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ire of the Warm Sea RAW novel - Chapter 43
* 43화 *
8. 작고 슬픈 나라
이민호는 겨우 며칠 만에 좌수영 집에 돌아오는데도 굉장히 많은 일을 해낸 것 같아 정신적으로 피로해졌다. 얼른 수하들을 가르쳐서 장사는 대충 떠넘기고 싶어졌다.
“도련님!”
뜻밖에 혜진이 집 앞에 나와 있었다. 이민호가 탄 외륜선이 포구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소포로 나가려던 차림새였다. 그런데 혜진이 이민호에게서 조금 이상한 낌새를 챘는지 다가와 코를 킁킁거렸다.
“흥! 도련님 바람피웠죠?”
“어? 아니야! 배를 오래 타는 바람에 목욕을 못해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거야!”
그러나 이민호의 변명을 듣지도 않고 혜진이 홱 돌아서서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는 결국 일본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실토하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야 했다. 우군 세력을 얻기 위한 정략결혼 같은 거라고 변명했다가, 그럼 앞으로 비슷한 이유만 생기면 여자들을 더 들일 거냐며 화내는 혜진에게 더 혼났다.
손톱으로 할퀼까 무서워 이민호는 혜진을 밤새도록 달래주었다. 혜진이 어려서 아직 몸을 합치지는 못해도 이민호가 몸으로 봉사할 수는 있었다. 깜찍하게도 그 동안 혜진도 그것을 은근히 즐겼다. 그러나 이민호가 혀가 굳을 것 같아 잠시 쉬기라도 하면 혜진이 바로 손톱을 세우는 바람에 다음 날 아침 진짜로 혀가 굳어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이리 오랍신다아아~ 이리 오너라아~”
“맙또따! 하삘 오늘.”
이민호가 화들짝 놀라 버선발로 뛰어나갔다. 한성에 있어야 할 내수사 전수가 노새를 타고 종 한 명만 데리고 좌수영 저택으로 직접 찾아왔다. 다소 파격적이긴 하지만 왕실에서 이번 상행에 큰 관심을 보였을 테니 환관으로서 당연한 행차였다. 이민호는 전수를 사랑방에 모시고 그 동안의 상행을 보고했다.
“그러니까 이번 상행으로 얻은 이문에서 절반인 왕실 몫이 왜은 8성은(成銀)으로 이십만 냥에 금이 150매라고? 무거워서 배가 가라앉지 않은 게 다행이로군. 이 첨정 자네 참 대단한 사람이야. 홍삼을 일본에만 조금 팔고 아직 중국에 팔지도 않았잖은가?”
“예. 거기에 더해 담보로 맡은 남만 포도아국의 순도 낮은 금화가 3만 냥 정도 되니 다음 상행 때 은으로 받거나 혹시 못 받으면 금화를 녹여 더 드릴 수 있습니다. 일단 궤짝에 담아 배 밑바닥에 깔아놓았으니 이번 달 중에 해동상단의 윤선이 한성에 갈 때 운반하겠습니다.”
“으음. 준비기간 합해서 겨우 석 달에, 한 달 동안 두 번의 상행으로 호조의 한 해 세입 이상을 벌어들이다니. 물론 이걸 다시 투자하면 더 많은 금은을 얻겠지만, 천조나 일본에 크게 영향을 줄 것 같아 욕심을 줄이겠네.”
“저번에 전수 영감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은을 적당히 풀어 다른 재산으로 축적하셔야 합니다.”
“그건 당연하지. 자네는 참, 사창이나 천일염전으로 얼마든지 사익을 취할 수 있었는데도 백성과 나라를 먼저 생각했지. 이 첨정 자넨 진정으로 충신일세.”
이민호는 전수의 칭찬을 호구의 다른 말인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사창이나 소금, 감자와 고추는 앞으로 있을 임진왜란에서 조선 백성들의 인명피해를 최소화하는데 밑바탕이 될 것으로 믿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일본에 복수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격앙된 백성들의 감정과 달리 전란 기간에 누적된 인명피해가 너무 커서 실행에 옮기기 불가능했다. 이민호는 바로 그 복수를 하고 싶었다. 미래를 위해서라도 일본은 반드시 잡아야 했다.
“이건 제가 준비한 선물입니다. 고관대작이나 궁내부 높은 분들에게 드리면 좋아하실 겁니다. 혹시라도 의심할까 두려우니 내수사는 뒤로 빠지고 국왕전하께서 직접 나눠주는 식이 나을 것 같습니다.”
“크고 무겁군.”
고급스럽게 옻칠한 나무상자마다 커다란 주화와 작은 은화들, 그리고 몇 가지 희귀한 향신료가 비단주머니에 조금씩 담겨 있었다. 커다란 주화가 먼저 눈에 띄지만 사실은 가장 싼 것이고, 가장 비싼 것이 몇 알 안 되는 향신료였다.
만력통보는 1576년 명나라에서 제조한 주화로 큰 것은 직경 97밀리, 두께 5.5밀리, 무게 200.6그램이나 된다. 앞면에는 만력통보 글자와 꽃나무, 물고기 등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시장 풍경이 담겨 있었다. 기본적으로 동전이므로 동 함량에 따라 시대별로 가격 변화가 컸다. 즉, 금화나 은화가 아니므로 액면가든 유통가든 비싼 것이 아니지만 금속화폐를 유통하지 않는 조선에서 보기에는 크기만으로도 꽤나 비싸 보이는 주화였다.
“자네 생각을 알겠네. 이게 가치는 사실 얼마 안 되는 거지?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조정 대신들이 천조의 보화를 얻었다고 좋아하는 꼴을 비웃자는 거로군.”
“역시 전수 영감이십니다.”
작은 은화는 1전이 은 4그램으로 네 번 제련하여 순도가 93.8퍼센트나 되는, 당시 세계 최고의 주화였다. 이 작은 것이 명나라에서는 쌀 몇 석에 해당했다. 그러나 명나라는 공적으로 은화 제조를 하지 않았으므로 이것은 사적으로 주조한 은덩이 합금에 불과했다. 물론 민간에서 주조한 금속화폐라도 시장 참가자들에게 받아들여져 시장 유동성에 기여하여 위조 화폐와는 성격이 다른 것이었다.
명나라는 일조편법으로 모든 세입과 세출을 은으로 통일하면서 은의 무게를 기준으로 삼았으므로 정부에서 주조한 은화를 시중에 유통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명나라 정부 차원에서 동전이나 지폐를 발행하거나 민간에서 사적 주조가 행해졌어도 정부는 그런 화폐의 유통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왜은과 양은, 멕시코 은인 원보, 응양, 마제은, 원사은, 대발(大髮), 소발, 마검(馬劍), 불두 등등 명나라 사회에서 유통되는 어떤 종류의 은화라도 마찬가지로 단지 은화 함량만 문제일 뿐이었다.
“자네에게도 뭔가 선물을 주고 싶은데 말일세. 물론 주상전하께 윤허를 얻어야 하지만 말일세.”
전수가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민호는 왕실에서 좋은 벼슬을 주면 냉큼 받을 생각이었다. 특히 벼슬을 주면 체아직이라도 일단 받고 봐야 전직 뭐뭐 하는 식으로 신분이 올라가니 사양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남쪽 바다에서 계속 활동해야 하므로 북방의 무관직 실직은 곤란했다.
“이보게, 이 첨정. 자네 혹시 내수사 전수가 되고 싶은 마음 없나? 능력 있는 자네가 내수사를 책임진다면 나는 언제든 전수 자리를 물려주고 푹 쉬고 싶네.”
“예에에? 전수는 환관이 맡는 직책이잖습니까!”
“허! 소리 지르지 말게. 자네 많이 컸네 그려. 환관이 뭐 어때서 그러나?”
“죄송합니다. 너무 놀랐습니다. 하지만 저는 삼대독자라서 환관이 되는 것만큼은 사양하겠습니다.”
무서운 이야기를 들었다.
“농담은 그만하고, 대만이라는 섬에서 기반을 약간 다졌다는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해보게. 명목상 독립국을 한두 개 만들어서 조공무역과 더불어 천조와 왜를 오가는 무역을 하겠다는 이야기지?”
“예. 저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중간에 조선 땅에 들르지 않고 재정거래, 즉 명나라와 일본을 오가며 금과 은의 환차익을 얻기 위해 작은 땅을 마련했습니다. 일본인 노예 500명을 구입하고 원주민들에게 쌀을 주어 거주지부터 만들고 있습니다. 여진족 노예 50명도 곧 그 땅으로 보낼 예정입니다. 최종적으로는 고개 너머로 이웃하는 성채 두 개를 만들어 각기 국가를 참칭하고 명나라와 일본은 물론 다른 나라들과도 무역을 계속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적당히 말 잘 듣는 원주민이나 여송, 혹은 섬라 사람을 골라 왕으로 세울까 합니다.”
“응? 이 첨정이 직접 왕을 하지 그러나? 관리하기 불편할 것 같은데 말이야. 그들은 필경 외국인일 텐데 자넬 배반하면 어떻게 하나?”
“저는 상행을 하면서 계약을 맡아야 하니 왕을 하면 곤란합니다. 그리고 저나 다른 조선인들을 왕으로 세우면 얼굴만 봐도 조선 사람이라 여길 게 빤한데 어떻게 중국이나 일본에 입조하겠습니까?”
“그것도 그렇군. 그 문제는 주상전하께 잘 설명 올리겠네. 그럼 이번에는 좋은 일을 이야기해보세. 일을 잘했으면 상을 받아야지. 아까 그 내수사 전수는 농담이고, 이 첨정 자네가 혹시 원하는 게 있나? 상이라면 보통 벼슬이나 품계, 혹은 농지와 노비에 더해 숙마와 곡식을 내리는데 자넨 딱히 욕심도 없는 것 같아 내가 오히려 더 고민이야. 뭘 줬으면 좋겠나? 자네 부친에게 실직이라도 줄까? 순천부사 같은 연변수령 말일세.”
“벼슬은 엄친께서 원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음. 혹시 어디 산이나 주실 수 있습니까?”
“은이 나오는 산을 그렇게 많이 사고도 욕심이 남았나?”
“아! 그거 제가 잠채할 것은 아닙니다. 언젠가 조정에서 채굴을 허락할 수도 있으니 미리 사두는 거죠. 일종의 투자입니다.”
내수사에서 정말 세심히 이민호의 뒷조사를 하고 다녔다는 증거가 나왔다.
“혹시 평안도 운산군에 있는 산을 주실 수 있습니까?”
함경도 단천 은광이 욕심났지만 거기서는 시기에 따라 은 생산과 폐광을 반복하고 있어 운산 금광으로 바꿨다. 그러나 내수사 전수는 조선 전역의 금은 광산을 꿰뚫고 있었다.
“거긴 금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잖나? 자네 광산에 대해 참 많이 아는군. 운산을 자네에게 주더라도 조정에서 금광 채굴 허가를 내주지 않을 거야. 조선에서 금은을 캔다고 소문이 나면 명나라에서 달라고 할 테니까 말일세. 그러니 한수 이남 땅에서 고르게.”
“에휴! 그럼 화순에 흑토 광산이나 주십시오.”
화순 탄광은 내륙 지역에 있어서 안 쓰려고 했는데 결국 쓰게 됐다.
“화순이라. 거긴 좀 쉽겠군. 그런데 설마 동복현에서 인삼 잠조하려는 건 아니겠지?”
“아휴! 제가 언제 제 돈으로 인삼이나 홍삼을 단 한 뿌리라도 산 적이 있습니까?”
“흠! 흠! 내가 다 준비해줬지.”
“흑토는 가마 열을 올려서 좋은 철을 만드는데 필요합니다. 그리고 흑토에서 나오는 게 좀 있습니다. 빨간색 염료 같은 거죠.”
“별로 돈이 될 것 같지 않은데. 자네가 말하니 뭔가 있는 것 같군.”
이야기가 끝나가는 것 같아 이민호가 금괴 몇 장을 전수에게 찔러주었다. 그러나 청렴결백한 환관은 받기를 거부했다.
“됐네. 나는 상께서 내리신 것만 받기로 결심했네.”
전수가 뿌리치고 집을 나섰다. 내수사 전수가 이민호를 감시하는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전수가 임금에게 감시를 받는 것 같았다. 어쨌든 전수를 한 번 만날 때마다 수명이 줄어드는 것 같아 이민호는 정말 싫었다.
그 날 저녁 소포의 해동상단 분점을 통해 은밀히 접촉한 기술자들이 과연 대만으로 떠날지 여부를 최종 확인했다. 필요한 기술자는 축성, 건축, 조선, 야금, 요업 등 국가에서 필요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쳤다. 활과 화살을 만드는 궁장과 시장, 화약을 만드는 장인은 민감한 군사 문제이므로 배제했다.
“첨정 나리! 대부분 장인들은 회유에 성공했습니다. 장인 가장 중심의 가족 단위보다는 관아에서 일자리를 못 잡은 둘째나 셋째 아들이 더 많습니다. 그리고 이앙법이 유행하면서 토지에서 밀려난 소작민들이 화전민이 되거나 시정에 흘러 다니고 있어 몇 가구를 포섭했습니다.”
“잘했소. 그들은 지금 어디 있소?”
“첨정 나리께서 타실 윤선 밑창에 숨겨 두었습니다. 제가 아침저녁으로 보살피고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이민호는 분점주와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분점주는 이민호를 위해 해동상단 대방이 천거한 과묵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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