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ire of the Warm Sea RAW novel - Chapter 49
* 49화 *
9. 발전
나하를 떠나 점점이 떠 있는 섬들을 지나쳐 서쪽으로 이틀을 항해했다. 바람만 잘 맞으면 나하와 해중국 사이를 하루에 항해할 수도 있지만 역풍을 받고 가느라 속도가 나오지 않았다.
이민호는 남쪽 100리에 이리오모테 섬이 떠 있으니 북쪽 100리에 센카쿠열도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이리오모테 섬에는 옛날에는 사람이 살았는데 저번에 지나갈 때 확인해보니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였다. 일본 어느 만화에서 본 이리오모테 살쾡이가 떠오른 이민호는 잠시 침울해졌다.
“아차! 깜빡했다.”
꽤 큰 섬인 이리오모테에 사람들이 살다가 말다가 하는 이유가 있었다. 근처 섬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새로 정착해 잘 살다가도 어느 한순간에 몰살당하거나 인구가 확 줄어들기 때문이다. 열대지방에서 흔히 감염되는 말라리아 때문이었고, 망글로브 지역이 말라리아모기들의 천국이었다.
이민호가 배 네 척에 긴급 지시를 내리며 항로를 급히 북으로 꺾었다. 배에 탄 모든 사람들에게 모기가 보이는 대로 잡고 밤에 긴 팔을 입고 자라는 명령도 내렸다. 이 근처는 열대 기후라서 다들 웃통을 벗고 자서 말라리아에 감염될 우려가 있었다.
이민호는 배 밑바닥에서 집단적으로 생활하는 일본인 노예들이 걱정됐다. 겨우 며칠이라도 끝없이 흔들리고 비좁은 선저에서 많은 사람들이 지내다 보니 아기 우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해중국에 상륙하는 즉시 소작농으로 신분이 격상될 예정이었다.
“북쪽 섬에서 연기가 치솟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저 무인도에 이름도 없는 섬인 센카쿠열도에서 수상한 낌새가 포착됐다. 돛대에 오른 사공이 폭 3km쯤 되는 평평한 섬을 가리켰다.
“왜선입니다!”
눈이 좋고 노련한 사공이 선형을 파악하고 즉시 보고했다. 이민호는 간수군들에게 전투 준비를 시켰다. 지나가는 배라 하더라도 근거지인 해중국 가까이에서 활동하는 왜선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섬 동쪽 해안 돌밭에 가까이 가서 보니 긴장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배는 너무 작았고, 홀딱 벗고 훈도시만 입은 왜인들 네 명이 불을 피워 물고기를 구워먹고 있었다.
선수루에 오르기 전에 이민호가 중국 관헌의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이민호는 목적에 따라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코스프레하는 기분이 들었다.
“너희들은 일본인이냐? 여긴 일본 땅이 아니지 않느냐?”
“아이고, 대인! 폭풍에 표류하다 보니 여기 당나라 땅까지 밀려왔습니다요. 용서해주십시오. 저희는 절대로 왜구가 아닙니다요!”
“지금 즉시 배를 타고 물러나라! 에잉! 무식한 놈들! 아직도 당나라라고 부르다니.”
“하지만 물도 없고 양식도 없습니다. 돛도 다 찢어졌습니다. 거센 바람에 사흘이나 떠밀려 왔으니 돌아가다가 목이 말라 죽을 것입니다. 대국의 대인께서 저희를 가련히 여겨 제발 살려주십시오!”
돛에 쓸 황포가 없어 면포 열 필, 쌀, 물을 단정에 실어 왜인들에게 건넸다. 왜인들이 비싼 면포를 받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일단 살아야 하기에 왜인들은 열심히 바느질해서 돛을 만들었다. 그러나 면포 서너 필 정도는 아낀 것 같았다. 이민호는 왜인들이 배를 타고 떠나는 것을 보고 나서야 배를 돌렸다.
“도련님! 그냥 죽여 버리지 그러셨어요? 시간이 아깝습니다.”
“배에 탄 일본인들이 계속 지켜보고 있는데 어떻게 죽여?”
이민호는 괜히 유리창으로 배에 방풍창을 달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표류자를 구호하는 것은 동아시아는 물론 모든 문화권에서 공통된 의무였다. 물건 좀 나눠주고 기다리면 될 것을 나중에 두고두고 욕을 먹을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이민호가 일본인을 싫어하긴 해도 괜한 사람을 죽이기도 싫었다.
이민호는 수시로 주변 해역을 순찰할 배가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다. 아직 방어시설을 완비하지 못한 해중국이 외부로 노출되는 것보다는 미리 바다에서 쫓아내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었다. 해군이 창설된 뒤에도 해양경찰이나 코스트가드 역할을 맡을 해양세력은 여전히 필요했다.
그날 저녁 해중국에 도착했다. 미카가 하녀들과 함께 선착장에 마중 나와 있었다. 하녀들이 기다란 나기나타를 들고 미카를 둘러싼 채 호위하고 있어서 미카가 마치 여왕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이민호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배에서 내린 이민호가 미카를 꽉 껴안았다. 이제는 제법 여자 같았다. 과감한 애정표현에 놀란 미카가 얼굴을 붉히고, 다른 사람들은 못 본 척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 미카는 그 동안 매일 바닷가에 나와서 망부석처럼 바다만 바라봤다고 한다.
애처로운 미카의 사랑에 제대로 부응해주지 못하는 이민호는 너무 안타까웠다. 그래서 배에서 내리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입맞춤을 진하게 해주었다. 입맞춤이 길어지자 계복이 옆에 와서 헛기침을 했다.
“험! 험! 도련님. 그 동안 이곳에 별 일이 없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음. 아무 일 없어야지. 암.”
혹시라도 왜구나 서양 해적이 이곳을 공격했으면 어떡하나 했는데 다행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선착장이 있는 곳은 만 깊숙이 숨은 곳이라 지나가는 배에서 잘 보이지 않는 곳이라 해도 대만 북쪽 끝에 있어 지나가는 배들이 폭풍을 위해 들어오기도 쉬웠다.
미카를 옆구리에 꼭 껴안고 걸었다. 과연 10여 일 사이에 꽤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외륜선 네 척이 동시에 접안할 만한 대형 선착장이 그럴 듯하게 만들어지고 거주지 창고로 통하는 넓은 도로도 완성됐다.
거주지도 번듯하게 정리됐다. 천막이 반 이하로 줄어들고 그 대신에 일본식 농가가 기둥부터 세워지고 있었다. 근처에서 미지근한 온천이 발견돼 공용 목욕탕도 만들었다고 했다. 일본인 거주지 앞에는 열흘 전에 대충 일궜던 밭이 지금은 논으로 변해있었다. 약간 높은 곳에는 작은 저수지가 여러 개 생겨 비올 때마다 물을 담고 있었다.
겨우 열흘 좀 지났을 뿐인데 이곳의 변화는 상전벽해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유가 있었으니, 10여 일 전부터 열심히 일하던 원주민들이 여전히 남아서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원은 5천 명 정도로 더 늘어났다. 그런데 이민호가 아무리 계산해 봐도 이곳 창고에 쌓여있던 쌀로는 이 많은 사람들에게 품삯을 지급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런데 저 인간들은 쉬지도 않고 매일 일만 하는 거야? 어이가 없다.”
“왕자니이임~ 쌀 갖고 오셨습니까? 환영합니다아~ 너무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얄미운 통역 놈이 반기며 달려 나왔다. 이민호가 가재미눈을 뜨고 통역을 노려보았다.
“나를? 아니면 쌀을?”
“그거야 당연히, 헤헤! 왕자님이죠.”
“그런데 어떻게 된 거야? 쌀이 그렇게 많지 않았잖아. 너 혹시……”
“예! 인원은 많고 쌀은 적어서 왕자님이 오실 때까지 당분간 품삯을 절반만 받고 일을 하게 했습니다. 충성스런 왕자님의 백성들은 그래도 왕자님을 위해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대신 쌀주머니는 매일 받게 했습니다. 저 잘했죠?”
쌀주머니로 사용된 천 만으로도 하루 품삯으로 충분했을 것 같았다. 원주민들이 낮은 기술력으로 천을 만들려면 노동력과 시간이 굉장히 많이 들므로 식량보다는 의복을 구하는 것이 더 어려웠을 것이다.
“잘했다. 그 동안 못 받은 쌀은 오늘 바로 나눠주마. 그런데 일이 진척되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구나.”
“산 너머 고산국에도 3천 명이 넘게 일하고 있습니다.”
“뭐?”
이놈이 이민호의 재산을 거덜 내려고 작정한 것 같았다. 언덕을 중심으로 이쪽저쪽 합해서 품삯 받는 원주민이 8천 명이나 일하고 있었다. 통역이 이민호의 놀람을 칭찬으로 받아들였는지 계속 떠벌였다.
“산 너머에서 궁궐 터 땅 다지기를 마쳤고, 기존에 있던 기장밭을 일본 농부들의 지시를 받으며 논으로 개간하고 있습니다. 산에서 목재를 베고 돌을 잘라 운반하는 작업 중이니 설계도만 준비되면 언제든 궁성 건축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통역은 참으로 훌륭한 부족 지도자였다. 이민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는 이민호가 이끄는 외부 침략자에게 고개를 숙였으나 백성들을 전쟁에 휘말리지 않게 하고 오히려 기회를 잡아 배불리 먹이고 있었다.
이민호는 통역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이름을 물었다. 계속 통역이라거나 이놈 저놈 할 수는 없었다. 아무한테나 이 새끼 저 새끼 했던 북병영의 어느 장수를 닮고 싶지는 않았다.
“내 이름은 이민호다. 네 이름은 뭐지?”
“반차오 무르만사입니다, 왕자님. 자는 없습니다. 무르만사는 아버지 이름이기도 한데 아버지 이름은 무르만사 칼라오입니다. 할아버지 이름은 칼라오 반차오입니다.”
고대 유럽인도 아닌데 아버지 이름을 마치 성처럼 써서 이민호는 무척 신기하게 여겼다. 그것은 이곳 남쪽에 거주하는 고산족인 아타얄족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아타얄족은 섬 북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거대 부족으로 조만간 접촉하게 될 것 같다는 의견을 반차오가 냈다.
“나도 자는 따로 없어. 그런데 고산국도 개발 중이라고 했지? 어이가 없네. 반차오 너는 앞으로 내가 시키기 전에는 함부로 일을 벌이지 마라. 부담돼. 군주가 백성들에게 약속을 못 지키면 안 되잖아?”
“예. 죄송합니다, 헤헤! 요즘 저희 부족 사정이 안 좋아서요.”
이민호는 일단 배에서 쌀과 벼 종자를 하역했다. 출발하기 전에 류큐 국왕이 따로 선물해준 씨나락이 있어 쌀은 모두 네 종류가 됐다. 한 가지는 조생종 올벼였다.
그리고 조선인 농민에게 지시해 일본 농부들을 이끌고 밭에 감자를 심으라고 했다. 주식을 쌀로 할 예정이지만 혹시라도 기근이 들지도 모르고, 감자 자체로 꽤 괜찮은 반찬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해동상단 전라좌수영 분점에서 이번에 대만으로 온 농부들에게 감자재배법을 자세히 가르쳐주고 씨감자도 배에 실어두었다. 조선인 농부가 일본말은 못해도 칼로 감자를 베어 재를 묻히는 것부터 시작해 손짓발짓으로 의사소통을 했다. 일본 농부들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감자 종자를 밭에 심었다. 말이 안 통해서 옆에서 지켜보던 이민호가 무척 답답하게 여겼다.
산 너머가 궁금해진 이민호는 계복과 함께 말을 타고 산을 넘었다. 배에 쌀과 각종 상품을 싣고 일본인 노예도 태워야 했으므로 말은 딱 세 마리밖에 못 실었다. 다음에 시전부락 여진족 아이들을 데려오면서 말과 소, 돼지 등 가축을 실어와야겠다고 이민호는 생각했다.
도로는 잘 닦여져 있었고 심지어 해중국 궁궐 터 앞에는 납작한 돌을 깔아 포장도 해놓았다. 걸어서는 반나절이 걸릴 거리를 말을 타고 금방 달려서 언덕에 올랐다.
“우와!”
“좋죠, 도련님?”
저 멀리 희뿌연 안개 사이로 지평선이 보이고 그 너머 파란 선은 수평선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바다 건너 중국 땅이 보일 듯 말 듯했다. 이민호의 기억이 맞는다면 저 건너편은 복건성의 푸저우, 복주였다.
시선을 밑으로 내리자 폭이 몇 백 미터에 달하는 꽤 넓은 강이 바다까지 구불구불 흐르고 있었다. 서유럽처럼 해항이 아닌 강항으로 아주 쓸 만한 곳이었다. 원주민들이 사는 움집이 점점이 흩어진 사이로 죄다 평원이었고,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떼를 지어 일하고 있었다.
“들이 굉장히 넓다.”
“정말 논으로 다 바꿔놨네요. 야만인답지 않게 일은 열심히 하는 사람들 같습니다.”
“원주민들도 좋은 백성이 될 것 같아.”
시키는 사람이 없어도 원주민들이 알아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까 1개 대에 불과한 간수군이 아니라 일본인 농부가 농지조성 작업을 지휘하고 있었다.
간수군이 1등 국민, 일본 노예가 2등 국민, 원주민이 3등 국민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간수군은 군인이고 일본인은 농민이고 원주민은 비숙련 품삯 노동자일 뿐이었다. 이민호는 백성들을 차별할 생각이 절대로 없었다. 다만 교육은 받아야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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