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ire of the Warm Sea RAW novel - Chapter 17
* 17화 *
“오호라! 먼저 왜선에 총통 몇 발을 쏘아 방패판을 깨고, 조총 든 놈들을 활로 쏘아 잡은 다음 나머지를 잡았다고? 잘했네. 조총이든 승자총통이든 화약무기는 한꺼번에 쏴야 조금이라도 맞는데 한두 발씩 쏘면 전혀 안 맞지. 왜 소선은 특히 선체가 낮으니 화포에 방패판이 부서지고 나면 왜구들은 과녁에 불과해. 이렇게 쉬운데 전라우수군은 왜 그리 못 싸운 거야?”
“맞습니다. 선장을 맡으신 엄친께서도 그렇게 싸우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저도 이 활로 왜구 다섯을 맞혔는데, 영공 말씀처럼 판옥선 방패판 옆에서 내려다보며 쏘니까 아주 잘 맞아서 속이 다 시원했습니다. 왜구들도 가끔 커다란 목궁을 쐈지만 날아가는 화살이 제 손에 잡힐 정도로 형편없이 느렸습니다.”
“수급을 얻기 어려운 수전에서 50여 급이라니 대단해. 아주 장쾌한 싸움이었겠어. 자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군. 직접 싸울 기회를 가진 자네가 너무 부러워.”
“무슨 말씀이십니까? 북도에서 신 영감께서 야인들을 물리친 이야기는 삼척동자들도 다 압니다. 저기 아이들이 영감을 보면서 초롱초롱 빛내는 눈길을 보십시오. 고기와 떡을 손에 쥐고도 먹지 않고 우리 장군님만 우러러보고 있지 않습니까?”
“허허! 몇 번 승첩했더니 멀리 남쪽에서도 나를 알아주는군. 무관으로서 아주 뿌듯하네.”
신립은 천생 무인이었다. 그러나 직급이 이미 높아 지금은 관리적인 면에 더 신경을 써야 해서 실전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을 아쉬워했다.
“나는 주상께 이번 왜변을 막고, 왜구가 이미 물러갔을 경우 이번 일의 뒤처리를 맡으라는 어명을 받고 내려가는 길일세. 그러니 이야기가 비록 재미있었지만 자네 말만 들어서는 안 돼. 특히 자넨 녹도만호를 불쌍히 여기면서도 좌수사를 은근히 감싸주는 말을 하는데, 내가 보기엔 좌수사가 문제일 것 같아. 내려가는 길에 수졸들에게 직접 물어봐야겠어.”
“수사 영감은 저에게도 상전이니 나쁜 말을 하기 힘든 것 아니겠습니까? 현재 수군 선운과 후운이 모두 진포에서 근무 중이니 참전했던 수졸들을 아무나 불러서 물어보십시오. 특히 영3선 수졸들은 좌수영 성하마을에 있으니 영공께서 부르기도 쉬울 것입니다.”
좌수영 수졸들을 며칠 접대하고 나서 이민호의 부친은 수졸들 사이에서 만고의 영웅이 되어 있었다. 이응화가 잘 싸우긴 했으나 수영에 돌아온 다음 수졸들에게 잘 해줬더니 전투에 참가했던 수졸들은 그의 전공을 과장해서 말하는 경향이 커졌다. 이민호 덕에 살림이 편 아전과 진무들도 여러 관아와 오고가는 공문에서 이응화에 대해 좋은 말만 했다. 수졸과 아전들이 떠들어대는 말이 신립의 귀에 분명히 들어갈 것으로 이민호는 기대했다.
“자네와 자네 부친이 전공을 세우고도 수사에게 양보했다지만 당연히 상을 받아야겠어. 자네는 부친이 유배에서 풀려나길 원하나?”
“아닙니다. 상은 필요 없으니 장렬하게 싸우다 죽은 녹도만호에게 조정에서 휼전을 잘 베풀어주시면 더 좋겠습니다. 부친도 유배에서 풀려나더라도 계속 좌수영에 계시길 원하십니다. 오두막에서 목을 길게 빼고 바다를 바라보면서 혹시 오늘은 왜구가 안 오나, 왔으면 좋겠는데, 이러고 계십니다.”
“껄껄! 싸움 좋아하는 이 첨사니까 그렇겠지. 사실 이 첨사가 함경도에서 패전한 것도 아니고 첨사진 공금을 빼먹은 것도 아니야. 평소에 진무들한테 들어가는 비용이 관례대로 처리된 것뿐인데 겨우 그걸 핑계로 사헌부에서 탄핵했지. 자네 부친을 방답진에 정배한 것은 왜구가 침입했을 때 선장으로 삼으라는 뜻일 게야. 그래도 공금횡령이나 탐관오리로 낙인찍히면 아들이 소과와 문과를 못 보니까 그걸 피하려다 보니 자네 부친에게 걸린 죄명이 참으로 구차해졌지.”
“가친께서도 임기가 짧은 수군첨사를 지내느니 차라리 귀양살이해야 바닷가에 오래 계실 수 있다고 좋아하십니다. 다만 지정된 주거지를 벗어날 수 없으니 조금 답답해하십니다. 아들 된 입장에서야 가친께서 유배에서 풀리길 원하는 게 인지상정이겠지요.”
도대체 임진년 해전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이민호의 부친은 유배에서 풀려나길 절대로 원하지 않았다. 귀양살이 죄인 신분으로 있어야 유사시에 전라좌수사에게 부름을 받아 선장으로서 해전에 참전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잘 알겠네. 고맙게 식사 잘하고 가네. 뜻밖에 오늘 아주 즐거웠다네. 언제 한 번 경성 우리 집에 찾아오게.”
“한성부에 올라갈 때 한 번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좋지. 그 동안 기사 훈련 열심히 하게나. 기사 실력을 늘리려면 직접 말 타고 쏘는 수밖에 없어. 말의 움직임에 사람 몸을 맞춘다는 게 사실 말처럼 쉽지 않지만, 계속 연습하다 보면 나나 내 군관들 정도 되는 것은 크게 어려운 게 아니야.”
“제게 재능이 없는 줄 알고 초조했었는데 시간이 해결해주나 보군요. 충고 감사드립니다.”
신립이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무장이 되게 한 자산은 군사전략도, 무예 실력도 아닌 용기였다. 만여 명의 여진족 기병들 사이로 활을 쏘며 돌격한다는 것이 제 정신 가진 사람이 할 짓이 아닌데, 신립은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신립을 따라 니탕개의 일만 기병에게 돌입한 500 용사도 보통 사람이라고 할 수 없었다.
물론 신립에게는 여진족 기병 무리 중간에서 움직이는 우두머리를 화살 한 발에 잡을 수 있는 궁술도 있고, 적 대장을 쓰러뜨린 다음 계속 돌격하면 추장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하던 여진족들이 뿔뿔이 흩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활용할 줄 아는 전술적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싸우는 신립과 마주치게 된 여진족들은 투명 드래곤을 만난 발록들처럼 무작정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신립을 따라 이민호도 일어섰다. 신립이 이민호의 체격을 유심히 살피더니 젊은이로서 피가 끓어오를 말을 했다. 고등학교와 대학, 대학원, 그리고 국방과학연구소에서 8년 동안 연구원을 한 전형적인 책상물림인 이민호도 홀딱 넘어갈 정도였다.
“아까는 내가 자네에게 문과를 보라고 했지만 말일세. 내가 볼 때 자네는 도저히 따분한 책상물림 따위를 할 사람이 아니야. 자네도 사나이라면 말이야, 내 젊었을 때처럼 말 타고 변경으로 돌아다닐 마음은 없나? 칼날 같은 바람 아래에서 성채를 지키고 새카맣게 몰려든 적호의 일만 기병무리를 향해 돌진할 때는 정말 온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다네.”
“카~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
배불리 고기를 먹고 한 잔씩 마신 신립과 군관들의 기분은 아주 좋아 보였다. 관리들의 숙박 장소인 역이나 원에서보다 훨씬 좋은 대접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민호의 집안 종들이 급히 돼지를 잡느라 고기를 숙성시키지는 못했지만 고기를 구우면서 살짝 뿌린 것이 비싼 향신료 종류임을 신립과 군관들은 알아보았다.
“그런데 자네 몇 살이지? 키는 큰데 아직 관례를 치르지 않은 모양이군. 조만간 열여섯 넘기면 내 밑에서 군관이나 하는 게 어떻겠나? 자네 무예 훈련은 내가 확실히 봐주겠네. 내 밑에서 군관 생활하면서 무예를 닦으면 20대 중반 식년무과 급제도 꿈이 아니야.”
“엄청나게 솔깃한 제안이십니다만, 송구하게도 아직 열 살입니다.”
이민호는 얼굴이 빨개지며 솔직히 나이를 밝혔다. 원래 나이가 열 살이라면 오히려 떳떳했을 텐데, 이 세상에 오기 전 나이가 있으니 꼬마가 잘난 척하는 게 얼마나 웃긴지 이민호도 아는 까닭이었다.
“뭐야? 푸하하하하! 완전히 속았어. 자네가 의젓하지만 아직 수염이 안 난 것을 보고 스무 살 청년 정도 되는 줄 알았다가 관례 안 치른 것을 보고 열다섯 정도로 봤는데 열 살짜리 꼬마였구먼.”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신성군은 자네보다 겨우 한 살 어린데도 도무지 비교가 안 되는군. 그런 약골보다는 아무래도 자네가 훨씬 나은 것 같은데, 어떤가? 내 사위 될 마음은 없나?”
“아니요. 전혀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영공의 따님도 왕자님이 더 좋다고 하실 겁니다.”
“무관의 딸이 신성군 같은 약골을 좋아할 리가 없지. 나도 억지 혼담에 짜증나던 참인데 자네라면 안심할 것 같아. 경성에 오면 꼭 들르게. 늦기 전에 말이야. 하하하!”
이민호가 부친에게 듣기로 신립은 선조 임금과 인빈 김씨의 소생 신성군의 장인이 될 사람이었다. 임진왜란 전까지 임금은 신성군을 세자로 밀고 있었고, 이 시대 최고의 무장인 신립을 배경으로 만들어주고 싶어 했다. 이민호는 괜히 왕가의 혼담에 끼어들어 임금에게 찍히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이민호가 황급히 손사래 치는 사이 신립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에 올랐다. 그리고 말발굽이 울리는 사이 웃음소리를 메아리로 남기며 남쪽 길로 떠났다. 이 당시 조선 최고의 명장 신립을 만나본 이민호에게도 오늘이 즐거운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았다. 물론 혼사 제안은 농담으로 넘겼다.
신립과 헤어지고 나서 이민호는 일행을 이끌고 전주에서 하룻밤 묵었다. 수륙의 물산이 모이고 양반들이 많이 사는 곳이라 비빔밥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어도 모든 음식이 아주 기가 막히게 맛이 있었다.
요 며칠 사이에 충청감사가 이인에서 권징으로 교체됐고, 전라감사 한준이 아직 유임한 상태에서 김명원이 전라도 순찰사로 파견됐다. 또한 전라우도 방어사로 변협이 임명됐다. 사실 왜구들은 이미 고토로 돌아갔으니 조정의 대책은 이미 뒷북이었다.
각 도의 감사는 보통 순찰사와 병마절도사, 수군절도사를 겸임해 도내의 최고 군사 지휘관으로서 모든 병력을 통할한다. 그러나 순찰사가 감사와 따로 임명될 경우 감사의 군사지휘권이 제한된다고 부친이 설명해주었다. 이민호는 순찰사가 이름처럼 감찰 업무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부친 이응화는 도체찰사, 체찰사, 도순찰사, 순찰사, 찰리사가 품계에 따라 이름만 다른 같은 직책이라 했다.
“가뭄이 너무 심해요, 도련님.”
“그래도 강변에 위치한 밭은 그나마 괜찮아. 농민들이 물을 떠 나르느라 고생들 하는군.”
논산을 지나는데 농민들이 물지게를 지고 강과 밭을 오가며 물을 퍼 날랐다. 아직 이앙법이 확산되지 않아 논은 전혀 없이 밭에서 벼를 키우는데도 갓 싹이 나온 벼가 누렇게 말라갔다. 마차에서 고개를 내민 혜영이 안타까워했다.
“가뭄이 들면 쌀농사 짓기가 너무 힘들어요. 다른 농작물을 먹고 살 수는 없나요?”
“그래도 쌀은 영양분과 생산성이 최고인 작물이야. 중국과 조선, 일본, 인도와 남월 정도만 해도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인데 이건 쌀 덕택이거든.”
“그게 세상의 대부분이잖아요. 혼일강리도를 봤는데 중국이 가장 크고 세상의 절반 이상이던데요?”
“음. 세상은 혜영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어. 언젠가 혜영이 데리고 세상을 일주하고 싶어.”
“저도 도련님과 멀리 여행을 갔으면 좋겠어요.”
혜영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세계여행을 가려면 증기기관을 먼저 완성해야 했다. 이 시대 유럽인들이 범선을 타고 지구 한 바퀴를 돌고도 살아남을 확률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풍토병에 대비한 기본적인 약제도 갖춰야 했다. 5년 후의 임진왜란에 대한 대비 말고도 이민호가 할 일은 많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