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ire of the Warm Sea RAW novel - Chapter 47
* 47화 *
“계복이 너 술 좋아하니 한 잔 마셔라.”
“에이! 대낮에 술은 좀 그렇죠. 도련님 모시고 있는데요. 꼴깍.”
“마시라니까? 맛을 보고 좋은지 말해. 상품 품평을 해보란 소리다.”
겨우 열두 살인데도 이민호가 술을 마신 적이 꽤 많았다. 집안 제사만 해도 일 년에 열 번이 넘고 사창을 운영하다 보면 술자리도 자주 참석해야 했다. 그런데 이민호는 술 마실 체질이 영 아니었다.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 혼자 술을 다 마신 티를 냈다.
계복이 호리병 마개를 따서 살짝 한 모금 마시더니 계속해서 홀짝거렸다. 그만 마시라고 이민호가 손을 드는 순간 계복이 단숨에 들이켜 버렸다. 결국 한 병을 다 비웠다.
“오오~ 아주 괜찮습니다. 쌀을 증류해서 만든 술 같습니다.”
“그래? 괜찮다니 잘 됐다. 이 섬에서 깨끗한 물이 나오니까 술이라도 만들어 팔게 해야겠다. 쌀 증류주라면 일본인들이 좋아할지도 몰라. 그런데 여긴 땅이 너무 좁아서 이모작을 하더라도 쌀값이 비싸잖아? 안 될 거야, 아마.”
땅이 좁으면 어떤 상품이든 다른 지역과 경쟁하기 곤란했다. 이민호가 고민하면서 계복과 함께 터벅터벅 걷다가 논에서 농부가 소를 몰고 일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계복아! 활을 뭐로 만들지?”
“흑각궁은 물소 뿔로 만든다는데 외국에서 수입한다니까 본 적이 없습니다. 어? 저게 물소인가요? 까만 소, 까만 뿔. 뿔이 엄청나게 크네요.”
류큐에서 키우는 소의 뿔은 남아시아 야생물소보다 굵었고 아메리카 들소보다 길었다. 명나라를 통해 수입한다는 남만의 물소 뿔이 바로 저것이라고 이민호는 판단했다. 혹시나 다른 품종이라면 뿔의 탄력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뿔의 크기 자체는 충분했다.
“저 쇠뿔을 수입하면 어떨까?”
“저게 진짜 물소 뿔이라면 무관들이 아주 좋아할 겁니다. 명나라를 통해 남쪽 나라에서 나는 물소 뿔을 수입해야 하는데 중간에 명나라가 자꾸 막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우나 몽골 소뿔을 써서 향각궁을 만드는데 흑각궁보다는 약하다고 합니다.”
명나라가 1회 교역에 물소 뿔 매매를 50개로 제한한다거나 해서 조선에서는 흑각궁을 만들 물소 뿔이 항상 부족했다. 명나라와 조선이 사대관계이라 하나 명나라는 꾸준히 조선의 군사력을 견제한 셈이었다. 명나라가 다른 나라와 달리 특별히 조선에 1년 3공, 조선 중기부터 1년 4공을 허락해 많은 경제적 이익을 주었음에도 물소 뿔만큼은 예외였다.
그래서 조선은 황소 뿔로 향각궁을 만들거나 물소 뿔을 적게 사용하는 식으로 극복하려 했다. 그러나 재료부족의 한계는 활의 성능 저하로 이어졌다.
“맞아. 활 탄성이 약하면 활을 쓰는 의미가 없지.”
“그런데 이 작은 땅에서 물소 뿔이 나봤자 얼마나 나겠습니까? 기르는 데도 몇 년씩 걸리니 큰돈이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유구에서 남쪽 여러 나라에서 수입한 것을 우리가 더 비싸게 사주면 되는 거야. 그럼 서로 큰 도움이 된다.”
이민호가 통역하는 관리에게 물소 뿔을 열 개 정도 사달라고 부탁했다. 소량이지만 명나라 조공품 목록에 속해 있어서 가격이 생각보다 싼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조선에서 유통되는 가격보다는 훨씬 싸서 수입할 가치가 있었다.
“도련님! 그것보다는 저 소를 사서 조선에서 키우면 되지 않습니까?”
“더운 곳에 살던 동물이라 조선에서는 겨울에 다 얼어 죽을 거야.”
“그렇군요. 어쩔 수 없네요.”
“더 살 게 없을까? 조선에 은이 넘쳐나면 곤란해. 지금은 아니라도 조만간 은값이 폭락해 물가가 올라 백성들 생활이 어려워질 거야. 은 가격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수입할 게 많을수록 좋아. 길게 봐서 미리 준비해야지.”
“이상하게 도련님은 비싼 은을 들여 외국 물건을 사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귀한 은이 외국으로 빠져 나가면 조선 전체의 부가 줄어들지 않겠습니까? 비록 어느 정도 은값이 떨어진다 해도 외국에 물건을 계속 팔아 은을 많이 쌓아두면 유사시에 대비할 수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계복의 말은 일반적인 현대 한국인이 외환보유고에 대해 가진 생각과 비슷했다. IMF 사태를 거치며 놀란 국민들은 외환보유고가 높을수록 좋다고 여겼다. 그러나 여러 가지 생각해볼 게 많았다. 특히 원화 환율을 낮춤으로써 수출경쟁력을 높이는 정책이 일반 국민에게 왜 손해인지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은을 쌓아둬서 뭐하게? 그 은으로 외국에서 물건을 사서 백성들이 먹거나 쓰면 좋은 거지. 비단을 만들어 외국에 파느라 명나라 백성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알아? 뽕나무 심어 관리하고 뽕잎을 따서 누에에게 먹이고 월령에 따라 옮기고 고치에서 실을 뽑아 물레에서 실을 잣고 비단 천을 짜고 염색하고 이고지고 가서 팔고. 그 고생을 했는데 달랑 은 몇 냥 남아. 그저 말랑말랑한 쇳덩이지.”
“으음. 그래서 비단이 비싸죠. 그래도 은이 값을 해주잖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 과정에 끼어들어 일해서 먹고 사니까 좋긴 한데 차라리 그 노동력으로 농사짓고 고기 잡으면 훨씬 더 잘 먹고 살 수 있을 거야. 최소한 외국에 팔지만 않는다면 비단 가격이 좀 더 내려가서 비단옷을 입는 백성들이 더 많아질 거야. 그게 전체 행복의 증가지. 물론 반대로 생각해서 국내 비단 가격이 높이 유지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가질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농사지을 땅은 줄어들겠지.”
“글쎄요. 장단점이 있겠지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시기 명나라는 은의 블랙홀이라 불렸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에서 착취한 은과 일본인들이 채취한 은 대부분을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중국에 갖다 주고 비단과 도자기를 사갔기 때문이다. 전근대 비단 무역을 두고 중국인 학자들은 역시 중국의 기술력이 세계 최고였다고 자랑한 반면, 서양인 학자들은 귀금속인 은을 통화로 사용하기 위해 수백 년 동안 많은 노동력을 낭비했으니 전반적인 국민복지의 하락이라 비판했다.
이때 유럽 각국은 은의 유출을 막기 위해 비단과 도자기에 대한 연구에 들어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으나 제품의 질적 차이는 여전히 남았다. 그 전에 중국에서 은의 과대평가로 인해 금이 꾸준히 유출돼 근세에 유럽이 금본위제를 시행할 기반을 갖췄다. 지금은 금과 은을 교환하는 재정거래로 두 배 이상의 이익을 거둘 수 있으나 100년 후에는 청나라의 은 가격이 국제시세와 비슷해졌다.
“그래. 무조건 한 가지만으로 판단하면 안 돼. 생각할 것은 많아.”
“다른 양반들은 그런 생각까지는 안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생각 안 해도 조선에서 편히 살 수 있으니까 거기까지 생각할 필요가 없겠지.”
어느덧 두 사람이 바닷가에 도착했다. 류큐는 경작할 토지가 적은 섬나라이니 땅보다는 바다에서 먹고 살 것을 찾아보는 편이 빨랐다. 슈리성은 태풍을 피하기 위해 섬에서 북쪽으로 치우쳐져 있어 이곳 바닷가도 북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니 너무 깊어서 시퍼렇다 못해 까만색이었다. 얕은 대륙붕에서 해산물이 더 많이 나는데 류큐제도 북쪽 지대는 경사가 급해 바다가 깊었다. 그러나 남쪽은 더 깊어 류큐제도를 따라 해구가 길게 이어졌다. 현대에 중국이 대륙붕 연장설을 들고 나와 류큐열도 바로 앞바다까지 중국 대륙붕이라 주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어물전을 구경하다가 통통하게 살이 오른 전복 값을 물어보니 꽤 비쌌다. 가난한 류큐인들은 일 년에 한 번 먹기 어려울 정도였다. 류큐 주변은 아열대 바다인데도 물이 차가운 편이라 전복이 잘 자란다고 한다.
“전복이 조선에서보다 더 비쌉니다.”
“명나라에 파는가 보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명나라 해안에서는 전복이 거의 안 잡힌다더라.”
“명나라 사람들이 좋다고 보이는 족족 다 잡아먹어 씨가 말랐나 봅니다.”
이민호는 호주에서는 20세기 후반까지 손바닥보다 큰 전복이 해변에 잔뜩 깔려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독도 해저 갈조류가 자라는 곳에도 자연산 전복 천지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보르네오 섬 동쪽에서 활동하던 마카사르 해적들은 호주에 가서 중국에 판매할 해삼만 잡았지 전복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 해삼 덕택에 호주 원주민들이 쌀을 먹고 술을 마실 수 있었다. 이민호는 아직 호주에 백인들이 들어오기 전이니 선점하기로 결심했다.
“도련님. 전복을 사람이 키우면 어떻습니까?”
“전복 양식이라. 미역이나 다시마가 빽빽이 자란 곳이라면 키우기는 쉬워. 아예 미역이나 다시마를 키워서 거기서 양식해도 되고. 하지만 최소 2년은 키워야 상품 가치가 있어. 가난한 사람들이 몇 년씩 키울 수 있을까?”
“그렇군요. 시설을 만들 자금을 빌려주고 몇 년씩 운영비도 대줘야겠어요.”
“어쨌든 전복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고민해보자.”
종묘인 치패생산이 좀 어렵긴 하나 저수조에서 2년 이상 밀생시키는 현대식보다는 치패 상태에서 미역이나 다시마에 부착시키는 방법이 쉬운 편이었다. 만약 전복을 말려 명나라 내륙지방 깊숙한 곳까지 진출시킬 수 있다면 이것은 유산상속 목록에 포함될 정도로 보물이 된다는 이야기를 부친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이민호는 전복 양식을 류큐에 권하고, 해중국에서도 전복 양식을 하기로 했다. 만약 명나라의 홍삼, 해삼, 전복, 소금 시장 중에서 단 하나라도 장악할 수 있다면 억만장자 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류큐에서 쌀 증류주를 일본으로, 양식 전복을 명나라로, 물소 뿔을 조선으로 보낸다. 으음. 그래도 좀 부족한데.”
이민호는 류큐를 위해 생산과 무역 방안을 구상했다. 물론 류큐에서는 지난 수백 년 동안 중개무역을 통해 더 많은 이득을 올렸겠지만, 앞으로도 포르투갈의 무역 개입 같은 갑작스런 상황 변화가 닥치면 꼼짝없이 불황에 빠져 모든 백성들이 가난에 시달릴 우려가 있었다. 그러니 류큐에서 직접 생산해서 외국에 장기적으로 판매할 특산품을 확보하는 것을 우선으로 삼았다.
중개무역이 잘 되더라도 무역을 통해 얻은 이득이 백성들에게 골고루 돌아간다는 보장도 없었다. 당시 유럽에서도 수출로 인한 이익은 귀족과 자본가가 독점하고, 귀금속 화폐가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백성들은 급등한 물가 때문에 살기 어려워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수출이 활성화되면서 일자리나 많이 생기면 좋겠지만 자본가가 적절한 임금을 주길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귀족과 자본가들은 가급적 저임금 구조를 유지하다가 나중에는 저렴한 외국인 노동력을 들여오거나 노예를 부리기도 했다. 이득은 귀족이 챙기고 물가상승 부담은 국민이 지는 방식은 불공평했다.
아메리카에서 은을 약탈하고 명나라에서 비단과 도자기를 수입해 스페인 귀족들은 흥청망청했지만 스페인 국민들은 옥수수를 주식으로 삼았다가 칼슘부족으로 인해 각종 질병에 시달리다 죽었다. 대항해시대의 또 다른 주역인 포르투갈 귀족들의 창고에서 은이 넘쳐나든 말든 상관없이 국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해외로 나가서 싸우다 죽고 조난당해 죽고 병에 걸려 죽었다.
최소한의 상품을 국내에서 생산해야 백성들이 살아남는다는 것이 이민호의 생각이었다. 한줌도 안 되는 왕족이나 귀족, 자본가들 대부분은 기득권을 지키는 것만 중요하게 여기고 국가의 흥망은 안중에도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이 시대 조선의 대신들이나 일본 다이묘들 정도라면 백성들 입장에서는 꽤나 훌륭한 편이었다.
이곳 류큐의 귀족들이 부패한 중국의 고관대작들에 비해서 낫다는 보장은 없었다. 당장 왕위 승계의 흐름만 보더라도 핏줄의 왜곡이 꽤나 많았다. 이민호는 슈리 궁성 안에서 벌어졌을 궁정암투를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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