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ire of the Warm Sea RAW novel - Chapter 44
* 44화 *
“그리고 제주도에서 나와 연도에 숨어있는 어민 가족들이 있습니다. 불쌍해서 미평의 소작농으로 보낼까 하다가 첨정 나리의 명을 기다리기 위해 잠시 보호하고 있습니다.”
“대만으로 가자고 해보시오. 대만 원주민들이 어업 기술이 떨어지더군요.”
제주도 백성들이 육지로 도망쳐오면 수군에서 잡아 순천부에서 조사한 다음 쇄환시켰다. 당시는 백성들에게 주거이전의 자유가 없는 시대였고, 제주도에서 살기 어렵다기보다는 왜구의 침범에 대비해 적절한 인구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민호도 제주도에서 이민희망자를 모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염전 기술자는…… 아하! 첨정 나리께서 최고의 천일염전 기술자이시죠.”
“염전도 만들어야죠. 의원은 못 구했죠?”
“송구합니다. 의원이나 약재상들이 제법 방귀 꽤나 뀌는 중인 신분이라 어렵습니다. 오죽하면 의원을 주부, 약재상을 봉사로 부르겠습니까?”
별주부는 의원, 심봉사는 실명 전에 약재상이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내의원에서 주부 직을 지낸 의원, 봉사직에 오른 약제사들이 흔해 의원과 약제사의 명칭으로 주부와 봉사가 일반화됐다.
비슷하게 고려와 조선 시대에 실제 벼슬을 한 시각장애인들이 있어, 그 벼슬 이름이 전체 시각장애인에 대한 일반화가 되기도 했다. 시각장애인 중에 고려 때 태상시와 전의시 소속 종4품 벼슬인 소경(小卿)을 지내서 시각장애인 전체를 소경이라 불렀다. 조선 전기 명통시(明通寺)의 최고 어른이 지팡이를 짚어서 장님(丈님), 조선 후기 맹청의 중간어른을 장님(長님)이라 부른 것도 전체로 확대됐다.
점술을 담당하는 부서인 관상감 음양과 소속 관리로 채용된 시각장애인을 품계에 따라 봉사 또는 참봉이라 불렀으니 이 명칭도 일반화됐다. 경기도와 황해도에서 시각장애인을 참봉이라 부른 것도 같은 연원을 두고 있다. 맹인(盲人)이라는 단어에 원래 비하적인 의미가 없었지만 사회적 인식 탓에 회피하려다 소경, 장님, 봉사 등 벼슬 이름으로 바꿔 부른 것에 불과했다.
“고급 기술을 가진 자들이라 어느 정도 안정된 다음에야 구할 수 있겠군요. 의원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는 정작 개척 초기인데 말입니다.”
“그래도 꾸준히 구해보겠습니다. 억지로 빚을 지게 해서라도 구하겠습니다.”
“그런 무리는 하지 마세요. 불행해진 사람이 원한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이민호가 말은 그렇게 했어도 내심으로는 정말 강압적으로 끌고 오고 싶은 직종이 의원이었다.
“민호야! 보통은 자갈밭이나 모래밭보다는 개펄에서 나온 해산물이 더 맛있다마는, 이 시커먼 갯벌 해삼은 좀 아니지 않느냐? 차라리 제주도에서 나는 홍해삼이 훨씬 맛있다.”
“아버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소비자가 왕, 아니 정승입니다. 명나라에서는 검은색 흑해삼을 더 높이 쳐줍니다.”
사실 이민호는 해삼을 딱히 맛있는 해산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멍게나 해삼이나 다 같이 포장마차 싸구려 안주거리일 뿐이었다. 그러나 해삼은 상어지느러미, 전복과 함께 중국인들에게 바다의 세 가지 보물(三寶)이라 불렸다.
어느 시대든 비싼 물건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맛이나 품질보다는 문화 코드와 유행이 더 중요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 흑해삼이 더 비싼 까닭을 알 수 없었다.
“혹시 어린 놈 자지가 빨갛고 어른 자지가 까매서 흑해삼이 더 비싼 거냐?”
“음. 아주 그럴 듯한 이유 같습니다.”
“너 아직 빨갛지?”
“예. 아버지도 이 나이 때는 그러셨을 걸요?”
“자주 하면 금방 까맣게 변한다. 경험담이다.”
그 동안 부친이 건해삼을 꽤 많이 준비해두었다. 바닷가 평사리에 해삼을 싣고 온 배들이 진을 칠 정도였으니 양은 충분히 많았다. 홍삼이나 해삼이나 건조기술 축적이 중요하지 조선에서 대량으로 생산해서 중국에 가져가 판매할 생각은 아니었던 이민호는 좀 놀랐다.
“바짝 말리는 일까지 다 해서 면포로 겨우 30필 들었다. 네가 준 면포가 너무 많이 남았다.”
“아버지가 다 가지세요. 저는 이걸로 명나라에 가서 폭리를 취하면 되니까요. 살 사람들이 값을 높이 쳐주겠다면 그렇게 받아야죠 뭐.”
“너 또 호구 소리 들을라. 만석꾼은 주변 눈치를 잘 살피고 아끼면서 베풀어야 한다.”
“호구 짓 좀 하면 어때요? 저는 만석꾼이 아닌데요.”
‘저는 백만장자가 아닙니다. 억만장자입니다.’라는 미국식 농담이 생각나는 이민호였다. 금 태환이 가능한 20세기 초에 10억 달러를 가졌다면 정말 어마어마한 재산가였다. 명나라에서 미곡과 비단을 제외한 수많은 품목 중에서 해삼과 소금 시장이 꽤 큰 편이므로 이민호는 이 두 가지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억만장자의 꿈을 이룰 생각이었다.
짐을 싣고 사람들을 태운 다음 소포를 떠났다. 저번과 같은 항로를 잡아 나가사키로 향하는데 남풍이 자주 불어 항해 속도가 많이 떨어졌다. 보통 계절풍을 이용하려면 1년 단위로 기다려야 하지만 이민호는 소들을 좀 더 고생시켜 역풍을 극복했다. 이민호는 이번 상행이 끝나면 소들에게 두부 콩물을 실컷 먹여줘야겠다고 결심했다.
이 시대에 동아시아의 바다를 누비는 상인이라면 비단 판매보다는 금은을 교환하는 재정거래가 훨씬 많은 이득을 남긴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비단이라도 판매물량에는 한계가 있고 판매기간도 오래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금과 은은 아무리 많은 물량이라도 비교적 짧은 시간에 교환을 마칠 수 있었다. 시간과 비용을 감안하면 상품판매보다 재정거래가 나았다.
그러나 국제항인 나가사키에 입항하는데 달랑 금괴만 들고 갈 수 없어 이민호는 남만인들에게 비단을 팔았다. 남는 비단은 겐타로에게 다 넘기고, 그의 도움을 받아 금과 은의 교환도 마쳤다.
저번 거래에서 담보로 맡아놓았던 크루자도 은화도 두아르테라는 포르투갈 상인이 은으로 바꿔갔다. 마카오까지 열심히 뛰어갔다 온 두아르테에게 옥 도자기 찻주전자와 찻잔, 찻잔받침까지 선물로 주었다. 두아르테는 그 비싼 것으로 도저히 홍차를 못 마시겠다고 울상을 지었다.
“니시무라 씨. 이걸 팔아주시겠어요?”
“흐에엑! 이건 혹시, 호랑이 가죽, 호피 아닙니까!”
표범 가죽은 조선에서 수출금지 품목이었지만 호랑이 가죽은 수출에 제한이 없었다. 겐타로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호랑이 코털을 살짝 만졌다가 얼른 물러섰다. 생긴 것은 전혀 딴 판인데 행동은 딱 원숭이라서 이민호가 속으로 웃었다.
“이런 귀물은 오랜 시간을 두고 제대로 된 주인을 찾아주어야 합니다, 주인님.”
가장 큰 호피는 경상도 산청의 착호갑사가 잡은 것을 싸게 사서 같은 지역 갖바치에게 맡겨 잘 무두질하고 시간을 들여 세심히 다듬은 것이었다. 갖바치의 실력이 좋았는지 상품 호피가 나왔다.
조선에서는 호랑이가 흔해서 호피 값을 아주 높이 쳐준 것은 아니었다. 왕실에 재고가 많아 중국 사신에게 선물로 몇 장씩 주고 문무관들에게도 수시로 상으로 내려줄 정도로 흔한 편이었다. 가격은 15세기 중엽에 면포 20필이었는데, 16세기 말에 폭등해 면포 400필로 올랐다. 그러나 호랑이가 살지 않는 일본에서는 호피 가격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조선에서는 호피를 쉽게 구할 수 있으니 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대호의 가죽 상품 하나, 중품 하나, 중호의 가죽 중품 하나입니다.”
“일본에서는 다릅니다, 주인님. 큰 다이묘의 영지에 연통을 넣어보겠습니다. 다음에 주인님이 오실 때까지 거래를 마치도록 하겠지만 워낙 귀물이라서 더 늦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카토라 님이나 도라노스케 님처럼 이름에 호랑이가 들어가는 다이묘들에게 연락해 보겠습니다.”
이민호는 남자한테 주인님 소리 들으니 정말 짜증났지만 미카의 아버지이며 충성스런 신하인 겐타로 앞에서 함부로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도라노스케라면 가등청정인 가토 기요마사의 어릴 때 이름으로 기억이 났다.
배에 쌀을 절반 정도 실어서 남는 공간이 별로 없었지만 구리를 최대한 적재했다. 유황도 은근슬쩍 몇 가마니 정도 사서 실었다. 거울을 팔아달라는 상인들의 요구가 많다 해서 겐타로에게 거울을 넘기고 명나라로 수출하지 못하도록 조금씩 물량을 풀라고 지시했다.
단 하루 만에 거래를 마치고, 젊은 남녀에 비해 잘 안 팔리는 가족 단위의 일본인 노예들을 500명을 배에 실었다. 겐타로가 조사한 노예 명세를 보니 몇몇은 직공이고 나머지 대부분은 농민들이었다.
덕택에 대만 땅에서 쌀농사를 짓는 일은 쉽게 해결될 것 같았다. 일본은 봄에 건조하지 않은 지역이므로 오래 전부터 이앙법을 활용하고 있었다. 건앙법(乾秧法)이라 해서 메마른 지역에서도 모내기가 가능한 농업기술도 갖고 있었다. 태풍이 자주 부는 땅에 사는 사람들이라 치수에도 능해서 이 시대에는 일본 농민들의 생산성이 조선과 명나라보다 훨씬 높았다. 벼 종자를 몇 가지 구해서 배에 실으니 이민호는 아주 든든했다.
겐타로가 일본의 축성기술자 집단을 소개해줘서 같이 배에 태웠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건설회사인 곤고구미(金剛組) 만큼은 아니더라도 일본 천수각과 성곽 건설에 있어서는 알아주는 집단이라고 했다.
화약시대가 되면서 수직에 가까운 일본식 성곽은 장기적으로 볼 때 오히려 불리했다. 하지만 입구와 통로를 미로처럼 설계하는 왜성의 축성방식은 받아들일 만했다. 천수각도 조선의 장대와 달리 실전 전투용이라 왜성의 특성 몇 가지는 새로 지을 궁성에 적용시킬 예정이었다.
준비를 모두 마치고 나가사키를 떠나 대만으로 향했다. 항해에서 나침반을 활용했으나 해도는 이민호의 기억을 바탕으로 예전에 대충 만들어두었다. 정확한 위도와 경도를 몰라 남서에서 북동 방향으로 길게 이어진 류큐제도를 따라서 항해하기로 했다.
류큐, 오키나와는 이민호가 가짜 나라를 세울 아이디어를 제공한 곳이었다. 사쓰마번이 1609년 류큐왕국을 정복했으면서도 대외적으로 숨기고 19세기 말까지 300년 가까이 허수아비 왕국을 유지했다. 실제 통제는 일본 막부와 사쓰마번이 하면서 책봉은 명나라, 또는 그 후의 청나라에서 받게 한 것이다.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와의 조공무역이 금지되자 류큐를 통해 일본 지배층에게 필요한 사치품을 수입하기 위해서 이런 꼼수를 동원했다.
“이 섬이 류큐국의 수도 나하가 맞긴 한 것 같다. 한데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는데?”
“저기 배가 옵니다. 복장이 다른 것을 보니 아마 관리가 탄 것 같습니다. 제가 중국어와 일본어로 교섭을 시도해볼까요?”
“오! 그래. 잘해봐라.”
계복이 나서주자 이민호는 당연히 고마웠다. 계복이 목을 가다듬더니 중국어로 크게 소리를 질렀다. 아직 산업혁명 시대가 아니라서 삶아먹을 기차 화통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배는 해중국의 사신선이오. 여긴 어딥니까?”
“류큐의 우치나 섬입니다.”
“저기 왕궁은요?”
“나하의 슈리성입니다. 저, 미안하지만 쇼에이 국왕전하께서 붕어하셔서 지금 국상 기간이라 손님을 받기 곤란합니다. 모처럼 와주셨는데 죄송합니다.”
류큐는 중국과 조선, 일본은 물론 동남아 각국과 무역관계를 맺어 아시아 바다의 가교역할을 했다. 15세기에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네덜란드와도 교역을 하여 최대로 번성한 시기였다. 그러나 1540년대에 포르투갈이 동아시아의 무역에 본격적으로 끼어든 다음부터 급속히 쇠퇴해 1570년대부터는 거의 중개무역지 역할을 하기 어려운 상태로 몰락했다.
거절을 당한 계복이 어쩔 줄 모르기에 이민호가 나섰다. 계복에게 이런 일은 처음이니까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당황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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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중에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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