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ire of the Warm Sea RAW novel - Chapter 19
* 19화 *
전라좌수사 심암이 파직돼 3월 27일 의금부로 압송됐다. 이민호는 수사에게 욕을 퍼붓는 구경꾼들 사이에 숨어 압송 행렬을 지켜봤다. 함거 안에 앉은 좌수사 심암은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임금은 심암을 군문에서 참수하는 논의를 하라고 시켰다. 그러나 대신들은 심암이 이미 파직됐으니 군문에서 참수하기 어렵다고 진언했고, 며칠 후 한성 인근 다른 곳에서 참수될 예정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앗! 고리타분한 얼굴! 이번에 사마시에 합격한 생원이세요?”
이민호가 고개를 내렸다. 똘망똘망한 눈이 이민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앙증스럽게 작고 예쁜 옷을 입은 네 살쯤 되는 꼬마가 또박또박 말은 참 잘 했다. 현대 대한민국이었다면 범죄자로 의심을 받더라도 전번을 따고 싶어지는 정말 귀여운 꼬마였다. 옆에서 여종이 안절부절못하는 것을 지켜보며 이민호는 속으로 웃었다.
“아가씨를 꼬마라고 부르다니, 선비라고 하기에 그대는 너무 어리고 정신수양의 정도가 낮군요!”
“저는 입을 연 적이 없습니다만.”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소? 흥! 선비가 되어서 아녀자에게 모욕을 주다니. 실망이오.”
토라진 꼬마 아가씨가 팽하니 돌아서더니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여종이 얼른 고개 숙여 사죄한 다음 달려가려 하기에 이민호가 붙잡고 물었다. 장난스럽게 말을 주고받았고 나이는 어리지만 주변에 풍기는 기품이 대단해 어느 귀인의 자식 같았다.
“어느 댁 아가씨인지 알 수 있겠는가?”
“김 진사 댁 막내 따님이십니다, 나리.”
분별력이 0에 가까운 대답을 한 여종이 꼬마 아가씨를 잡으러 부리나케 달렸다. 이민호는 심암이 잡혀가는 길에서 웃을 수도 없어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아야 했다. 저런 딸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민호가 혼례를 치르기에는 아직 너무 어렸다.
심암은 결국 4월 4일에 당고개에서 참수 당했다. 그리고 여러 지방에 조리돌림 당한 다음 서대문에 효수됐다. 패전보다는 적전 도주를 더 중한 죄로 여기는 것이 당시 조선의 분위기였다.
성균관에서 조금 먼 서소문에 집을 구한 것은 이민호가 마포나루에 자주 들르기 위해서였다. 마포는 삼남의 세곡이 모이는 광흥창 외에도 전국 각지에서 상인들이 몰려와 도매거래를 하는 큰 시장이었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은 좌판과 천막 가게가 늘어서 있는 소매시장이었다. 이민호는 종들 몇을 거느리고 구경을 다녔다.
올해는 조선에서 소리 없이 식생활 혁명이 일어난 원년으로 기록될 해였다. 3년 전부터 천일염 제법으로 대량 생산한 소금이 간수를 빼는 기간이 지나 드디어 지난 3월부터 조금씩 출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쌀과 소금의 가격비가 2대 1인데 이민호는 10대 1 이하 비율로 떨어뜨릴 계획이었다.
천일염전은 1905년 을사늑약 이후인 1907년에 대만의 천일염전을 일본 관리들이 모방해 인천에서 시작됐다는 시각이 일반적이나 그 전에도 제주도에서 소규모로 경영하고 있었다. 제주도 해안가에서 치솟는 민물 용출수 때문에 바닷물을 끓여 자염을 만들어도 염도가 낮은 탓에 소금이 워낙 귀했다. 그래서 구엄리에서는 바위에 바닷물을 말리는 돌 소금밭 방식으로 소금을 소량 생산했다. 물론 효율은 지극히 낮았으나 새로운 생산방식이 아니라 기존에 있던 기술이라는 점이 이민호에게는 중요했다. 현대인인 이민호는 새로운 기술을 도입할 때마다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이민호 부친의 귀양지 입구 어촌 마을인 평사리에 일궈진 염전에서 이민호의 주도로 3년 전에 소금 시험 생산이 처음으로 성공했다. 쓸모없는 바닷가 개펄에서 비싼 소금이 단 며칠마다 몇 섬씩이나 생산되자 이곳에 초청받은 전라좌수영 아전들은 눈이 완전히 뒤집혀버렸다.
최소 2년 동안 창고에 소금을 보관해 간수를 빼고 나서야 판매할 수 있었지만 아전들은 성공을 확신했다. 수영과 수군진포는 소금생산권과 국가에서 공인받은 소금가마가 있으므로 얼마든지 소금을 생산할 수 있었다. 소금가마에 들어갈 땔감을 많이 못 구하고 해안가와 섬이 이미 모두 벌채돼 민둥산이 되어 그 동안 적게 생산했을 뿐이었다. 조선시대에 낙동강 하구에서 소금생산이 많은 것은 주변 산과 낙동강 수로를 통해 땔감을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눈이 뒤집힌 좌수영 아전들은 좌수사의 턱수염을 잡고 멱살을 쥐어흔드는 식으로 정중하게 설득한 다음 수졸들을 동원해 두산도 해안 개펄에 염전을 대폭 확장했다. 방답진과 흥양현에 위치한 4개 수군진포의 아전들도 뒤질세라 염전 조성에 열심이었다.
수영과 수군진포의 운영비는 물론 아전과 진무의 녹봉을 주고도 남을 정도로 염전이 늘어났지만 해안가 염전은 그 후에도 꾸준히 확장됐다. 그 동안 좌수영 대장간에서는 염전에서 사용할 수차를 만들고, 좌수영 가마에서는 도자기와 옹기 대신 평평한 타일을 굽기 바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문을 듣고 득달같이 쳐들어온 경상우수영과 전라우수영 아전들이 전라좌수영 아전들을 족쳐서 천일염 생산법을 배워갔다. 다만 몇 년이라도 천일염을 독점해 고가로 판매하고 싶었던 전라좌수영 아전들은 살기등등한 다른 수영 아전들에게 굴복해 천일염 제조법을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남해도와 거제도 같은 섬, 경상 남부 해안지대, 그리고 전라도 서남부 섬과 바닷가 개펄에 염전이 대규모로 조성됐다.
이민호는 천일염이 단숨에 확산되는 것은 반가웠지만 간수를 빼지 않은 소금을 시중에 팔아 수많은 사람들이 복통이 날까봐 겁이 났다. 그러나 소금 맛을 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으니 불량소금이 대량 유통될 걱정은 없었다.
당연히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이민호가 있었다. 심지어 경상우수영에 소문을 흘린 것도 이민호였다. 그는 삼남지방의 수영과 각 수군진포, 그리고 소금가마를 갖고 있는 연해 고을 관아에서 관 주도로 천일염 방식으로 소금을 대량생산토록 해서 소금 가격을 대폭 낮출 계획이었다. 이민호는 전기분해로 더 싼 비용을 들여 소금을 대량 생산할 수 있었으나 오버 테크놀로지를 자제한다는 의미에서 이 정도로 타협했다. 물론 천일염 생산의 공은 부친에게 돌렸다.
이민호의 부친은 천일염 제법을 삼남지방에 널리 퍼뜨린 공으로 유배에서 풀려났고, 이번에 손죽도 해전의 전공을 인정받아 품계까지 올랐다. 그러나 이응화는 여전히 귀양지의 오두막에서 살고 있었다. 유배에서 풀리기 전에 부친은 유사시 전라좌수영의 선장으로 임명된다는 약속을 받았다.
물론 천일염 제법으로 인해 손해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기존에 소금가마를 소유한 왕실 종친과 이들의 대리인으로서 소금을 직접 생산하는 염간과 상인들이었다. 천일염이 아직 출하되지도 않았는데 상소가 빗발치자 조정에서 중재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결국 수군진포와 관아에서 종친들의 소금가마를 차례로 사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소금가마를 끝내 팔지 않은 일부 종친들은 본격적인 염전 경영에 나섰다. 소금 생산권은 주로 관에 있어서 이들 민간 생산업자들은 소수라도 소금의 수요와 공급을 맞추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아직 소금에서 간수를 빼지 못해 민간에 식용으로 판매하지는 못하지만 단기간에 간수를 적당히 뺀 저렴한 소금을 이용해 가공한 어물이 조운선이나 상선에 실려 한성까지 올라와 판매되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아직 소금이 시중에 판매되지 않았는데도 염전을 확장할 수 있는 자금이 되었고, 어민과 관아 아전들, 조졸들은 만세를 부를 수 있었다.
예전에 비해 가격이 대폭 내린 건어물과 염장처리한 해산물, 그리고 여러 종류의 젓갈과 장이 한성 사대부들과 중인 가정의 식탁을 천천히 점령해갔다. 아직 생산 초기라서 그렇지 간수 빼는 2년이 지나 대량 출하가 이루어져 가격이 더 내려가면 양인은 물론 천민도 구매가 가능했다.
“도련님! 오실 줄 알았으면 제가 안내해드릴 걸 그랬습니다.”
“아닙니다, 대방. 오늘은 저녁거리 사러 나온 겁니다.”
물론 대방은 이민호의 말을 믿지 않았다. 서얼 출신의 상단주는 이민호를 사또 모시는 이방처럼 굽실거리며 상단 소유의 기와집으로 모셨다. 대문에 해동상단이라는 한글 현판이 걸려 있었다. 다른 상단과 달리 종이나 짚으로 제대로 포장된 물건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창고 겸용의 건물이었다.
“조졸들이 아주 열심히 잘하고 있습니다. 예전처럼 조운선이 난파하는 사고도 확 줄어들어, 아! 올해는 아예 없어졌습니다. 세곡이나 물건을 빼돌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민호는 천일염전과, 조운선을 객선으로 도용함으로써 조운 관련해 다발적으로 발생했던 문제 대부분을 해결했다. 소금에 절인 어물을 비롯해 소금을 이용한 품목과 물량이 확대되면서 호경기가 되자 마포 상단들이 확 살아났고, 세곡 운송을 겸해 어물을 운반하는 조졸들은 배를 두들기며 살 수 있게 되었다. 바람이 강하거나 해가 지면 조운선이 무조건 포구에 머무르도록 조운방목을 고쳐 시행한 탓에 더 이상 해난 사고가 생길 수도 없었다.
“이익 배분에 문제는 없습니까?”
“예. 관리나 아전들의 욕심은 여전하나 이익이 예전보다 훨씬 늘어났으니 다들 입이 찢어졌습니다. 당분간은 괜찮을 것 같습니다.”
“혹시 조졸들이 지방별 이익 분배 비율을 두고 다투지는 않던가요?”
마포까지 경상도 조운선이 가장 먼 뱃길을 돌아야 하고, 충청도가 가장 짧았다. 운송횟수를 조절해 조졸들마다 들이는 노고가 비슷해진다지만 거리가 멀수록 일회 운행 당 비용이 크게 들므로 이민호 입장에서는 경상도 조운선에 조금이라도 특혜를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익이 예전보다 확 늘어서인지 충청도 조졸들이 많이 양보를 해주었다. 전체적인 노력과 대가는 비슷하게 받아갈 수 있도록 해동상단의 대방이 잘 배분해주었다.
“불만이 나오지 않도록 상단끼리도 물량 배분을 잘하세요.”
“예. 예전보다 훨씬 장사하기 편해졌으니 작은 불만이 있더라도 수긍하고 넘어가는 편입니다. 그래도 불만을 가진다면 그놈은 도둑놈이지요.”
사실 조운선을 운영하면서 다른 품목의 운송도 맡아 하는 불법행위인 셈이다. 관리, 아전, 조졸, 상인들이 거대한 부패의 시스템에 가담해 조운선을 상업에 전용해서 이익을 나눠먹는 구조였다.
분명히 불법인데도, 게다가 관료들이 조정에 보고하거나 선비가 상소를 올려 조정에서 알고 있는데도 다들 모른 척 넘어갔다. 조운선을 이용한 물품 수송은 예전부터 어느 정도 관례화돼 있었고 오랫동안 조운 제도의 문제점을 해결하지 못했다가 이번에 해결책이 보이는 탓에 다들 지켜보고 있었다. 이민호의 사주를 받는 조정 대신들이나 선비들은 이 시스템을 완전히 합법적인 행위로 바꾸려고 노력하고 있었고, 조만간 결실이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이 과정에서 이민호가 크게 얻은 이익은 없었다. 원래부터 소금 생산권을 가진 관아나 수군진포에서 더 많은 소금을 싸게 생산해서 그 이득은 고스란히 관아나 수군진포에 돌아갔다. 조졸들은 상인들의 의뢰를 받아 생산지와 소비지를 연결했을 뿐이며, 정당한 운송료를 받았다. 상인들은 물량과 품목이 늘어나 전체적인 이득을 늘일 수 있었다.
이민호는 다만 신규 상단에게 기반을 갖춰주고, 마포나루에서 상인들 사이에서 발언권이 커진 것뿐이었다. 물론 물가가 낮아지고 다양한 식생활로 백성들의 삶이 좋아지고 더불어 이민호의 식탁이 풍성해진 것은 덤이었다.
조선시대에 어느 지역에 흉년이 들면 조정에서는 쌀과 잡곡뿐만 아니라 소금을 보냈다. 곡식이 부족하면 소금 넣은 물에 채소를 끓여 먹으라는 뜻이다. 간수를 빼는 기간이 지난 소금이 대량 출하되기도 전에 각 지역 진휼창고에는 이미 삼남의 수군진포에서 보낸 소금이 쌓여 있었다.
“도련님께 광흥창 주부 직을 제수해야 한다는 여론이 마포 상인들 사이에 일고 있습니다. 도련님께서 직접 마포나루를 키워보시는 게 어떠십니까?”
“관직에 얽매이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합니다. 나는 조운선 제도가 활발해져서 더 맛있는 반찬을 먹으면 족합니다.”
사실 위에 상전들이 줄줄이 있는 직장생활을 하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한성에 거주하는 조정 중앙 관료들에게 녹봉을 지급하는 광흥창에는 종7품의 주부 위에 종5품의 사(使)부터 부사와 승까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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