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ire of the Warm Sea RAW novel - Chapter 20
* 20화 *
“그런데 고추와 감자는 아직 못 구했습니까?”
“동래의 왜상들에게 계속 주문하고 있지만 송구스럽게도 아직 못 구했습니다. 왜인들은 고추라는 작물 자체를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감자는 장기(나가사키)를 왕래하는 이양인들을 통해 구해달라고 해놨습니다. 여송에서 인도까지 왕복하는 상선이 있다니까 그 배를 통해 들여온다고 합니다. 선원들이 먹다 남긴 것이라도 구해보라고 해놨습니다.”
고추가 임진왜란 전후에 일본을 통해 들어왔다는 설이 다수설이나,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통해 조선에서 들어왔다는 설이 우세했다. 고추가 중국을 통해 들어왔다거나 조선 자생종이 있었다는 소수설도 있었다.
고추는 16세기 말에 조선에 도입된 후에도 200년 정도는 약용 외에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소금 품귀현상이 일어나고 나서 고춧가루에 든 성분이 식품의 부패방지에 효과가 큰 것을 발견하고 김치를 만들 때 첨가되었다. 이 시기에 소금이 대량 생산되어 가격이 하락한다면 고추가 들어간 김치는 만들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민호는 김치와 매운 음식을 먹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만상이나 송상에 문의해보세요. 고추 열매 안에 납작한 씨가 가득 들어 있으니 고추 하나만 구해도 종자 문제는 쉽게 해결될 겁니다. 고추와 감자를 조선에서 재배하면 고질적인 식량 문제가 단번에 해결됩니다. 나라를 구한다는 각오로 반드시 구하세요.”
“예. 천금을 들여서라도 구하겠습니다.”
“천금까지는 들일 필요 없어요. 남쪽에는 흔한 작물이니 쉽게 구할 수 있을 겁니다.”
이민호가 말을 얼버무렸다. 그리고 식량문제보다는 이민호의 식도락을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내륙 지역에 소금이 들어간 다음에는 동래 왜상들을 통해 소금을 일본에 수출하는 문제를 논의해보세요. 일본에서도 자염을 만드는데 염도가 낮아 식량의 장기 저장에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조선에 남는 소금을 비싼 가격에 일본에 팔아넘길 수 있어요.”
“도련님은 조선 땅에 소금이 남을 것까지 미리 생각하고 미래를 준비하시는군요.”
조선시대에 항상 부족한 것이 소금이었으니 소금 수출은 생각도 못한 대방이었다. 그러나 대방이 감동하든 말든 이민호는 일본의 은을 빨아들일 생각에 골몰했다. 임진왜란 후에 복수를 빌미로 군사적인 침공을 할 때 사전작업으로 경제력을 무너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 중에 이민호가 부를 늘릴 수 있다면 더 좋고.
왜은은 품위가 7할에 불과하나 조선의 은 제련법을 통해 중국의 천은과 동일한 품위로 올릴 수 있었다. 이민호는 금과 은이라는 귀금속을 이용해 중국과 일본을 제어하기로 했다. 은 생산량과 유통량은 매년 일정하고 유럽을 통해 꾸준히 유입되기 때문에 조건만 갖춰진다면 적은 양으로도 장난치기 딱 좋았다.
“도련님께서 소유하신 상단들은 매년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상단이 너무 커져서 웬만한 관아나 대갓집들은 명절에 선물을 받길 원하는 눈치입니다.”
이민호는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상단 세 개를 만들어 운영 중이었다. 이민호가 소유주로 표면에 드러난 상단은 경상 중에서도 이곳 해동상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런데 몇 년 사이 상단이 급성장하자 여기저기서 손을 내밀고 있었다.
대방이 뇌물 문제를 이민호에게 직접 보고한다는 것은 대방의 선을 떠나 큰 부담이 생겼다는 뜻이었다. 이민호가 눈살을 찌푸렸으나 상단을 운영하려면 뇌물수수는 필수적이었다.
“해금령도 해제시키지 못하는 주제에 돈을 밝히는구려. 쯧쯧!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말입니다. 달라는 곳에는 다른 상단이 주는 것을 봐서 적당히 주세요.”
“옳으신 말씀입니다. 가을에 추석 선물을 돌리면서 넌지시 찔러 보겠습니다. 대명 같은 경우 명색이 해금령 중인데도 남만인들과 활발하게 교역을 하고 있습니다. 조선 조정은 무역의 이익을 극소수 고관대작 가문에 독점시키고 싶은 것입니다. 반대가 심해 명나라는 아니더라도 일본, 유구, 안남, 점성 등과 무역을 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겠습니다.”
그러나 권신 가문들과 역관들의 이익이 달려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민호는 감시의 눈길이 두려워 밀무역을 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새 품종의 종자를 들일 방법을 계속해서 모색하고 있었다.
밀감 종자는 두 해 전에 이미 의주를 통해 중국에서 들여왔다. 밀감은 제주에서 묘목으로 키우고 있었다. 제주도는 바람이 강해 과수원 바깥을 방풍림으로 둘러치는 작업도 동시에 진행 중이었다. 앞으로 고추를 구한다면 수원 본가나 부친의 귀양살이 오두막 옆에 온실을 만들어 종묘를 키운 다음 밭에 이식할 계획이었다.
“외륜선 운항에는 문제없습니까?”
“예. 조운선과 달리 첨저선이라 선착장을 새로 연장해서 개수하는 문제가 있습니다만, 대부분 해결됐습니다. 태풍이 불면 나무 선착장이 유실될 것이므로 장기적으로는 도련님의 뜻을 받들어 바다에 돌을 놓아 방파제 겸 선착장으로 만들겠습니다. 그런데 윤선은 배가 힘이 있어서 안흥량을 지날 때 아주 좋습니다.”
“암초에 부표를 다는 문제는요?”
“태안 앞바다는 암초를 우회해서 먼 바다로 돌면 위험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부표를 달아 배가 암초에 깨지지 않게 하는 일은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충청수사와 충청병사가 요청해서 충청도 해안 전역으로 부표 설치 작업을 확장하는 문제를 논의 중입니다.”
“국가의 일이니 비용 문제는 편의를 봐주세요.”
충청병영은 바닷가인 해미에 있고, 왜구가 침범할 경우 충청병영의 병력도 수군처럼 배를 타고 나가서 싸웠다. 명종 때 수전 중에 왜구가 방패 뒤에 숨어 방패 귀 사이에 얼굴을 내밀어 보는 것을 활을 쏘아 맞혔다는 이야기는 충청수군이 아니라 충청육군이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외륜선 운항을 몇 달 지켜보던 내수사에서 좋은 가격에 정기 운송 계약을 제안해왔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왕실의 개인적인 사업이지만 국가의 일이기도 해서 고민입니다.”
“쳇! 빌어먹을 내수사! 어쩔 수 없지요. 내수사는 모든 조건을 최고로 해주세요. 혹시 배를 더 만들어야 합니까?”
“아직 세 척으로 버틸 만합니다만 나중을 생각해 두 척 정도 미리 더 만들어놓으면 좋겠습니다. 윤선 만드는 값이 일반 조운선의 두 배 이상이라는 사실을 내수사에서도 알고 있습니다. 윤선이 안전하고 시간을 확실히 지킨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것 같습니다.”
“나라에 수차나 물레방아가 많이 없어서 그래요. 기술이 축적되고 대량 생산하면 가격이 떨어질 것입니다. 운행비용은 조운선보다 더 적게 드니까 장기적으로 괜찮을 겁니다.”
처음 전라좌수영에서 만든 외륜선은 이민호가 상단에 넘겨 자금을 회수했다. 나머지 두 척은 강원도에서 한강을 타고 내려온 뗏목으로 압구정 강변에 임시 조선소를 세워 건조했다. 한강이나 서해안, 남해안에 특이한 모양의 외륜선이 돌아다니는 것은 이제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동복현과 금산에서 인삼밭을 매입했습니다만, 관의 통제가 너무 심해 대량으로 홍삼을 찌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주 적은 양만 시험 삼아 홍삼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아홉 번 찧는데 비용이 많이 들고 절반은 두 달 안에 곰팡이가 슬어 가격이 백삼의 열 배는 되어야 수지가 맞습니다.”
“예. 중국에 밀수출할 것도 아니니 상관없습니다만 기술을 획득하는 차원에서 계속 홍삼을 생산하세요. 수삼이나 백삼도 약호가 좋지만 유통기한에 문제가 있어서 그래요.”
대방이 침을 꼴깍 삼켰다. 중국에 가서 팔 수 있다면 어마어마한 부를 약속하는 물목이 홍삼이었다. 상인으로서 욕심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민호가 지금은 여유를 부렸지만 만약 자금이 부족했다면 홍삼 밀무역에 나섰을지도 몰랐다.
“윤선 간수군의 조총 훈련은 잘 됐습니까?”
“예. 무인도인 흑산도나 가거도에서 훈련을 시켰습니다. 각 윤선에 조총을 가진 간수군을 네 명씩 배치했으니 웬만한 왜구는 물리칠 수 있습니다.”
간수군(看守軍)은 상단에서 믿을 만한 사람들을 모아 고용해 훈련시킨 상선 호송원이었다. 남해안과 섬의 목장을 경영하는 관리인 감목관 밑에서 목장을 지키는 사람을 간수군이라 불렀는데 관과 민의 중간적인 성격을 가진 신분이었고 민간에 고용된 경비원도 그렇게 불렀다. 조선에서 가문 소속의 사병이 아닌 민간인 용병을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이민호가 얼마 전에 상단에 넘긴 조총은 탄피일체식의 후장단발 소총이었다. 6연발 리볼버 소총인 육혈총을 넘길까 하다가 바다에서는 긴 사거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중에 조선군에 넘길 예정이었던 단발 소총을 만들어주었다. 선장들에게는 도자기 수류탄도 두 발씩 넘겼다.
이 당시 조선에 질려포통, 유럽에 주먹폭탄이 있으니 수류탄이 전혀 새로운 개념의 무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은 모양만 전근대식이지 작동방식은 완전 현대식 수류탄이었고 안전장치도 여러 겹 갖춘 물건이었다. 이런 식으로 이민호는 기존의 것을 참조해 합법적인 한도 내에서 임진왜란에 차근차근 대비했다.
“총과 수류탄이 왜국으로 전해질까 우려되니 외부에 노출되면 절대 안 됩니다. 몇 년 후에 왜적이 쳐들어올 때 나라에 바칠 예정이니 대방은 역모를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간수군들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도련님의 뜻에 따라 보통 때는 선장실 금고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민호가 현대인이라 더 예민해서 그렇지 사실 조선에서 총기를 들고 다닌다 해서 문제될 것은 없었다. 사냥꾼이 길거리에서 활이나 승자총통을 들고 다닌다 해서 문제 삼는 관원도 없었다.
에도시대 일본과 달리 조선에서는 대부분의 기간 동안 현대 미국인 이상으로 총기소지의 자유를 누렸다. 조선 후기에 총기 사고가 날까 우려해 사냥을 나가지 않는 날에는 사냥용 화승총을 관아에 비치하라는 명령이 몇 번 내려졌지만 금방 철회되곤 했다. 그래서 평소에 총을 갖고 다녀도 되지만 이 새로운 개념의 소총이 널리 퍼져 나가는 것은 아직 이민호가 바라지 않았다.
가뭄이 심해진 6월에 이민호는 한양 북촌의 누님 댁에 들렀다. 17살 많은 누님은 무관의 여식답게 여장부였으나 깐깐한 선비인 해주 오씨 시아버지와 병드신 시할머니를 모시느라 혹독한 시집살이를 하고 있었다.
“전에 처남이 인사하러 오겠다는 말은 들었는데 마침 출타 중이라 못 봐서 섭섭했네. 사마시에 합격했다는 소식 들었네. 어린 나이에 아주 장하네 그려.”
“감사합니다, 자형. 성균관에서 찾아뵈려 했는데 안 계시더군요.”
“요즘 성균관은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친우를 사귀는 곳이라네.”
매형과의 나이는 18살 차이인데 소과 합격은 5년 차이였다. 매형 이름은 오윤겸, 사돈어른의 함자는 오희문이었다. 이민호는 오희문이 쇄미록의 저자라는 희미한 기억을 떠올렸다.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간 일기에 고스란히 기록돼 후세 사람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것 같아 이민호는 말을 조심했다.
이민호의 부친 이응화가 계사년 말에 한산도로 가다가 물에 빠져 죽은 다음, 아들이 없어 사위인 오윤겸이 삼년상을 치르려고 했었다. 그러나 부친 오희문의 강권으로 오윤겸은 문과 시험공부를 계속하게 된다. 제사를 처가에서 모신 덕에 이응화가 제삿밥은 얻어먹을 수 있었으나 대가 끊긴 설움을 톡톡히 느껴야 했다.
부친이 물에 빠져 죽은 다음 이야기는 잘 안 하는데 혼백이 되어 얼마 동안 떠돈 것 같았다. 분위기로 미루어 이민호가 조선시대로 온 첫날에 봤었던 무당이 부친을 도와준 것 같다는 추측만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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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여기까지 올리겠습니다. 챕터 4는 아직 두세 편 남았고 다음 챕터는 남정북벌 편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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