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ire of the Warm Sea RAW novel - Chapter 45
* 45화 *
“너는 말도 제대로 못 꺼낸 채 거절당하고 나서는 당황해서 아무 생각도 못하는구나. 상행이든 전쟁이든 미처 예기치 못한 상황이 자주 발생할 테니 그럴 때마다 흔들리지 말고 침착하게 대응할 생각을 해라.”
일단 계복에게 가르침을 내린 다음 이민호가 나섰다. 그 사이 계복은 어이없다는 듯이 이민호를 쳐다봤다.
“우리 해중국 사신들은 붕어하신 선왕 전하께 조의를 표하고 싶소. 우리가 이웃나라 사신으로서 미리 해둔 약속은 없었지만 일단 비보를 접한 이상 궁궐을 방문해 조문을 표하는 것이 예의일 것 같소. 우리 해중국 사신단을 조위사 겸 새 국왕전하의 즉위 축하사절로 받아들여주겠소?”
“높은 분들께 물어볼 테니 강 하구에 들어가 부두에 배를 대고 기다리십시오. 하지만 배에서 내려서시면 절대 안 됩니다.”
“알겠소. 다녀오시오.”
젊은 관리가 탄 작은 배가 빠르게 강 하구로 향했다. 외륜선 네 척이 그 배를 따라 폭이 꽤 넓은 물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관리가 탄 배를 놓쳤다 싶었는데 그 관리는 어느새 부두에서 배를 내려 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 사이 외륜선 네 척이 차례로 부두에 접안했다. 이 넓은 부두에 작고 낡은 어선 몇 척만 정박해있어서 마치 한적한 갯마을을 연상케 했다. 주변에 흐느적거리며 걸어 다니는 사람들 움직임에 도대체 매가리가 없어 답답했다.
류큐인들은 중개무역으로 나라를 지탱했던 사람들답게 원래 굉장히 사교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나라가 쇠하는 중에 국왕까지 붕어하자 사회분위기가 전반적으로 가라앉고 소극적으로 변한 것 같았다.
“선물로 바칠 물건하고 옷 좀 챙겨라. 예복 가져왔지? 일단 정복을 입고 궁성에 들어갔다 가 국왕을 알현할 때만 예복을 입자.”
“선물은 뭘 챙겨야 합니까?”
이런 일은 사실 처음이라 이민호도 조금 덤벙거리다가 작은 실수도 했다. 국왕에게 진상할 백자 하나를 살펴보다가 손에서 놓쳐 깨뜨린 것이다. 이민호는 억대 골동품을 깨뜨린 줄 알고 깜짝 놀랐지만 계복은 도자기 가격을 알고 있어서 별로 놀라지 않았다. 겨우 며칠 전에 도공이 만들어낸 백자는 현대 가치로 억대도 아니고 골동품도 아니었다.
한참 지나 관리가 돌아왔는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조문하고 축하하겠다는데 류큐국에서는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다만 이민호가 이끄는 사신단이 실체가 없는 국가라는 게 문제였지만 류큐국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다.
이민호가 계복과 함께 배에서 내려 젊은 관리와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눴다. 한국 사람하고 일본 사람의 딱 중간 정도 얼굴에 약간 가무잡잡한 피부가 이 젊은 관리에 대한 이민호의 인상이었다.
“해중국에서 오신 조위사 겸 축하사절단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슈리성 객사에 모시겠습니다. 국왕전화 알현은 내일 오전으로 정해졌습니다. 그 사이 푹 쉬십시오.”
“고맙소.”
의외로 빠른 결정이 나자 이민호와 스무 명 정도가 선물꾸러미를 들고 내렸다. 이민호와 계복을 제외하고 열 명은 호위 역할을 맡아 소총을 든 간수군, 열 명은 일본인 노예로서 짐꾼이었다. 이민호와 계복이 화려하게 치장한 전마를 타고 대로를 걷자 류큐 백성들이 집 밖으로 나와서 구경했다.
객사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쉬는데 관리들이 들어왔다. 늙은 관리들은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이민호에게 여러 가지 안 좋은 나라 사정을 말했다. 정상적인 외교관이라면 외국 사신에게 자국의 나쁜 사정은 말하지 않는 법이지만 이들은 정상에서 좀 벗어났다. 한 번 쇠락하기 시작하자 역대 류큐국왕들이 무슨 수를 써도 방법이 없고 수십 년 넘게 불황이 계속되다 보니 이제는 관리들은 물론 백성들도 아예 포기한 것 같았다. 이민호도 이들의 사정에 깊이 공감하며 걱정해주었다.
그러나 한숨만 쉬고 있을 수는 없어 이민호는 관리들과 함께 즉위 축하 진상품의 목록을 작성했다. 이민호가 갑작스럽게 와서 제대로 된 준비가 없을 줄 알았는데, 조선 백자와 처음 보는 우윳빛 본차이나, 비단 등의 아름다움과 품질에 류큐국 관리들이 깜짝 놀랐다.
“아아! 정말 대단한 보물들입니다. 제가 젊었을 때 명나라와 일본을 다녀온 적이 있었지만 이런 보물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나라 사정으로는 이에 걸맞은 회사품을 마련할 길이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순수하게 조문과 축하의 의미로 바치는 것이니 회사품에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웃 나라인데 어려울 때 서로 도와야지요.”
대만 원주민 족장 아들과 부친의 친우 분에게 호구 인증을 받은 이민호다운 대답이었다. 그리고 삼별초에게 영향을 받았다느니, 홍길동이 세운 율도국이라느니 하는 이야기를 자주 들은 이민호에게 류큐는 첫 인상부터 호감을 주는 나라였다. 1591년 임진왜란 직전에 류큐국에서 명나라에 진주사(陳奏使)를 보내, 일본의 음모로 인해 조선에 의구심을 가졌던 명나라 황제의 의심을 지워주기도 했다.
“이웃 나라라고 하셨는데, 정확한 위치가 어디입니까?”
“복건성 앞바다 대만 섬 북단에 나라를 새로 세웠습니다. 국호는 해중국이라 합니다.”
“아아! 나가사키에서 거울을 판 사신이시군요. 소식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가까운 곳에 새로 나라를 세우셨군요.”
“이번에는 거울을 안 가져왔습니다. 다음에 올 때 바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만 자꾸 죄송스러워집니다.”
“염두에 두지 마십시오. 서로 도웁시다.”
잘하면 건국을 하자마자 우방국을 하나 얻게 될 것 같아 이민호는 내심 무척이나 기뻤다.
다음 날 오전 이민호는 수하들과 함께 슈리궁 객사에서 출발해 정전으로 향했다. 아주 새빨간 중국식 3층 건물인 정전 앞에 당나라나 삼국시대와 비슷한 복장을 입은 신하들이 양 쪽에 길게 늘어서 있었다. 신하들의 머리 장식이 멋지고 다들 빨개도 아주 새빨간 옷을 입어 이민호 입에서 빨갱이 드립이 절로 나올 뻔할 정도였다.
오랜만에 외국 사신이 방문해서 그런지 국왕의 친위 호위 무사들이 많이 당황한 것 같았다. 그들은 이민호 호위병들에게 무기를 잠시 맡겨두라고 감히 청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민호와 계복을 비롯한 열두 명이 무장한 채 그대로 옥좌 앞에 서게 되었다. 이민호는 나중에 이것을 알고 사죄했지만 한순간 힘의 우열이 드러난 순간이었다.
이민호 일행은 유럽식 군복과 비슷한 예복을 입었는데도 서양 여러 나라 사람들을 이미 봤던 류큐 사람들이라 크게 놀라지 않았다. 대신들은 칼 대신 부채를 허리에 꽂고 다녔는데 어제 설명 듣기로는 평화와 우호선린을 상징한다고 했다.
정전 안쪽 옥좌에 앉은 국왕은 30세 정도의 깡마른 남자였다. 착하고 똑똑해 보이는데 병색이 완연한 그런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옥좌 뒤에는 한자로 중산세토(中山世土)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류큐국이 3국으로 나뉘어있던 통일 전의 왕국 이름이 중산국이었다. 류큐국왕이 조선에 국서를 보낼 때는 유구국 중산왕으로 보내기도 했다.
이민호가 정전 앞에 서자 나이가 아주 많은 신하가 이민호 일행을 소개했다. 일본어와도 다른 류큐어로 뭐라고 떠들어서 이민호는 알아듣지 못했다.
“이 대인. 명나라 복건성 앞 대만 섬에 새로 생긴 해중국 사신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다음에는 해중국 사신들이 국왕전하께 경하의 절을 올릴 차례입니다.”
대신이 중국어로 통역해준 다음 다시 류큐어로 뭐라 외쳤다. 이것은 어제 연습해서 이민호는 물론 호위병들도 알아들었다.
“해중국 사신들이 국왕전하께 절을 올립니다. 사신단 일배, 이배, 삼배, 사배. 사신단은 이제 무릎을 펴십시오.”
이민호가 절을 네 번을 하고서야 절차가 끝났다. 이민호가 정사, 계복이 부사 역할을 맡아 한 발짝 뒤에서 같이 절하고 일어섰다. 그 뒤에 호위병 열 명도 아닌 밤중에 날벼락을 맞아 같이 절을 해야 했다.
이제 말을 해도 되는 순간이었다. 이민호는 어제 밤새도록 외웠다가 아침에 까먹고 다시 외운 말을 어전에서 크게 외쳤다. 류큐에 도착한 이후 이민호는 계속 중국어만 썼다.
“태조 쇼엔왕의 고손자이시며 3대 국왕이신 쇼신왕의 장남 쇼이코 님의 증손자로서 류큐국의 7대 국왕에 오르신 쇼네이 국왕전하의 즉위를 저희 해중국 사신들은 해중국 국왕전하를 대신해 성심을 다해 경하드리옵니다.”
이민호가 잠시 목청을 가다듬은 다음 커다란 체구에 걸맞은 중후한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면서 미리 준비한 문장을 읊었다. 그래봤자 이민호는 아직 변성기를 지나지 않았고 수염도 나지 않아 마치 어린 내시 같은 목소리였다.
“류큐국은 남해의 승지(勝地)에 위치해 삼한(三韓)의 빼어남을 모아 취하고, 대명(大明)과 일역(日域)을 보차순치(輔車脣齒)로 삼아 서로 의존하고 있습니다. 류큐는 그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난 봉래도이니, 배를 타고 만국의 가교가 되어 이국의 산물과 보물이 온 나라에 가득 차게 되길 천지신명께 기원합니다.”
“크흑! 고맙소. 만국진량의 종에 새겨진 명문을 읽으셨구려. 우리 조상님들은 그리 당당하셨는데, 이 못난 후손은 이렇게 시들어 죽어가고 있소. 당과 남만의 보물선들은 더 이상 오지 않고 시마즈 가문의 해적선만 가끔 들러서 우리가 아직도 살아있는지 확인하고 있소.”
이민호는 어제 밤 슈리성 안쪽에 위치한 종각에서 사람 크기 정도의 아담한 종을 볼 수 있었다. 희미한 달빛의 도움을 받아 음각된 명문을 읽었는데 뜻밖에 첫 문장에 조선을 뜻하는 삼한이 들어있었다.
어전에서 이민호가 읊은 것은 1458년 주조된 만국진량의 종에 음각된 명문 중 첫 문장이었다. 만국진량(萬國津梁)이란 세계 만국의 나루터와 다리라는 뜻으로 중개무역을 영위하며 번창하던 당시 류큐의 이상적인 역할을 뜻했다.
이어서 이민호가 국서를 바쳤다. 어제 밤에 부랴부랴 만든 엉터리 국서였고, 류큐 국왕과 대신들도 대충 눈치 챘지만 뭐라 항의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어서 진상품을 전시하는 시간이었다. 늙은 신하가 목록을 읽을 때마다 조선백자와 옥 도자기라 불리는 본차이나 접시 세트, 중국제보다 좋은 비단, 빨갛게 익은 고추, 하얀 소금, 조선 면포, 유황, 금괴와 은괴 등 한중일 삼국의 대표적인 상품들이 국왕 앞에 진열됐다. 대신들이 탄식하는 소리가 연신 흘러나왔다.
“가장 비싼 보물을 여기서 따로 진상하겠습니다.”
이민호가 무릎을 꿇고 도자기에 넣은 홍삼 세 뿌리를 바쳤다. 환관이 대신 받아 옥좌에 전하자 국왕이 깜짝 놀랐다.
“이것은 대명 황실에서만 드실 수 있다는 조선국 홍삼 아니오?”
“조선국에서 난 홍삼이 맞습니다, 전하.”
“고맙소. 정말 고맙소. 하지만 이미 국운이 쇠해 진상품에 걸맞은 회사품을 내릴 수 있을지 자신이 없소. 사신은 상관없다 하셨지만 회사품을 내리지 않는다면 손님에게 예의를 차렸다고 할 수 없소.”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하. 저희 해중국과의 우호가 국왕전하께서 내리시는 가장 소중한 회사품이 될 것입니다.”
그 동안 외국 상인들에게까지 무시당했던 류큐 국왕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이민호는 류큐 사람들을 우방국으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그대 나라의 국왕전하에 대해 말씀해주시겠소?”
“해중국의 국왕전하께서는 조선국의 둘째 왕자로서 부왕의 명을 받들어 성인의 교화가 미치지 않는 대만 땅에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지금은 조선에서 데려온 백성 3만, 일본인 노예 1만, 원주민 5만을 거느리고 계시지만 국운이 욱일승천하고 있어 조만간 대만 섬 전역을 정복해 교화를 하실 계획이십니다.”
“훌륭하오. 내게도 그럴 기회가 온다면 좋을 텐데 말이오.”
해중국의 국세를 심하게 과장했으나 이민호는 외교 현장에서는 적당히 과장도 하고 그러는 거라고 생각하며 넘어갔다. 류큐국 사람들도 해중국은 듣도 보도 못한 나라이니 뭐라 트집 잡을 것도 없었다.
류큐는 앞으로 광저우나 항저우-해중국-일본으로 가는 경로에서 중요한 중간기지 역할을 맡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게다가 류큐는 명나라에서 책봉을 받고 2년 1공을 하는 명목상의 명나라 제후국이었다.
이민호는 류큐국이 가진 조공무역의 권리에 얹혀 많은 이익을 얻어낼 계획을 세웠다. 물론 류큐도 일방적으로 착취당하지는 않게 충분히 배려할 생각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