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ire of the Warm Sea RAW novel - Chapter 46
* 46화 *
알현을 마치고 오후에 이민호는 계복과 간수군들을 데리고 궁궐에서 나와 나하 시내를 구경하고 있었다. 아열대 지역이라 그런지 시장 노점에 쌓인 과일과 채소가 굉장히 이국적으로 생겨 촌놈 계복의 시선을 확 잡아끌었다.
“도련님. 같은 바닷가인데도 해중국 풍경하고 또 다르네요.”
“해중국은 그나마 대륙에 가깝고 여긴 완전히 아열대의 섬이니까.”
정확히 구분하면 류큐 북쪽은 온대, 남쪽 일부는 열대지대였다. 위도로만 보면 대만이 더 남쪽에 위치하는데도 바다 중간에 있는 류큐가 난류의 영향을 받아 더 더웠다.
이민호는 시장 노점에서 특이하게 생긴 파란 색의 채소를 구입했다. 모양이 오이와 가지의 중간 정도로 생기고 겉에 돌기가 많은 고야라는 식물 열매였다. 이민호 일행을 따라온 통역이 설명하기로 류큐 백성들이 좋아하는 야채로 쓴 맛이 난다고 했다.
이민호는 오돌토돌 돌기가 난 이것을 가마솥에 푹 찐 다음에 말려서 청해삼이라고 속여 명나라에 팔면 어떨까 하는 망상을 했다. 생긴 것이 해삼과 많이 닮았다.
“이놈들은 또 뭐야? 얼씨구? 꼴에 철포도 들고 다니네?”
투박한 일본어를 쓰는 사무라이와 병졸들이 이민호 일행을 가로막았다. 큐슈 남쪽 시마즈 가문의 영지인 사쓰마에서 온 사무라이 두 명과 병사 10여 명이었다. 통역으로 따라온 류큐국 하급 관리가 덜덜 떨었다.
역사적으로 침략은 몇 년 후에 했지만 사쓰마는 그 전부터 류큐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마치 한일합방 이전부터 일본인들이 대한제국에서 설치고 다닌 것과 비슷했다.
“이봐!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모르겠지만 얼른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거야. 류큐는 사쓰마의 속국이나 다름없으니까.”
사무라이가 자꾸 도발하자 앞으로 나서려는 계복을 이민호가 슬며시 잡아 제지했다. 지금은 외교관 입장이라 만약 외국인들과 싸움이라도 일으키면 외교관례상 매우 좋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류큐는 사쓰마의 마수에서 스스로 벗어날 힘이 없으니 싸움이 나면 이민호 일행이 더 불리했다.
이민호는 모욕 받은 것을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다. 그러나 일본 무사가 계속 길을 막고 시비를 걸자 어쩔 수 없이 이민호가 나섰다.
“류큐는 중개무역으로 살아가는 평화롭고 작은 나라입니다. 무사님이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해 외국 사신이나 상인들을 쫓아낸다면 류큐를 노리는 귀국에 절대로 이득은 아닐 겁니다.”
“풋! 웃기고 있네. 어디 조그마한 섬나라 고관대작의 아들이 애비 힘으로 사신에 뽑힌 모양인데, 내가 하나 가르쳐주지. 이 세상은 오직 힘으로 움직인다는 것이 영원불멸의 법칙이야. 곱게 자란 놈은 모르는 거친 세상의 진리지.”
이민호는 무사가 모욕을 해도 꾹 참았다. 그러나 사무라이가 이민호를 본격적으로 도발하려고 작정했는지, 과일 행상을 하는 처녀의 멱살을 쥐어 잡아당겼다. 과일 여러 개가 땅바닥에 구르고 사무라이가 한 손으로 처녀의 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시장 상인들 사이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으나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이민호가 나섰다. 이민호는 권총을 무사 얼굴에 들이대고 일본어로 소리를 질렀다.
“여자에게서 손을 떼라! 당장 손을 놓지 않으면 쏘겠다.”
“풋! 내게 겁주려면 그 짧은 조총에 화승이나 채우고 불을 붙인 다음에나 그런 소리를 해라, 이 애송아! 총구에 화약과 총알을 넣어 다지고 화약접시에 화약을 놓고 화승에 불을 붙일 때까지 이 처녀가 살아있을 것 같아?”
– 쾅!
이민호는 그냥 쏴버렸다. 안 쏘면 그 뒤의 과정이 어떻게 진행될지 빤했기 때문이다. 사고 칠 작정을 하고 나선 사무라이 앞에서 괜히 시간 끌고 망설였다간 이민호와 수하들의 생명을 장담하기 어려웠다. 소란 과정에서 일본 병사 10여 명이 슬금슬금 움직여 이민호 일행을 반포위해 빠져나가지 못하게 포진한 것도 이민호의 신경을 거슬렸다.
사무라이의 이마에 작은 구멍이 뚫렸다. 그 사무라이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서서히 뒤로 넘어갔다. 목을 잡혔던 처녀는 너무 놀라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털썩 주저앉았다.
“끼요오오오~”
이번에는 다른 사무라이가 칼을 뽑아 이민호에게 달려왔다. 사무라이가 괴성을 지르며 칼을 높이 쳐들었다가 힘차게 내려베기를 시도하는 순간, 그리고 계복이 사무라이에게 곤봉을 휘두르는 순간 두 번째 총성이 울렸다.
이민호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쓰마의 무슨 류 검술을 쓰는 두 번째 사무라이도 정확히 이마에 총구멍이 뚫렸다. 총을 한 번 쏘고 나면 장전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바로 공격에 나섰던 사무라이는 6연발 권총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 탓에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사무라이 두 명이 모두 쓰러지자 사쓰마 병사들이 잠시 당황해 서로 얼굴을 쳐다봤다. 그러나 일본의 전국시대를 거치며 사납기로 정평이 난 사쓰마 병사들이 순순이 물러설 일은 없었다. 병사들이 창과 칼을 앞세우고 일제히 이민호와 계복에게 달려들었다.
– 탕! 타타탕!
당연히 이민호의 호위병으로 차출된 간수군들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사쓰마 병사 열두 명 중에서 여덟 명이 쓰러지는 사이 계복의 곤봉이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이민호는 이 순간에 여자 리듬체조를 떠올렸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계복의 몸매가 여자 리듬체조 선수들과 달리 너무 울퉁불퉁했기 때문이다.
“끼핫!”
마지막 살아남은 일본 병사가 칼을 높이 세우고 기합소리를 내자 이민호가 권총을 발사해 사살했다. 먼저 죽은 이들이 사쓰마 사무라이가 맞다면 병사들이 쓰는 검술도 위험했기 때문이다.
계복은 병졸 상대로 전혀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이민호에게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그러나 병사의 검술을 쉽게 봤다가 허망하게 죽은 조선과 명나라 장수가 임진왜란 때 한 타스가 넘었다. 사쓰마 무사와 병사의 첫 공격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는 속담이 일본에 있을 정도였다.
“이, 이거 어떻게 하죠? 하지만 잘하셨습니다. 차라리 잘됐습니다.”
통역이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이민호에게 칭찬을 건넸다. 이민호는 과일행상 처녀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일으켰다.
“몸은 괜찮소?”
“괜찮아요. 살려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커다란 문제가 생길 것 같아요. 이들은 류큐를 노리는 사쓰마 무사와 병사들이에요.”
이민호가 중국어로 먼저 물었는데 과일행상 처녀가 즉각 중국어로 대답했다. 신기하게도 류큐국이 중개무역지로서의 기능이 완전히 마비됐는데도 젊은이들에게 여전히 외국어 교육을 시키고 있는 것 같았다. 교육은 그 사회의 최후의 자산이라는 말이 맞았다. 이민호는 젊은 여자 행상이 국제관계를 논하며 말하는 수준이 장난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때 총소리를 듣고 시장의 치안을 맡은 관리가 병사들을 이끌고 달려왔다. 관리가 쓰러진 일본 사무라이와 병사들의 숫자를 급히 세었다.
“하나, 둘, 셋, 열네 명. 사무라이 둘에 병사 열둘. 전부 죽은 것을 확인했다. 부두로 간다. 따라와!”
관리는 어떻게 해서 분쟁이 발생했는지, 아니면 누가 먼저 공격했는지 이민호에게 묻지도 않고 병사들을 데리고 부두 쪽으로 달려갔다. 잠시 후 부두 쪽에서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얼굴에 피가 잔뜩 묻은 관리가 이민호 앞으로 달려왔다. 이민호는 그 사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해중국 사신님! 저놈들은 큐슈 사쓰마에서 정기적으로 파견되는 놈들입니다. 그 동안 이놈들이 사고를 일으켜도 배후가 두려워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사고가 났으니 노꾼들까지 다 죽여서 입막음을 해야겠지요.”
“류큐와 주변 섬들에 태풍이 자주 지나가니 저들이 조난당했다는 핑계를 대도 될 겁니다.”
“사쓰마까지 가는 길 중간 중간에 섬이 많아 조난당할 가능성은 적습니다만, 그런 기대라도 해야겠지요. 6월에 교대하니까 몇 달 정도 시간이 남았습니다.”
시장 치안 관리가 합리적인 판단을 해서 이민호는 이 관리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세상을 경영하기 위해 인재를 등용한다면 바로 이런 사람을 최우선적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민호가 계복을 쳐다보니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 웃었다. 이민호는 그저 한숨이 나왔다.
이민호는 슈리성으로 돌아왔다. 시장에서의 싸움 소식이 전해진 슈리성은 발칵 뒤집혀 있었다. 사무라이 두 명의 복수를 한다는 핑계로 사쓰마가 류큐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쳐들어올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러나 이민호를 책망하는 관리는 아무도 없었다. 이민호에게 정당방어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은 물론이고 백성을 구해줬다고 관리들이 감사 인사까지 해왔다.
욕 좀 먹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민호는 얼떨떨했다. 류큐국은 제법 좋은 나라였다. 만약 그 동안 사쓰마의 위세에 눌렸던 류큐 관리들이 겁에 질렸다면 이민호 일행을 잡아 가두거나 사쓰마에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류큐 관리들은 이민호 일행에게 행동의 자유를 제약하지 않고 어디든 갈 수 있게 허용했다. 이민호는 슈리성은 물론이고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이민호는 이번 일의 책임을 회피할 생각은 없었다. 만약 사쓰마에서 류큐에 쳐들어온다면 같이 싸울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곳에 계속 붙어있을 수도 없었고, 겨우 백여 명으로 사쓰마군을 상대하기도 어려웠다.
“도련님. 뭘 찾으십니까?”
“작은 섬인데 뭔가 돈이 될 만한 게 없어. 이 시대에 관광 사업을 할 수도 없고.”
이민호는 다시 시장으로 나왔다. 류큐는 돈 될 만한 것이 없는 나라인데 사쓰마의 침략에 대비해 국방예산을 많이 쓰라고 조언해봤자 미친놈 소리밖에 못 듣는다. 일단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어야 했고, 그 열쇠를 현장에서 찾기로 했다.
동아시아 바다의 한가운데에 있는 류큐의 위치 때문에라도 일본에 속하면 이민호로서는 매우 곤란했다. 빠른 시간 내에 류큐가 독립을 유지할 기반을 마련해주고, 해중국과 우호관계를 단단히 유지하길 원했다. 그 와중에 이민호가 돈을 벌 품목을 찾으면 더욱 좋고.
“도련님! 저런 과일을 팔면 어떨까요?”
“웬만한 과일은 수송 중에 다 썩어 나가서 위험해. 저건 파파야네. 류큐 고유종은 아니고 서반아 놈들이 들여온 모양이야.”
길가에 가슴 높이까지 오는 반쯤 휘어진 나무가 서 있었다. 이민호가 열매를 따서 칼로 상처를 내자 하얀 액체가 흘러나왔다.
파파야 효소를 정제한 다음 비누로 만들까 고민했으나 세안비누이므로 판로가 별로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중국 귀부인들이 살지도 모르니 파파야 과일 몇 개를 챙기고 씨도 구했다. 망고 열매와 씨앗도 많이 구하도록 했다. 어차피 이 시대에 과일은 유통하기 어려우니 대만에 심을 계획이었다.
“이 섬에서 유일하게 돈이 될 만한 것은 사탕수수인데, 대만이 넓으니 차라리 대만에서 재배하는 게 낫지.”
“좁은 섬인데도 돼지와 염소를 많이 키웁니다. 제대로 먹일 수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외국에 고기를 팔면 어떨까요?”
“사탕수수에서 설탕을 짠 나머지 줄기를 돼지에게 먹이는구나. 고기도 운반하다가 썩기 쉬우니 아무래도 해산물 쪽에서 찾아봐야겠다. 식사 때 보니까 이곳 사람들이 바다뱀 말린 것을 좋아하더라. 대하와 전복, 참치도 좀 잡는 것 같고.”
“흐익! 그 기다란 게 장어가 아니라 바다뱀이었어요?”
“배에 들어가면 다 똑같아.”
그런데 부두 쪽으로 가다가 호리병에 술을 넣어 파는 가게를 발견했다. 아와모리라 해서 쌀 증류주를 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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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너무 일찍 정한 것 같습니다.
한 편 더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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