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ire of the Warm Sea RAW novel - Chapter 6
* 6화 *
부친께 하직인사를 올린 다음 노비들 몇, 혜영이 혜진이와 함께 배를 타고 전라좌수영 성하 마을로 출발했다. 이민호는 전생이나 현생이나, 부친 이응화처럼 물에 빠져 죽었지만 물을 무서워하지는 않았다. 부상과 저체온증으로 인해 죽은 탓에 일반적인 익사와 다른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다.
두산도 서쪽으로 돌아 무덤처럼 둥그런 장군도를 지나기 전에 혜영이 서쪽 야트막한 언덕을 가리켰다.
“도련님! 저기 산 밑 봉산골에 삼십 호 규모의 대장간 마을이 있고 벼락산 재 너머 새터 앞 판옥선을 만드는 선소에도 대장간이 있사옵니다. 수영에서도 장인들 몇 십 명이 여러 가지 무기를 만듭니다.”
“그거 잘 됐구나. 장인들이 근무시간 끝나면 다른 것도 만들지?”
“예. 필요한 물품을 생산해 관아에 바치고 남는 시간은 오로지 장인들이 마음대로 해요. 쌀이나 면포를 주고 필요한 물건을 주문하셔도 돼요, 도련님.”
도련님이 물에 빠지신 다음 갑자기 어른스러워진 것 같다고 종알거리는 혜진을 혜영이 급히 말렸다. 그러나 다섯 살 나이 꼬마는 하루만 안 봐도 달라 보일 테니 크게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장군도를 지나자 강 하구 바깥 방파제로 둘러싼 포구 안에 전라좌수영 직할 판옥선 여섯 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이 포구를 좌수영 서쪽을 흐르는 강 이름과 같이 경강이라고 하는데 현대와 달리 강폭이 꽤 넓었다.
좌수영 남문 앞 작은 포구를 지나 소포에 배를 대니 집안 가솔들이 이민호가 탈 노새 한 필을 몰고 와 대기하고 있었다. 고삐를 잡은 집사의 안내를 받아 언덕길을 오른 이민호는 곧 성하 마을에 도착했다.
예전에 순천부 내래면의 중심지였던 성하 마을은 좌수영성 동쪽을 동정, 서문 바깥을 서정이라 불러 구분했다. 경강 하구에 접한 서정에는 시장이 크고 대장간이 많은 반면 동정에는 좋은 집이 많다고 한다.
“집이 많네? 크기도 하고.”
기와집 말고 일반 양인들의 초가집도 의외로 컸는데 좌수영 수군들이 근무기간 중에 대부분 하숙을 하는 탓이었다. 남원부나 광주목 같은 외지에서 온 군사들이 군용막사에서 생활하지 않고 민가에서 출퇴근하는 것은 서울에 상번하는 경군과 같았다.
전라좌수영 수군은 수영에서 가까운 순천부나 5관 5포 거주민보다는 내륙 깊숙한 산골 고을 거주민이 더 많았다. 남원에서 좌수영까지 걸어오려면 닷새는 걸린다. 그리고 근무기간 동안 먹을 양식과 비용까지 수군이 부담해야 하기 때문에 수군 군역 자체가 장난이 아니었다.
수영이나 수군 진포와 가까운 고을에서 수군을 동원할 수 있다면 왜구가 갑작스레 쳐들어왔을 때 즉시 대응이 가능하고 수군 병사들이 물길에 익숙하니 이는 전투력으로 나타날 것이다. 양반들이 백성을 사랑한다는 의미로 그런 주장을 담은 상소를 올리고 문집에 싣는 경우가 많았다. 이민호는 현재 제도보다 그게 훨씬 합리적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수군의 군역이 워낙 무거운 탓에 바닷가 고을에서만 수군을 징병할 경우 백성들이 다 도망가서 바닷가 고을이 인적 없는 황무지로 변한다는 이야기를 부친에게 들었다. 수군에 병력을 공급하는 고을 문제는 애민애국하는 척하는 양반들이 국초부터 자그마치 이백 년 동안 떠들어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떠들어댈 주제라고 말하며 부친이 코웃음 쳤다.
이 문제는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에 걸쳐 해결됐다는 이야기를 이민호가 기억했다. 양남수군변통절목이던가 하는 이름으로 내륙지역 수군들은 보인과 함께 수군진포에 군포만 바치고 현지 수군 근무는 생략하게 된다. 대신 수영과 수군진포에서는 그 군포로 진하거민, 즉 수영의 성하 마을 사람들 같은 수군진포 아랫마을 사람들을 고용해 수군 근무를 시키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전 시대부터 부패와 군역 질 저하의 대명사였던 대립(代立)과 방군수포(榜軍收布)를 공식화한 방식이었다.
이후 바닷가 마을 사람들은 돈을 받고 자기 집에서 출퇴근하니 좋고, 내륙 고을 주민들은 군포 2필로 군역을 면하니 좋고, 수영과 수군진포의 장수나 아전들은 운영비가 생겨서 모두가 해피한 결말이 났다. 그러나 실제 근무하는 수군 병력이 반 토막 이하로 줄어들기 때문에 임진왜란을 앞둔 지금은 도저히 시도조차 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이민호가 집사에게 물었다.
“그럼 수군으로 근무하는 동안 비용이 많이 들겠네요?”
“어이구! 말씀 낮추십시오, 도련님. 주인마님께서 아시면 경을 칩니다요.”
“그럼 말 놓을게. 앞으로 아저씨라고 불러도 돼?”
“어이쿠! 너무 과분합니다요.”
그래도 집사가 싫은 기색은 없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부친에게 설명 듣기로 집사는 대대로 수원 본가에 속한 작은 마름들 중 하나로 부친을 따라 전라좌수영까지 따라 내려온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했다.
“성하 마을에 양반가는 몇 안 되는 것 같은데 기와집이 의외로 많네. 수영에 아전이나 진무로 근무하는 부유한 중인들이 많다는 건가?”
“그렇습니다요, 도련님. 중인들은 녹봉을 아예 못 받거나 아주 적게 받으니까 부업을 하든 농장 같은 가업을 유지하든 어떻게든 수입을 마련해야 합니다. 몇몇은 쌀과 면포를 교환해주는 장사를 한다고 합니다.”
조선 중기에는 쌀과 면포를 화폐로 활용했는데 추수철에는 쌀값에 비해 면포 가격이 오르고, 봄부터 조생종 쌀인 올벼가 추수되는 여름까지 면포에 비해 쌀값이 오른다. 중인이나 양반들은 그 가격차를 이용한 치재를 한다고 집사가 설명했다. 고리대가 아니더라도 국가에서 인정한 공식 이자율이 연 5할에 달했으니 재산을 많이 가진 자가 재산을 불리기도 쉬워 부익부 빈익빈이 더욱 심했다.
“그 와중에 몇 안 되는 향반들이 가격을 갖고 장난 쳐서 중인들에게 원성이 자자합죠. 가만 놔둬도 일 년에 두 배 넘게 이문을 얻을 수 있는데도 양반들은 욕심이 많습니다요.”
이민호가 눈을 반짝였다. 관리 비용이 많이 들어서 일 년에 딱 두 배만 남기더라도 10년이면 천 배로 불릴 수 있다. 2의 10제곱은 1024. 복리의 마법이었다.
겨우 몇 달러에 불과한 구슬과 장신구를 받고 맨해튼 섬을 판 인디언들을 멍청하다고 백인들이 수백 년 간 놀렸는데, 사실 멍청이는 백인들에 대한 우호의 표시로 섬을 싸게 판 인디언이 아니라 백인들이었다. 구슬과 장신구의 당시 가격을 미국 연구자들이 추정하는 3달러라고 치고 당시 기준 금리 이하인 연 1할만 이자로 받기로 해도 4백 년 사이에 10경 달러 정도로 불어난다. 맨해튼이 아니라 미국 땅 전체를 몇 백 번을 사고도 남는 돈이 된다. 2008년 미국 가계 소유 부동산 시가 총액은 16조 달러로 한국의 두 배 정도였다.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더라도 이자율에 기반을 둔 금융제도는 언제든 모래성처럼 무너질 수 있고, 사실은 가끔 무너져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민호가 올해 일만 섬으로 면포와 쌀을 교환하는 일을 시작한다면 열다섯 살에 천만 섬을 가질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지만 이것은 절대 불가능했다. 한 지역에서 유통되는 미곡의 양이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조정이나 왕실에서 전국을 한 단위로 같은 일을 한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수영성 주변에서 거래되는 미곡 규모는 어느 정도야? 수군들이 한 달 치 식량을 지고 올 수 없을 테니 다른 곳보다 많겠네?”
“그렇습니다요. 미곡 거래량은 일 년에 삼만 석이 넘는데 백미 5천 석이면 충분히 장난을 칠 수 있습니다요.”
“상평창, 환곡, 사창을 알아?”
“상평창은 쌀과 면포를 교환해 물가를 조절하는 기관인데 나라에서 국초부터 시행하면서 진휼 기관을 겸하다가 요즘은 아예 폐지됐습니다. 환곡은 쌀을 빌려주어 빈민을 구제하는 진휼기관이었다가 지금은 아예 대놓고 국가에서 운영하는 고리대로 바뀌었습니다. 사창(社倉)은 사, 그러니까 면 단위의 곡식 대여기관으로 남송의 성인인 주자께서 만드신 훌륭한 제도라 하여 대구에서 실시했다가 지금은 폐지됐고 몇몇 양반네에서는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상평창, 의창, 진대법, 환곡 등등은 국가에서 주도하는 물가 조절기관과 빈민 구호기관이었다. 그러나 두 가지 기관의 공통된 자금인 곡식을 수시로 빌려주고 전환하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두 기관이 통폐합되기 일쑤였고, 중간 중간에 자본이 소진되거나 고리대로 변질돼 혁파되었다가 수시로 재개되기도 했다.
사창도 조선 조정이 주도하거나 민간에서 운영하면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런 제도는 이자율과 도량형 통일 문제, 관리하는 아전의 농간, 고리대금업을 하는 부호들의 반대 등으로 제대로 시행되기 어려웠다.
이민호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지금도 쌀과 면포를 교환하면서 이문을 취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상평창과 같았다. 그러나 그런 장사만 하면 지역사회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을 것이기에 상평창의 후기 사업인 빈민구제 사업도 같이 하기로 했다. 대한민국에서 치킨을 주문할 때도 한 가지보다는 양념 반 후라이드 반이 더 끌렸다.
“좋아! 규모는 사창, 이문은 상평창으로 얻고 진대법과 같은 진휼 사업을 할 테니 집 주변에 창고를 사들이거나 크게 짓도록 해. 그리고 내년 가을 추수 전에 면포 천 동을 줄 테니까 쌀과 면포를 바꿔서 불리는 일을 아저씨가 관리하도록 해. 수군이나 백성들에게 사고팔 필요 없이 아전과 진무들하고만 거래하면서 수수료 떼는 식으로 조금 할인해 줘. 일종의 도매금융이지.”
“히익! 단위가 너무 큽니다요. 면포 천 동이면 5만 필입니다!”
“아버님께서 귀양살이 중이라 관에 약점이 많아. 그러니 수영 소속 아전과 진무들에게 아주 유리하게 거래해주게. 초기 자금이 없어서 못하는 사람에게는 무이자로 빌려줘. 무슨 뜻인지 알겠지? 이건 돈을 벌려고 하는 장사가 아니야. 이름도 상평창이 아니라 주자가 제안해서 양반들에게 이미지, 아니 인상이 좋은 사창이 좋겠어.”
“예. 그렇다면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좌수영의 아전과 진무들의 집안을 휘어잡고 병방군관이 도련님의 손 안에서 놀게 만들겠습니다요. 도련님이 수영에 가시면 수사 영감이 버선발로 뛰어나오고 환갑 넘은 우후가 도련님을 형님으로 모시도록 만들겠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수영의 장수, 아전들에게 잘해주더라도 설마 당상관인 수군절도사가 버선발로 뛰어나올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앞으로 9년 후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할 이순신 장군이 버선발로 뛰어나오며 반기는 장면을 상상한 이민호가 피식 웃었다.
“적당히 불리면서 그래도 남으면 가난한 집에 나눠줘. 수영을 통해서 수군들에게 나눠줘도 좋아. 손해만 안 보는 선에서 팍팍 써. 이득을 안 남겨도 된다는 거야. 알았지?”
“하지만 수사나 아전들이 뜯어먹겠다고 달려들 테니 사실 배보다 배꼽이 클 것입니다.”
“사창을 통해 충분히 수입이 생긴 다음에는 적당히 욕심을 자제하겠지. 아저씨가 아전, 진무들이 가족들까지 먹고 살게 편의 좀 확실히 봐줘.”
“수군과 성하 마을 백성들이 도련님을 미륵의 현신으로 믿게 될 것입니다.”
이야기하는 중에 성하 마을 집에 도착했다. 도로를 따라 행랑이 길게 이어진 기와집 중앙에 위치한 대문에 들어서니 너른 마당 건너편에 중문이 있었다. 집안 노비들을 행랑으로 보내고 이민호는 사랑채에 여장을 풀었다.
“돈이고 과거시험이고 다 떠나서 목욕탕부터 만들어야겠다. 화장실 문제는 해결 못할까? 음식도 입맛에 안 맞고, 손 볼 게 한둘이 아니야.”
“도련님! 목욕물 준비했습니다.”
미리 연락을 받고 준비했는지 노비들이 커다란 목욕통을 들고 방 안에 들어왔다. 그리고 혜영의 지시에 따라 계집종들이 물통을 들고 들락거리면서 목욕통 안에 따뜻한 물을 퍼 담았다.
그 사이 이민호는 따로 세숫대야에 담긴 물로 머리부터 감았다. 녹두가루와 창포로 만든 비누로 감으니 거품은 별로 안 나도 꽤 시원했다. 이민호는 NaOH로 화학비누를 만들어서 팔아봤자 돈이 별로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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