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ire of the Warm Sea RAW novel - Chapter 23
* 23화 *
“섭섭하지만 당연히 그럴 겁니다. 사실 제 꿈을 펼치려면 넓은 땅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조선에는 없습니다.”
“설마 나라 밖에 나라라도 세울 건가?”
“딱히 나라를 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그저 본가를 수원에 두고, 가능하다면 겨울에는 저 멀리 남쪽 여송이나 섬라, 점성 혹은 안남 같은 따뜻한 지역에서 살고 싶습니다. 그럴 마음도 없지만 제가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조선은 마음대로 되지도 않을 겁니다. 그걸 떠나서 조선은 겨울에 너무 춥거든요.”
전수가 피식 웃었다. 이민호가 겨울에 따뜻한 좌수영에 가서도 하루 종일 온돌방에 틀어박혀 이불을 뒤집어쓰고 오들오들 떤다는 소문을 전수도 들어 알고 있었다. 이민호는 아직도 소빙기 중 간빙기의 추위에 적응하지 못했다. 만약 이민호가 17세기 말 이후의 제대로 된 소빙기 시대에 왔다면 진작 따뜻한 남쪽 나라로 이민 갔을지도 몰랐다.
점성과 안남 혹은 대월은 베트남의 왕조였는데 참파족의 점성은 이 당시에 거의 멸망하고 국가의 명목만 남은 정도였다. 베트남 중부와 북부를 차지한 대월이 대외적으로 왕, 대내적으로 황제를 칭하기 위해 참파족의 국가를 번국으로 보존시켰다.
“저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도 남쪽에 기반을 만들어야 합니다. 직접 하기 곤란한 왕실의 일을 해드릴 테니 제가 남쪽에서 기반을 닦도록 허락해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기본적으로는 제가 왕실에 충성하겠지만, 서로 보탬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자네 나이 열 살 맞지? 꿈이 굉장히 크군.”
“맞습니다만, 저는 지금 심각합니다. 진짜 추워 죽겠어요. 제 체질이 추위에 약해서 그런지 조선에서는 도저히 못 살겠습니다.”
내수사 전수가 조금 안심하는 것 같았다. 사실 이민호도 추위 이야기만큼은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이때 조선은 영토 확장에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이민호의 야망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행이었다.
“만약 자네에게 해외 진출을 허락하면 왕실에는 어떤 이득이 생기는가? 매년 금은보화라도 바칠 생각인가?”
“왜구 토벌과 기반을 닦는 데에 드는 기간 3년을 제외한 그 다음 해부터는 매년 삼남지방의 전세에 해당하는 미곡, 또는 그에 상응하는 금 또는 은을 바치겠습니다. 왕실에 은혜를 입었으니 당연히 조정이 아닌 왕실에 바쳐야겠죠?”
“자네는 참으로 통이 크군.”
내수사 전수가 꽤나 놀랐다. 삼남지방의 전세에 해당하는 미곡이라면 당시 조선의 국가예산과 사실상 같은 말이었다. 16세기 후반 조운선과 사선(私船)에 의해 운반되는 삼남지방의 세곡은 대체로 20만 섬 정도였다.
그러나 각지의 조창에서 조운선으로 운송해 경창인 마포 광흥창에 들어가는 세곡 대부분은 한성에서 근무하는 관료들의 녹봉으로 지출됐다. 지방 관아에서 사용할 예산이나 수영의 예산은 따로 관리됐다. 함경도와 평안도의 세곡도 그 지방에서 사용됐다.
그리고 조선의 국가 재정은 전세 외에도 공납에 크게 의존했다. 그러니 조선의 전체적인 재정은 20만 섬을 훨씬 초과했다.
“만약 제게 홍삼 판매권을 주시면 판매금의 절반을 바치겠습니다. 천조의 황도에 팔지만 않으면 역관들도 뭐라 하지 않을 겁니다. 항주와 남경, 일본에 홍삼을 판다면 일 년에 은 삼십만 냥 이상도 가능할 겁니다.”
“홍삼이라. 천조의 황실에만 들어가는 물건이라 사실 어려운 이야긴데 황도는 피하고 은으로 매년 삼십만 냥이라니 솔깃하군. 은이 삼십만 냥이면 천조에서 쌀이 육십만 석이야. 양자강 건너 남쪽 땅에서는 백이십만 석일세. 허허!”
홍삼이 아닌 수삼이나 백삼만 해도 중국산 인삼인 전칠삼의 100배 이상의 가치가 있었다. 중국에는 짝퉁 고려인삼도 많았고 나중에 18세기에는 미국산 인삼이 대량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고려인삼이 중국에서는 최고의 보양강장제, 베트남에서는 황제나 권신들이 먹는 정력제, 일본에서는 만병통치약으로 통했다. 세 곳 모두 황제나 천황의 이름으로 홍삼의 유통을 통제했으나 수요가 있으면 어떻게든 유통되는 법이었다.
“그런데 매년 은 삼십만 냥이라니. 천조가 은본위제인데 자넨 천조 경제의 근간을 무너뜨릴 셈인가? 어마어마하다는 천조의 국고수입이 매해 은 이백만 냥일세. 일본과 여송에서 같은 양의 은이 천조로 흘러 들어가지 않으면 천조는 몇 년 안에 망할 수도 있어.”
“옳으신 말씀입니다. 은을 모아 쌓아두기만 하면 피차 손해이니 어느 정도는 천조에 되돌려줘야 합니다. 그래야 천조로부터 보화가 꾸준히 조선에 계속 유입될 수 있습니다. 왕실 재산은 쌀과 토지, 금과 보석, 비단과 골동품 등으로 보관할 수 있습니다.”
환관이 계산을 하느라 고개를 들고 눈을 껌뻑거리는 중에 이민호가 강수를 두었다.
“전수 영감! 생각해 보십시오. 무역만 잘 되면 나라에서 전세나 공납을 걷을 필요도 없습니다. 주상전하께서는 역대 어느 성군들도 해내지 못한 업적을 이루시고 만백성으로부터 성인으로 칭송을 받으실 겁니다. 그리고 조정 대신들과 문무 관료, 하급 서리들까지 주상전하께서 녹봉을 내려 다 먹여 살리신다면 선비들이 주상께서 하시는 일에 감히 딴소리를 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아! 매년 은 삼십만 냥이면 충분히 가능하지. 그렇게 되면 정말 좋겠어. 왕권이 강화되겠지. 그렇다면 정말 꿈의 나라가 현실에 이루어지는 거야.”
환관 입장에서야 꿈의 나라일지 몰라도 다르게 생각할 양반들이 많을 것을 이민호는 알고 있었다. 내수사 전수가 환상에 젖어 있는 동안 이민호는 그에게 행복을 즐길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잠시 고개를 흔든 전수가 밝은 표정을 지었다. 환관은 당연히 신권보다는 왕권 강화를 선호했고, 왕실의 재정이 는다는 것은 왕권의 강화를 뜻했다. 내수사가 하는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왕실 재정을 늘리는 일이었다.
“상께 말씀드려 윤허를 얻겠네. 조정 대신들을 설득하기 정 어렵다면 수사들에게 비밀 교지를 내려서 비공개적으로 일을 진행할 수 있을 걸세. 그런데 사병은, 아니 좋은 말로 간수군이라 부르세. 간수군은 얼마나 필요한가? 당연히 적을수록 좋다네.”
“걱정하시는 바는 잘 알겠습니다만, 백 명 정도만 모아도 됩니다. 대만에서 농사를 지을 유민이나 중간 관리를 제외한 순수 병력만으로 말입니다.”
“오도의 왜구를 토벌한다면서 겨우 그걸로 될까? 그렇게 많은 전라우수군도 사나운 왜구들에게 패했네.”
왜변 때 전라도에 나타난 왜선은 총 20척이었다. 세키부네 10척, 고바야 10척이니 700명 약간 넘는 수로 이민호는 추정했다. 일본에서도 병력을 동원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여 주변 지역에 거주하는 장정들을 징집해야 한다. 왜구의 근거지라는 오도의 포구에는 실제로 100명도 있기 힘들다고 이민호는 판단했다. 왜구가 남해안에서 그렇듯이 이민호도 오도의 주 포구에 갑자기 들이친다면 승산은 충분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윤선이 세 척인데 사공들을 제외하고 싸울 자 백 명이면 오히려 남습니다. 대신 오도 왜구를 토벌한 뒤에도 제가 그들을 계속 고용하겠습니다. 가능합니까?”
“그 정도면 가능하지. 좋아. 아주 좋아. 이번 일이 잘 되면 간수군 모집 인원을 천 명까지 늘려주겠네. 이제야 말하지만 사실 이건 내가 자네에게 오기 전에 상께서 미리 윤허하신 숫자라네. 대신 상선 간수군 소수와 호위 몇 명을 제외하곤 자네 사병들이 부대 단위로, 그리고 무장한 채로 조선 땅에 발을 디딜 수 없네. 괜찮겠나?”
“어차피 그들은 모두 조선에 가족과 삶의 기반을 두고 있으니 역모를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사병들이 휴가 때는 비무장으로 고향에 가도록 하겠습니다.”
이민호는 임진왜란 전쟁 과정 중에 대량으로 발생할 유민을 이용할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조선 왕실에서 이민호에게 먼저 접근함으로써 계획을 서두를 수 있게 되었다.
왜구를 토벌해주는 대신 해외 진출의 길이 열렸다. 다만 앞으로도 조선 왕실에서 시킬 일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민호가 윤선 몇 척을 만들어 운행하는 것을 본 것만으로도 왕실에서는 이민호의 장래 계획을 알아챌 능력이 있었고, 그것을 이용할 줄도 알았다. 이민호는 등골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물었다.
“혹시나 외적이 조선 강토에 침입할 경우 제가 간수군을 동원해 도와드리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으음. 안 들어오는 게 낫긴 한데 미래야 알 수 없으니. 그럼 절대로 경기도 내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자네가 약조를 하면 주상전하께 말씀드리도록 하겠네.”
“제 본가가 있는 수원까지 안 되겠습니까?”
“수원이 자네 본가이기 때문일세.”
범궐을 막을 뿐만 아니라 본가를 약점으로 삼겠다는 노림수였다. 이민호는 충분히 이해했다.
“그런 뜻이 더 있었군요. 알겠습니다. 간수군의 훈련을 훈련원에서 시키면 좋겠는데, 한성이니 안 되겠죠?”
“병력 모집과 훈련은 감영이나 병영, 수영을 이용하게. 경성에서 멀수록 좋다네.”
“주로 배를 타고 훈련해야 하니 수영이 좋겠습니다.”
내수사 전수가 돌아갔다. 밤이 깊어 사대문이 닫혀 있었지만 그의 힘은 웬만한 정승, 판서 이상이니 잘 돌아갔을 것으로 믿었다.
“어휴! 가을에 웬 땀을 그리 흘리세요?”
“방금 무서운 손님이 왔다 갔잖아.”
이민호는 목욕탕에 가서 찬물에 몸을 담았다. 자리옷만 입은 혜영이 와서 목욕을 도와주었다. 추위에 지독히 약해서 여름에도 미지근한 물로 목욕을 하던 이민호가 오늘은 찬물로 목욕해도 혜영은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지난해 말에 초경을 했던 혜영은 가슴도 조금 부풀었다. 이민호를 따라서 워낙 잘 먹은 혜영과 혜진은 같은 나이 여자애들에 비해 발육이 무척 좋은 편이었다. 키 큰 여자는 매력 없다는 속설 때문에 걱정하는 혜영에게 이민호는 무관 집안에서는 여자도 키가 커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러자 그때부터 혜영은 순전히 앞으로 태어날 2세를 위해 돼지처럼 잘 먹었다. 그러나 아직도 키가 쑥쑥 크는 시기라 살은 별로 찌지 않았다.
거시기에 아직 털도 안 나서 그런지 이민호는 헐벗은 여체를 보면서도 아무 생각도 안 났다. 다만 남자의 본능으로 이민호의 시선이 혜영의 몸을 훑을 때마다 혜영의 볼에 홍조가 졌다.
“그 분 궁궐 사람이죠?”
“그렇지. 거의 죽다 살아났어. 하지만 이제부터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됐어. 왕실을 위해 일을 좀 해줘야겠지만 이제부터 쉽게 바깥으로 나갈 수 있을 거야.”
“정말요? 드디어 꿈이 이루어지겠군요. 도련님, 축하드려요.”
“얼른 좌수영으로 내려가 봐야겠어. 겨울에는 좌수영보다 따뜻한 곳에서 지내고 싶었는데 잘하면 내년부터 가능하겠어. 요즘 사창은 어때?”
“창고가 벼와 면포로 가득 차서 새로 창고를 지어 보관하고 있어요. 올해 워낙 흉년이라 그런지 추수철에도 백미를 계속 출하하고 있는데도 면포 가격이 오를 줄을 몰라요.”
“이런! 지금 백미가 몇 섬 남았지?”
면포 한 필의 규격은 폭 세 자, 길이 40자인데 접어놓으면 부피는 얼마 안 된다. 보통 면포 한 필이 쌀 두 말에 해당하는데 올해 쌀 가격이 너무 비싼 탓에 면포 가격이 상대적으로 폭락했다.
올해 가뭄이 들어 극심한 흉년이었지만 치수가 잘 된 수원 본가에서는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소출을 얻었다. 봄에 이앙법을 하려던 소작농들은 결국 직파법으로 농사를 지었는데 가을에 이민호에게 몰려와서 큰절을 올렸다. 이민호는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이앙법을 시작할 계획이었다.
“북촌 누님 댁에 일만 섬 보내고 수원 사창에 이만 삼천 섬 남았어요. 본가에 보관된 쌀은 9백 섬, 벼는 8천 섬이에요.”
“아직도 많네. 흉년을 이용해 치부한다고 양반들에게 욕먹고 싶지 않으니 앞으로 거래량을 제한하도록 해. 보리를 수확하는 내년 봄까지 매달 일천 섬을 면포와 교환하고 일천 섬을 진휼미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줘. 수원부에 타 지역 유민들이 많이 흘러 들어왔다니까 진휼소를 차리고 사람들을 고용해서 밥을 해 나눠먹이도록 해. 남으면 다른 지역으로도 쌀을 보내. 가을걷이한 다음 뭘 심었지?”
“예. 그렇게 할게요. 내년에 어떻게 될지 몰라 보리와 밀을 절반씩 심었어요. 제가 잘못했나요?”
“내년에도 가물지 모르니 좋은 선택이야. 하지만 올해 가물어서 다들 밀을 심으니 아직 파종을 안 한 곳이 있다면 보리를 심는 게 나을 거야.”
말은 그렇게 해놓고 이민호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부친의 말을 들어보니 내년 봄에 비가 많이 온다고 했다. 그럼 건조한 기후에 더 잘 자라는 밀농사는 망했다고 봐야 했다.
이민호가 욕조에서 나오자 혜영이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었다. 머리 크고 팔이 짧은 다섯 살 때와 달리 이제 이민호 혼자 닦을 수 있는데도 혜영은 여전히 시중을 들었다. 사타구니를 조심스럽게 닦고 그것을 까서 대가리를 닦을 때 이민호는 너무 민망해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여자 손이 닿았는데도 그것은 설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민호는 한국에서 살 때 열한 살 여름에 처음으로 ‘남성’임을 느꼈던 기억이 났다.
“이리 와봐.”
“네?”
이민호가 알몸으로 혜영을 뒤에서 안았다. 솔로들이 질투를 가장 심하게 느낀다는 백허그 자세였다. 품에 안긴 혜영이 눈을 꼭 감고 바들바들 떨었다.
“눈을 떠봐.”
“예. 힉!”
욕실 벽에 붙은 커다란 거울에 비친 모습을 보고 혜영이 소스라쳤다. 그러나 잠시 후 정인에게 안긴 처녀의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이민호는 혜영을 껴안고 잠시 그렇게 서 있었다.
“우리가 금방금방 클 테니까 이 거울이 큰 것은 아니라고 했잖아. 내년에 더 큰 거울로 바꿔야겠어. 나가자.”
“네?”
혜영이 뭔가 크게 실망한 것 같았다. 침구를 깔면서 괜히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공대생-연구원이라는 솔로 테크를 탈 때와 달리 이민호는 혜영의 심정을 알아챘다. 그래서 오랜만에 혜영을 안고 5분 넘게 키스를 했다. 키스가 끝나고 품에 안긴 혜영은 너무 좋아했고, 자기만의 여자가 있다는 사실에 이민호도 행복했다.
다음 날, 이민호는 함경도 녹둔도 둔전이 야인들에게 공격당해 많은 사람들이 잡혀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제야 내수사 전수가 밤늦게 찾아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조선 왕실은 왜구 토벌을 되든 안 되든 이민호에게 맡기고 여진족에 대한 응징에 전념하기로 결정한 것 같았다.
이때 녹둔도 둔전을 관할하던 조산보 만호는 이순신 장군이었고, 백의종군을 하게 된다. 몇 달 후 함경도 북병사 이일이 이끄는 조선군이 시전부락을 토벌하는 것이 역사의 흐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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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대화나 머리싸움보다는 행동이 재미있습니다.
따분했던 가뭄편이 끝나고 다음 편이 남정북벌입니다. 낮에 두세 편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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