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ire of the Warm Sea RAW novel - Chapter 12
* 12화 *
“허허! 과연 훌륭하오. 내 바로 병조에 품의를 올리겠소. 공을 세운다면 이 첨사 부자의 이름을 장계의 맨 앞에 올리리다.”
“싸움이 벌어진다면 좌수백께 왜적의 수급을 30개쯤 바칠 테니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허허허! 좋소. 아주 좋소. 이 도령 자네도 잘해보게. 왜구들은 사나운 도적놈들이니 다치지 않게 몸조심하고. 자네는 우리 좌수영의 보물 아닌가?”
“감사하오이다, 좌수백 영감!”
이민호가 씩씩하게 대답하자 수사가 좌선으로 돌아갔다. 수사가 버선발로 뛰어나오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죄인의 아들에게 인사하러 수사가 직접 발걸음을 했다는 사실에 이민호는 신기하게 여겼다.
이민호의 도움으로 전라좌수영에서 사창 사업을 벌이면서 수사 심암은 재임 기간 중 크게 재산을 모았다. 좌수영 사창에 속한 자산이 시간이 갈수록 불어나고 있었으므로 심암은 앞으로 더 큰 재산을 모을 수 있다는 꿈을 꾸고 있었다.
“민망하지만 돈의 힘이란 거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장수나 관리나 아전이나 다들 아버지로서 가족을 부양해야 하니까요.”
만약 가족이 아닌 몇 대에 걸쳐 이뤄진 가문을 이끈다면 가장이 먹여 살려야 하는 가솔은 60명이나 100명을 쉽게 넘어갔다. 이들 중에 생산에 종사하는 가솔이나 노비 다수를 포함하더라도 가장의 부양책임은 막중해진다.
“뭐야? 크하하! 그런 썩어빠진 정신머리라니! 민호 너는 청백리 되기는 애당초 틀려먹었다.”
“물론 저는 관리나 장수가 되더라도 부정을 저지르지는 않겠습니다. 재산은 이미 충분히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요즘도 미친 듯이 모으는 거냐?”
“미친 듯이 많이 쓰기도 합니다.”
이민호는 부친 이응화를 따라 수영 직할 판옥선인 영3선에 승선했다. 출입문에서 내린 널빤지를 밟고 격군 갑판에 탄 다음 통로를 몇 걸음 지나 계단을 타고 상갑판에 올랐다.
“어서 오십시오, 도련님.”
“은혜를 입었는데도 오늘 처음 인사드려 죄송합니다.”
군관과 진무들이 일제히 이민호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들은 선장(船將) 겸 한후장인 이응화보다는 아들 이민호를 더 반갑게 맞아들였다. 이민호가 공적인 자리에 얼굴을 드러내는 경우가 드물어 오늘 처음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진무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민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아 이민호가 민망해 얼굴을 붉힐 정도였다.
그러나 대를 이어 수영에 소속된 아전, 진무들의 2백 년 숙원을 이민호가 풀어주고 있었기 때문에 칭찬이 과한 것은 아니었다.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수영에서 부정행위를 저지르지 않아도 되고, 사소한 비용을 두고 수졸들과 얼굴을 붉히고 싸울 일도 없어졌다. 또한 부정을 빌미로 상관에게 꼬투리 잡혀 더 나쁜 짓에 동원될 우려도 없었다. 심신이 편안해진 아전과 진무들의 얼굴은 예전에 비해 한결 밝아졌다.
잠시 후 판옥선에 무기와 군량, 물과 기본적인 땔감을 싣고 출항준비가 끝나자 좌선에 탑승한 취타대가 나발을 불고 북을 쳤다. 전부에 속한 방답전선과 여도전선이 앞서 나가고, 순서에 따라 몇 척이 출항했다. 이윽고 중위장이 탄 순천1선에 이어 수사의 좌선이 포구를 떠났다.
이민호가 탄 영3선은 후부에 속해 광양현감이 지휘하는 판옥선 다음 순서로 출항했다. 마지막으로 참퇴장이며 이민호 부친의 귀양살이 바둑 친구인 급제 최대성이 지휘하는 영2선이 포구를 떠났다.
판옥선 13척은 그보다 조금 많은 사후선들과 함께 빠른 물살이 흐르는 장군도 서쪽 물길과 경호도 북쪽을 지나 천천히 남서쪽 바다로 나아갔다. 손죽도는 흥양현에서도 한참 남쪽에 위치한 섬이었는데 현재 왜구들이 점거한 채 노략질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전라좌수영 함대는 맞바람을 맞으며 밤새도록 노를 저어 2월 19일 오후에 손죽도 북쪽 해상에 도착했다.
“녹도권관을 불러라!”
좌수영 좌선 장대에 오른 좌수사가 기패관에게 지시했다. 좌선에서 색깔이 다른 깃발을 흔드는 사이 좌수영 직할인 영 제3선에 탄 이민호가 여장에 세운 방패판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네 명이 노를 젓는 자그마한 사후선을 타고 녹도권관 이대원이 좌선 아래에 도착했다.
“녹도권관은 군령을 받으라!”
“하명하소서!”
녹색 두정갑을 차려 입은 녹도권관이 한쪽 무릎을 꿇고 명령을 받았다. 이민호는 이런 쓸데없는 절차가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좌수사의 명령은 이민호가 듣기에 전혀 뜻밖이었다. 미래에서 회귀하는 바람에 앞으로 있을 일을 다 알고 있던 부친은 그저 혀를 차기만 했다.
“녹도권관은 선봉으로서 휘하 전선을 지휘해 적진에 돌입하라!”
“그렇게 하겠습니다만, 수사 영감! 혹시 수백께서는 녹도전선 홀로 왜선들 사이로 뛰어들라 명하십니까?”
“어허! 무슨 말이 많아? 군령이라 하지 않느냐! 수사의 군령을 거부할 셈이냐? 녹도전선이 돌진하면 조만간 나머지 전선이 돌격할 예정이라 하지 않았느냐?”
“군령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다만 수졸들이 이틀 전의 전투로 피로하고 부상자가 많으니 하루만 시간을 주십시오.”
음력 2월이라 남풍이 불어 맞바람을 받느라 함대의 이동 속도는 느린 편이었다. 판옥선에 사각 돛이 두 개라 역풍을 거슬러 운항할 수 있다지만 수사가 심하게 독촉을 해서 격군들은 밤새 죽어라 노를 저어야 했다. 힘이 빠진 격군을 데리고 왜선 18척에 돌입하라는 명령은 이민호가 보기에도 영 아닌 것 같았다.
“어허! 왜적들이 상륙해 노략질하느라 정신이 없는 틈에 기습을 가해야 하느니라. 어서 북을 올리고 노를 저어 왜선을 잡지 않고 뭐하느냐? 네가 그리도 좋아하는 왜적 수급이 저 섬에 못해도 천 개나 있다. 내가 권관에게 기회를 줄 테니 혼자서 다 잡아도 좋다.”
“하아! 수백께서는 저를 미워하시더라도 죄 없는 수졸들을 죽게 하실 요량이십니까? 내일이면 후운의 병력이 소집돼 녹도2선이 이곳에 도착할 예정이니 제발 그때까지만 기다려주십시오. 게다가 이미 해가 지고 있지 않습니까?”
“말이 많다! 어서 진군하지 않으면 군령에 의거해 너를 비롯해 녹도전선의 수졸들 모두를 참수하겠다!”
“즉시 돌격하겠습니다. 하지만 지난 번 전투로 화약과 탄환을 모두 소모했으니 화약이라도 빌려주십시오. 수백! 제발 부탁드립니다.”
“에잇! 더 이상 군령 거부를 용납지 않겠다!”
수사가 환도를 빼들자 이대원이 어쩔 수 없이 사후선을 타고 녹도전선으로 돌아갔다. 판옥선에 오른 이대원이 휘하 장졸들에게 지시하자 처음에는 크게 동요가 일었다. 그러나 녹도만호진 수졸들은 이대원의 명령에 따라 남쪽으로 판옥선을 몰았다. 나머지 판옥선들은 수사의 엄명에 따라 자리를 지켰다.
“민호야. 장대로 올라오너라.”
이민호는 부친 이응화의 대솔군관 자격으로 장대에 올랐다. 이번 전투의 결과를 알고 있는 부친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시기심에 사로잡힌 절도사가 무슨 짓을 하는지 잘 지켜 보거라. 그리고 이 권관이 얼마나 잘 싸우는지도 봐둬라. 물론 그의 장렬한 최후도 잘 지켜보아라.”
전라좌수영 영3선을 지휘하며 함대에서 한후장 직책을 맡았지만 이 상황에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이응화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이번 해전의 결과를 모르는 이민호는 부친이 권한 대로 높은 장대에서 전투 장면을 지켜봤다.
단 한 척에 불과한 녹도전선이 손죽도를 향해 나아가자 왜선들이 섬 바깥으로 배를 몰고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녹도전선에서 차대전 두 발을 쏘고, 한 발이 왜선의 기둥에 꽂혀 상갑판 일부가 무너져 왜구 몇 명이 물에 빠졌다.
녹도전선에서 쓴 화약무기는 그것이 전부였다. 그 뒤부터는 칼과 창, 활과 조총이 서로를 겨눠 치열한 접전이 계속됐다. 서쪽 바다에 해가 가라앉으며 생긴 붉은 낙조 아래에서 녹도전선은 그렇게 장렬하게 싸웠다.
치열한 전투가 시작되고 얼마 후 이민호는 차마 지켜볼 수가 없어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이곳은 역사의 현장이라 이민호는 억지로 고개를 돌려 전투현장을 눈길에 담았다.
왜구들이 판옥선에 벌떼처럼 달려드는데도 녹도전선은 쉽게 점령되지 않았다. 녹도전선에 탄 수졸들은 왜선들에 포위된 채 밤새도록 싸웠다. 판옥선 겨우 한 척으로 왜선 18척을 상대하면서도 놀랍도록 잘 싸워서 해전을 처음 구경하는 이민호는 속으로 무척이나 놀랐다.
“왜구들이 탄 배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혹시 알고 있는 게 있느냐?”
“예. 단층의 작은 배는 소한, 고바야라 하고 이층짜리 큰 배는 관선, 세키부네라고 합니다. 만드는 곳마다 워낙 다양해서 표준을 삼기가 어려우나 소선은 노꾼 8에서 12명에 조총수를 포함한 병졸 4명, 대선은 노꾼 40명 이상에 병졸 10명 이상이 타는 것으로 압니다. 임진왜란 후기에는 판옥선과 상대하기 위해 대선이 커져서 나중에는 100명이 타거나 더 큰 배에는 노꾼 80명, 병졸 40명이 탄다고 들었습니다.”
“여기에는 없지만 임진년 때에는 판옥선보다 크고 위에 기와집을 지은 배도 있었다.”
“그건 안택선이라 하는데 영주나 지위가 높은 왜장이 탄 배입니다. 그러나 몇 척 없지 않습니까?”
“그래. 수전이 다 재미있었지만 그 배를 잡을 때가 가장 재미있었다. 화포로 신나게 두들기는 동안에도 왜장은 의연하게 의자에 앉아있더구나. 사부들이 일제히 활을 당겨 왜장 맞추기 내기를 했지. 한 번은 내가 이겼다. 도깨비 가면을 쓴 왜장이 이마에 화살을 맞고 으악 소리와 함께 물에 빠지더구나. 하하!”
장엄한 전투가 계속해서 이어지더라도 해가 지면서 잘 보이지 않으니 이민호와 부친은 물론 수졸들 사이에서도 슬슬 잡담이 나왔다. 밤이 깊어질수록 하품하는 수졸들도 많았다. 녹도전선의 아군들이 죽기 살기로 싸우고 있었지만 나머지 수졸들은 완전히 강 건너 불구경하는 꼴이었다.
이응화는 수사의 명령이 없어도 수졸과 격군들에게 교대로 휴식을 취할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싸움 구경이 제일 재미있는 법이라 다들 밤을 새워 구경했다. 장대 앞 부뚜막 가마솥에서 지은 밥을 나눠 먹으면서도 수졸들의 눈은 전투현장에서 떠나지 않았다.
녹도전선의 장졸들은 너무도 잘 싸웠으나 새벽녘이 되고서는 힘이 다 떨어졌다. 조총에 맞아 방패판이 부서져 나가고 여장도 도끼에 찍히거나 갈고리에 걸려 다 떨어져 나갔다. 전사자와 부상자가 절반이 넘어서자 판옥선의 방어력이 뚝 떨어지면서 사상자는 더욱 빠르게 늘어났다. 하층 갑판에서 급히 올라온 격군들이 사상자들을 대신해 싸웠으나 이들도 빠르게 창칼에 맞아 쓰러졌다.
해가 뜬 다음부터는 왜구들이 대나무 사다리를 타고 끊임없이 판옥선으로 기어올랐다. 부상을 입은 이대원과 수졸들이 악착같이 막아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만신창이가 된 판옥선이 왜구들에게 점령당하기 직전이었다.
전라좌수영은 판옥선 열세 척을 출동시켰으나 밤새도록 전투에 나선 판옥선은 녹도전선 달랑 한 척이었다. 이대원이 전라좌수사 심암에게 공을 넘기지 않은 괘씸죄로 인해 녹도전선 홀로 왜선들과 싸워야 했고, 이제 마지막 순간이 왔다.
“불쌍한 녹도권관. 멍청이 상급자 밑에서는 아무리 용감해봤자 저렇게 불행한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다. 멍청한 조정 대신들도 심 수사가 설마 저런 장수일지는 상상도 못했겠지.”
이응화가 한탄했으나 아침밥을 배불리 먹고 느긋하게 차를 마시면서 하는 말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이민호가 돼지털 칫솔로 이를 닦으면서 물었다. 도와주고 싶어도 그럴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핑계를 댔으나, 어울리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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