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ire of the Warm Sea RAW novel - Chapter 27
* 27화 *
“귀찮으니 그냥 알겠다고 하시오. 대신 우리가 온 사실을 일본 조정에 보고하거나 소문이 퍼지지 않게 하라고 전하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리. 비밀로 하자니까 저쪽에서 아주 좋아합니다. 어? 왜놈들 소굴을 불태우지 않은 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선물을 바치겠답니다. 배에 화포가 여러 문 보이는데도 왜인들을 불쌍히 여겨 화포를 쏘지 않아주어서 고맙답니다. 선물을 받으시겠습니까?”
“쳇! 귀찮게. 받겠다고 하시오.”
사실 왜구 소굴에 화포 쏘는 걸 이민호가 까먹었다. 괜히 골목길에서 전투를 하면 인명피해가 나느니 하면서 쓸데없는 걱정을 한 끝에 공격을 포기한 것은 이민호의 결정적 실수였다. 사무라이가 우려했듯이 포구 마을에 화포 몇 발 쏘고 불질러버릴 수도 있었는데 이민호는 그걸 못했다. 이래서 작전계획을 세우는 것이 중요했다.
지금 다시 포격을 하고 싶었으나 물리기에는 이미 늦었다. 화포를 맡은 간수군들이 전투 내내 이민호가 내릴 명령을 기다리다가 끝내 포격 명령이 내려오지 않아 다시 화포에서 화약을 꺼내 종이 봉지에 보관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도 문제인 것이, 지휘관이 명령을 내리지 않았는데도 간수군들이 제멋대로 판단해서 행동을 옮긴 것은 큰 잘못이었다. 각 편제 단위별로 세부적인 교전규칙을 미리 만들어뒀어야 했다.
“내가 왜 이러지?”
어제 오늘 이민호는 머릿속이 뒤죽박죽 온통 엉망이었다. 병력을 이끌고 적지를 치면서도 세부적인 작전계획은 하나도 안 세웠다. 도착한 저녁에 공격할지, 새벽에 공격할지 정하지도 않았고, 정찰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선단을 묘박할 곳에 대한 어떠한 고려도 없었다. 불침번 순번도 사전 계획 없이 그냥 현장에서 정했다. 포로를 구출할 때도 완전히 주먹구구로 병력을 운용하다가 왜구들에게 기습을 당할 뻔했다.
이 포구에 돌입했을 때의 절차도 미리 준비하지 않아 대리 지휘관 역할을 한 계복이 어느 쪽을 먼저 해야 할지 고민하게 만들기도 했다. 사실 새벽에 깨워달라고 미리 잠들기 전에 당직 대정에게 언질을 했어야 했다. 대장이 잔다고 깨우지도 않고 계복이 대리 대장 임무를 수행한 것도 사실은 잘못이었다. 이번 원정에서는 정말 많은 곳에서 실수와 잘못으로 점철됐다.
이민호에게 변명거리는 있었다. 이 모든 실수는 선전관이 독촉해 갑작스럽게 출동하는 바람에 작전보다는 보급에만 온통 신경을 쓴 탓이었다. 그러나 좋든 싫든 임금에게 책임을 돌릴 수는 없었다. 언제 어떤 명령이 내려오든 최선을 다해 수행해야 하는 것이 장수가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정도면 작전의 성공 여부를 불문하고 지휘관으로서 이민호는 완전 낙제점이었다. 다른 이들이 이민호가 신장이라고 우러러보든 말든 이민호는 자기가 계속해서 실수한 것을 인정하고 정신을 바짝 차렸다.
“아농하시무니까?”
사무라이가 선물 증정을 핑계로 얼렁뚱땅 배를 접현시키더니 외륜선에 올라왔다. 사무라이는 어눌한 조선말로 인사를 하면서 연신 주변을 힐끗거렸다. 배의 구조와 병력, 간수군들의 무장 상태를 살피기 위한 목적이 분명했으나 이민호는 왜인들이 보더라도 알아낼 것이 별로 없으므로 내버려뒀다.
선수루와 선미루에 포진한 간수군들 중 몇이 소총을 조준한 가운데 사무라이가 두리번거렸다. 화려한 전투복을 입은 이민호와 잠시 눈이 마주쳤으나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는지 사무라이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간수군들 사이에서 기골이 장대하고 좀 더 멋진 군복을 입은 계복을 발견하고 종종 걸음으로 다가가 왜검을 바쳤다. 대정 이상의 간수군들 어깨에 마치 헌병처럼 황금색 포승줄을 둘러놨더니 장군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계복이 이민호와 눈을 마주쳤다가 어깨를 으쓱한 다음 왜검을 받았다. 사무라이가 한참 동안 검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한 것을 왜학훈도가 간단히 추려서 알려주었다.
“너무 길어서 대충 요약하겠습니다. 유명한 검장 이누이, 그러니까 건이라는 사람이 3년에 걸쳐 정성들여 만든 검으로 일본 막부의 정이대장군이 저 무사의 5대 조상에게 하사한 명검이라고 합니다.”
“됐고. 만약 다음에 또 조선 해안을 침범한다면 우리가 다시 와서 섬에 사는 모든 이들을 죽이고 이 섬을 불태워버리겠다고 경고하시오.”
“예.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거라고 약속하겠답니다.”
왜인들이 외륜선에서 물러나 배를 타고 아직도 불타는 포구로 돌아갔다. 이민호는 선물로 받은 왜검을 우후에게 줘서 전리품에 포함시키라고 판옥선으로 돌아가는 왜학훈도에게 줘버렸다.
전리품에는 왜인의 창, 칼, 조총이 몇 십 자루씩 있고 왜장의 투구와 갑옷도 몇 습이 있었다. 우후가 전투에 나서지 않고 구경만 했으나 전리품 분류와 기록, 그리고 포장 같은 일은 아주 꼼꼼히 잘해서 마치 적의 대군을 격파하고 나서 국왕에게 바칠 좋은 전리품만 모은 듯했다.
그런데 고지식한 전라좌수영 우후가 왜검의 접수를 거부했다. 전투 과정 중에 얻은 무기가 아니라 선물이니 이민호의 사유물이라 전리품 목록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래서 이민호는 좌수사에게 선물로 주려고 왜검을 선장실에 보관했고, 또 까먹어버렸다.
그 사이 판옥선 네 척의 예인 준비 작업이 끝났다. 판옥선 두 척에 나눠 타고 온 사공들 일부가 왜구들에게서 다시 빼앗은 판옥선 네 척에 나눠 탔다. 단정에 탄 간수군들이 널따란 황포 돛을 격군 갑판을 통해 사공들에게 건네자 사공들이 익숙한 솜씨로 바느질해서 연결한 다음 돛대에 달았다.
외륜선이 힘이 좋다고 하나 판옥선 두 척씩을 끌고 가는 건 조금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포로에서 갓 구출되어 아직 몸 상태가 말이 아닌 격군들에게 노를 저으라고 시킬 수는 없었다. 격군들이 굶주리지는 않았으나 간소한 식생활을 하는 왜인들과 같은 식사를 하고 과중한 노동에 시달렸으니 비쩍 마를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판옥선에서 나눠주는 아침을 먹고 있었다.
항구 밖으로 나온 다음 외륜선에 견인되는 판옥선 네 척에 돛을 올리자 어느 정도 속도가 나왔다. 올 때와 똑같은 북풍이 지금은 역풍이 되어 불었다. 그러나 쌍돛대인 판옥선의 특성상 지그재그 운항으로 늦더라도 어떻게든 북쪽으로 항해를 계속할 수 있었다.
맞바람을 맞으며 이틀 동안 힘겨운 항해를 계속해 간신히 연도에 도달했다. 이민호는 단정 한 척을 내려 방답진에 연락해서 판옥선들을 인수하도록 했다. 돌아오는데 이틀이나 걸리자 이민호는 조바심이 났다.
선단이 안도를 지날 때쯤 고깃배 여러 척이 남쪽으로 몰려왔다. 수군들이 없어 방답진 영하마을 사람들이 판옥선을 인수하는 사이 방답첨사가 탄 사후선이 외륜선에 접현했다.
“이 생원! 승첩 소식을 들었소. 왜추에게 항복을 받고 끌려갔던 사람들까지 모두 구해오다니, 정말 대단하시오.”
“우후께서 많이 도와주신 덕택입니다.”
남에게 억지로 공을 돌리는 것도 민망한 일이었다. 그래도 이민호가 세운 전공은 알아줄 테니 상관없었다. 이런 대단한 전공을 세웠으니 앞으로는 이민호를 애 취급할 장수는 없을 것 같았다.
첨사가 끊임없이 보내는 찬사를 대충 받아주면서 이민호는 판옥선들을 묶은 밧줄을 방답첨사가 데려온 사람들에게 넘기고 우후와도 작별했다.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은 처음부터 우후가 탄 판옥선에 적재했으니 우후가 전라좌수사 박선에게 잘 설명해줄 것으로 믿었다.
왜구에게서 빼앗아온 전라우수영 소속 전선 네 척은 수영으로 보내지 않고 방답진에 정박시켰다. 좌수영에서 우수영에 연락하면 그쪽 수군들이 와서 눈에 띄지 않게 배를 몰고 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 작전을 전라우수영에서 주도한 것으로 공식 발표되겠지만 작전 참가자들에 의해 소문이 어느 정도 퍼질 것을 각오해야 했다.
“아니, 이 생원! 바로 떠나려고 하시오? 방답진에서 하룻밤이라도 쉬고 가지 그러시오? 방답진에 이 생원의 춘부장께서 기다리고 계시지 않소?”
“첨사 나리. 시간이 촉박하니 바로 함경도로 가겠습니다. 혹시 가친께서 오두막에 계신다면 제 인사를 전해주십시오.”
이민호의 부친은 지금 따로 하고 있는 일이 있었다. 지금쯤 집안 종들과 함께 말 100여 필을 몰아 부산진으로 가고 있거나, 종들에게 일을 맡기고 급제 최대성과 바둑을 두고 있을 것이다.
포로에서 풀려난 격군들이 눈물로 이민호 일행을 환송했다. 원래는 2년 후에 통신사 파견을 조건으로 대마도를 거쳐 조선으로 쇄환될 사람들이었으니 귀가를 일 년 정도 앞당긴 것뿐이었다. 그러나 왜 땅에서 평생 노예 생활할 것으로 알고 자포자기했던 포로들은 진심으로 이민호에게 고마워했다.
외륜선 두 척은 남해도 남쪽으로 해서 동쪽으로 항진했다. 완전한 역풍이 아니고 해류도 순류라 속도는 꽤 나왔다. 선미루에서 재고를 확인하고 온 계복이 이민호에게 보고했다.
“도련님! 함경도까지 가기에는 여물과 땔감이 부족합니다. 식량은 많은데 여물과 땔감은 딱 하루치 남았습니다.”
“응? 당연히 중간에 쉬다 가야지. 배에 말도 안 태웠잖아? 부산포에서 하루 쉬자.”
동쪽으로 가는 항해는 수월했다. 외륜선 두 척은 북동쪽으로 흐르는 쓰시마 해류를 타고 다음 날 오후 절영도를 지나 부산포에 도착했다. 부산포 어민들이 처음 보는 배와 군복에 놀랐으나 부산진첨사가 군사들 몇을 이끌고 직접 마중 나오자 소란은 금방 가라앉았다. 서해나 남해안의 포구들과 달리 부산진부터는 조수간만의 차가 적어 첨저선인 외륜선 두 척이 쉽게 선착장에 정박할 수 있었다.
부산진첨사가 조정으로부터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식수와 소여물, 땔감을 준비해놓고 있었다. 이민호는 간수군들과 함께 부산진의 객사에서 하루 쉬며 배에 보급을 추진하기로 했다.
그리고 집안 종들이 육로를 통해 전라좌수영에서부터 몰고 온 전마 100여 필에게 콩과 좁쌀을 많이 먹인 다음 외륜선 두 척에 나눠 실었다. 상등품 전마가 면포 500필에 달하고 노비가 그 말 값의 3분의 1 가격이니 상등품 전마는 무척 비싼 동물이었다. 여진족이 조선에 조공하는 상등품 전마 가격은 세종 대 기준으로 면포 45필이었다.
전마와 말먹이 곡식인 조와 콩을 갑판 아래에 많이 실은 탓에 배가 아주 묵직해졌다. 그래서 그 동안 외륜선의 무게 중심을 낮추기 위해 배 밑바닥에 쌓아둔 돌 대부분을 버려야 했다.
“히잉! 땅에 내리니 어질어질해요. 배에서는 간신히 괜찮아졌는데 새로 멀미가 나요.”
“뱃멀미가 아니라 땅멀미야. 그건 금방 적응할 거야.”
그 동안 못 먹어서 볼이 쏙 들어간 혜진이 관비들을 시켜 방 안에 따뜻한 목욕물을 받았다. 밥은 못 먹더라도 목욕은 반드시 하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러나 이민호는 오랜만에 편하게 쉬지도 못하고 부산진첨사에게 호출을 당했다.
“이 생원. 시전부락의 야인에 대한 토벌 계획이 앞당겨졌소. 12월 20일까지 행영에 도착하라는 어지가 내려왔소. 북병사의 요청을 조정에서 받아들인 거라 하오.”
“첨사 영감! 오늘이 12월 10일 맞습니까? 동지섣달 초열흘 맞아요?”
“그, 그렇소. 지금 출발해도 도저히 날짜를 맞추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겠소.”
이민호에게 선조 임금은 잘 하는 부하에게 더 못 되게 구는 직장 상사의 이미지로 완전히 굳었다. 어쩔 수 없이 다음 날 새벽부터 출항할 수밖에 없었다.
부산진에 온 뒤부터 내내 이민호를 기다리던 김해 지역 마름은 이민호와 인사만 하고 돌아가야 했다. 웬만하면 가문의 김해 농지를 봐주고 떠나려던 이민호는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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