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ire of the Warm Sea RAW novel - Chapter 14
* 14화 *
한때 영국 여왕이 연합왕국의 여왕 겸 인도제국의 황제를 칭했다. 만약 여왕과 인도황제 제위가 분리되더라도 식민지 인도의 종주국은 여전히 영국이니 인도황제가 연합왕국 여왕을 주군으로 모셔야 한다. 남송의 황제가 요나 금의 황제 또는 몽골 칸의 종주권을 인정해 세폐를 바친 적도 있으니 왕이 황제보다 높은 관계가 형성되더라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으음. 역모를 일으키지 않아도 되니 그것도 괜찮겠구나. 조선에서 인재를 계속해서 끌어들이는 좋은 방법이야. 민호야! 나를 꼭 국태공으로 만들어다오. 너를 믿는다.”
“이왕이면 직접 왕이 되시는 것이 어때요? 화포를 탑재한 배 몇 척이면 대만이나 여송국 왕좌 정도는 쉽게 차지할 수 있습니다.”
“대만이 어딘데?”
“복건성 동쪽 팽호도에서 동쪽으로 120리쯤 더 가면 경상도 크기의 섬이 있습니다. 따뜻해서 농사짓기 좋고 무역하기에도 아주 좋은 위치에 있습니다. 원주민만 살고 있고 지금쯤은 복건성이나 광동성에서 흘러든 한족 유민이 소수가 있을 겁니다. 물론 관의 영향력은 전혀 미치지 않고 있습니다.”
“오호. 여송이란 곳은?”
“여송은 중국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라 더 좋아요. 저번에 말씀드렸다시피 4백 년 후에 여송의 인구가 일억이 된다니까요. 더 남쪽으로 내려가 브루나이 황제를 도와 해적들을 해치운 다음 야금야금 영토를 확장해 황제로 즉위할 수도 있습니다.”
여송국은 스페인이 점령 중인 필리핀 루손 섬이었다. 1624년 펑후제도를 점거한 네덜란드는 명나라 군대와 협약을 맺어 농사도 짓지 못하는 조그마한 펑후제도 대신 커다란 대만을 차지했다. 네덜란드가 플랜테이션 농업을 시작한 이후 대만에 한족 이주민이 급증했고, 1662년 정성공이 네덜란드를 쫓아내고 최초의 한족 정권을 세웠다. 그러므로 16세기까지 대만은 중국과 전혀 관계없는 땅이었다.
“내가 나이가 들었는지 이제 직접 움직이는 것은 귀찮다. 그냥 편하게 황제의 아버지이고 싶다. 우리 마누라님이 먼저 가서 섭섭하구나.”
“새 장가는 안 가세요?”
“예끼! 이놈! 내 나이가 몇인데. 혼자여도 불편하지 않다. 아들이 커 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즐겁고. 그리고 몇 년 후에는 통제대감 밑에서 신나게 싸울 수 있지 않느냐?”
“임진왜란 때는 조선 백성들의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역점을 두고 제가 전면에 나설 일은 되도록 자제하도록 하겠습니다. 조선에서 살기 힘든 유민들을 바깥으로 적당히 빼돌려 대만이나 여송을 개척할까 합니다.”
“그거 참 아쉽네. 그래도 적당히 전공을 세우도록 해라. 전공이 많을수록 전쟁 끝나고 나서 발언권이 강해지니까. 그리고 전쟁 중에 대량 발생할 유민들을 잘 다독여서 활용하도록 해라.”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조선의 유민 외에도 요동이나 일본 구주에서 노예로 팔려가는 사람들을 구해서 풀어주면 남을 사람이 절반은 될 겁니다. 고향에 돌아가더라도 다시 노예로 팔릴 사람들이니까요.”
큐슈에서는 조선에서 끌려온 포로 말고도 같은 일본인들을 노예로 외국에 많이 팔았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만주의 정세가 어지러워지면서 대량의 노예 혹은 유민이 발생할 테니 이민호 입장에서는 인력을 확충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대만이나 필리핀을 정복해 현지인을 교육시키는 방법도 있었다. 건국 초기에는 인력부족이 가장 심각한 문제였다.
그런데 순혈주의자에 가까운 부친은 조선인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줄 것을 이민호에게 요구했고, 이민호는 이 요구를 쉽게 받아들였다. 이민호도 이왕이면 말이 통하고 비슷한 문화를 가진 조선인들을 더 가깝게 여겼기 때문이다.
“어느새 왜선이 가까이 왔다. 내려가서 싸우자. 권총은 안 써야겠지?”
“혹시라도 위험해지면 쓰세요. 윗사람이 달라면 줘버리세요. 그깟 권총보다는 아버지 목숨이 훨씬 중요합니다.”
“그깟 일천 섬 짜리 권총이라. 고맙다. 조총 든 놈이 배마다 두세 명에 불과하니 활로 충분할 거다.”
이민호는 부친과 몇몇 사부(射夫)들과 함께 선미로 향했다. 판옥선에서 활을 쏘는 궁수들을 얼마 전까지 사관(射官)이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를수록 수군의 전반적인 신분이 하락하는 바람에 명칭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선수와 달리 선미에는 화포가 배치되지 않았고 여러 가지 항해용 시설들이 얽혀있어 활을 쏘기 위해 움직이기 꽤나 불편했다. 전투를 대비해 돛대 2개가 뒤로 누워있어 갑판에 틈이 많고 용꼬리 두 개가 높이 치솟아 시계를 제한했다.
“안 되겠다. 선두무상! 배를 좌로 돌려라. 도훈도! 왜선이 보이면 방포하라고 해!”
부친의 명령에 따라 타공이 키를 돌려 판옥선이 왼쪽으로 선회했다. 그리고 왜선이 화포 정면에 놓이자 판옥선 아래 갑판에서 지자, 현자총통을 발사했다.
화포 구경이 커서 화약을 많이 쓰더라도 당시 지자총통이나 현자총통의 크기 자체는 작기 때문에 4인용 큰 노를 젓는 격군들 사이에서 화포장들이 활동할 공간은 충분했다. 상갑판에서는 활과 가벼운 황자총통을 쏘고 나중에는 조총도 쏘게 된다.
– 퍼버벙!
자욱하게 퍼지는 흰 연기 사이로 노란 불꽃이 일고 시커먼 쇳덩이, 또는 커다란 나무 화살이 왜선을 향해 날아갔다. 이민호는 포격의 결과를 주시했다.
바다에 뜬 배는 좌우, 전후, 상하로 요동하기 때문에 보통 해상에서 화포 명중률은 극도로 낮았다. 그러나 100보, 즉 120미터 거리에서는 사격 경험이 풍부한 수군 화포장이라면 충분한 유효사거리였다. 차대전과 커다란 석환 서너 방을 한꺼번에 맞은 왜 소선 한 척이 단숨에 침몰했다. 물에 빠진 왜구들이 허우적거렸다.
“아까운 수급이 가라앉는구나! 아직 두 척이 남았다. 조총을 든 놈들 먼저 잡아라. 쏴라!”
– 피릭! 피리릭!
한후장 이응화의 명령에 사부들이 활을 쏘자 화살 이십여 발이 왜선을 향해 날아갔다. 왜선에 방패판을 듬성듬성 세웠으나 방패판 전면에 맞은 화살은 하나도 없었다. 왜구 조총수가 화살에 맞아 넘어지면서 간발의 차로 목표를 잃은 화살이 반대쪽 방패판 뒤에 맞은 사례가 딱 한 번 나왔다.
이민호는 조선 궁수들의 실력을 익히 봐온지라 놀라지 않았지만 여전히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서양이나 일본 같으면 전투시에 활은 고각 사격을, 머스킷이나 아퀘부스는 일렬로 서서 제압 사격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데 조선에서는 활이든 총이든 심지어 대포든 직접 조준 사격을 했다.
이민호와 부친도 열심히 화살을 재서 쏘았다. 머리띠를 감은 왜구 조총수가 고개를 들다가 이마에 화살을 맞고 쓰러진 것을 끝으로 왜선 두 척의 조총수는 모조리 죽었다. 이제 창과 칼을 든 왜구, 그리고 노를 젓는 왜구만 남았다. 물론 해적선에서 노 젓는 왜구도 역시 전투시에 칼부림을 하는 왜구였으나, 이미 화포나 화살에 맞아 절반 이상이 쓰러져 있었다.
“앞으로!”
육중한 판옥선이 왜선들을 향해 전진했다. 화살에 맞아 쓰러지는 왜구들 사이에서 장수풍뎅이 머리 같은 투구를 쓴 왜장이 칼을 뽑아 허공에 휘둘렀다. 날아오는 화살을 칼날로 쳐내는 것이 가능하긴 했지만 두세 발을 동시에 막아내는 것으로 미루어 빼어난 능력을 가진 왜장이었다. 그러나 어깨와 배를 가린 갑옷을 뚫고 화살이 박혀 있었다.
이민호는 그 왜장과 눈이 마주쳤다. 의외로 매우 젊어, 열여섯 정도 되어 보였다. 저 왜장도 이민호처럼 이번이 첫 출전일지도 몰랐다.
“크하하하하!”
젊은 왜장이 이빨을 드러내며 소리 내어 웃었다. 이민호는 잠시 혼란에 빠지며 별로 있을 법하지 않은 온갖 쓸데없는 생각을 다 했다. 그때 부친이 이민호의 어깨를 쳤다.
“어서 쏴라. 전투에서는 단 한 순간도 주저하지 마라.”
“예. 죄송합니다.”
이민호가 활을 겨누자 왜장이 눈을 부릅뜬 채 칼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왜장은 정면에서 쏜 화살을 향해 칼을 휘둘렀으나 결국 막지 못하고 가슴에 깊이 화살이 박혔다. 왜장이 화살을 여러 번 막아내자 통아를 끼워 편전을 쏠 준비를 하던 사부들이 일제히 활을 내렸다.
가슴에 화살이 박힌 젊은 왜장이 서서히 무너지면서 이민호와 다시 눈을 마주쳤다. 이민호는 왜장이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왜구에게 동정심을 느낄 필요는 전혀 없었다.
이민호는 오늘 활을 쏘아 왜구 세 명을 쓰러뜨렸다. 확실히 죽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죽었을 가능성이 컸다. 이 시대로 와서 첫 살인을 한 기분은 굉장히 찝찝했고, 세상 모든 것에 혐오감이 들었다. 그러나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기에 무의식적으로 계속 활시위를 당겨 왜구에게 화살을 퍼부었다.
그때 참퇴장이 지휘하는 판옥선이 이민호가 탄 배 옆으로 다가왔다. 판옥선 장대에는 이민호가 부친의 오두막에서 자주 봤던 급제 최대성이 서 있었다. 지정된 유배 장소를 비워두고 바둑을 두러 왔으니 실로 목숨 걸고 바둑을 두는 사람이었다.
“이 첨사! 내가 돕겠소.”
“최 만호, 잘 오셨소. 그렇게 하시오.”
판옥선 두 척이 이미 전투력과 기동력을 잃은 왜 소선 두 척을 상대로 신나게 화포와 화살을 쏴댔다. 이미 전투원 왜구들은 모두 죽었으나 노를 저어 도망가려는 왜구 반, 노를 버리고 기다란 목궁을 들고 저항하는 왜구 반으로 우왕좌왕하던 왜구들이 차례로 쓰러졌다.
이것은 이미 전투라고 할 수도 없었다. 활이나 대포를 쏘는 수졸들 입장에서는 잘 못 쏘면 장수에게 욕을 먹어야 하는 훈련 때보다 긴장감이 훨씬 덜했다.
“아! 젠장! 뭐 얻어먹을 것 있다고 왔어? 수급을 얻어봤자 수사한테 다 바쳐야하는데 말이야.”
“아버지가 아저씨를 잘 설득해주세요.”
“최 만호 말고도 이 배에 탄 놈들한테도 기름칠을 해야겠어. 잘 싸우고도 상이 없으면 불만이 많을 거야. 민호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지만 나는 선장에 불과하니 수졸들에게 너무 큰 상을 줘서는 안 된다.”
“예. 소와 돼지 몇 마리 잡아서 먹이고 사부나 사공, 화포장들에게는 집에 갖고 가라고 고기를 나눠주면 어떨까요?”
5년 전부터 이민호의 지시에 따라 집안에 소속된 마름이 좌수영성 북쪽 미평에서 소와 돼지를 치고 있었다. 소작농마다 이미 소 한 마리씩 빌려줬으니 올해부터는 송아지가 남아돌았다.
소작농은 소를 농우로 쓰고, 소에서 난 송아지를 소를 빌려준 주인이 사용료 대신 갖는 식으로 불릴 수 있었다. 부친의 땅을 붙여먹는 소작농이 아니더라도 소가 남는 한 계속 빌려줘 수를 불리고 있었다.
“충분하고도 넘치지. 사격 중지! 사후선은 수급을 모아와라!”
“예으이!”
사후선에 탄 수졸들이 신이 나서 왜선 쪽으로 노를 저었다. 참퇴장의 배에서도 사후선을 출발시켰다. 수군들이 왜 소선에 올라 죽은 자와 부상자를 가리지 않고 도끼나 칼을 내리쳐 목을 쳤다. 끔찍한 장면이라 이민호가 얼른 고개를 돌렸다.
“민호는 화살 말고 칼이나 도끼로 사람을 쳐 죽인 적은 없지?”
“예. 그런 일은 안 하렵니다.”
“끔찍하다만, 죽이는 방법이 다를 뿐 죽인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어.”
“맞는 말씀입니다만, 직접 손쓰기는 싫습니다.”
“그래. 너는 능력이 되니까 앞으로도 웬만하면 그렇게 싸워라. 너는 조선을 위해 할 일이 많으니 위험한 일은 피하는 게 좋지.”
물에 빠져 죽은 왜구의 목까지 깔끔하게 베어온 사후선 수졸들이 장대 아래까지 배를 몰고 와 이응화에게 보고했다.
“저희가 직접 수급 23개를 얻었고 참퇴장의 사후선에서 수급 열 개를 우리한테 넘겨줬습니다.”
“잘했다. 벼룩이도 낯짝이 있구먼. 도훈도! 출입문을 열고 사후선에서 왜적 수급을 옮겨 실어라. 소금에 절여 궤짝에 나눠 담아라.”
“예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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