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ire of the Warm Sea RAW novel - Chapter 32
* 32화 *
6. 동래 왜관
시전부락에서 출발해 나흘 만에 동래부에 도착하니 교서가 이미 내려와 있었다. 이민호가 교서에 숙배하고 내용을 읽어보니 품계를 올려준다는 승서 교지였다.
“임금은 이렇게 이르노라. 옛날에는 뛰어난 재지를 가진 성현들이 계셔서 예전에 없던 물건을 새로 만들어 백성들이 밭에서 더욱 많은 곡식을 얻게 하고, 새로운 제도를 만들어 백성을 편히 다스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 생원 민호는 기존에 있던 제도와 물건을 더욱 편하게 고치는 것을 자질로 삼았다. 민호는 사창 제도를 새롭게 고쳐 곤궁한 백성을 배불리 먹이고 관아의 재원을 튼튼히 하였다. 또한 윤선을 고쳐 만들어 멀리 변방과 광흥창 사이를 더욱 빨리 오가게 하여 웅얼웅얼. 그리하여 이 생원 민호에게 쌀 삼십 석, 콩 오십 석, 숙마 한 필을 상으로 내리며 종5품 군기시 판관의 영직을 수여하니 이 판관 민호는 백성들을 편케 하는 일에 더욱 정진토록 하여라. 만력 16년 정월.”
아직 문과에 급제하지 않은 생원인데도 수원과 전라좌수영에서 행한 공적으로 인해 품계가 종5품으로 올랐고 군기시 판관이라는 영직(影職)이 내려졌다. 시전부락 토벌 과정에서 올린 전공에 대한 상은 북병사 이일이 승첩장계를 올린 다음에야 조정에서 논의할 테니 여기에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경하드리오, 이 판관!”
동래부사가 축하인사를 건넸으나 교서를 읽은 이민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녹봉도 없고 근무할 필요도 없이 관직 이름만 주는 것이 영직인데 하필 군기시 판관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이민호가 무기를 제조하는 것을 왕실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경고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상을 주려면 기분 좋게 줄 것이지 함경도 끝에서 동래부까지 괜히 사람 뺑뺑이 돌리고 북병사 이일을 시켜 군령으로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영 맘에 들지 않았다. 이민호는 아랫사람들에게 더 잘해줘야겠다고 결심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곳 동래부에서 승서 교지를 주시는 것을 보니 동래부에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
“험! 이 판관. 왜관에 나하고 같이 가주셔야겠소.”
교서를 이민호에게 교부한 동래 부사가 상당히 곤란한 표정을 짓고 연신 헛기침만 했다.
“무슨 일입니까? 오늘은 일단 하루 쉬고 싶습니다.”
“필요한 것들은 객사에 준비해 놓았소. 마침 내일이 열흘에 하루 있는 개시일(開市日)이니 내일 아침에 이야기한 다음 같이 갑시다.”
작년 정해년 말에 입국한 일본 사신이 아직도 한성 동평관에 묵고 있다고 알고 있었다. 사신 귤강광은 조선에 통신사를 청했다가 실패해 일본으로 돌아가서 풍신수길에게 사형당하고, 올해 무자년(1588)년 12월에 평의지와 현소가 올 예정이었다.
이민호는 간수군, 포로들과 함께 객사에 가서 묵었다. 동래부의 객사는 일본으로 가는 조선 사신단을 접대하기도 해서 꽤나 컸다. 최근에는 조선에서 일본에 사신을 보낸 경우가 없어 이 넓은 객사를 오로지 이민호와 그 수행원들이 독차지했다.
혜진에게는 여진족 아이들을 잘 먹인 다음 일단 뽀득뽀득 씻기고 새 옷을 주도록 했다. 동래부의 관노와 관비들이 총동원돼서 물을 데워 아이들을 씻기고 입히고 먹였다.
“계복이 네 생각은 어떠냐?”
“부사 영감이 개시일이라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아무래도 왜관 주변의 잠상을 잡아달라는 이야기 같습니다.”
“잠상? 아! 밀거래 상인?”
이민호는 잠상(潛商)이 잠수함을 타고 무역하러 다니는 상인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이없게도 그런 상인이 실제로 있었다. 예전 생에서 콜롬비아의 마약 밀수범들이 잠수함을 타고 미국 영해에 잠입해 미국 코스트가드와 숨바꼭질한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었다.
마약이 아니더라도 밀수는 분명히 나쁜 범죄행위이지만 수요가 있으니 공급이 있게 마련이었다. 국초부터 일본과의 무역을 조선 조정에서 아무리 억눌러도 안 되니 삼포를 개항하고, 삼포왜란으로 인해 폐쇄했다가도 다시 요구에 의해 왜관을 열 수밖에 없었다.
탈세를 위한 밀수는 사실 별 것이 아니고 또한 어느 시대든 있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에서 무역에 대한 제한을 너무 많이 가한 탓에 정상적인 무역이 수요를 다 채워주지 못해 발생하는 밀무역은 관의 힘만으로는 막기 어려웠다. 그래서 잠상이 늘고, 법을 준수하는 정상적인 상인만 손해를 보는 결과를 가져왔다.
“원래 동래부사가 잠상에 대한 단속 권한을 갖고 있는데, 밑에 관리들이 뇌물 받고 눈감아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래? 그럼 나도 뇌물 주고 잠상을 할까? 잘 찾아보면 돈 될 것 많은데.”
“도련님이 그럴까봐 미리 단속하라고 보내신 것 같습니다. 잠상하다 걸리면 왜관 대문에 효수됩니다.”
일진한테 학교 선도부를 시킨다는 교육부의 논리와 흡사한 것 같아 이민호는 조금 불쾌했다. 효수된다는 이야기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그러니까 예비 범죄자에게 범죄 단속을 시킨다는 건데. 미치겠네. 내가 앞으로 중개무역은 하더라도 밀무역은 안 한다고 분명히 말했는데 말이야.”
“이번 기회에 내상이나 왜상들을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민호가 눈을 번쩍 떴다. 언젠가 접촉해야 할 사람들이니 미리 알아둬서 나쁠 건 없었다.
“오호! 그건 좋네. 그런데 참 나한테 온갖 일을 다 시킨단 말이야. 난 올해 겨우 열한 살인데 말이야.”
“예에에? 아! 맞죠. 저도 가끔 도련님 나이를 깜빡합니다. 도련님이 머리만 좋으신 줄 알았는데 무예도 뛰어나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시전부락에서 도련님이 망나니처럼 칼부림한다고 군사들 사이에서 말이 많았습니다.”
“좋은 말 좀 해주면 안 돼? 그건 그렇고, 이 왜검 날 좀 갈아라. 저번에 오도에서 선물 받은 건데 깜빡하고 갖고 있다가 쓰게 됐다. 무예 실력이 좋은 게 아니라 무기가 좋았다.”
시전부락에서는 권총 총알이 떨어져 어쩔 수 없이 칼을 휘두르게 됐었다. 그런데 여진족 전사가 휘두른 칼이 뎅겅뎅겅 잘려나가 마치 게임에서 치트 키를 쓰는 기분이었다.
“저번에 왜인이 외륜선에서 바친 검이군요. 날을 좀 빼보겠습니다. 오오! 제가 대장간에서 일 해봐서 아는데, 이것 꽤 좋은 왜검입니다. 왜 땅에서는 쇠 품질이 낮아 열심히 두드리다 보니 오히려 더 좋은 검을 만들게 됐다죠?”
“괜찮으면 계복이 네가 쓰든지.”
“저는 됐습니다. 중병을 쓰다 보니 가벼운 무기는 맘에 안 듭니다. 그런데 도련님 체구도 크시고 생각도 깊으시니 사람들 만날 때는 나이를 여덟 살 정도 올리는 게 어떨까요?”
이민호는 나이 +8 아이템이 있다면 비싼 값에라도 구입하고 싶었다. 행영에서 무관들한테 무시당한 것도 그렇고, 평소에도 어리다는 이유로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나중에 나이 들어서는 당연히 후회하겠지만, 지금은 어서 나이를 먹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19세, 아청법에서 만 19세는 아니더라도 19세가 되는 해의 1월 1일을 넘기면 19세로 취급받으니 그 정도가 딱 좋았다. 마음껏 H신에도 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나이로 이 세상에 왔다면 필시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넘어갔다.
“계복이 너 나이가 올해 스물인데 장가 안 가? 수원 감골에 자작농 양인 처녀도 그렇고, 좌수영 병방 따님도 너만 보면 얼굴이 빨개지던데 말이야.”
“아직은 괜찮습니다. 도련님 따라다니는 게 더 재미있어요.”
“생각 있으면 언제든 말해라. 한 밑천 마련해주마.”
계복이 작가가 19금 장면을 쓰고 싶어도 못 쓰게 만들었다.
다음 날 동래부사를 만나보니 계복이 말한 그대로였다. 동래의 내상과 일본에서 건너온 왜상들은 품목과 물량을 늘려주길 원했고, 조정에서는 가급적 줄이거나 현상 유지하길 원했다. 수요와 공급이 맞지 않으니 밀무역이 발생할 충분한 조건을 갖춘 셈이었다. 살짝만 부정을 저지르면 상인과 하급 관리들이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으니 무조건 막는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영감! 제가 생각한 바가 있으니 왜관에 저 혼자만 들어가서 왜상들과 협의해보겠습니다. 내상의 요구는 조정과 협의해서 영감께서 처리하십시오.”
“이 판관! 이 문제는 왕실과 내수사에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소.”
“비밀 상소를 따로 올릴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또한 동래부에 해를 끼칠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저를 믿고 기다려주십시오.”
“끙! 그러시다면야.”
이민호는 얼른 나가고 싶은데 동래부사가 뜸을 들였다. 다른 문제가 또 있었다.
“작년에 경상우수영을 통해서 배운 기술로 천일염전이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말이오. 문제가 좀 있소. 이 기술이 이 첨사가 제주도에서 배워 퍼뜨렸다는데 이 판관도 아는 것 같아 좀 물어보겠소.”
“예. 부사 영감께서 백성들을 위해 노고를 아끼지 않으시는군요. 말씀해 보시지요. 제가 아는 대로 대답해드리겠습니다.”
동래는 일본과의 외교 및 통상의 관문이다. 동래부사가 일본 사신들을 영접하는 역할을 맡아야 하므로 동래부사에는 무관보다는 문관이 제수 받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리고 동래에 부임하는 수령들의 직급도 높아 흔히 당상관이 이 자리를 차지하곤 했다. 이민호는 어제 객사에서 동래부 선생안(先生案)을 읽어 전임자들의 품계를 확인하고 조금 놀랐다.
그리고 아무에게나, 심지어 직속상관인 북병사에게도 이 새끼 저 새끼 하는 변언수 같은 인간보다는 확실히 문관들이 최소한 말하는 것만큼은 양반이었다. 무관들 사이에서는 수하 장수가 명령에 불복하면 참수하겠다고 협박하고 모욕하거나 곤장을 때리는 경우가 흔했다. 전라좌수사 이천도 보성군수가 문관 당상관인데도 곤장을 때려서 죽일 정도였다. 그러나 문관들끼리는 언제 직급이 뒤바뀔지 몰라 서로 말조심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판관도 아시다시피 같은 나라인데도 서해와 동해에서 바닷물이 들고 남이 차이가 크오. 서애나 그 전에 선현들도 의문을 품고 연구했던 내용이오. 동래는 분명 남해안인데도 동해에 가까워 그런지 밀물과 썰물의 차이가 크지 않아요. 그래서 갯벌도 별로 없고 특히 바닷물을 염전에 담을 때 인력이 많이 드는 문제가 있소.”
“동해에 접한 동래 북쪽의 모든 고을이 동래와 같을 것입니다. 만약 동래에서 그 문제가 해결된다면 동해에 면한 모든 고을에서 염전을 가질 수 있겠지요. 몇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말씀해주시는 거요?”
그러나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동해안에는 천일염전이 거의 없었다. 함경도라면 태평양전쟁 시기에 일본이 개발한 염전이 조금 있었다. 염전 경영이 불가능한 것은 아닌데 서해안에 비해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뜻이다.
“나무로 물레 같은 기구를 만들어 물수레, 그러니까 수차(水車)라 칭하고 바닷물을 염전으로 퍼 올리는 방식입니다. 사람이 밟아서 돌려도 되고 소의 힘이나 심지어 바람의 힘을 이용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 소금을 생산하는 남해안 염전에도 웬만하면 수차가 다 있습니다.”
“갯벌에 염전을 만들어야 소금이 더 맛있다는 말을 들었소. 염전 바닥에 납작한 석판을 까는 곳도 있으나 일부러 깔지 않아 맛을 높여 더 높은 가격을 받는 곳도 있소. 동래에서 쓴 소금이 생산되면 싸구려 취급 받지 않겠소?”
“생산성은 바닷물이 안 빠지는 곳이 나을 수 있습니다. 그걸 감안하면 결국 같은 기간에 같은 돈을 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래에서 천일염전을 생산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연간 강우일이 서해안보다는 커서 서해안보다 불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민호는 다른 사업을 추천했다.
“동래에 왜관이 있으니 일본에 팔 만한 물건을 대량으로 만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화문석이나 모시, 부채 같은 제품을 생산하는 곳에서 사서 왜상들에게 팔아도 됩니다. 백성들에게만 맡기지 말고 관아에서 주도해보시지요.”
“어떤 물목이 좋겠소?”
“으음. 그건 왜상들과 만나 본 다음에 이야기를 진행합시다. 관아에서 대량으로 사고팔면 유리한 면이 많으니 동래부에서 판매할 물목이 정해졌다고 전매는 하지 마시지요.”
“그렇게 하겠소. 좋은 물목으로 소개해주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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