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ire of the Warm Sea RAW novel - Chapter 48
* 48화 *
이민호는 계복과 함께 류큐 대신들을 만났다. 이들은 류큐가 몰락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정확한 원인은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적합한 대책이 나올 수가 없었다.
“류큐의 위치가 너무 남쪽, 또는 너무 북쪽에 치우쳐져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여기 이 지도를 보십시오.”
이민호가 기억에 의존해 대충 만든 지도라 류큐에서 보유한 지도와 비교해 그게 그거였다. 해안선 굴곡이 현실과 비슷하게 묘사돼 있고 나라나 항구 사이의 거리가 숫자로 제대로 표시된 류큐 지도가 오히려 더 정확한 편이었다.
그러나 이민호가 만든 지도는 여러 나라와 중요 항구도시의 상대적인 위치를 비교적 정확히 기록해 류큐 대신들이 신음소리를 냈다. 왜구들 앞에서 이 지도를 보여줬다면 그 즉시 지도를 빼앗기 위한 칼부림이 났을 것이다.
“지도를 보고 바로 알아챈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명나라와 일본이 감합무역을 하면서 광저우를 개항하고 류큐가 그 사이에서 중개무역을 할 때는 이곳이 가장 적합한 위치였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남만 무역선들이 일본의 위치를 정확히 몰라 이곳까지 와서 물화를 교류한 시대에는 류큐가 더욱 번성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남만 배들은 류큐를 거치지 않고 더욱 북쪽으로 올라가 일본과 직접 교역을 시작했고, 척계광에 의해 25년 전 왜구가 없어진 지금은 해금령이 해제돼서 광저우가 아닌 북쪽 항저우가 일본과의 무역항으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명나라는 왜구가 활동할 때마다 해금령을 숱하게 자주 내리고 왜구 진압이 된 다음에는 느슨하게 운영했다. 명나라의 국책이 국초부터 일관되게 해금령이었다 해도 일본 외의 다른 나라에게는 관대하게 운영했다. 심지어 왜구 때문에 해금령의 주요 대상이 된 일본조차도 무역을 철저히 막은 시기는 왜구가 활발히 활동하던 상대적으로 적은 기간에 불과했다. 명나라의 기본 무역정책이 조공무역이나 감합무역이라 해도 일본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사무역에 대해서는 적당히 세금만 받고 넘어간 경우가 더 많았다.
이 시대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네덜란드 배들이 중국 정부에서 발행한 감합부나 서류를 맞춰보면서 배 척수와 운항시기, 항로까지 허가를 받고 무역하던 시대는 절대 아니었다. 외국 배의 입항을 항구 몇 곳으로 제한한 원나라나 대외 무역항을 광저우로 단일화시킨 청나라와 달리 명나라 때는 사무역이 훨씬 자유로웠다. 심지어 닝보와 나가사키를 왕복하던 포르투갈 배들은 관에서 허가를 내주지 않은 밀수선인데도 항구에 자유롭게 상륙해 장사를 했다.
“간단히 말해 남만 배들이 항저우나 닝보(寧波)에서 나가사키나 히라도로 직접 가므로 더 남쪽인 류큐에 중간 기항할 필요가 거의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그럼 앞으로도 우리 류큐는 가능성이 없다는 뜻입니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습니다. 만약 일본과 명나라 남쪽 항구들 사이를 무역선들이 돌아다니면서 활발히 교역한다면, 그리고 여송과 섬라 등 남쪽 나라들이 직접 북쪽으로 올라와 일본과 무역을 한다면 이곳 류큐가 중간 기착지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해중국 사신께서는 나하가 교역항이 아니라 중간 기착지라고 자꾸 강조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가장 늙은 대신이 불만스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류큐인들도 이제 과거의 영광을 잊고 현실을 받아들일 때가 됐다는 것이 이민호의 생각이었다.
“그렇습니다. 주요 교역국들과 거리가 너무 멀어 앞으로도 류큐는 여러 나라 배들이 몰려와 거래를 하는 교역항이 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중국과 조선에 일본까지. 이 세 나라의 교역을 중개하기에는 너무 남쪽에 있고, 여송이나 섬라 같은 남쪽 나라들의 산물을 모아 거래하기에는 너무 북쪽에 치우쳐져 있습니다. 그러니 특산품을 만들어 파는 것이 가장 좋으며, 그 다음은 다른 나라의 필요에 응해 물품 운송을 해주는 것입니다.”
“과거의 영광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씀이군요. 냉정하지만 틀리지 않는 말씀입니다.”
“그렇게까지 부정적이지는 않습니다. 농우로 부리는 소의 뿔을 조선에 팔 수 있고, 사탕과 쌀술을 일본에 팔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복을 채취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양식을 한다면 류큐의 모든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살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몇 가지 산업을 진흥시키는 동시에, 남쪽 여러 나라에서 물화를 수집해 류큐에 집적한 다음, 명나라와 조선, 그리고 일본에 파는 방법이 있겠습니다. 그 전에 세 나라에서 필요한 물품이 뭔지 알아야겠지요.”
류큐에서 남만인들에게 중국 비단과 도자기를 팔아 엄청난 부를 쌓던 영광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이제 열심히 만들어서 팔아먹는 수밖에 없었다. 중국이 은본위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비단과 도자기, 차를 팔고 조선이 화약 제조에 사용될 유황을 구하기 위해 무역을 한다면 류큐는 굶어죽지 않기 위해 무역에 나서야 했다.
“비싼 물건의 중개무역에 남만인들이 끼어들었으니 이제 우린 싼 물건을 대량 운송해야겠군요. 그렇다면 예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바다로 나가야 합니다. 이국땅에서 병들어 죽거나 풍랑을 만나 불귀의 객이 되는 이들이 예전보다 더욱 많아지겠지요.”
“하지만 이대로 시간이 흐를수록 류큐왕국의 힘은 더욱 줄어들 겁니다. 사쓰마는 오래 기다리지 않고 류큐를 도모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으음. 고견에 감사드립니다.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우리 해중국이 류큐를 여러 모로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전복 양식은 약간의 기술이 필요하니 조만간 전수해드리고, 종묘장과 양식장을 만들 자금은 저희가 떠나기 전에 빌려드리겠습니다. 우리 해중국과 류큐의 우호를 유지한다면 저희에게 결코 손해가 아닙니다.”
“처음 국교를 맺었는데 이렇게 신세를 지는군요. 해중국을 위해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말씀을 해주십시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 하는데, 류큐 대신들은 마인드가 일단 돼 먹었다고 이민호는 기뻐했다. 류큐 대신들에게 부탁하려고 그 동안 입이 근질근질했는데 오래 참았다.
“그렇다면 대신님께 부탁이 있습니다.”
“뭐든지 들어드리라는 국왕전하의 하명이 계셨습니다. 말씀하십시오.”
홍삼을 우려낸 약을 드신 국왕의 병세에 차도가 있었다고 한다. 회사품도 안 받는다고 사양하고, 일본 사무라이와 병사들을 죽인 보상금까지 내놓자 류큐국 관리들은 미안해 죽으려 했다. 그런데 전복 양식장을 만들고 운영할 자금까지 대준다고 하니 대신들은 뭐라도 내놓아야 했다.
물론 사쓰마가 보상금만 먹고 떨어진다는 보장은 전혀 없었다. 이 사건을 기화로 사쓰마가 류큐를 침략할지도 몰랐다. 어제는 류큐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이민호가 지도를 그려 해중국의 위치를 정확히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이민호도 병력과 함께 항상 해중국에 체류하는 것도 아니기에 딱히 도와줄 방법도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귀국이 명나라 입조를 언제 하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류큐는 2년 1공을 허락받았는데 마침 다음 달에 조공사절단이 황도로 출발할 예정입니다.”
“그럼 조심스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해중국 옆에 고산국이라는 형제 나라가 있습니다. 귀국 신하들이 입조하실 때 해중국과 고산국이 세워져서 명나라 문물과 황제폐하의 덕을 숭모한다고 전해주시겠습니까?”
이민호는 욕심이 많았다. 항상 퍼주기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류큐왕국을 이용해 명나라 중심의 조공무역 체계에 들어가길 원했다. 이 체계에 포함된 국가는 올망졸망한 나라까지 해서 50여 국에 이른다.
전통적으로 조공무역이나 감합무역은 중국이 종주국임을 인정받으며 명목상 제후국들에게서 특산품을 받는 대신에 회사품을 내려주는, 몇 배나 마구 퍼주는 공적 무역이었다. 당연히 중국에서는 조공무역 규모를 제한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명목상 제후국들은 필사적으로 연공과 무역 규모를 늘려주기를 요구했다. 조선처럼 1년에 네 번이나 조공하는 특혜국도 있고, 가끔 왜구가 설칠 때마다 조공무역 체계에서 쫓겨나는 일본 같은 나라도 있었다. 조공무역은 호구 물주를 잡아 일정한 기간마다 대규모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므로 이민호는 바로 이 조공무역 질서에 편입되기를 원했다.
“해중국 사신의 부탁인데 당연히 들어드리겠습니다. 그런데 고산국은 어떤 나라입니까? 요즘 새로운 나라들이 많이 생기는군요.”
“고산국은 해중국처럼 페이퍼…… 아니, 대만 섬 서쪽 평원에 자리 잡은 작은 나라입니다. 그곳에서는 소금이 많이 납니다.”
“오오! 정녕 복 받은 땅이구려. 땔감이 충분치 않으면 소금 굽는 일은 꿈도 꾸기 어렵지요.”
아직 천일염전이 제대로 확산되지 못한 시기였다. 바닷가 섬에 살면서도 육지에서 소금을 사먹는 제주도 사람들처럼 류큐국도 소금은 명나라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고맙습니다. 그럼 상호방위 약조에 대해 논의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무엇이냐 하면, 해중국과 류큐국이 적국에게 침략을 당할 경우 서로 원군을 파병해 도와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어? 그럼 명나라가 해중국을 공격할 경우 우리가 원군을 파병해 천조와 싸워야 합니까? 조공국으로서 그건 매우 곤란합니다.”
“하하하! 그런 전쟁이 일어날 수는 없지요. 만약 명나라가 쳐들어온다면 우리 해중국은 얼른 항복할 것입니다.”
대만 원주민들도 지금까지 잘 막아냈는데 해중국이 막아내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군사력 차이보다는 대대로 중국 왕조 입장에서 대만이 별로 쓸모없는 땅이라는 인식이 더욱 결정적인 이유였다.
아직까지는 중국의 역대 정권이 대만에 욕심을 내어 침공한 적이 없었다. 다만 오나라가 이주(夷洲)에 종종 병력을 파병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나 그 이주가 대만이라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렇다면 사쓰마가 류큐를 침공할 경우 해중국이 원군을 보내 도와주신다는 뜻입니까?”
“예. 일본에서 전국시대가 끝났으니 사쓰마가 큐슈 북쪽 지방으로 더 이상 진출하지 못하고, 필경 남쪽으로 눈을 돌릴 것입니다.”
“이상하군요. 저희야 좋지만 이 약조로 인해 해중국이 얻는 이익은 무엇입니까? 약조한 당사국 한쪽이 일방적으로 손해만 본다는 것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일본에서 볼 때 류큐를 집어삼키고 나면 그 다음 목표가 바로 우리 해중국이기 때문입니다. 명나라는 더 이상 영토를 확장하려 하지 않으나 일본은 다릅니다. 해중국 땅에서 전쟁을 하느니 차라리 미안하지만 류큐에서 전쟁을 하는 것이 해중국에 피해를 덜 끼치는 길입니다.”
“이해하겠습니다. 류큐는 섬들이 일본까지 길게 이어져 있으니 우리가 일본 침략자를 막으면서 버티는 동안에 해중국의 원군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외국과의 약조는 국가 운명을 결정할지도 모를 막중한 사안이니 조정 회의를 거쳐 국왕전하의 윤허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평등한 조약은 없다. 조약이 체결된다면 해중국 군선은 무장한 채로 마음껏 류큐에 출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물론 류큐 군선도 해중국 해역에 무상으로 출입할 수 있겠지만 이민호는 당분간 중국과 대결할 이유도 능력도 없었다.
이민호가 이끄는 외륜선 네 척이 류큐의 수도 나하를 떠났다. 건강을 조금 회복한 국왕부터 대신, 일반 백성들까지 슈리성에서 부두까지 따라와 이민호 일행을 배웅해주었다. 국왕은 없는 살림에 선물까지 가득 안겨 주었다. 물소 뿔이 100개나 배에 실렸다.
고마운 마음이 든 이민호는 백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국왕에게 큰절을 올려 하직인사를 대신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의도적이었는데, 류큐 국왕에 대한 백성들의 충성심이 쭉쭉 올라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류큐에서의 일은 아주 잘 끝났고, 앞으로 할 일도 많이 남겨두게 됐다. 다만 사쓰마 병사, 무사들과 충돌한 일은 떠나는 이민호에게 불안감을 안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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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한 편 더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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