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ire of the Warm Sea RAW novel - Chapter 16
* 16화 *
4. 가뭄
2월 하순에 이민호는 혜영과 집안 노비들을 이끌고 좌수영을 떠났다. 지난 해 시든 누런 수풀 사이에 파릇파릇한 새싹이 돋아나고 산그늘에서는 성질 급한 진달래가 꽃망울을 터뜨릴 즈음이었다. 이민호는 광양 매화 마을에 들르고 남원 광한루에서 하루 놀면서 느긋하게 북상했다.
그러나 봄길 가는 곳마다 전라우도에 왜구가 들이쳐 난리가 났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부친이 미리 이야기해준 것처럼 가리포첨사가 눈 밑에 왜구가 쏜 화살을 맞고 도망치고 판옥선 네 척이 불탔다. 그리고 전라우수사 원호가 이끌던 판옥선 다섯 척은 갑자기 들이닥친 왜구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전라우수군은 제대로 싸우다 패한 것이 아니라 포구에 판옥선을 세워놓거나 복병한답시고 숨어 있다가 어이없이 기습당했다. 전라우수사 원호는 이 일로 인해 파직당한 다음 함경도에서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민호가 가는 곳마다 백성들은 전라우수군이 왜구에게 패전한 것보다 전라좌수군이 싸우지 않고 물러난 것에 더한 분노를 쏟아냈다. 전라좌수사는 왜구들의 배를 전라좌수영 영역 밖으로 몰아냈고 왜구 수급을 50 넘게 얻는 승첩을 했으니 할 일을 다 했다고 주장했으나, 바로 그것이 백성들이 더 화를 낸 이유가 되었다. 전라좌수군이 왜선들을 계속 쫓아갔다면 왜구들이 잡히지는 않았더라도 전라우수군을 기습할 기회는 없었을 것이며, 좌우 수영이 서로 연락을 취했다면 포위 섬멸도 가능했을 거라는 논리였다.
이때 전라도 해안마을 곳곳이 노략질당한 다음 수군과 백성 수백 명이 포로로 끌려갔고 2년 후에 앞잡이 사화동을 포함해 116명이 돌아오게 된다. 왜구들의 본거지인 일본 큐슈 북서부 고토(五島)열도에 끌려간 판옥선들은 포구 한 구석에 처박혀 미래의 해적을 꿈꾸는 왜구 자식들의 실전훈련장을 겸한 놀이터가 되었다. 그리고 정해왜변 당시 이대원 외에는 조선 수군이 제대로 힘을 발휘한 경우가 없었던 탓에 조선을 침략하기 전에 일본이 조선 수군을 무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벌써 전주부를 지났다고? 정말 빠르다. 계복아! 면포 몇 필 갖고 저 마을에 가서 돼지 한 마리 끌고 와라. 밥해줄 아줌마들 몇과, 그래. 술과 반찬도 준비해달라고 해라. 어서!”
한성우윤 신립은 2월 26일에 전라방어사를 제수받았는데 28일에 벌써 전주와 남원 중간인 임실까지 달려오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기마행렬이 아무리 빠르다 해도 몽골군이 아닌 이상 소문이 항상 한 발 앞서기 마련이라 이민호는 소문을 믿었다. 일행은 서둘러 길가에 천막을 치고 신립 일행을 대접할 준비를 갖췄다.
“혜영은 수레 안에 들어가 있어. 한 발짝도 나오지 마.”
“왜요? 저도 유명한 신 장군님을 뵙고 싶어요. 저기 구경꾼들이 잔뜩 몰려나왔잖아요.”
“신 영감한테 시집가고 싶어? 그럼 나와 있어.”
“얼른 들어갈게요. 중금아! 마차 앞을 지켜다오.”
이민호가 냉정하게 한 말을 알아듣고 안색이 하얗게 변한 혜영이 얼른 마차 안으로 몸을 감추고 차양을 내렸다. 마차 문 앞에는 튼튼한 계집종이 몽둥이를 들고 섰으나 이민호는 그 여종도 마차에 타게 했다. 아무리 신립이 유명한 장군이고 휘하에 정예 군관 30명만 이끈다 해도 군대 행렬 앞에 젊은 여자가 눈에 띄어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신립이 이번 전라도 땅에서 양인 처녀를 첩으로 들이고 바로 그 시골에서 이틀간 숙박한 죄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한다는 이야기를 부친에게 들은 탓에 이민호도 긴장했다. 신립 본인은 어린애를 상대하지 않으니 억울하게 생각할지 몰라도 본인 취향을 미리 물어볼 수 없으니 이렇게 대비할 수밖에 없었다.
– 두두두두!
“우와! 박력 넘친다.”
수십 기의 기마행렬이 누런 먼지를 흩날리며 좁은 길을 달려오고 있었다. 순수하게 감탄한 이민호는 얼른 정신을 차리고 길옆에 나아가 신립 일행을 맞아들였다.
“원로에 노고가 많으십니다. 잠시 요기라도 하고 가시지요.”
“오! 고맙네.”
전현직 고관이 지나는 길에 미리 천막을 쳐놓고 기다리다 식사 대접을 하는 경우가 많기에 신립은 기꺼이 초대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신립 일행을 본 이민호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깜짝 놀랐다. 신립 뒤에서 군관 30명이 말에서 내리는 뒤에 청년 60여 명이 동시에 내렸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종인 60여 명이 신립과 군관들을 수행하고 있었다.
종인(從人)은 병역의무자인 호수(戶首)의 말을 돌보고 식사를 준비해주는 등의 일을 맡는, 중세유럽 기사의 종자 같은 심부름꾼이었다. 조선 중기까지 기병 1인에 2~3인이 배정됐던 이들 종인은 전마와 짐말인 복마를 몰면서 원래 걸어 다녀야 하나 전체적으로 빠른 이동이 필요하면 말에 타기도 했다.
신립과 기병 90명이 나타나면 웬만한 왜구는 그냥 쓸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이민호는 이들도 대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복아! 돼지 세 마리 더 사와라. 인원에 맞춰 소반도. 어서!”
“예. 도련님.”
계복을 비롯한 젊은 종들이 면포를 말에 싣고 후다닥 마을을 향해 달렸다. 돼지 한 마리로는 비록 간단히 먹는 점심이라 해도 90명이 넘는 장정들을 도저히 대접할 수 없었다.
조선시대 문관이나 선비의 점심은 국수나 죽 정도로 간단히 때우는 식이었다. 그런데 농민이나 군인들은 운동량이 워낙 많으므로 먹을 수 있는 대로 먹었다. 이 시대 사람들은 공식적으로는 아침과 저녁만 먹는다고 하나 중간에 새참이 최소 두 번이고 새벽과 늦은 밤에도 밤참을 먹었으니 대한민국 고교생과 비슷한 식생활 패턴이었다.
천막 아래 놓인 평상의 상석에 앉은 신립이 초대한 천막 주인인 이민호와 통성명부터 했다. 그 사이 이민호의 집안 종들이 신립을 비롯해 군관들 앞에 상을 날랐다. 개인용 소반마다 술과 몇 가지 먹음직한 반찬이 놓여 있었다. 조선시대에 손님에게 술과 밥을 대접할 때는 술을 먼저 내고 밥을 나중에 내야 정중한 대접으로 인정된다.
양반들은 집이든 바깥이든 겸상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양인들도 성인이 되면 웬만하면 어딜 가나 독상을 받았다.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수군 병사들에게 음식을 베푼 일을 그림으로 기록한 호궤도를 보면 모든 수군 병사들 앞에 음식이 차려진 소반이 놓여 있다.
“그래. 이 첨사 응화의 아드님이라고? 이 첨사 아들답게 헌앙하구먼. 올해 식년시가 있는데, 자넨 무과를 볼 예정인가?”
“송구하오나 제가 무관의 자식인데도 아직 기사(騎射)를 제대로 못해서 무과 볼 실력이 안 됩니다.”
“흐음. 기사는 오랜 훈련과 경험이 필요하지. 자네가 아직 어리긴 하나 열심히 연습한다면 나중에는 웬만큼 쏘게 될 걸세. 그런데 자네 조부께서 사마시 방목에 함자를 올리셨지 아마? 이 첨사도 문장을 잘 하던데 자네도 사마시를 준비하지 그러나?”
“예. 그렇지 않아도 올해 식년시에는 무과가 아닌 사마시를 보기로 했습니다. 소과 초시는 지난 가을에 통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기사와 기창이 수준에 오르면 무과를 보고 싶습니다.”
“오! 역시 그렇군. 그런데 일단 사마시에 합격하면 체면 때문에 무과를 보기 힘들걸? 흠! 내가 관직 생활을 해보니 문관도 그럭저럭 괜찮고, 진사나 생원을 하면서 유유자적 음풍농월하는 인생도 나쁘지 않아.”
같은 과거라도 문과는 무과와 달리 예비시험 성격인 소과가 따로 있었다. 흔히 소과라고 하는 생원진사시는 원래 문과의 예비 시험이 아니라 성균관 입학 자격시험이었지만 조선 초기에 성균관에서 300일 이상 수학해야 문과 응시자격을 주었으므로 그렇게 이해되었다. 또한 생원진사시는 문무관 벼슬을 하지 않으면서도 양반으로 인정받는 중요한 관문이기도 했다.
소과 초시는 이미 지난 가을에 있었다. 쉰 살 할아버지뻘 유생들과 함께 시험을 치른 이민호는 어린 나이임에도 당당히 합격했다. 경기도에 배정된 60인의 생원시 복시 응시자격을 이미 획득했고, 올 봄 한성에서 치를 복시에서 전국에서 모인 생원시 초시 합격자 700명 중에서 100명 안에 들면 생원이 되는 것이다. 몇 년 뒤부터는 경기도에 배정된 초시 합격 정원이 한성부에 합쳐지고 경기도 유생들은 한성 유생들과 함께 한성에서 초시부터 치르게 되나 아직은 경기도 향시가 따로 있었다.
“그래도 저는 반드시 무과를 보고 싶습니다.”
이민호가 딱히 문무과 동시 합격이라는 타이틀에 집착하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 조선에서 출세하기 위해서라면 차라리 문과만 보는 게 나았다. 괜히 무과까지 급제해서 무과 선배들에게 군기 잡히느니 문과 급제만 해서 무관들 머리 꼭대기에 서는 게 나았다. 이민호는 조선에서 관료로 출세하고픈 욕심이 없기에 이런 허세도 부려보고 싶었다.
“사나이라면 역시 무과가 좋지. 하지만 문과 급제자가 무재까지 갖고 있다고 소문나면 유장(儒將)이라 해서 일반적인 문무관들보다 승진하기 훨씬 유리하니까 그쪽도 고려해 보게.”
“아하! 맞습니다. 김종서 장군, 강감찬 장군. 윤관 장군이 그런 멋진 분들입니다. 제가 갈 길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영공.”
문관으로서 장군이 된 경우는 동양 역사에서 꽤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군대의 승리보다는 무관들을 억누르고 반역의도를 감시하기 위한 역할에 치우친 편이었다. 심지어 기마부대의 감관(監官)이란 인간이 단지 권위를 내세우기 위해 가마를 타고 다녀 기마부대의 기동력을 깎아먹다 못해 몰살시키는 식으로 민폐를 끼치는 경우도 있었다.
유장의 자격은 뛰어난 무예가 아니라 수하 무장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카리스마와 더불어 전략적인 식견을 갖추고 군의 승리를 이끄는 것에 있다. 조선 전기의 김종서, 임진왜란 당시의 도원수 권율을 문관으로서 군을 잘 통솔한 유장의 대표적인 인물로 들 수 있다.
“가만! 그런데 이 첨사는 방답진에 정배되지 않았나? 그럼 이번 왜변에 이 첨사도 나섰겠네?”
이민호가 정성껏 대접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신립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신립은 이민호가 부친의 유배를 풀어주길 원하는 줄로 오해하고 있었다. 보통은 그렇게 여기기 쉬웠겠지만, 이민호가 원하는 것은 따로 없었다.
“물론입니다. 가친께서 한후장을 맡아 지휘하던 영3선이 참퇴장의 영2선과 함께 왜 소선 세 척을 무찌르고 수급 50여 개를 얻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참전했습니다.”
“오오! 대단해. 전라 좌우도가 모두 형편없이 패한 줄 알았는데, 좌도에는 인물이 있었군. 그런데 녹도만호는 어쩌다 죽었나? 경성에서는 손죽도에서 좌수영이 어떻게 싸웠는지는 말이 없고 온통 녹도만호와 심 수사 이야기뿐이네. 심 수사를 비난하는 상소가 궐에 쏟아져 들어오고 있어.”
이민호는 전라좌수사 심암이 작성한 승첩장계가 아직 한성에 올라가지 못했음을 알았다. 전투가 끝나고 전과보고서에 해당하는 장계를 작성하는데 며칠 걸릴 수도 있었다. 장계초가 전사돼 주변 사람들이 읽고 이의를 제기하면 수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전공을 수사에게 몰아줬으니 그럴 일은 없을 테고, 아마 수사가 일가친척들 불러서 전공을 나눠주느라 아직 장계를 못 올린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사실 왜선들이 대규모로 몰려오기 사흘 전에 녹도만호가 왜선 두 척을 먼저 잡았습니다. 좌수영 수군이 출동 준비하는 동안 녹도만호가 수급 몇 십 개를 수영에 가져온 것을 저도 수영 동헌에서 봤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날 오도의 왜선 18척이 손죽도를 노략질한다는 소식이 좌수영에 전해진 겁니다.”
“오호! 계속해보게.”
이민호는 좌수영이 출동준비를 갖추기 전에 녹도만호 이대원이 먼저 왜선 두 척을 잡은 것, 좌수사 심암이 전공을 탐한 것, 좌수사가 녹도전선만 왜선들에게 밀어 넣어 이대원과 수졸들을 죽인 것, 후퇴 중에 부친이 왜구들을 잡아 수급을 수사에 바친 것 등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이민호는 이야기 도중 한 점의 거짓이나 과장도 보태지 않았다. 목격자가 워낙 많아 어떻게든 다 밝혀질 테니 걱정할 필요 없었다.
다만 이민호는 좌수사 심암의 문제는 적당히 포장했다. 이민호가 사실을 말하고 싶어도 이 자리에 없는 윗사람을 놓고 나쁜 말을 하면 듣는 사람이 불쾌히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립이 수영이나 수군이 거주하는 지역에 도착하면 사실이 드러나리라 여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