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ire of the Warm Sea RAW novel - Chapter 28
* 28화 *
북상하는 도중 역풍이 너무 심해서 돛을 접고 외륜 바퀴만 돌리게 했다. 그래도 동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동한난류를 타고 올라가는 양양까지는 제법 속도가 났다.
그러나 그 북쪽에서 내려오는 북한한류가 남향이고 바람도 여전히 북풍이라 양양부터는 항해가 악전고투로 변했다. 사공이 바퀴를 돌리는 소들에게 연신 채찍질을 했고, 하루에 백 리도 가지 못하고 해 지기 전에 포구에서 묵었다.
간수군들은 저녁 식사 전에 일정 시간 동안 말을 타고 달렸다. 겨울에 출정을 앞두고 매일 말에게 반드시 운동을 시켜줘야 하기 때문에 넣은 스케줄인데 이것 때문에 일정은 더욱 늦춰졌다.
“이러다가 도련님이 군령 위반죄로 참수당하는 거 아닙니까?”
계복은 걱정이 많았다. 계복이 듣기로 임금이나 북병사나 다들 군령 집행에 있어 아주 혹독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민호는 여유 만만했다.
“아직 날짜는 많이 남았어.”
“이 속도라면 도저히 스무날까지 날짜를 못 맞춥니다.”
“정 안될 것 같으면 함흥에서 내려 말 타고 가자. 그래도 늦을 것 같으면 배 타고 멀리 도망가지 뭐. 크크!”
“그래야겠군요. 주상전하께서 변덕이 심하십니다.”
계복이 주변을 둘러본 다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민호는 그 정도 눈치는 있는 계복이 예뻐 보였다.
“힘을 가진 분의 괜한 심술이지. 얼른 바다 건너 남쪽에 기반을 마련해서 조선 조정과 관계를 끊든지 해야겠어. 안 그러면 매번 이렇게 시달릴 거야.”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남쪽 바다 너머 섬나라들은 남만의 포도아라는 나라에서 다 정복했다는데 도련님께 기회가 있을까요?”
“포르투갈? 응. 포도아보다는 서반아가 문제야. 여송을 서반아가 정복했거든.”
이민호는 일단 대만에서 기반을 마련한 다음에는 마닐라에서 스페인 세력을 몰아내고 마닐라를 기반으로 필리핀 전역과 보르네오 섬을 정복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민호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워낙 적으니 군사적 점령보다는 각지에 자리 잡은 원주민들의 협조를 얻어 느슨한 연방제나 봉건제와 비슷한 국가체계를 구상했다. 정복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원주민을 학살하는 그런 계획은 애초부터 안중에 두지 않았다.
인도와 동남아의 주요 거점을 확보할 때까지만 해도 스페인과 포르투갈, 영국과 네덜란드가 힘을 합해 원주민들의 저항 거점인 항구와 성을 공격한 경우가 많았다. 자기들끼리는 서로 해적질을 하거나 탐험 독점권이 있다고 주장하는 등 사이가 나쁘더라도 유럽 세력에 강력히 저항하는 원주민에 대해서는 일단 공동 대처한 셈이다.
그러나 16세기 말에는 식민지 획득 경쟁이 격화돼 그 나라들이 단결할 위험은 거의 없었다. 특히 영국 탐험선들은 여차하면 서양 다른 나라 배들을 공격해 노략질하곤 했으니 분열이 더욱 가속화됐다. 그리고 아직 서구 세력들은 말래카해협을 제외하곤 동남아시아에 충분히 많은 병력을 유지하지 못했으니 이민호에게도 아직 기회가 열려 있었다.
12월 15일에는 아침부터 바람이 가라앉았다. 덕택에 외륜선들은 오랜만에 빨리 북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후부터 겨울인데도 갑자기 남풍이 불어와 외륜선 두 척은 돛을 활짝 펴고 쏜 살 같이 바다를 달릴 수 있었다.
하늘이 도련님을 돕는다고 간수군들이 환호하자 이민호는 뜨끔했다. 정말로 이민호를 이 시대로 보낸 하늘에서 계절에 맞지 않는 바람이 불게 해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늙은 사공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겨울에도 가끔 남풍이 분다고 했다.
이민호는 동한만 깊숙한 곳이며 대륙붕 지대라서 군데군데 암초지대가 있는 함흥을 피해 정북 방향으로 밤새도록 배를 몰게 했다. 바람이 강해 그 동안 고생했던 소들을 푹 쉬게 해줄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말 운동은 하루 쉬었다.
다음 날 오후 함경도 북병영이 위치한 경성부의 포구에 도착했다. 현대의 청진에서 약간 남서쪽이었다. 외륜선에서 말을 하역시키는 도중에 계복이 이민호에게 물었다.
“도련님! 더 가도 되지 않나요? 잘하면 두만강을 타고 행영이 있다는 종성부까지 바로 갈 수 있겠는데요.”
“너는 저기 바다를 떠다니는 부빙이 안 보이니? 얼음덩어리 말이다. 저런 부빙이 바다에 숱하게 돌아다닌다. 부딪치면 어떤 배든 단박에 깨져. 부빙에 안 부딪치더라도 당연히 두만강도 얼었을 테니 배를 타고 못 올라간다.”
“우와! 워낙 추워서 바다에 얼음이 떠다니는군요. 하긴 한강도 겨울에 얼어붙으니 이쪽은 더 추워서 확실히 두만강이 얼겠네요.”
“그리고 이번에 문제가 생긴 녹둔도와 시전부락은 두만강 하류에서도 바다에 아주 가까운 곳이다. 행영이 있는 종성부가 두만강 중류야. 두만강이 얼지 않았더라도 우리가 배를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토벌 대상인 적호들이 놀라서 다 도망갈지도 몰라.”
한반도 북단은 두만강의 굴곡을 따라 북쪽으로 뾰족하게 형성돼 있었고, 행영이 위치한 종성부가 바로 그 지역이었다. 두만강변인 종성부에서 남동쪽으로 50km 약간 넘게 이동한 다음 두만강을 건너야 녹둔도가 나왔다.
녹둔도 사건이 발생한 9월 이래로 여진족들의 시선도 온통 함경 북병사가 위치한 행영에 쏠려있을 때였으므로 북병사는 평소와 다른 움직임을 펼치기 어려웠다. 이런 판에 두만강 남쪽에 외륜선이 나타난다면 시전부락 적호들이 도망가지 않더라도 바짝 경계하게 되어 토벌 작전에 차질을 줄 우려가 있었다.
간수군들이 동계전투복 위에 덧입은 두툼한 외투는 털가죽으로 만든 비싼 제품이었고, 이번 작전을 위해 특별히 구입했다. 털모자와 장갑, 장화 등도 모두 동절기도 아닌 혹한기 전투에 대비한 피혁제품이었다. 말도 안장 외에 털가죽으로 만든 말뒷거리를 입혔다.
추운 곳에 와서 싸우려면 이렇게 돈이 많이 들었다. 부유한 나라에서도 물자수송과 군용품 생산에 어려움이 많으니 차라리 둔전을 지어 병사들에게 자비 부담을 시킬 수밖에 없었다. 전라좌수영에서 모은 병력을 함경도까지 끌고 온 이민호는 그 동안 들인 비용에 경악해야 했다.
이민호는 조선 국왕이 자기 돈은 한 푼도 안 들이면서 신하에게만 경제적 부담을 지운다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국왕이 부담한 것이 전혀 없지는 않아, 함경도에 많은 내수사 노비들이 말먹이 콩과 좁쌀을 제공해주었다. 이민호를 포함한 정병 101명에 해당하는 보급이 지원됐으나, 함경도 기병과 달리 간수군들에게는 종인이나 짐말이 따로 없기에 지나치게 많이 받게 되었다.
함경도의 내수사 노비들은 태조대왕 대 이래로 계속 숫자가 늘어났다. 요즘도 군역과 부역을 피해 양인들이 농지를 바치고 내수사 노비로 꾸준히 들어갔다. 이런 토지가 많아 나중에 토지조사령 이후 대규모 분쟁이 발생했지만 일본의 조선총독부는 내수사 토지를 무조건 국유화해버렸다. 당시 경제적으로 윤택한 내수사 노비는 양인 처녀들에게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그렇게 껴입으니 혜진이 눈사람 같다.”
“제가 그렇게 뚱뚱해 보여요?”
“귀여워. 낄낄!”
“도련님 말하는 게 아저씨 같아요.”
두꺼운 외투를 입고 털모자를 쓴 혜진의 말에 이민호는 뜨끔했다. 열두 살 혜진이 무슨 짓을 해도 귀여워 보일 수밖에 없는, 속은 진짜 아저씨가 이민호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따뜻한 바닷가 포구에 남아있으라고 해도 혜진은 끝까지 이민호를 따라다니려 했다.
그 날 저녁은 말에게 운동을 시킨 다음 북병영 객사에서 묵었다. 북병사 이일이 병력을 모두 이끌고 종성부 행영으로 떠난 이후라 경성부 병영은 거의 텅텅 비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자 온 세상이 하얗게 변했다. 밤새 함박눈이 와서 무릎 깊이까지 쌓였다. 이민호와 간수군들은 5인용 천막과 솥단지, 식량, 소총과 탄약 등 개인 및 공용 장비를 말에 나눠 싣고 북쪽을 향해 출발했다. 하얀 입김이 입에서 나오자마자 얼어붙어 땅에 떨어질 정도로 추운 날씨에 간수군들과 이민호는 무척이나 고생했다.
육로로, 그것도 대부분 함경도의 고산준령 사이에 난 산길을 따라 100km 정도 달려 북병영의 겨울 행영이 자리 잡은 종성에 도착했다. 이때 종성에는 한성에서 지원 온 병력과 북병영 소속 병력이 모여 완전히 군인들만의 도시로 변해 있었다. 토벌군은 정예 기병만 뽑아 겨우 2300명에 불과했지만 지원 병력을 합하니 만 명이 훌쩍 넘어갔다.
며칠 전에 북병사 이일이 군관 몇 명을 이끌고 직접 경흥에 가서 평소 조선에 우호적이었다가 이번에 배반을 한 아오랑 부족의 족장을 잡아 죽였다. 그리고 우후 김우추에게 기병 400명을 주어 추도 부락을 쓸어버렸다. 시전부락 토벌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이었다. 그 외에도 조만간 실시될 정벌에 관련된 갖가지 소문이 종성부에 나돌고 있었다.
이민호는 행영 남문 밖에 병력을 대기시켜놓고 계복과 함께 행영에 신고하러 들어갔다. 중문에 기대고 서서 다른 사람들의 통행을 가로막고 있는 거구의 장수가 이민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어이, 꼬마! 키만 컸지 진짜 꼬마네. 넌 누구냐? 여기까지 전쟁놀이하러 왔냐?”
“소생은 수원 사는 이 생원이라 하오. 주상전하의 어지를 받고 북병영에 부방하러 왔소. 북병사 영감은 어디 계시오? 신고하러 왔으니 길을 비켜주시오.”
“아하! 사창을 상평창처럼 운영해 기근을 얼렁뚱땅 극복하게 했다는 그 꼬마구나! 네 이름이 이민호 맞느냐? 너무 어려서 아직 자도 안 만들었다는 꼬마 이민호? 그런데 넌 뭘 믿고 이렇게 뻣뻣하냐? 함경도 땅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는 하룻강아지냐?”
“장수는 어떻게 되시오?”
“내가 북병사다, 이놈아! 이래도 기세를 안 꺾을래?”
이민호가 표정 변화도 없이 얼른 군례를 올렸다.
“생원 이민호가 북병사께 문후 올리오.”
“능글맞은 녀석! 놀라지도 않아. 처음부터 내 정체를 알고 있었구나.”
북병사 이일이 대충 군례를 받아주며 투덜거렸다. 동헌으로 통하는 중문을 가로막고도 느긋하게 서 있을 수 있다면 그 관아의 최고 책임자라는 소리밖에 되지 않으니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먼저 오도의 왜구를 토벌하러 갔다고 들었는데 용케 날짜를 맞춰 왔구나. 하루라도 늦었으면 본보기로 때찌 해주려고 했는데.”
“제가 비록 관직도 없는 생원에 불과하지만 일단 무관의 소임을 받은 몸. 군령을 엄수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좋아! 좌위에 배속할 테니 좌위장 군헌에게 신고하고 배치를 받아라. 그런데 아느냐? 너는 애초에 불가능한 임무를 수행했다. 오도에서 왜구를 토벌하고도 행영에 날짜를 맞춰 도착한 것 때문에 왕실에서는 너를 더욱 더 경계하게 될 것이다. 하루쯤 늦게 왔다고 위에 보고해줄까?”
“늦었으면 참수될 것 같아 겁이 나서 밤을 새며 달려왔습니다. 사실대로 보고해주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알았다. 하지만 다음에는 적당히 실수도 해라. 완벽한 사람은 국왕 전하 한 분으로 족하다.”
“명심하겠습니다.”
신립과 함께 조선 최고의 장수 소리를 듣는 이일이라 역시 무식한 인간은 절대 아니었다. 신경 써야 할 일이 엄청나게 많은 조선군 지휘관은 단지 용맹하다는 것만으로는 역할을 제대로 하기 어려웠다. 이일은 껄껄거리며 동헌으로 들어갔다.
이민호는 동헌 주위에서 아전들에게 군헌이라는 자를 가진 사람이 누군지, 어디에 있는지 물어 부임 인사하러 갔다. 좌위장은 40대 중반의 나이에 품계가 종2품 가선대부에 이른 회령부사 변언수였다. 막사에서 보급품 관리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변언수가 이민호를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넌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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