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ire of the Warm Sea RAW novel - Chapter 35
* 35화 *
7. 건국
어느덧 기축년(1589) 정월, 이민호는 열두 살이 되었다. 키는 이미 어른들보다 한 뼘이나 컸고, 서서히 근육도 키워나갔다. 한성에 있을 때는 한학훈도에게 중국어를, 좌수영에서는 왜학훈도에게 왜어를 배웠다.
작년 여름에 왜상을 통해 해동상단에서 구한 감자 한 자루를 강원도 고랭지 마을 세 곳에 나눠 보내 씨감자를 생산했다. 감자 돌림병이 걱정돼 해동상단에 다른 품종도 구해보라고 했으나 쉽지 않아 일단 한 품종의 씨감자만 대량생산하기로 했다.
씨감자가 생산되자 초겨울에 팔도의 농가 100여 곳을 선정해 쌀 두 가마씩 넘겨주고 감자를 경작해줄 것을 주문했다. 씨감자를 나눠주면서 재배법, 수확법, 보관법, 씨감자 파종법, 요리법까지 한글과 한자로 인쇄해 나눠주었다. 올 봄에 수확이 성공하면 감자의 높은 생산성을 농민들이 알아주고 조만간 전국에 퍼질 것으로 기대했다. 올해 감자농사가 성공하면 관의 힘을 이용해 더욱 확산시킬 예정이었다.
고추는 씨감자를 분배하던 수원 본가의 집안 종들이 두 군데에서 동시에 발견했다. 고초라 하여 경상도 안동과 충청도 부여에서 삼국시대부터 약용작물로 재배하던 것인데, 이민호가 현대에서 먹던 것과 같은 품종이었다. 이민호는 이것을 수원과 삼남지방의 본가 농지가 있는 곳에 보내 소작료를 감해주는 조건으로 재배하도록 했다.
해동상단에서도 약간 시차를 두고 일본과 중국에서 고추를 들여왔다. 품종이 달라 각각 왜초와 당초라 이름 붙였다. 나가사키에 기항한 포르투갈 상선을 통해 들여온 인도산 고추 3종은 남만초라는 이름을 붙였다. 파프리카 같은 것도 있어서 수원에서 재배했다. 올 가을에는 김치를 담글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축년 정월 하순에 전라좌수영 소포에서 외륜선 네 척에 물건을 가득 싣고 출항을 준비했다. 조운선 운항이 끝난 시기라 해동상단에서 한 척을 동원해 큰 배 세 척, 작은 배 한 척까지 합해서 모두 네 척이었다.
출항 직전에 전라좌수영의 군관이 병졸들을 이끌고 배를 검색했으나 내수사 봉인이 찍힌 화물의 내용물을 감히 뜯어보지 못했다. 이민호는 군관에게 섭섭지 않을 정도의 술값을 쥐어주었다.
“첨정 나리! 이번에도 한성으로 가시는 길입니까?”
“진상품이 궁궐이 있는 한성 말고 갈 곳이 있겠어요? 봉수 아저씨는 농담도 잘 하세요.”
전라좌수영 군관 이봉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배에서 물러났다. 워낙 고지식해서 뇌물을 줘도 안 통하는 사람인데 내수사의 위세는 먹혀들었다. 내수사 봉인은 당연히 이민호가 수하들을 시켜 찍었다. 봉인은 가짜라도 도장 자체는 내수사 전수가 빌려준 진짜였다.
이민호는 시전부락 토벌의 전공으로 종4품 군기시 첨정 벼슬을 체아직으로 받았다. 체아직(遞兒職)은 이름뿐인 산직. 영직과 달리 녹봉을 받으며 경복궁의 조회에도 참가할 수 있는 실직의 하나였다. 원래는 여러 명이 교대로 근무하는 방식이지만 실제로는 첫 봉록만 받고 퇴직하는 좀 어설픈 관직이기는 해도, 이름뿐인 영직이 아니라 확실히 양반관료층에 편입됐다는 증거가 됐다. 함께 참전한 간수군들은 양인과 천인 신분이라 무반 산직을 받았다.
외륜선 네 척은 소포를 떠나 한성으로 가는 물길인 좌수영 서쪽 장군도로 항로를 잡았다. 항해시간을 줄이려면 동쪽으로 가야 했지만 좌수영에서 사람들이 보고 있기 때문에 다른 길로 갈 수가 없었다. 배는 북풍을 받고 쭉쭉 남하했다.
“안도를 지나 연도를 지나고 있습니다. 100리 밖에서 선회할까요, 지금 선회할까요?”
“무인도인데 뭐 어때. 지금 선회해.”
이민호는 선장실에서 왜어를 공부하다가 계복의 질문에 대답해줬다. 크고 작은 외륜선 네 척이 남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공도정책이 시행돼 남해에 산재한 숱한 섬에 사람이 살지 않아 신경 쓸 필요 없었다.
선장실 방풍창 너머로 섬이 지나갔다. 이민호는 저런 섬을 항구로 이용할까 하다가 제주도 사람들이 가끔 무인도에 정착하는 경우가 있고 수군 판옥선이 수시로 수색하므로 좋은 생각은 아니었다. 물론 첨사나 아전들을 회유해 특정 무인도를 수색 대상에서 아예 빼버리는 방법도 있지만 첨사는 임기가 짧고 아전들은 숫자가 너무 많아 입을 제대로 막기 어려워 포기했다.
이번이 올 들어 두 번째 출항이었다. 첫 번째는 왜관의 왜상들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하카다로 향했다. 불에 타 전소됐던 하카다는 풍신수길에 의해 최근 재건이 끝났고 항구에 상인들이 가득했다. 입항할 때 상선에 대한 일본 관리의 임검이나 무역 품목 조사 같은 절차가 없었다. 다만 일본 관리 같은 사람이 무역을 마친 다음 신고하라고만 알려주었다.
이민호는 낮에 면포, 모시, 삼베, 부채, 옹기 등 조선산 제품을 판매했는데 조선 국내가의 몇 배나 되는 가격에 팔렸다. 이민호는 이 맛에 상인들이 목숨 걸고 바다를 건너 무역을 하는가 싶었다.
밤에는 하카다 포구 선착장 옆 창고에 상인들을 모아 다완을 판매했다. 곤봉을 든 계복을 빼고도 소총으로 무장한 호위 네 명이 수행하고 이민호도 품에 숨긴 권총손잡이를 손으로 잡고 경매를 진행했다.
이도다완 형식으로 입구가 넓고 적당히 큰 사발 모양의 다기가 연속해서 경매대에 올랐다. 왜인들의 요구사항과 이민호의 지시에 따라 도공들이 정성을 들여 만든, 조선 기준으로 불량품인 이도다완들은 왜상들에게 절찬리에 판매됐다. 왜상들이 선호하는 모양과 특성이 각각 달랐지만 몇 가지는 왜상들끼리 경쟁이 붙어 그릇 하나가 외륜선 제작비보다 비싼 값에 팔렸다.
그 다음은 홍삼이었는데 의외로 홍삼 경매가 치열했다. 물량이 많은 편인데도 앞으로 6개월 이내에는 더 이상 못 판다고 하자 가격이 예상보다 두 배로 뛰었다. 불치병에 걸린 사무라이가 빚을 내어 산 홍삼을 다려먹고 병은 나았으나 빚을 갚지 못해 자살했다는 어이없는 이야기가 앞으로 일본 여러 곳에서 나올 것 같았다.
그 다음은 비단을 팔았다. 중국에서 수입한 생사나, 조선에서 생산된 생사를 구입해 수원 본가에서 화학적으로 가공한 다음 방직기로 짠 비단이었다.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는 방적기는 아직 만들지 못했다. 이민호가 왜관에서 중국산보다 조금 싸게 팔겠다고 왜 상인들에게 약속했는데도 경매과정을 거치다 보니 더 비싼 값에 판매됐다. 이민호는 최상급 비단 열 필씩을 경매에 참가한 왜상들에게 선물로 돌렸다.
약속대로 대금은 모두 은으로 결제됐다. 대충 세어 보니 상행 한 번에 조선의 일 년 세입을 넘어섰다. 왜상들은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전 재산도 모자라 주변에서 최대한 긁어모은 자금으로 거래에 참가했고, 창고에서 나가면서 이민호에게 절을 몇 번씩이나 했다.
다음 날 오전에도 면포나 부채 같은 소소한 조선 공산품을 판매했다. 그리고 이른 오후에 거래를 끝낸 후 일본인 관리에게 신고하고 예상보다 훨씬 적은 세금을 납부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은 관리가 아닌 상인조합과 비슷한 조직의 직원으로, 상인들이 자율적으로 항구를 관리하고 있었다. 이민호는 구리를 사서 조선으로 돌아간 다음 좌수영 저택에 은을 운반하고 내수사에 줄 몫을 떼어놓았다.
왕복 도중에 대마도를 지났는데 가깝더라도 대마도에는 절대로 무역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마도는 조선과의 무역에 목숨 걸고 있는 곳이라 조선의 밀무역선이 대마도에 기착하면 체포해서 동래부로 호송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마도가 밀무역을 허용하더라도 문제인 게, 이민호가 대마도에서 조선 상인들을 마주치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좌수영에서 나가사키까지 300km도 안 되는 항로라서 20시간 정도 만에 일본 땅에 도착했다. 그러나 주변에 섬도 많고 온통 리아스식의 복잡한 해안선이라 나가사키 항구의 입구를 찾느라 많이 헤맸다. 항구의 불빛을 찾아 무작정 남쪽으로 50km 정도 가다가 새벽에 지나가는 작은 어선에게 물어 다음 날 아침 겨우 나가사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나가사키는 동래나 하카다와 공기부터 달랐다. 왜선들 외에도 포르투갈 범선 두 척이 정박하고 있는 포구에 도착하니 항구 거리에 양코백이 놈들이 꽤 많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작은 배에 탄 일본 관리가 선착장으로 향하는 외륜선에 다가왔다.
“나가사키에 오신 외국 상인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어느 나라에서 오셨습니까? 혹시 남월입니까?”
“남월에서 남쪽 바다 멀리 이만 리를 더 가서 인도와 가까운 해중국(海中國)에서 왔습니다. 한자로 이렇게 쓰는데 일본어로 카이나카 구니? 맞습니까?”
“와타나카 구니? 아! 카이쯔우 구니가 맞는 것 같습니다. 일본에 처음 오셨으면 일단 관청에 신고를 하셔야 합니다.”
일본어 한자 독음은 음독과 훈독이 달라 헷갈리는데 더욱이 여기는 교토나 오사카에서 멀리 떨어진 큐슈라서 사투리 발음이 곁들어지니 이민호는 혼란에 빠졌다. 역관 가문이나 통사들과 거리를 두기 위해 상행에 통역을 대동하지 않았더니 일본인들과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길 것 같아 이민호는 내심 걱정이 많았다.
배 네 척을 선착장에 접안하고 이민호가 배에서 내렸다. 그리고 관리의 안내를 받으며 호위 몇 명, 짐꾼 몇 명과 함께 관청으로 향했다. 항구 거리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활발하게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가사키로 오셔서 고맙습니다. 화란 사람들이 주로 히라도로 가고 여기는 잘 안 오거든요.”
“아! 평호도. 작은 섬보다는 육지의 큰 항구가 좋을 것 같아서 여기로 왔습니다.”
“탁월한 선택이십니다.”
히라도와 나가사키가 국제항구로서 서로 경쟁관계인 것 같았다. 이민호는 왜인 관리가 말할 때까지 히라도가 어디 있는 줄도 몰랐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일본에 주로 설탕을 팔아서, 나가사키의 음식이 달짝지근해졌다는 이야기를 관리에게 들었다.
사실 이 시기에 서양에서 동양에 팔 물건이 무기 말고는 정말 별 거 없었다. 17세기에 동아시아의 무역에 뛰어든 영국은 모직물과 면포가 중국에 안 팔리니까 필리핀 남쪽 마카사르로 가서 해삼과 건어물을 모아 중국과 교역해야 할 정도였다.
관청으로 가는 도중 관리가 슬쩍 물었다. 이민호가 끌고 온 배들이 특이하긴 했으나 서양 범선들을 자주 본 나가사키 사람들이라 그렇게 많이 놀라지는 않았다.
“2년 전에 바퀴달린 배에 탄 해적들이 고토를 습격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혹시 귀하의 배는 아니시겠지요?”
“윤선 말씀입니까? 윤선은 천 년 전에 중국에서 먼저 만들었고 남만 여러 나라에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기 포도아 사람들에게 물어보시면 진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지난 해 말에 남만 뱃사람들에게서 저 배들을 샀습니다. 덕택에 이렇게 멀리 일본국까지 조공을 바치러 올 수 있게 됐습니다.”
“그렇군요. 남만인들이 특이한 배를 만들긴 합니다. 조선에도 바퀴달린 배가 많이 다닌다고 들었는데 남만인들이 만든 것이로군요.”
길거리를 걷는데 일본인들이 특이한 복장의 이민호와 수하들을 보고도 그저 한 번 쳐다보고 지나갔다. 이곳은 국제도시였고, 또한 스페인 수사들이 열심히 선교에 나서는 곳이기도 했다. 겉모습은 분명 절인데 십자가가 붙어있는 곳도 있었다. 현대 나가사키의 어느 작은 성당 앞에 관세음보살상이 서 있는 사진을 본 적이 있는 이민호는 종교의 퓨전은 나가사키의 오랜 전통인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웃었다.
언덕길을 조금 올라 관청에 도착했다. 관청이라곤 해도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어 마치 상관(商館) 같은 모양새였다. 사신을 겸한 무역상으로 위장한 이민호는 일본국 국왕에게 바치는 국서를 관리에게 교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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