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ire of the Warm Sea RAW novel - Chapter 18
* 18화 *
수원에 들어서서 본가에 가기 전에 남쪽 독성, 흔히 독산산성이라 불리는 곳을 살펴봤다. 임진년 말에 전라감사 권율이 이끄는 관군 4천이 왜군 수만 명에게 포위됐다가 하얀 쌀로 말을 씻어 물이 풍부한 것처럼 속인 곳이었다. 바로 그 병력이 행주산성에서 대첩을 거두니 이곳에서 반드시 병력을 보전해야 행주대첩도 가능했다.
이민호는 혜영만 데리고 산성에 올라갔다. 들었던 것처럼 마른 우물 세 군데만 있고 물을 구하기 어려웠다. 특히 올해는 봄부터 가뭄이 심했다.
“시주 얼굴에 걱정이 가득하십니다. 전란에 대한 대비는 결코 쉽지 않은 법입니다.”
“아! 스님. 이곳 산성을 맡아 관리하시는 주지스님이십니까?”
조선에는 산성마다 작은 절이나 암자가 있고, 그곳에 사는 스님들이 평소에 산성을 관리하는 식이었다. 주변 사찰 스님들이 산성을 축조하거나 보수 작업에 동원되기도 했다.
이민호의 걱정을 읽었다 해서 이 스님이 고명하다거나 법력이 높다고 평가할 필요는 없었다. 젊은이가 산성에 와서 걱정스런 얼굴을 하면 국방을 우려하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무너진 곳을 다시 손 보고 있지만 일손이 부족해 그것도 쉽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산성에서 물을 구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산성 정상 부근에 못을 파고 연꽃이나 물풀을 길러서 깨끗한 물을 보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4천 군사가 한 달 정도 마실 물이 있어야 산성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맞는 말씀이긴 한데, 늙은 소승과 동자승 몇으로는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사전(寺田)은 혁파됐고 저희들이 밭을 직접 일궈도 주변 양반들이 유람 왔다가 곡식을 다 빼앗아 먹습니다.”
사찰에서 운영자금 마련을 위해 콩을 갈아 두부로 만들어 민가에 판매하는데 양반이나 관리들은 두부를 공짜로 빼앗아 먹었다. 물론 절에 놀러 오면서 술과 고기를 들여오는 것은 기본이었다.
조선은 불교를 억누르는 정책을 우선하기에 양반관료들은 절에 두부를 먹은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을 오히려 당연시했다. 심지어 스님들을 모욕하는 것을 유학을 숭상하는 자로서 의무 비슷하게 여기기도 했다.
“쯧쯧! 일반 사찰도 아닌 산성 사찰에서 민폐를 끼치는 양반들이 잘못하는 거죠. 마침 독성 전체가 기반이 돌로 되어 있으니 못을 만들어 물을 보관하기는 쉬울 것 같습니다. 제가 사재를 풀 테니 주지스님께서 일꾼들을 사서 만들어 보십시오. 이곳은 아주 중요한 곳입니다.”
“백성들을 전란의 도탄에서 구하기 위해 꼭 필요한 산성입니다. 시주의 뜻을 잘 받들겠습니다.”
노승이 허리를 굽히자 이민호도 자동적으로 허리를 숙였다. 백성들이 피난할 곳은 아니지만 이 산성은 길게 봐서 꼭 필요한 곳이었다. 또한 여차하면 이민호가 가솔들을 데리고 피할 수 있도록 산성 암자와 협력관계를 맺기로 했다.
수원 본가가 멀리 보이는 들에 도착했다. 마름 몇 명이 멀리까지 이민호를 마중 나왔다.
수원은 다른 지역보다 치수사업이 잘 돼 있고 몇 년 전부터 준비한 덕택에 가뭄의 영향을 심하게 받지 않았다. 높은 지대에 만든 저수지 말고도 평지에도 작은 웅덩이가 군데군데 있었기 때문에 농민들이 물지게를 지고 나르는 힘든 일을 하지 않아도 됐다.
그런데 올해는 가물기에 이앙법을 쓰지 말고 웬만하면 쌀이나 보리가 아닌 밀을 심으라고 이민호가 지시했는데도 논에 물을 대는 이기적인 소작농들이 몇몇 있었다. 아직까지는 쌀이 가장 비싼 작물이고, 소출이 두 배 이상 늘어나니 모내기로 농사를 지으려고 고집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민호가 그것을 지적하자 마름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몇 번이나 올해는 무논을 만들지 말라고 경고했는데도 저럽니다. 진짜로 쫓아내야 합니다, 도련님.”
“올 가을에 추수 끝나면 쫓아내겠다고 전하세요. 그래도 모내기로 농사를 지을 거라면 쫓아내야죠.”
이민호가 소작농들에게 너무 잘해준 탓에 버릇이 없어졌다는 마름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겠지만 이 정도면 심했다. 논에 물을 계속 대기 위해서는 공용으로 쓰는 저수지의 수위를 빠른 속도로 낮출 게 분명했다.
이기심이 지나쳐 주변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사람들까지 이민호가 보듬어줄 이유는 없었다. 그런 사람들이 기회가 닿으면 쉽게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기도 하니 이 기회에 멀리 내쫓는 게 나았다.
수원 본가에 도착한 이민호는 과거 시험, 정확히는 생원시인 소과 복시 공부에 열중했다. 경전 암기를 제대로 못하면 글선생이 회초리를 치던 작년과 달리 올해는 소과 복시에 대비해 좋은 선생을 모시고 이해 위주로 수업이 진행됐다.
아직 이민호가 어려서 정식 스승으로 모시는 관계는 아니었다. 정식 제자도 아니니 스승님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그런데 선생님이 이민호에게 불만이 많은 것 같았다.
“퇴계나 율곡 선생처럼 학식이 높은 학자들 사이에 이와 기를 두고 논쟁이 벌어지는 것은 나 같은 썩은 선비로서는 그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일이다.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너는 엉뚱하게 서애나 남명학파에서 내놓은 잡저 종류를 읽기를 좋아하는 것 같더구나. 동해가 서해에 비해 조수의 차가 적으면 어떻고, 고리짝에 돈을 쓰든 면포를 쓰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
“백성을 이롭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호기심이 가는 것입니다. 같은 나라인데도 동해와 서해의 조수에 차이가 있다면 고기잡이 방법과 포구의 위치를 정할 때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가벼운 돈이 있으면 무거운 면포나 쌀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될 것 아니겠습니까? 예기와 춘추를 읽고 있자니 교훈이 되는 이야기도 많지만 현재 조선에 전혀 쓸데없는 지식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내가 늘그막에 아주 좋은 제자를 얻었다만, 너는 성현의 말씀에 좀 더 순응하는 게 좋겠구나. 사실 나도 옛날 중국의 몇몇 고사에 관해서는 성현의 말씀인데도 별로 동의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하지만 지금 시대와 달리 옛날에는 그렇게 생각했을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너는 그것을 감안하고 대꾸를 해주면 좋겠다.”
“예. 춘추시대의 중국과 현 아국 사이에 제도와 도덕이 많이 다를 테지요. 잘 알겠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 평균에 비해서 급진주의자에 가까울 이민호가 보수주의도 아닌 수구에 가까운 선생에게 배우자니 죽을 맛이었다. 그래도 노선생은 그나마 다른 유학자들에 비해 매우 합리적인 분이었다. 다만 제자가 나빴다.
“시험공부에 집중하도록 해라. 내가 이걸 보여주겠다. 이렇게 언제든 내용을 넣고 빼면서 자유롭게 철해서 들고 다니면서 외우는 게 편할 것이다. 민호 네가 아직 나이가 있으니 이번에 반드시 합격할 필요는 없다. 시험 볼 기회는 평생 있으니 이번에는 공부하는 방법만 제대로 배워도 된다. 그러나 나는 네가 어쩐지 이번에 복시에 합격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뛰어난 인재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많은데 설마 제가 붙겠어요?”
“너도 나중에 늘그막에 제자를 둬보면 알겠지만 선생이 욕심을 더 많이 내는 법이란다. 조금 더 열심히 해서 한 번에 붙으면 좋겠다.”
“그렇군요. 저도 나이 들면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시험공부는 선생님 말씀을 믿고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조선시대 시문 몇 개를 대충 기억하니 진사과를 보면 쉽게 합격할 수도 있겠지만, 이민호는 남의 작품을 표절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경전 내용을 외우고 있었다. 사실 경전 시험만 보는 생원보다는 진사시가 훨씬 어렵고, 양반들이 더 높이 쳐줬다.
시험일이 가까워지자 선생은 이민호에게 목차 쓰기를 연습시켰다. 사서삼경도 아닌 사서오경 전체를 외운다 해도 한계는 있는 법, 요약하다 못해 차라리 목차를 외움으로써 시험문제가 어떻게 나오든 최소한의 답안을 쓸 수 있게 하는 방법이었다. 이민호는 현대의 사법시험 법학 과목의 공부법을 떠올렸다.
“너는 시와 문장을 짓는 일에 영 젬병이니 괜히 헛바람 들어 진사과 본다 하지 말거라. 젊었을 때는 진사보다 생원이 확실히 낫다.”
“예. 저는 시나 문장은 진짜 못하겠습니다.”
“대과에 합격하면 진사나 생원이 무슨 구별할 필요가 있겠느냐만, 어렸을 적에는 문장을 짓는 것보다는 경전을 배우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나 학자는 학생이 아니다. 그저 경전과 고사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네 스스로 생각한 것이 과연 주상과 조정을 설득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제가 생각이 짧아서 좋은 의견을 낼 수 있겠습니까?”
“예전에도 성균관 입학생들을 대상으로 정시(庭試)를 가끔 봤는데 금상 16년부터는 매해 보는 것 같다. 촉각시에 즉일방방이니 작성과 채점에 시간이 걸리는 경서는 시험보지 못하고 표와 부를 주로 시험 볼 것이다. 너는 주상을 모시고 조정을 이끄는 관리 입장에서 서술해야 할 것이다. 성균관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부나 표, 송을 작성하는 방법은 천천히 배울 수 있으니 조바심 내지 마라.”
“선생님. 올해는 합격할 것 같지도 않으니 그냥 공부나 가르쳐주세요.”
이민호가 웬만하면 선생에게 하지 않을 말인, 진도 나가자는 이야기를 먼저 했다. 그만큼 선생이 이민호를 너무 높이 봐서 이민호가 생각하기에 너무 민망했던 탓이다.
이민호는 고등학교 때 이과, 대학 가서는 전자공학 전공이었다. 평생 죽어라 공부 아니면 연구만 한 사람이 풍류를 알 리가 없었다. 사실 경전을 외우는 생원이나 시, 부, 책문을 짓는 진사가 공부하기 버겁기는 마찬가지였다.
상피 제도 때문에 수험생들은 2부로 나뉘어서 시험을 보는데 이민호는 예부에서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이민호의 암기력이 좋았는지 아니면 선생의 족집게 과외가 훌륭했는지 이민호가 제대로 외운 곳에서 문제가 나왔고, 답안을 논리적으로 잘 썼다.
방방(放榜) 직후 큰 소란이 일어났다. 비록 병과지만 이민호의 이름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열 살에 생원시에 합격한 신동이 나왔다고 한성 전체가 진동했다.
이민호는 모든 공을 선생에게 돌렸다. 훌륭한 학자분이 효과적으로 잘 가르쳐주신 덕택에 합격했다고 이민호가 말하니 선생의 월사금이 당장 열 배로 뛰었다.
복시 합격 후 이민호는 서울 서소문 밖에서 살게 되었다. 부친의 뜻에 따라 성균관에서 공부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원점 300점을 따야 문과 응시자격이 주어지는데, 아침과 저녁을 성균관 식당에서 먹어야 1점씩 따는 식이라 아침저녁으로 성균관에 출퇴근했다.
물론 낮에는 성균관에서 나와서 활동했다. 나중에는 문과를 보기 위한 원점을 낮춰주거나 성균관 출신이 아닌데도 문과에 급제할 수 있었지만 지금 이민호가 기댈 방법은 적은 편이라 성균관에 계속 다니기로 했다.
이민호는 외출할 때 단령에 선을 두른 남삼을 입었다. 과거 합격자는 아직 아니지만 소과에 합격해 국왕에게 백패를 받은 진사, 생원들이 흔히 입는 옷이었다. 만약 이민호의 체구가 작았다면 어린애가 과거 합격자를 사칭했다고 어른들에게 욕만 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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