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ire of the Warm Sea RAW novel - Chapter 15
* 15화 *
이민호는 왜구 수급을 소금에 절이는 과정을 상상하다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조선에는 아직 천일염전이 없고 암염 생산량도 거의 없어 수군이 사용하는 소금은 모두 햇볕을 받아 염분 농도를 높인 바닷물을 가마솥에 끓여 만든 자염이었다. 자염은 맛은 좋지만 생산과정에서 장작이 대량으로 소모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미네랄이 풍부한 고급 소금인 자염을 가득 부어 왜구 수급의 신선도를 유지하는 장면을 상상하던 이민호는 다시 고개를 저어 끔찍한 상상을 떨쳐내려 했다. 그러나 끔찍한 장면일수록 뇌리에 강하게 남고 자꾸 눈앞에 떠올랐다.
염화나트륨이 천천히 분해되어 왜구 수급의 피를 통해 스며든 다음 덜 굳은 혈관을 타고 뇌로 퍼져 나간 나트륨 이온이 뉴런에 작용해 왜구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장면을 상상했다. 이민호는 그 외에도 몇 가지 끔찍한 상상에 몸부림치다가 결국 토하고 말았다.
부친 이응화가 이민호의 등을 두드려주며 껄껄 웃었다.
“왜 토하는지 알겠다. 넌 상상력이 너무 풍부해.”
“꾸엑! 꾸엑!”
영3선과 영2선이 전투와 수급 획득을 마치고 함대로 돌아갔다. 판옥선 두 척이 전투하는 중에 아군 함선들은 멀찍이 떨어져 기다리고 있었다. 겁이 나서 도망가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영3선 판옥선에서 돛을 올리고 노를 저어 수사의 좌선 근처에 도달했다.
“수급을 소금에 다 절였다니 이것을 얼른 갖다 바치자. 사후선을 보내 최 만호에게도 이야기해뒀다.”
“저는 속이 불편해서 정신이 없어요.”
“수사는 나보다 너를 더 믿으니 같이 가자. 나는 귀양살이 죄인이다. 원래는 점호 때마다 권관 앞에서도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사람이야.”
갑판 아래로 내려가 격군 갑판에서 문을 열고 두 사람이 사후선에 옮겨 탔다. 이민호는 왜구 수급을 가득 담은 궤짝에서 멀어지려고 애썼다. 궤짝에서 흘러나온 피가 뚝뚝 떨어져 사후선 밑판에 번지고 있었다.
사후선이 좌선 앞에 도달하자 수사가 여장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고함을 질렀다. 이민호는 수사가 화를 내는 정확한 이유를 몇 가지로 예상하다가 그만 두었다. 따로 고민할 필요 없이 수사를 사이코패스로 여기면 간단했다고, 부친 이응화는 이런 사람들을 잘 상대할 수 있었다.
“어째서 전투를 했느냐! 한후장은 군령을 거역할 셈인가?”
“수백 영감! 저희 배에 격군이 적어 뒤처지다 보니 왜선에 따라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싸웠고, 운 좋게 왜적의 수급을 얻다 보니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 좋은 생각이란 게 뭐요? 이 첨사는 얼른 올라오시오.”
뭔가 눈치를 챈 수사의 말투가 확 달라졌다. 이민호는 부친을 따라 좌선 출입문을 타고 들어가 계단을 통해 좌선 갑판에 올랐다.
뒤이어 사후선 수졸들이 수급이 담긴 궤짝 두 개를 옮겨왔다. 이응화가 말하는 동안 수사의 눈길은 수급 궤짝에 꽂혀 있었다. 이민호는 수사가 입맛을 다시는 꼴을 봤지만 수사가 식인종이라 그런 것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수백 영감! 왜선이 물러났다지만 우리 좌수영은 녹도전선을 잃었소. 장계를 어찌 올릴 셈이시오?”
“왜선들이 물러나긴 했소? 잘 됐소. 장계야 뭐, 비록 전선 한 척을 잃었지만 왜적과 치열하게 싸워서 물리쳤다고 해야 하지 않겠소?”
“바로 그거요. 아주 좋은 생각이시오. 그러나 왜적의 수급이 없다면 상께서 우릴 의심하실 터, 이렇게 수급을 바치면 우리가 열심히 싸워 승첩을 한 것을 알아주실 것이오. 최 만호도 곧 올 테니 승첩장계를 올릴 때 이 수급 33개와 최 만호가 바칠 12개도 같이 바치시오. 물론 수백 영감이 지휘했으니 전공은 모두 수백의 것이오.”
“허허! 역시 이 첨사는 나의 속을 잘 알아주시오. 그런데 영3선에서 공을 세운 수졸들이 불만을 품지 않겠소?”
“수졸들이 포를 쏘고 활을 쏘았지만 자기가 쏜 것에 왜구가 맞은 것을 어찌 알겠소? 돼지를 잡아 배불리 먹일 터이니 아랫것들의 불만은 없을 것임을 이 죄인이 장담하오이다.”
“고맙소. 첨사만 믿겠소.”
그러나 유럽 군대와 달리 조선군은 활이든 포든 조준 사격을 하니 자기가 올린 전과를 거의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도 수사는 모른 척하고 넘어갔다. 수사는 수급을 바침으로써 얻을 전공과 포상, 승급에만 관심이 있었다.
좌수영에 돌아오는 길에 이응화가 상갑판에서 왜구들과 싸웠던 수졸들을 모아 설득했다. 비록 선장에 한후장이지만 이응화는 귀양살이하는 죄인 신분이라 수졸들에게 하는 말투부터 조심스러웠다.
“오늘 다들 아주 잘 싸워주었네. 그러나 우리가 얻은 수급은 모두 수사 영감께 바치기로 했네.”
“아니! 그게 말이 됩니까? 기껏 싸운 우리를 두고 수사가 전공을 독차지하다니요!”
“불만이 있는 것은 아네. 그러나 녹도전선이 왜 혼자 싸우게 됐는지 자네들도 알고 있지 않은가? 수사 영감에게 찍히면 우리만 죽어갈 걸세.”
“험! 험! 그건 안 되죠.”
수졸들이 억지로 불만을 누그러뜨리는 것을 지켜보던 이응화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민호는 속으로 혀를 찼다.
“그리고 녹도전선의 이 권관과 수졸들이 떼죽음을 당했는데 자네들만 상을 받기도 미안하지 않은가? 그래서 수급은 모두 수사에게 바치는 대신, 열심히 싸운 자네들을 위해 내가 사재를 털어 소와 돼지를 잡기로 했네. 격군들에게도 돼지를 잡아 배불리 먹이겠지만 자네들에게는 고기를 넉넉히 싸들고 가게 해주겠네. 전공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더라도, 어떤가?”
“뭐, 그 정도면 됐습니다. 사실 고마운 일입니다, 첨사 나리.”
“그렇죠. 수졸이 군공을 세워봤자 알아주지도 않고, 기껏해야 쓸모없는 품계 아니면 수군 근무 일수나 올려주는 식이니 차라리 고기가 훨씬 낫죠.”
“다들 고맙네. 불만이 있더라도 참게. 그리고 집에 돌아가걸랑 이번 일은 모르는 척해주게.”
이응화가 수졸들에게 입을 닫아줄 것을 부탁했다. 영3선에 탄 수졸들은 대부분 남원부나 광주목 출신들인데 몇몇은 멀리 전주에서 온 자들도 있었다. 부친이 장대로 돌아오자 이민호가 물었다.
“아버지! 수졸들이 수십 명인데 과연 비밀을 지켜줄까요?”
“훗! 다들 입을 다물면 큰 일 나지. 저 수졸들이 집에 돌아가면 심 수사의 비리를 열심히 떠들어줄 거야. 선비들이 수졸들 이야기를 듣고 벌떼같이 상소를 올린 다음에야 심 수사가 탄핵될 것이다.”
“아버지는 능구렁이십니다.”
“조직 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이 정도는 다들 할 수 있다. 그런데 너는 심 수사를 탄핵하는 일에 절대로 이름이 드러나서는 안 된다. 심 수사의 동생이 심대라고 하는 유명한 학자인데 조정에서 큰 힘을 갖고 있으니 나중에 다른 엉뚱한 이유로 너에게 해코지 할까 두렵다. 심 수사가 결국은 참수당하겠지만 꽤나 오래 버틸 테니 그 전이든 후든 절대 나서지 마라. 알겠느냐?”
“사회 생활하는 방법이군요.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이 끝나면 너는 평택에 가서 이 권관의 집안을 좀 돌봐줘라. 이 권관, 아니 이 만호의 부인이 지금 수태 중이라 조만간 유복자를 낳을 것이다. 쯧쯧!”
녹도권관 이대원은 어렸을 적 부모를 잃었고 두 번째 정실부인, 용인 이 씨는 임신 중이었다. 이대원의 본가인 평택에 함평 이 씨의 집성촌이 있어 유가족의 생활이 곤란해지지는 않겠지만 부친은 이번 일을 이민호가 명성을 쌓을 수 있는 기회로 활용하라고 권했다. 그리고 조정에서 이대원의 유가족에게 보낼 쌀이 백미 삼십 섬이라고 알려줬다.
“순수한 도움이 아니라 기회로 삼으라는 말씀에 심한 거부감을 느낍니다만, 그렇게 하겠습니다. 매달 백미 삼십 섬을 보내고 유가족의 생활기반을 닦아주도록 하겠습니다. 흥양 녹동에 이대원 만호의 사당을 짓고 전사자와 포로의 가족을 경제적으로 돌봐주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너구리 녀석! 지한테 좋은 건 다 할 거면서 말만 많아. 큭큭! 그리고 수군 유가족들을 도울 바에는 농지나 좀 구해줘라. 조정에서 휼전을 시행하겠지만 딱 굶어죽지 않을 정도만 해주는 것이 조정이다. 그런데 안방준이라는 이름은 미래에서 들어봤느냐?”
“아! 몇 가지 책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래. 시간이 돼서 보성에 갈 때 동암공께 인사 올리고 나주에서 안방준을 만나 친구로 사귀면 어떻겠느냐? 젊어서 죽은 작은 아버지 집에 양자로 들어갔는데 너보다 서너 살 많을 거다. 이대원전을 써서 이 만호의 이름을 널리 알린 꼬마이니 네가 가서 직접 본 내용을 이야기해주면 아주 좋아할 거다. 그리고 송강 선생의 아들 화곡 정기명이 녹도가를, 우의정 정언신의 아들 한천 정협이 를 지을 테니 이들에게 안방준이 지은 이대원전을 꼭 보내도록 해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열 몇 살에 책을 쓰다니, 신동이군요.”
“제대로 이해도 못하면서 경전을 통째로 외우는 너보다야 훨씬 천재지. 그런데 과거 시험 준비는 잘 돼 가느냐? 초시는 붙었다며?”
“예. 떨어지더라도 경험 삼아 식년시 소과 복시에 응시하겠습니다.”
“그래. 일단 진사까지는 하는 게 좋다.”
이민호는 합법적인 병역기피를 떠올렸다. 선비들은 유학 공부한다는 핑계로 군역을 회피할 뿐만 아니라 군포 납부도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나중에 균역법이 시행되면서 완전히 반대되는 개념인 국민개병제와 모병급료제가 동시에 한 나라에서 시행되는 마법을 보게 된다.
“이쪽 일은 마무리됐으니 내일이라도 수원 본가로 돌아가려무나. 한 감사 준, 변 순천부사 기 등은 조만간 다 체직될 테니 감영이나 순천부 향리들 다독이는 것을 잊지 말고. 참! 올라가는 길에 신 영감이나 만나 보거라. 비록 임진년에 죽을 사람이지만 조선 최고의 무장이니 네가 배울 게 있을 거다.”
“신립이요? 임진년에 충주 탄금대에서 패했죠?”
“어허! 어른 이름 함부로 부르는 게 아니다. 항상 말조심하여라.”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난 5년 동안 가뭄에 대비했는데 잘 될지 모르겠다. 너는 올 가뭄을 치재의 기회로만 삼지 말고 민심과 임금의 신뢰를 얻는 기회로 잘 활용해 보거라.”
“예. 내수사 환관의 눈에 띄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죠.”
수군들을 대접하는 것은 부친과 집안 종들에게 맡기고 이민호는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혜영이 이민호가 좋아하는 음식만 골라서 상을 차렸다.
그러나 첫 전투의 흥분과 참수당한 왜구 수급이 떠오른 이민호는 한 숟갈도 뜰 수가 없었다. 시원한 동치미만 몇 사발 마신 다음 상을 물렸다.
“이번에 처음 그런 끔찍한 장면을 보셨으니 충격이 크실 겁니다. 그러나 세상 살다 보면 그보다 더 끔찍한 광경도 많이 보시게 될 겁니다.”
“그래. 미안.”
이민호가 어려서가 아니라, 현대인이기 때문에 전근대에 흔히 볼 수 있는 장면도 충격적으로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혜영은 그보다 더한 장면도 더 어린 나이에 직접 봤던 여자 아이였다.
그 날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자면서 밤새 악몽을 꾸던 이민호가 몸을 움찔거릴 때마다 혜영이 포근히 감싸주었다. 이민호는 혜영의 마음 씀씀이에 고마워하며 새벽녘에는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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