에 매고 있던 어머니의 유품인 붉은 목걸이를 쥐었다.
‘죄송합니다, 두 분. 결국 우리 페이샨을 되살려내는 건 실패해 버렸네요. 저한테는 역부족이었던 걸까요.’
하지만…….
눈을 감은 그레이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왠지 편안해요.’
“그럼 난 조금 쉬어볼까.”
그 말과 함께 그레이센은 잠들었다. 얼마만에 지어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편안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엘리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레이센 씨. 편안해 보이네요…….”
“…….”
론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가 없었다. 쏟아져 나오는 눈물 때문에 한마디라도 내뱉었다가는 울음을 멈추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 론의 손을 엘리스가 조용히 잡아 주었다.
“가요, 론 씨. 그레이센 씨의 기분. 이해해 주셔야죠.”
“네.”
론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주군, 그레이센을 통로에 남겨둔 채. 그리고 결심했다. 그렇게 희생한 그레이센을 위해서라도 이터를 도와 이데아로크의 부활을 막겠다고…….
론과 엘리스는 이터가 있을 최상층을 향해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Chapter 4-5. 부활! 이데아로크
휘이이…….
어둑해진 하늘 아래로 찬바람이 불었다. 무너지고 부서진 잔해들로 엉망이 되어버린 성의 최상부.
온몸이 엉망진창인 프리야가 비틀거리며 잔해 속을 걸었다. 그곳은 이조르네가 먼지가 되어 사라진 자리였다.
프리야는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문디 같은 가시나… 누가 니멋대로 죽으뿌라고 했노. 싸가지 없는 거…….”
프리야는 잔해 속에 털썩 드러누웠다. 그의 힘도 이제 한계에 달해 있었다.
“내도 이제 움직이지는 못하겠다.”
그래도…….
프리야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이 저 멀리 폐허 속에 선 두 사람을 향했다.
“하지만 지켜는 봐줄게. 니가 그렇게 살릴라고 했던 주인의 싸움이 어찌되는지.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봐주마.”
이조르네가 목숨을 바치면서 건넨 마지막 조각. 최후의 조각은 마침내 이데아로크를 완성했다. 이터의 바로 앞에 선 이 푸른 머리의 미청년이야말로 그 결실이었던 것이다.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그를 마주한 이터가 입을 열었다.
“결국 부활해 버렸군. 그게 완전한 네 본 모습이냐, 루시펠.”
“루시펠?”
청년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루시펠은 나를 칭하는 또 다른 이름일 뿐. 내 본명이 아니야.”
그는 자신을 가리키며 선언하듯 말했다.
“내 이름은 이데아로크. 파괴신이다.”
“…….”
파괴신, 이데아로크.
이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네가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해가며 우릴 이 성으로 끌어들인 건 아니었을 거야. 5개로 나눠진 조각은 단순히 한자리에 모인다고 해서 이데아로크로 각성하진 않았을 테지. 조각들이 완전해질 수 있는 장소, 아마도 그건 여기가 네가 조각을 찢겨진 봉인된 장소였기 때문이겠지?”
“후후. 너답지 않게 머리를 굴리는군. 그래, 네 말이 맞아. 하지만 한가지가 빠진 게 있어.”
쿠르르르.
당장 낙뢰라도 떨어뜨릴 것처럼 으르렁거리는 검은 하늘. 이데아로크는 그것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섯 조각으로 나뉘어 봉인된 날로부터 5천 년이 지난 오늘이야말로 봉인의 위력이 가장 약해지는 날이었거든.”
이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주먹을 굳게 움켜쥐었다.
“널 봉인시킬 생각은 없다. 이젠 다시는 세상에 기어 나오지 못하게 완전히 박살을 내주지.”
이데아로크는 미소로 답했다.
“잘 부탁한다. 마음껏 즐길 수 있게 해줘. 오랜만에 붙은 몸이라 힘 관리가 안 되서 단번에 끝장 내버릴까봐 걱정되거든.”
쿠우우.
둘 사이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른다. 그 광경을 지켜보며 프리야는 침을 꿀꺽 삼켰다.
“드디어 시작되는구먼. 이 지상에 둘도 없는 괴물들의 싸움이.”
그리고 마침내 최종 승부가 시작되었다. 먼저 바닥을 박차고 나간 것은 이터였다.
“타아앗!”
맨주먹으로 달려드는 이터를 보며 이데아로크도 마주 손을 들어올렸다.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맺혔다.
“처음은 권법으로 승부인가? 그것도 좋지.”
어느새 바로 앞까지 도약한 이터가 주먹을 뻗었다. 이데아로크는 그것을 손바닥으로 받아내며 반대 손을 내밀어 공격했다. 이터는 그것을 옆으로 흘리며 동시에 자리를 박차고 뛰어올라 발차기를 날렸고 이데아로크는 그것을 막으며 물러섰다.
“플레어.”
화르륵!
이데아로크가 손을 뻗자 이글거리는 불길이 이터를 향해 뻗어나갔다. 이터는 빛나는 왼손을 내밀었다. 항마 능력을 가진 빛이 순식간에 플레어를 날려버렸고 그와 함께 이데아로크의 품안으로 뛰어든 이터는 불타는 손을 뻗었다.
“극렬폭염장!”
초극렬의 폭염장으로 상대를 순식간에 재로 만들어 버리는 기술, 극렬폭염장.
이에 맞서 이데아로크가 내놓은 것은 차가운 냉기를 뿜어내는 장이었다. 얼핏 보면 슈페른의 극렬한빙장과 같은 기술처럼 보였지만 위력은 비교도 할 수 없었다. 두 일격이 허공에서 맞붙는다.
퍼어엉!
열기와 한기가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수증기가 주위를 가득 메웠다. 막상막하의 위력. 손을 떼기가 무섭게 다시 둘의 권각이 얽혀 들어간다.
“타아앗!”
콰앙! 콰앙!
한 번 한 번 부딪힐 때마다 주먹이 부딪히면서 나는 소리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굉음이 들렸다. 부딪히는 둘의 투기에 멀쩡하던 첨탑들에 금이 간다.
천지가 진동하고 있었다.
퍼어억!
마지막 일격을 겨룬 둘은 동시에 멀찍이 떨어졌다.
프리야는 마른 침을 삼켰다.
“대, 대단한 싸움이구만. 호각인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