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ire of the Warm Sea RAW novel - Chapter 22
* 22화 *
흉년이 들면 당연히 열어야 하는 진휼소를 조정에서 열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시간이 흘러 결국 열리지 않았다. 진휼소에 배정됐던 환곡 또는 세창의 곡식은 다시 창고로 돌아갔고, 대신 각 고을의 사창에서 빈민들에게 무료로 진휼미를 풀었다. 이것으로 흉년이 들었어도 기근이 발생하지 않은 특이한 사례가 되었다.
미곡 생산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는데도 식량난으로 인한 위기가 없자 조선 조정의 대신들은 큰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이민호가 이끄는 상단과 조선 왕실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추석을 지내고 나서 추수철이 끝나가는 어느 날 밤늦게 환관이 가마를 타고 이민호의 서소문 저택을 방문했다. 예전에 수원 본가에 왔었던 내수사 전수였다. 이민호는 내수사에서 뇌물을 수금하러 왔나 생각했으나, 정 반대였다. 내수사 전수가 이민호의 걱정을 알아채고 시름을 덜어주었다.
“왕실 내탕고에는 조선의 국고보다 훨씬 더 많은 재산이 있네. 내게도 애비가 고자라고 무시하는 양자 놈들에게 물려줄 재산은 많아. 달라고 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말게. 오히려 자네에게 선물을 주러 왔네.”
“송구합니다.”
지난해 말 이민호에게 자세한 설명을 들은 내수사 전수는 임금을 설득해 내수사 소유의 전답이 위치한 여러 지방에서 사창을 대대적으로 운영했다고 한다. 10개월 이자가 5할이나 되는 고리대인 장리는 오히려 사업규모를 대폭 줄였다.
그런데 사업 첫 해인 올해 마침 흉년을 맞아 큰 이문을 얻었다고 했다. 올 늦봄부터 백미를 풀어 얻은 면포가 지난해 백미 가치의 열 배로 늘었으니 아주 대박을 친 셈이었다. 사실 내년 작황과 교환 비율을 봐야 이득이 얼마일지 확정되겠지만, 면포가가 너무 싸면 거래를 안 하고 그 다음 해에 풀 여력이 내수사에 있으니 큰 상관이 없었다. 면포 기준이든 쌀 기준이든 늘어나게 돼 있었고, 그럼 이익이 눈으로 판별될 것이다.
“이 생원 자네 덕에 품계도 제법 올라 드디어 당상관이 됐네. 내가 내관이라 별 의미는 없지만 얄미운 양자 놈들에게 음직이라도 줄 수 있게 됐어. 양자 놈들이 관직에 올라야 예쁜 손주 놈들도 양반 대접을 받지 않겠나?”
“영감이라고 마음 놓고 불러도 되겠군요. 축하드립니다, 전수 영감!”
“고맙네. 다 자네 덕일세. 그런데 이 과자는 정말 맛있군. 집에 갈 때 싸갈 수 있겠나? 내가 먹겠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예쁜 손주 놈들 주고 싶어서 그래.”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부엌에 알려 더 만들게 하겠습니다. 절기마다 보내드린 인정은 제대로 전달됐는지요.”
“남들 눈치 보이고 그리 필요도 없으니 비싼 재물은 더 이상 보내지 말게. 내가 그만 보내라고 하면 진짜로 보내지 말라는 뜻이야. 양반들처럼 체면 때문에 말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닐세.”
이민호는 전통 한과를 더 좋아하는데 요리에 관심이 많은 혜진은 이민호가 가르쳐준 요리법으로 새로운 요리를 만들기를 좋아했다. 차와 함께 내온 것은 생과자 종류였다.
“자네 집에 올 때마다 입이 호강해서 좋구먼. 이런 주전부리는 좋아. 자네 집 하인을 우리 집에 보내서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겠나? 자네가 보낸 달짝지근한 과자를 아이들이 아주 좋아하더군.”
“사탕이 들어가서 단 맛이 납니다. 귀한 손주 분들이 많이 드시면 이가 상할 우려가 있으니 걱정됩니다.”
“오! 사탕이라니, 아주 비싼 재료가 들어갔구먼. 아직 젖니가 안 빠졌으니 손주들 이빨은 걱정 말게.”
설탕은 예나 지금이나 수입품이었다. 이민호는 사탕무를 조선에 들여와 설탕판매와 동시에 축산업을 대규모로 해볼까 하다가 효율이 낮을 것 같아 포기했다. 일조량이 많은 대만에서 땅을 얻어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을 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이민호는 다과를 두고 환관과 오랜 시간 이야기를 했다. 주로 조운선과 왜구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머리 좋은 환관은 이민호가 원하는 것을 알아들었다.
“외국과의 무역을 원한다고? 그건 좀 어렵겠는데. 해금령은 천조의 시책이라 조공무역 외에는 어려워. 또한 조정에서 상업을 중시하면 나라의 근본인 농업을 등한시하게 돼 고려의 망조를 보게 될 수도 있네.”
역시나 환관은 부정적인 입장부터 밝혔다. 그러나 이민호 입장에서는 무역에서 이득을 얻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일단 나가서 자리를 잡아야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고 꿈자리도 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난 5년 동안 이민호가 준비한 것은 많았으나 조선에 남아있는 동안에는 제대로 활용하기 어려운 것이 대부분이었다. 또한 임진왜란에 대비해 멀리 인도에서 감자의 종자를 구하고 고구마와 옥수수 등을 구해 팔도에 미리 전파시켜야 전쟁으로 인한 인적 피해를 줄일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나 조선에 있다 보면 의주나 동래를 거쳐 외국 상인에 부탁해야 하는데, 쓸데없이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이 장난 아니었다. 이민호는 최대한 빨리 조선에서 나가 대만이나 필리핀에서 자리를 잡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 천조는 지금도 남만인들하고 무역을 하고 있지. 심지어 해적을 잡아준 대가로 포도아 사람들에게 오문 땅을 떼어주기까지 했어.”
포르투갈 사람들이 해적을 잡아줘서 명나라가 오문(澳門) 즉 마카오를 떼어준 것이 아니라 사실은 포르투갈 사람들의 불법체류를 뇌물을 받은 중국 관리들이 눈감아주고 나중에는 정식으로 매년 세금을 바치면서 체류를 장기화한 것뿐이다.
“그리고 고려나 원조는 상업 때문에 망한 게 아니라 오히려 흥성했지. 사실은 지폐인 교초를 너무 무분별하게 발행했기 때문에 망한 거야.”
“그렇습니다. 화폐는 시중에 필요한 만큼을 정확히 찍어내 유통시켜야 하는데 태종대왕 때 저화 유통 건으로 알 수 있듯이 엄청나게 어려운 일입니다. 원나라 중기에는 교초를 필요한 양보다 적게 찍어서 문제였고, 말기에는 무한정 찍어대는 바람에 화폐제도뿐만 아니라 국가제도 자체가 완전히 붕괴됐습니다. 액면가가 높은 원나라 지폐 종류로 재산을 보관한 고려 귀족들도 지폐 가치 폭락으로 인해 망했지요.”
“자네도 역사를 알고 있군. 어쨌든 중국과의 사무역은 어렵네. 조공무역 외에 다른 방향에서 중국 물건이 들어온다면 고관대작들과 연결된 역관 가문들이 용납하기 어려울 걸세. 명분은 해금령에 있으니까 자네에게 불리해.”
“그럼 중국 물건을 조선 땅에 들여오지 않으면 상관없습니까? 사실 저는 만석꾼의 아들이기에 중국산 비단이나 도자기를 조선에 들여와 팔아서 이득을 얻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저는 그저 점성이나 안남, 인도의 농작물 종자를 조선에 들여와 키우고 싶습니다.”
“그런가? 하지만 먼 곳에서 종자를 들여오려면 배를 운행해야 할 테고, 그럼 비용이 많이 들 텐데 어떻게 충당할 텐가?”
내수사 전수는 이민호가 배를 운행하면서 들어가는 비용을 회수할 방법을 물었다. 전수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적당히 편의를 봐줄 수도 있다는 자세를 보여 이민호는 희망을 품었다. 그리고 처음에 전수가 이민호에게 선물을 가져왔다고 한 말이 자꾸 신경 쓰였다.
“배를 운행하면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무역을 하면 조공무역의 독점적 이익을 침해할 수 있습니다. 그럼 중간에 조선에 들르지 않고 중국과 일본 사이의 무역만 하면 어떻겠습니까? 조공무역에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을 것입니다.”
“흐음. 그건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그런데 남해에는 왜구가 들끓어 무역을 하기 어려울 텐데. 자네 호위 역할을 하는 가노 몇에 윤선에 태운 간수군 겨우 열 몇 명 외에 사병을 가진 것도 아니지 않나? 새로 만든 조총을 믿는 건가?”
역시나 내수사에서 이민호가 가진 것을 샅샅이 꿰고 있었다. 등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낀 이민호는 그 동안 사병을 키우지 않은 것을 정말 다행으로 여겼다.
“가문에 장기 고용되는 사병은 필요도 없고 그저 배 타고 멀리 나갈 때마다 사람들을 모아 돈 주고 부리면 됩니다. 수영 영하마을마다 수군 대립(代立)해주는 장정들이 많지 않습니까? 군사훈련도 충분히 받았겠다, 가족이 영하마을에 남아있으니 충성심도 높겠다, 숫자도 많겠다. 딱 적당합니다.”
“그건 그렇군. 맞아. 가족이 영하마을에 있으니 밖에 나가더라도 허튼 생각을 못하겠지. 그런데 배를 타고 나간다면 그 외에 무슨 일을 하려고 하나? 그래도 이득이 있어야 할 것 아닌가?”
이민호가 고용할 병력의 가족이 수영 영하마을에 남아있을 거라는 말이 전수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인 것 같았다. 대립하는 장정들의 가족과 이민호의 부친은 조선 조정 입장에서는 인질로서 가치가 있었다. 덕택에 이민호의 자유를 옥죄던 봉인이 풀렸다.
“중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은과 금의 교환비율 차이에서 비롯된 이득만 얻어도 어마어마한 양이 될 것입니다. 초기에는 왜구를 토벌해야 하니 큰 이문은 남지 않겠지만 나중에는 큰돈이 될 것입니다.”
유럽과 중국, 일본의 밀무역 상인들을 통해 중국과 일본 사이에 비단과 생사(生絲), 은과 구리가 주요 교역 품목으로 손꼽혔으나 그것은 피상적인 면에 불과했다. 동아시아의 바다에서 활동한 유럽 상선 또는 해적들은 두 나라의 환율 차이에서 가장 큰 이득을 얻었다.
은 본위제인 명나라의 은 가격이 비싸서 중국의 금을 은 생산국인 일본에 가져가 은으로 교환하기만 해도 항해의 기본적인 수지를 맞출 수 있었다. 비단과 생사 판매로 인한 이윤이 하나도 없더라도 단지 거래만으로도 이득이 생겼다. 16세기 초반 이후 일본은 전 세계 은 생산량의 3할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중국이나 일본이나 다 알면서도 바닷사람에게 넘길 수밖에 없는 이득이군. 왜구 토벌에 대해 좀 더 이야기해보세. 요즘 여진족들이 난동을 부려 함경도의 방비에 신경 쓰느라 남쪽 왜구에 대한 대비를 등한시했던 것이 사실이야. 이번 손죽도 왜변 이후에 우리 조정에서 대마도를 통해 일본에 항의했더니 지방의 난민들이 도적이 되어 일본 해안지방을 노략질한다고 오히려 우리에게 투정을 부리더군. 항상 그랬듯이 일본에서는 왜구를 막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아.”
“왜놈들이 스스로 막지 않는다면 우리가 왜 땅에 가서 토벌해버려야 합니다. 제게 군사를 빌려주시면, 아니,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명령만 내려주시면 의병들을 이끌고 오도라는 왜구들의 본거지 섬을 토멸하겠습니다.”
“그건 어려운 문제일세. 조선은 국초에 사병들을 혁파하면서 국정을 안정시킬 수 있었네. 만약 자네가 사병을 모아 군벌이 된다면 왕실에서 결코 좌시하지 않을 걸세. 장보고나 고려 태조의 사례가 있으니 말일세. 무역을 하려면 사병이 필요하고, 사병을 보유하면 역모죄에 쉽게 엮일 수 있네. 그래서 고민이야. 오늘 내가 찾아온 이유이기도 하고.”
조선시대에도 권문세족들은 농장 보호 등을 이유로 적당히 사병을 운영하기도 했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의병장을 했던 정인홍 등 권세가들이 의병들을 수하에 두고 사병이나 가속처럼 부렸다. 그러나 지금은 임진왜란 이전이라 그 방법을 쓸 수도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전수는 사병을 보유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지 않았다. 이민호는 전수가 뭔가 원하는 것이 있음을 알고 괜히 사병 이야기를 꺼내 떡밥을 뿌렸다.
“그래도 써먹기에는 사병이 좋은데 말입니다. 그렇다면 수영의 병력을 일부 빌려주십시오. 저를 감시도 하고, 왜구 상대로 수군이 실전 훈련도 하고. 좋지 않습니까?”
“내 선에서 결정할 문제는 아니군. 하지만 긍정적으로 보고하겠네. 생각해보니 조선의 정식 군대가 비록 섬나라 야만인들이라 하지만 외국 영토에서 왜구를 토벌하는 것도 무리일 것 같아. 하지만 만약 자네가 사병을 이끌고 왜구를 토벌해준다면 왜국에는 왜구에게 피해를 입은 전라도 백성들이 사적인 복수에 나선 것이라 말하고, 조선에는 전라우수영이 토벌했다고 발표하면 괜찮겠는데 어떤가?”
“오호! 그 방법이 좋겠습니다. 전수 영감께서 걱정하시는 부분은 잘 알겠습니다. 확실히 사병 보유는 예민한 문제이며 큰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정치할 사람이 아닙니다. 귀찮거든요. 그리고 설혹 제게 욕심이 있다 하더라도 제 밑에 있는 사람들이 찬동하겠습니까? 다들 충성스런 자들입니다.”
“자네 부친도 참으로 충성스러운 무관이더군. 적에게는 용감하고 수졸들에게는 자애로우면서도 수영과 수군진포의 경영을 위해 새로운 소금 생산법을 알려줬으니 말일세. 자네 소유 상단 사람들도 만나봤네. 만약 자네가 역모를 꾸밀 것 같으면 의금부에 고변하겠다고 하더군.”
이민호와 내수사 전수는 서로 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민호는 목숨을 걸고 머리를 굴렸다. 내수사 전수는 이민호의 부친을 볼모로 삼겠다는 소리까지 아주 대놓고 했다.
그러나 내수사 전수가 이민호의 집을 방문한 것에는 분명히 어떤 목적이 있었다. 전수가 왜구 토벌을 이민호에게 맡기고 무역의 이익을 줄 것 같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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