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ire of the Warm Sea RAW novel - Chapter 40
* 40화 *
그런데 원주민 여자들의 복장에 조금 문제가 있었다. 원주민들이야 항상 생활하는 더운 환경에 적응한 것이니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지만, 유교사회에서 살았던 조선인 간수군들이 보기에 원주민 여자들의 복장은 너무 야했다.
원주민 여자들이 치마를 입은 것은 분명한데 너무 짧았기 때문이다. 마치 현대의 미니 원피스 같은 옷이었다. 노출이 심한 걸 그룹을 욕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빌리자면, 딱 룸살롱 여자들이 입는 홀복 같았다.
“이 동네에는 천이 부족한가봐.”
“험! 험! 뭐, 보기에는 좋네. 여자들 허벅지가 아주 튼실하구먼.”
간수군들이 일하다 말고 눈이 자꾸 돌아가느라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조선인들이 입던 핫바지라면 성이 난 그것을 적당히 가릴 수 있겠지만 현대식 바지를 입은 간수군들은 그것이 굴곡져 그대로 표가 났다. 민망해서 서로 얼굴을 못 보다가, 결국 주저앉은 놈들까지 나왔다.
이민호는 계복을 시켜 1개 대를 남서쪽으로 정찰 보냈다. 산 정상까지만 올라 산 너머에 평원이 있는지만 확인시켰다. 근처에 울긋불긋한 천으로 만든 옷을 입은 원주민들이 돌아다녀 조금 불안했지만 계복이라면 잘 할 줄로 믿었다.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천막 주변에 목책이 완성되고 창고와 통나무 오두막 한 채, 그리고 지붕으로 하늘만 가린 공용 부뚜막이 건설됐다. 공동화장실도 몇 개 파서 낡은 천이나 싸리나무 종류로 두르고, 두엄을 쌓을 곳에 깊이 웅덩이를 팠다. 마지막으로 외륜선에 적재된 식량과 부식 대부분을 창고로 옮겼다.
저녁에 일을 다 마치고 원주민들에게 밥을 먹였다. 밥을 안 먹어도 좋으니 쌀로 달라는 이들이 많았지만 일단 해놓은 밥이라 다 먹였다. 소금으로 간을 한 짭조름한 건어물 반찬을 원주민들이 아주 환장을 하고 잘 먹었다.
이민호는 원주민들을 줄 세운 다음 쌀 석 되씩 제대로 다 나누어 주었다. 쌀을 받은 원주민들이 어쩐지 감동한 것처럼 한동안 우두커니 서서 쌀자루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 때부터 이민호를 제대로 믿게 됐다.
통역도 쌀을 받고 좋아서 얼굴이 활짝 폈다. 이민호가 통역을 툭 건드리며 물었다.
“쌀 석 되가 그렇게 좋아? 요즘 다들 굶은 거야, 아니면 평소에 쌀을 구하기 어려운 거야?”
“이곳에서는 쌀농사를 짓지 않고 무역도 거의 안 해서 쌀을 구하기 어렵습니다. 농사야 잘 되겠지만 사람들이 쌀농사 짓는 법을 몰라요. 하지만 저는 중국 땅에서 쌀을 자주 먹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저리 좋아해?”
“저들이나 제가 좋아하는 이유는, 면포로 만든 쌀자루가 너무 고급스러운데 왕자님이 공짜로 줘서 그래요.”
“컥!”
쌀을 담을 것이 없어 이민호가 일본 여자들에게 배에 남는 면포를 줘서 자르고 대충 실로 기워서 쌀주머니를 만들라했더니 원주민들이 그것을 받고 더 좋아했던 것이다. 마트에서 식품 몇 개 사고 사실 쓸모는 없지만 카트까지 끌고 갈 수 있다면 손님 입장에서는 땡 잡은 기분일 것이다. 원주민들의 표정이 딱 그 모습이었다.
“도련님! 탐망을 마치고 왔습니다.”
계복이 어스름할 무렵에 돌아왔다. 같이 갔던 다른 간수군들은 밥 먹으라고 보내고 계복이 이민호에게 정찰 보고를 들었다.
“도련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산을 넘어가니 넓은 평원이 있었습니다. 오두막 몇 채씩이 모인 작은 마을이 멀찍멀찍 떨어져 있었습니다. 원주민들이 허름한 밭에 농사를 짓긴 하는데 조나 피, 수수 같은 걸 지어 강원도 화전민보다 못한 것 같습니다. 평원 중심에서 서쪽으로 강이 흐르고, 바다에 닿기 전에 강어귀가 꽤 넓은 곳이 있습니다. 포구로 만들기 적당한 곳이었습니다.”
“으음. 수고했다. 잘 됐어.”
“그곳에도 나라를 세우실 겁니까?”
“응. 그곳에 대충 도시를 세워서 중국 여러 도시들하고 교역하려고. 고산국이라고 했잖아.”
“너무 넓어서 방어하기 꽤나 어려울 텐데요.”
“중국 상인 놈들이 다 해적은 아니니까 괜찮아. 그리고 한 나라의 수도라면 그 정도 넓이는 돼야 위신이 서지.”
“국가 운영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가장 기본적인 토지제도는요?”
국민 대부분이 농사를 짓는 전근대 시대에는 토지가 경제의 기본이니 세월이 지나면서 소수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고, 토지 소유에서 배제된 다수의 불만이 쌓여 민란이 일어나기 쉬웠다. 조선처럼 조정과 양반들이 평소에 제 욕심 채우다가도 가끔 적당히 소작농들을 위해주면 나라가 좀 오래 가고, 중국처럼 지주들이 끝없이 땅 욕심을 내고 그것을 견제하지 못하면 오래 가지 못해 망한다는 것이 이민호의 생각이었다.
“땅 문제로 허구한 날 싸우고 2백 년쯤 지날 때마다 나라 망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니 농지는 국유로 해야겠어. 세금은 안 받고 국가에서 백성들에게 직접 소작료만 받으려고. 처음 농지 개발 단계에서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는 식으로 국가가 직접 개발 주체가 돼야 해.”
“큭큭! 왕을 지주, 관리들을 마름이라고 칭해야겠네요.”
“오! 좋은데? 큰 마름 작은 마름 새끼 마름.”
세금 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란 없으니 그게 나은 방법일 수 있었다. 그러나 백성들이 세금 10퍼센트 내기 싫어한다는 이유로 소작료 50퍼센트를 내게 하는 꼴이었다. 사실 전근대에 어느 나라든 세금은 50퍼센트를 넘어갔다. 조선의 전세가 1할이 안 된다지만 공납이나 부역, 군역까지 포함하면 5할을 넘는다고 봐야 한다.
다음 날부터 부역하러 나온 원주민이 삼천 명으로 늘어났다. 일에 비해 너무 많이 와서 이민호가 깜짝 놀랐다. 아직 도구나 장비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이번에는 급히 기본 주거지만 설치하려 했으니 저렇게 많이 와도 사람들이 할 일이 없었다. 일본인들이 경작할 밭은 그들에게 만들라고 시켜도 충분했다.
이민호가 원주민들에게 돌아가라고 했으나 이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일을 하지 못하게 간수군들을 동원해 막으려고 해도 원주민들이 슬슬 피해가면서 계속 일을 하는 바람에 결국 말리지 못했다. 강압적으로 해산시켰다가는 원성을 살 수 있어서 결국 원주민에게 일을 시키기로 했다.
“쳇! 일을 만들어야겠네. 밭을 좀 넓게 만들고 저기 산에 숲 좀 베어내서 목재와 땔감을 만들라고 해. 돌 옮겨서 개울에 징검다리라도 만들고. 아! 선착장도 좀 튼튼히 만들어야겠다.”
기껏 일을 만들었지만 이 정도 인원이면 한나절이면 다 끝날 것 같았다. 간수군들을 경계와 정찰, 작업 지시로 돌린 다음 이민호가 통역을 붙들고 물었다.
“이거 어떻게 된 거야? 사람이 너무 많으면 쌀을 다 줄 수 없잖아! 적당히 불러와야지!”
“제가 부른 게 아닙니다. 소문이 퍼져서 멀리 사는 다른 부족 사람들까지 몰려 왔어요. 혹시 부담되시면 배급하는 쌀을 좀 줄이면 될까요?”
“약속을 어길 수는 없지. 이봐! 비단을 줄 테니 쌀과 교환하지 않겠나?”
“헤헤! 부족에 쌀이 있었다면 저희 부족민들이 이렇게 몰려나오지도 않았겠죠.”
이 통역이 부족장 가문이더라도 딱히 쌀을 창고에 가득 쌓아놓고 사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통역이 어제 말한 것처럼 대만 섬 통틀어 쌀농사 자체를 거의 짓지 않았다. 극소수 복건이나 광동 땅에서 도망쳐 온 한인이 쌀농사를 지었지만 그것이 원주민들에게 퍼지지 않았다.
“좋아! 내가 바다 건너 중국에 가서 쌀을 사 오겠다. 그런데 너희들 부족은 제대로 지키고 있는 거야? 마을 비우고 다 오면 어떡해?”
“마을에 사내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못 오게 했으니 조금 여유가 있을 겁니다. 보십시오! 어제와 달리 꼬마들은 없고 어미에게 업혀온 젖먹이만 있지요?”
“그래? 거 참 고맙다. 그럼 나는 중국 땅에 갔다가 며칠 후에 오마. 혹시라도 내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면 내 반드시 너를 찾아내서 죽여 버리겠다.”
“어이쿠! 왕자님이 이렇게 호구, 아니 인자하신데 배반할 백성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저도 이미 왕자님의 백성입니다. 헤헤!”
그 날 낮에 성을 쌓는 부역에 동원됐던 경험이 있는 자들 위주로 간수군 1개 대(隊)를 남겨서 원주민들을 시켜 성벽의 터다지기를 하라고 지시했다. 시골 읍성 정도의 작은 크기라서 몇 천 명이 두세 달 정도 일하면 기본적인 성벽을 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돌을 깎고 옮기는 것이 가장 큰일인데 지금 시작하기에는 장비가 없고 돌산도 파악하지 못했다.
나머지 병력은 중국에서 쌀을 사기 위해 배를 탔다. 원주민들 수가 너무 많아 조금 불안했지만 일을 시키면서 쌀을 풀고 있는 동안에는 안심해도 될 것 같아 결단을 내렸다.
미카와 하녀들도 따라왔다. 아버지가 상업을 시작한 이래 미카가 중국어도 배웠다 하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외륜선 네 척이 항구에서 빠져 나와 서쪽으로 항해했다. 대만을 남북으로 가로지른 산맥이 동쪽에 치우쳐 있어 동쪽은 가파르고 서쪽은 평지가 많았다. 서쪽 지형이 낮아 김제평야나 나주평야가 몇 개씩이나 이어진 것과 같은 모습이었다.
거리가 멀어지면서 대만 평지는 수평선 아래로 사라지고 산꼭대기만 남을 때 서쪽에서 육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작은 배들이 항해하고 있는 중국 연안이었다.
“아무 항구에나 들어가서 사면 안 될 텐데. 급한데 뭐 할 수 없지.”
“첨정 나리! 웬 배가 접근해오고 있습니다.”
이민호가 해적인가 하고 사공이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웬 상선에 탄 사람들이 이쪽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뭔가?”
중국어를 아는 사람이 없어 외부 접촉은 일일이 이민호가 다 나서서 해결해야 했다. 그런데 이민호가 광둥어 같은 남중국어는 모른다는 문제가 있었다.
“거기 바퀴 달린 배, 외국 배가 맞습니까? 부에노스 디아스! 봉 디아! 살람 알라쿰! 짜오 안! 싸왓디크랍! 셀라마트 파기! 어느 나라에서 오셨습니까?”
전혀 못 알아듣는 말이 잔뜩 흘러나왔다. 이민호는 중국인 뱃사람이 중국을 자주 방문하는 여러 외국의 인사말을 늘어놓은 것으로 판단했다.
“중국어 할 줄 압니다. 중국 사람이 아니라서 남쪽 중국어는 몰라요.”
“오오! 외국 배 맞네요. 혹시 무역을 하실 거라면 저희들에게 기회를 주실 수 있겠습니까?”
상대방 상선의 정체를 제대로 몰라 이민호는 조선이라고도, 해중국이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밀무역을 할 때 서로 국적이나 정체를 밝히길 꺼리는 경우가 많으니 상인이 끝까지 묻지 않고 넘어가줬다.
“조정에서 지정한 항구가 아닌 곳에서 무역을 하면 밀무역이잖습니까? 밀무역은 해금령에 위배되지 않나요?”
“밀수가 맞습니다만 세금 낼 필요가 없으니 피차 좋지 않습니까? 만약 수군 군선이 오더라도 적당히 뇌물을 주면 다 넘어갑니다. 항구에서보다 저희들이 훨씬 좋은 가격에 상품을 사겠습니다. 혹시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저희가 팔거나 없더라도 대신 사드리겠습니다.”
어차피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정식 교역허가를 받지 못했으니 이곳 바다 한가운데에서 거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중국 상인과 대화하는 중에 자꾸 다른 배들이 모여들었다. 대부분이 무역을 하자고 제안해왔지만 숫자가 많아지니 중국 상인들이 해적으로 변해 약탈을 시도할까봐 슬슬 불안해졌다.
이민호는 다른 배들에게 조금 멀리 물러서라 해놓고 처음 외륜선에 다가온 상선과 대화를 계속했다. 이 상선에 쓸 만한 물건이 없으면 언제든 다른 상선과 거래를 할 수 있었다.
미카가 의외로 중국어에 능숙해 중간 중간 이민호를 도와주었다. 그래봤자 미카가 일본인이라 이민호가 외국어를 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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