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ire of the Warm Sea RAW novel - Chapter 33
* 33화 *
이민호는 동래부 관아에서 나오는 길에 내수사 노비가 전해주는 쪽지를 받았다. ‘시(始)’라는 한 글자만 있었지만 내수사 전수의 뜻을 충분히 알아들었다. 동래부로 가는 것이 이민호에게 상이라고 이일이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동래부사가 내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가마를 타고 자성대 부근의 왜관으로 향했다. 임진왜란 때 불 타 없어진 곳이니 이민호가 아는 초량 왜관의 위치와 다른 곳이었다.
이민호가 가마를 타고 왜관에 들어가니 파수하는 병사들이 절을 하고 대문은 검색 절차 없이 무사통과했다. 높은 사람이 온 줄 알고 거래 중이던 왜인과 조선인, 관리들이 놀라 일제히 길을 열었다.
왜관의 담벼락은 높았다. 원래는 조선인들이 못 들여다보게 하는 목적으로 지어졌지만 왜관 안에서 일본인들 사이에 일어나는 일에 조선 관원들이 손쓰기 어렵게 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왜관 거주민들이 모이는 공청(公廳)의 가장 넓은 방에 왜상들 중에서 거래규모가 큰 대상인 또는 그의 대리인들만 모았다.
이민호가 눈짓을 하자 조선 관원인 금란관과 녹사가 슬그머니 일어나서 반절을 한 다음 방 밖으로 나갔다. 이 행동의 의미를 이해한 왜상들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원래 왜상과의 거래는 거래를 감시하고 세금을 징수하는 조선 관원이 배석한 자리에서만 가능했다. 막말로 여기서 홍삼이나 금 같은 품목을 거래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이야기였다.
왜상들은 이민호를 조선 권력자의 대리인 정도로 여겼다. 사실 어느 정도는 맞는 이야기였다.
“저는 이 판관이라 합니다.”
“오오! 높으신 분이군요.”
도에는 관찰사, 목에는 목사가 책임자로 있지만 웬만한 실무는 종5품에 불과한 판관을 통해 처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군과 현 단위 지방의 실무 행정도 판관의 지시를 통해 품계가 더 높은 고을 수령이 처리하곤 했다. 판관이란 단어 자체의 뜻도 높아 보였으니 일본에서는 조선의 판관을 고위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민호가 군기시 판관이라도 판관은 판관이었다.
“동래부사가 저를 위해 여러 가지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동래부사는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관원이니 신경 쓰지 말고 이야기합시다.”
이때 허리를 잘록하게 끈으로 맨 일본 여인들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와 차를 날랐다. 이민호는 복잡한 절차의 일본 다도를 떠올렸으나 손을 씻게 하는 등 다도를 강요하지 않는 편안한 분위기라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커다란 찻그릇인 일본 다완에 퍼런 찻가루가 물에 잔뜩 떠다니는 것을 보고 이민호가 흠칫했다. 이민호는 전국시대 다도 예절을 대충 그럴 듯하게 흉내 내서 마셨다. 차는 아니더라도 다기는 일본에 고급 수출품이 될 수 있으니 차 한 잔 마시면서 득템했다고 여겼다.
“저는 비공식적으로 조선 왕실과 내수사를 대리하고, 저 또한 상단을 몇 개 소유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좋은 거래 관계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우와! 조선국 왕실이 드디어 나선 겁니까? 성은이 망극합니다.”
“저는 대리인에 불과하고, 제가 왕실 자체는 아니니 절대 오해는 말아주십시오.”
“하잇!”
두 줄로 무릎 꿇고 앉은 상인들이 일제히 부복했다. 상인들을 어느 정도 휘어잡았다고 생각한 이민호는 일단 부정적인 발언부터 시작했다.
“일단 공식적인 조선 조정의 입장을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공무역의 금지 품목을 줄이거나 물량을 늘리는 것은 불가합니다. 이는 조선 조정의 확고한 의사입니다.”
조선인들이 왜관에 금을 팔다가 세종 때 금지됐고, 이런 식으로 금과 은, 표범 가죽, 동전, 11새 이상의 고급 모시와 삼베 등이 거래 금지됐다. 그리고 상업을 억누르는 것이 조선의 기본 시책인 탓에 무역에 여러 가지 제약을 가했다.
“조선의 시책이 그러니까 이해는 합니다. 그래도 많이 아쉽군요.”
“하지만 잠상이 단속되지 않으면 공식적인 무역만 하는 저희들이 손해입니다. 이 판관 나리, 혜량해주십시오.”
이 시대 일본에서 가장 많은 교육을 받은 집단이 스님 다음으로 상인이었다. 당시 일본 상인들은 상인들치고는 꽤나 품위가 있는 편이었다. 신사는 아닐지라도 최소한 유럽 상인들처럼 유사시 해적으로 돌변할 정도는 아니었다. 왜구가 해적과 무역을 겸한다지만 그들은 해적이 주업이니 상인과 명백히 분별됐다.
“이 자리에 모이신 분들만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제가 앞으로 조선 왕실의 밀명을 받아 당과 일본 사이의 중개무역과, 조선의 비공식 무역을 담당하기로 했습니다.”
“예에에에에?”
왜인 상인들이 충격을 받아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민호는 법인영업 뛰는 영업사원이 된 기분으로 열심히 중개무역과 비공식 무역에 대해 설명했다. 이 시대 일본인들은 조선을 고려라 부르듯이 명나라를 당이라 불렀다.
왜상들은 사무라이 계급에 비해 입은 옷이 추레해보일지라도 사실은 굉장히 큰손들이었다. 전국시대든 에도시대든 영주나 무사에게 돈을 빌려주어, 못 갚은 무사들을 위해 쇼군이 덕정령을 내릴 수밖에 없게 만들기도 했다. 이들은 은 몇 만 냥 단위는 쉽게 움직였다.
다만 왜관에 와 있거나 상주하는 상인들이 사장이 아닌 과장 정도 낮은 직책이라는 것이 문제였다. 대마도주가 사적으로 운영하는 상단 직원도 이곳에 있었다.
“이 판관 나리의 훌륭하신 계획 잘 들었습니다. 그러나 당과 일본 사이, 조선 남쪽의 바다에는 해적들이 득시글거립니다. 이 판관께서 그 해적들의 방해를 물리치고 그런 사업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 해적들, 왜구든 남만 해귀든 다 제가 소탕하겠습니다. 조선 국왕 전하께서 제게 특명을 내리셨고, 제게는 해적을 진압할 무력이 있습니다.”
“우와아!”
왜상들이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그들은 중국과 보다 안전하게 무역을 할 기회가 생긴 것을 기뻐했다. 쉽게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들은 이민호 때문에 절대로 무임승차하지는 못할 것이다.
“제가 준비 중인 사업 아이템, 아니 물목을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유리와 거울입니다.”
외륜선에서 급히 가져온 물건들이 왜상들 손에 쥐어졌다. 투명도가 높은 유리와 거울을 본 왜상들의 눈이 크게 떠졌다. 유럽 물건보다 훨씬 발전된 단계의 유리였다.
“내가 이렇게 못 생겼구나.”
“흠!”
왜상들은 좋은 물건을 살피면서도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표정 변화도 별로 없었다. 반응에 따라 가격이 오락가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민호는 왜상들의 반응을 정확히 파악하면서 가격을 책정했다. 예상보다 조금 더 높여도 될 것 같아 이민호의 입이 찢어졌다.
“이것은 조선의 모처에서 생산되어 왕실에만 공급되는 비단입니다.”
왜상들이 비단옷을 조심스럽게 만지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선산 비단은 중국산보다 품질이 떨어진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이것은 오히려 그 이상으로 아름다운 광택을 자랑했다.
상인들이 비단옷을 만지는 것을 보며 이민호가 피식 웃었다. 견본품을 미리 준비하지 못한 이민호는 어쩔 수 없이 혜진이 입은 속치마를 벗겨왔다. 이것은 비단실을 둘러싼 세리신을 탄산나트륨 용액으로 제거하고 초산에 담갔다 꺼내 말려 윤기를 높인 견사로 만들었다.
“당나라 비단보다 조금 더 높은 품질인데도 여러분을 위해 가격은 그 이하에 넘기겠습니다. 물량이 많으니 기대하십시오.”
“판관 나리를 위해 목숨이라도 바치겠습니다.”
상인들에게 일단 이익을 보장해주겠다고 하니 그 다음은 술술 풀렸다. 안심이 된 이민호가 다른 보따리를 풀었다.
“홍삼도 대량으로 팔겠습니다. 물량을 소화할 고민이나 하세요.”
“예에에에에? 정말입니까?”
“도자기와 다완도 팔겠습니다. 다만 물량은 제한하겠습니다.”
“허억! 꼬르륵~”
왜상 몇몇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까무러쳤다. 오늘 공청에 모인 왜상들은 로또를 맞은 셈이었다. 이들이 장사를 잘하면 매주 로또 맞는 셈이 될 수도 있었다.
사실 거래할 품목을 미리 알려준 것은 성급한 감이 있었다. 그러나 선조임금이 자꾸 일을 시키는 게 미워서 이민호는 미리 사고를 치기로 했다. 그래도 내수사 전수에게서 시작하라는 내용의 쪽지를 받았으니 어쩌면 임금이 이민호에게 영업 자리를 마련해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예상대로 왜상들이 떡밥을 제대로 물었다. 왜상들은 이민호를 호구, 아니 목숨을 구해준 은인 대하듯이 정중해졌다. 이제 일본은 은을 대량으로 털릴 일만 남았다. 어쩌면 일본의 경제가 위축돼 풍신수길이 임진왜란을 일으키지 못할 수도 있었다.
“다만 보는 눈이 많으니 동래에서 거래할 수는 없고, 거래 장소를 제가 지정하겠습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희 상인들은 위험한 곳을 싫어합니다. 왜선은 일단 때려잡고 보는 조선수군이 있어서 조선 땅은 너무 무섭습니다.”
왜상들 입장에서는 이민호가 상인을 가장한 해적일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하니 이해하기로 했다.
“일본 땅에서 거래해도 좋습니다. 그럼 운임을 조금 더 붙여도 되겠습니까? 앞으로 삼 년 동안은 제가 소유한 상선을 일본 땅으로 보내서 거래하겠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여러분이 제가 지정한 포구로 오셔도 좋습니다.”
그 포구란 곳이 조선 땅이라는 이야기는 안 했다. 이민호는 어느 정도 자본과 군사력이 축적되면 본격적으로 해외로 나설 생각이었다.
“그래 주시면 정말 좋겠습니다. 상업이 활발한 사카이나 나가사키가 좋겠습니다. 그 두 곳이 아니라면 판관 나리께서 정해주신 곳에 지점을 내겠습니다.”
“멀다면 하카다도 좋습니다.”
현대 오사카부에 포함되기 전의 사카이는 오사카 남쪽에 붙어 있었으며 아직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정책이 시작되지 않아 서양 상인들도 자주 오는 곳이었다. 나가사키는 큐슈 북서쪽이며 큐슈 북쪽에 하카다가 있다. 하카다는 현재 풍신수길이 재건 중이었고, 에도시대에 바로 옆에 후쿠오카가 건설되고 나중에는 합쳐진다.
“그 세 곳이라면 저도 믿을 만하지요. 그럼 일단 첫해에는 나가사키로 정하겠습니다. 그곳 다이묘의 성향이나 세금, 다른 환경을 보면서 다른 항구로 옮길 것을 판단하겠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예. 그렇게 해주십시오.”
“저는 여러분께 최대한 편의를 보장해 드리고 물품을 공급해드릴 것을 약속합니다. 그런데 제가 남만 상인들과 직접 거래할 수 있도록 해주셔야 합니다. 특히 화란 상인들을 소개해주십시오.”
“난 말씀입니까? 남만에서 나는 물건들이 다 조잡하지만, 특히 그 사람들이 파는 물건은 자명종 말고는 정말 보잘 것 없습니다.”
대항해시대에 토르데시야스 조약에 의해 아프리카와 인도, 아시아는 필리핀을 제외하고 포르투갈이 독점권을 가졌다. 포르투갈은 항구를 건설해 거점으로 삼고 무역에 중점을 두었다. 조약에 의해 아메리카는 브라질을 제외하고 스페인이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두 나라 간에 체결된 토르데시야스 조약을 무시한 채 아시아에서 무역과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물건을 사려는 게 아니라 팔려는 거니까 괜찮습니다. 소개해주시는 분께는 반대급부로 좋은 거래를 약속드립니다.”
“제가 판관 나리께 소개해드릴 수 있습니다. 사실 사카이에 가서 기다리다가 화란의 배가 들어오면 누구나 거래를 틀 수 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좋은 것을 배웠습니다. 솔직한 상인이시니 제가 나중에 좋은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 작품 후기 ============================
오전중에 하나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