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ire of the Warm Sea RAW novel - Chapter 38
* 38화 *
서양 상인들과 거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린 겐타로가 이민호 앞에서 다시 무릎을 꿇었다. 어제 미카와 밤을 보낸 이민호는 민망하고 미안해서 겐타로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러나 겐타로는 머리를 조아린 채 주군을 새로 맞이한 사무라이처럼 최대한의 공경을 담아 이민호에게 부탁했다.
“미카는 제 가문에서 단 하나 남은 핏줄입니다. 판관 나리께서 잘 보살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십시오. 미카는 제가 끝까지 책임지겠습니다.”
전생에 일본 잠수함 때문에 죽었고 그 사건으로 인해 일본과 한국 사이에 전쟁이 났을 것이라 생각하는 이민호는 일본인들을 극도로 미워했다. 왜관 상인들을 만나고 일본에서 장사하는 동안 그 분노와 증오를 숨기느라 고생해야 할 정도였다.
그러나 미카를 안고 나니 같은 일본인이라도 사람마다 다를 수도 있다는 조금 얄팍한 생각을 하게 됐다. 미인계가 잘 통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이민호는 느꼈다. 그래도 이민호는 일본을 정복해 일본인들이 앞으로도 영원히 농사나 짓고 물고기나 잡게 만들 생각은 여전했다. 일본인들이 하는 꼴을 봐서 잘하면 수공업 정도는 봐줄 생각이었다.
“고맙습니다. 제 못난 딸이 조상님들에게서 복을 받아 고귀한 분께 몸을 의탁하게 됐으니 이 아비는 더 이상 여한이 없습니다.”
“앞으로 니시무라 씨가 하실 일이 많으니 그런 말씀 마십시오.”
아버지를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에 축 쳐진 미카의 어깨가 안쓰러웠다. 이민호가 미카의 가녀린 어깨를 꼭 안아주었다. 현대적인 다정한 스킨십에 놀란 미카가 송구스러워했으나 몸을 빼지는 않았다. 현대 일본 여성들이 한국 남성의 자상함을 부러워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았다.
이민호가 지금까지 만난 여자는 딱 하나 빼곤 모두 연상이었다. 어서 열아홉 살이 돼야 제대로 된 밤 묘사가 가능할 것 같았다.
외륜선 네 척은 북서풍을 돛에 가득 담고 지그재그 운항으로 대만 북단을 향했다. 이민호는 장고 끝에 필리핀보다는 대만을 선택하기로 했다. 대만은 1624년에 네덜란드가 들어올 때까지 무주공산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에 가까워도 대만에는 중국인들이 거의 없고 평지와 산지의 넓은 지역에 오스트로네시아어족 원주민들만 살고 있었다.
반면 필리핀 쪽은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가 고전하고 있는 스페인과, 스페인에 맞서 무력을 동원한 중국 상인들, 그리고 필리핀 토착 세력이 서로 다투고 있었다. 루손 섬 남쪽에는 브루나이 제국과 술루왕국이 강력한 해양세력을 형성했고, 더 남쪽 마카사르에서는 해적들까지 설쳐서 전반적으로 꽤나 역동적인 지역이었다. 향신료와 해산물 때문에 결국 남양으로 진출해야 하긴 해도 병력이 부족한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전에 어째서 죽으려고 했던 거야? 앞으로는 그런 생각 절대 하지 마.”
“네. 하지만 저는 절실했어요.”
선장실 침대에서 이민호에게 안긴 미카가 입을 열었다. 이때 미카가 데려온 하녀 네 명이 선실 바닥에 웅크리고 자는 척했다. 배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타서 하녀들에게 선실을 따로 배정해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고용인에 불과한 하녀들이 미카를 따라 일본을 떠난 것을 이민호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미카나 하녀들에게 직접 물어보지는 못하고 미카 입에서 그 이야기가 나오길 기다렸다.
“아버지는 무사 가문의 장남이었어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버지는 더 뛰어난 기량을 가진 삼촌에게 가문을 상속시키고 상업에 나섰어요. 그런데 얼마 전 시마즈 가문과의 전쟁에 패해 삼촌과 가문의 무사들은 모두 전사하거나 할복하고 말았어요. 저들은 하녀가 아니라 저희 가문 무사들의 딸이 도망쳐온 것인데 아버지가 보호해주는 거여요.”
“저런! 그랬구나.”
“아버지는 복수를 다짐하실 수도 없었어요. 사쓰마는 너무 강하고 가문을 이을 남자들은 다 죽어버렸거든요. 한탄하면서 세월만 보내시던 아버지가 얼마 전부터 기뻐하시는 것을 봤어요. 저도 무척 기뻤어요. 제가 아버지를 위해 해드릴 것이라곤 주인님께 제 몸을 바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제가 먼저 주인님께 오겠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렸어요. 제발 저희 아버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그것 참. 니시무라 씨에게 잘해줄 테니 걱정 마라. 앞으로 일이 잘 되면 너희 가문의 영지를 회복하도록 도와주마.”
“고마워요, 주인님.”
일본에 의외로 효녀가 많다거나 운명에 순응한다기보다는, 가문의 목적이 이뤄지도록 적극적으로 희생하는 여자가 많은 편이었다. 다네가시마 조총 장인의 딸이 아버지가 조총 총신 뒤에 끼우는 나사를 만들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서양인에게 스스로 팔려간 사례가 대표적이었다.
이민호가 이불 속에 손을 집어넣어 미카가 입은 유카타를 슬며시 열었다. 미카는 숨을 몰아쉬며 이민호의 손길을 전혀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한참 애무를 한 다음 미카를 옆으로 눕히고 이민호가 뒤에서 천천히 결합했다.
미카가 억눌린 신음을 토해내는 순간 잠자는 척하던 하녀들이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를 냈다. 소리가 고스란히 들리고 방풍창을 통해 희미하게 달빛이 비치는 선실 안의 은밀한 방사는 이민호를 극도로 흥분시켰다. 조선 양반들이 이 일을 안다면 앞에서는 야만인이라고 욕하면서도 뒤에서는 음란소설과 춘화로 만들 만큼 자극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더 이상 자세한 묘사는 생략한다.
나가사키에서 출항하고 나흘 후 오전에 외륜선 네 척이 대만 북단의 작은 만에 도착했다. 이민호가 기억하기로 현대의 타이완 지룽 항 위치였다. 인적 없는 이곳을 해중국(海中國)의 수도로 정하고 계복을 지휘관으로 한 소규모 정찰대를 먼저 상륙시켰다.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절대 위협을 가하지 마. 앞으로도 원주민들과 계속 협력해야 하니까 말이야.”
“걱정 마십시오. 그런데 아직 겨울인데 이곳은 왜 이리 덥습니까?”
“북쪽으로 갈수록 춥고 남쪽으로 갈수록 덥잖아.”
“아하! 함경도가 북쪽이라 더 추웠죠.”
계복이 떠나고 얼마 후 원주민들과 조우했다. 이민호는 외륜선에 탄 채 계복과 원주민들이 대화하는 것을 지켜봤다. 이민호가 지시한 대로 계복이 손짓발짓을 하면서 원주민들에게 선물을 주고 외륜선으로 데려왔다.
번쩍번쩍 빛나는 수은갑으로 갈아입은 이민호가 나섰다. 원주민들과 의사소통을 어떻게 하나 하고 걱정했는데 의외로 중국어, 그것도 광동어나 민남어가 아닌 화북지방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있어서 직접 만나서 대화하기로 했다. 원주민치고는 아는 것이 많아 대화가 제법 통했다.
“너는 섬사람이면서 제법 유식하구나. 혹시 조선국을 아느냐?”
“예. 여름에 명나라 항저우에서 북동쪽으로 나흘쯤 항해하면 흑산도라는 섬이 나오고 계속 가면 조선이라는 나라의 수도에 도달한다고 들었습니다.”
“오호! 명나라 군대에서도 모르는 것을 알고 있구나. 그걸 너는 어찌 아느냐? 그리고 중국어는 어떻게 배웠느냐?”
“저는 여름에는 바다 건너 광동 땅에서 북경 출신 상인 밑에서 일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과 달리 외국의 사정에 밝습니다. 중국어도 그분께 배웠습니다. 그런데 대인은 이곳에 어떻게 오셨습니까? 무역을 하기에는 이 땅의 사람들이 가진 재산이 너무 적습니다. 서쪽 바다를 타고 더 남쪽으로 내려가 항저우나 광저우에서 무역을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어차피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속이지 못할 테니 처음부터 솔직히 목적을 밝히기로 했다. 그 와중에 이민호는 단군신화를 슬쩍 도용했다. 물론 핏줄을 왕족으로 세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수하들이나 일본인들 중에 중국어를 알아듣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니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나는 조선국의 둘째 왕자로, 국왕전하의 명을 받들어 거선 네 척에 신하들과 정예 군사, 그리고 백성 3천 명을 태우고 멀리 이곳에 나라를 세우기 위해 왔다.”
“뭐요?”
“이곳은 너희들이 조상대대로 살던 삶의 터전이겠지만 내가 강한 나라를 세워 너희들을 보호해주려 한다. 내 밑에서 대국의 신민이 되겠느냐, 아니면 전쟁에 패해 노예가 되겠느냐?”
원주민의 반응이 시원찮아 이민호가 일부러 조금 강압적으로 나왔다. 그런데 이 건방진 원주민이 콧방귀를 뀌었다.
중국 바로 옆에 있으면서도 중국인들이 왕조 대대로 정복하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중국인들이 광동성과 복건성 건너에 대만이 있다는 사실을 몰라서 정복하지 않은 것은 절대 아니었다.
“아! 젠장! 또 침략자가 왔군. 이보세요! 전쟁에 이기더라도 당신들은 이 땅에서 오래 못 버틸걸요? 우리 케타갈란족이 1년 내내 당신들 집에 불더미를 던질 거요. 땔감 구하러 산에 들어왔다가는 애나 여자나 다 목이 잘려요. 그럼 당신들이 오래 버틸 수 있겠어요?”
“오호! 전쟁을 원하느냐?”
“대포를 가져와도 소용이 없어요. 그리고 이 땅에는 우리 케타갈란족만 있는 게 아니라 평지족과 고산족에 속하는 부족이 수도 없이 많고 전사들이 바닷가 모래알 같이 많아서 웬만해서는 정복할 수가 없어요.”
“계복아! 하늘에 기러기 날아간다.”
계복이 소총 총구를 하늘로 향했다. 원주민 남자도 이민호가 가리킨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 쾅! 철컥. 쾅! 철컥. 쾅!
굉음이 세 번 연속 울리며 하늘을 날던 기러기 세 마리가 원주민 앞에 뚝뚝 떨어졌다. 잠시 놀라 얼어붙었던 원주민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민호 앞에 부복했다.
“왕자님은 훌륭한 왕이 되실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족장에게 용안을 뵈러 오라고 전하겠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원주민들에게 각각 비단 세 필씩과 거울 여러 개를 주어 돌려보냈다. 저 원주민이 돌아올 때 당연히 전사들을 잔뜩 데리고 오겠지만 어쩌면 대만 원주민들의 내부 상황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고 이민호는 기대했다.
“사공들만 빼고 전체 상륙한다. 저기 강가가 좋겠구나. 일본인들은 저쪽에 천막부터 쳐라. 일 년만 지나면 대리석으로 지은 집에 살게 해줄 테니 조금만 고생해라.”
조선에서 미리 준비해 가져온 천막 100동을 치고 천막촌 주변에 목책을 둘렀다. 그러나 아직 안전을 확보하는 길은 요원했다. 제대로 된 성곽이 갖춰지거나 원주민들과 관계가 설정되기 전까지는 항상 불안한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도련님! 여기에 마을을 세우실 겁니까?”
“마을이 아니라 나라다. 여기에 하나, 저쪽 산 너머 평원에 하나를 더 세울 거다. 여기는 해중국, 산 너머에는 고산국이라고 이름도 미리 지어 놨다. 이름 좋지?”
“조, 좋습니다. 예. 전혀 촌스럽지 않습니다.”
“해중국은 남만 여러 나라와 일본을 상대하고, 고산국은 중국과 조선을 상대할 예정이다. 둘 다 당분간 백성이 몇 백 명밖에 안 되는 작은 나라겠지만 말이다.”
이민호는 자그마한 마을 두 개로 나라 두 개를 세우는 만행을 저지르려 하고 있었다. 항구에는 해중국을, 남서쪽 현대의 타이페이 자리에는 고산국(高山國)을 세울 예정이었다.
“맙소사! 마을이 아니라 나라를 한꺼번에 두 개나 세우신다고요?”
“나라를 세우겠다고 했는데 도대체 뭘 들었느냐? 어차피 명목상의 나란데 작으면 좀 어때? 사람들 모아서 천천히 키워나가지 뭐.”
현재 이민호가 확보한 인력은 상단 세 개, 외륜선을 운항하는 사공들, 간수군으로 출발한 사병, 나가사키에서 노예로 팔린 일본인, 그리고 시전부락 어린이들이었다. 앞으로 원주민 고산족인 케타갈란족과 조선 유민, 요동 주민들을 받아들여 백성으로 삼고 나라를 확장할 계획이었다.
“원주민들이 몰려옵니다!”
예상대로 원주민들은 창과 방패를 들고 몰려왔다. 결코 호의적인 분위기가 아니었다. 전사들이 아래에 바지를 입긴 했는데 앞에만 천이 달리고 종아리와 허벅지 뒤는 맨살이었다.
“이 분은 케타갈란족의 대왕이시다! 침략자 조선 왕자는 무릎을 꿇고 영접하라!”
“아까 그 놈이네.”
천막을 친 다음 목책을 세우던 간수군들 100명이 대열을 맞춰 이동했다. 전체 병사들이 발걸음까지 딱딱 맞춰 움직이니 꽤나 위압적이었다. 통역이 갑자기 항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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