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ire of the Warm Sea RAW novel - Chapter 8
* 8화 *
2. 기반을 다지자
조선에서 새 삶을 시작하고 어느덧 5년이란 세월이 흘러 이민호는 열 살이 되었다. 수원에 본가가 있는 이민호는 겨울에는 전라좌수영, 농사철에는 수원에서 보냈다. 임진왜란 5년 전인 1587년 정해년 초에 전라좌수영으로 다시 내려가기 직전까지 수원에서 바쁘게 지냈다.
현대인의 상식을 총동원해 성장기의 식단에 신경을 많이 쓴 탓에 이민호는 같은 나이의 다른 아이들에 비해 체구가 굉장히 컸다. 혜영과 혜진 자매는 물론 집안 종의 자식들에게도 같은 것을 먹였더니 너무 쑥쑥 자라 계집종들 부모가 걱정할 정도였다.
이민호의 본가인 수원의 자택 외양간 한쪽에는 젖을 짜기 위한 염소 무리를 들여서 키우고 있었다. 이민호는 몸이 자라 유당분해효소 분비가 완전히 멈출 때까지는 계속 우유를 마실 계획이었다. 남으면 젖이 부족한 노비나 소작농 신분의 아이들에게도 나눠줬더니 이민호에 대한 평판이 아주 좋아졌다. 근처 양계장에서는 이민호와 집안 아이들이 먹을 닭고기와 달걀을 꾸준히 공급했다.
이민호는 주로 수원에 살면서 천자문과 소학을 떼고 부친의 추천으로 글선생을 초빙해 사서오경을 배웠다. 현대인 입장에서 무척 짜증나더라도 나중을 생각해 일단 모조리 외우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농업 경영은 양반의 기본 소양이며 가장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라 농장 경영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이민호는 수원에 올라온 첫 해 가을부터 마름들을 시켜 경지를 반듯하게 만들고 중간에 농로와 수로를 내는 농지정리를 실시했다. 아직은 밭에 볍씨를 직접 뿌리는 직파법을 하고 있지만 본격적인 이앙법에 대비한 준비였다. 뒷간이나 가축의 분뇨를 이용한 거름을 만드는 법도 연구했다. 만석꾼의 아들인 이민호 입장에서는 소출증대보다는 오히려 공중위생에 더 주안점을 뒀다.
농한기를 이용해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고 저수지도 여러 개 팠으나 아직 본격적인 이앙법을 실시하지는 않았다. 저수지에 몇 년에 걸쳐 물을 충분히 담아야 하고, 또한 정해년에 아주 심한 가뭄이 든다는 것을 부친에게 들은 탓이었다.
그래서 2년 전에 온돌식의 작은 온실을 만들어 모판에 파종하고 몇 마지기에만 시험 삼아 모내기를 했다. 당시 전국에서 유일하게 이앙법으로 논농사를 짓는 지방인 강원도 농민을 일 년 간 초빙해 기술 지도를 받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해 가을에 소출이 두 배 이상 늘어나자 작년에 주변 소작농들이 따라 하려는 것을 말리느라 힘이 들었다.
임진왜란 전에 이앙법이 확산될 경우 광작으로 인해 농지에서 밀려난 소작농들이 유민화되어 전쟁 전부터 조선 사회가 혼란에 빠질 우려가 있어 이민호 입장에서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로써 언제든 대규모 유민을 발생시켜 유휴 노동력을 흡수할 수단을 갖췄다. 전쟁이나 기타 나쁜 짓이 아닌 기술 발전을 통해 유민을 발생시킬 수 있었다. 공장 자동화로 인해 필요 없어진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것과 같았다.
전라좌수영에서처럼 수원에서도 사적인 사창 사업을 해서 이것도 대박을 쳤다. 쌀이 넘쳐나는 곳이라 기름이 잘잘 흐르는 경기미인데도 쌀값은 오히려 전라좌수영 지역보다 훨씬 쌌다. 이민호는 수원부 아전들에게 환곡 외에 사창 사업을 하라고 꼬드겨 아전들이 이득은 이득대로 챙기면서도 수원과 경기 지역의 물가 안정과 민생 안정에도 크게 기여했다. 대신 고리대를 하던 양반들에게는 욕 좀 먹었다.
수원에서 사창이 성공하자 다른 고을 관아에서도 알음알음 사창 사업을 시도해 이제는 예전에 비해 곡가와 면포가의 등락 폭이 줄어들어 1년에 5할 이문을 남기기도 어려워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만큼 물가 안정이 되니 백성들이 조금 더 여유가 생겼다. 관아뿐만 아니라 민간에서 보유한 미곡 양이 많아지니 흉년에 대비할 여유도 더 많이 생겼다.
소문을 듣고 조선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내수사 관원이 이민호를 찾아왔다. 사랑채에 모신 그 관원은 도포를 입고 갓을 썼으나 마흔이 넘은 얼굴에 수염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환관이 틀림없었다.
이민호는 이 사람이 내수사 전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내수사의 형식적 수장인 도제조와 제조는 양반 고관대작이지만 내수사에 대한 권한은 거의 없었고 실질적 우두머리인 전수는 환관이 맡았다. 내수사가 왕실 재산을 관리하는 곳이니 당연했다. 이 환관이 어쩌면 어명을 받고 온 것일 수도 있어 이민호는 목숨을 걸고 말 한 마디에도 세심히 주의했다.
“책을 읽다 보니 환곡은 빈민구제를 위한 고구려의 진대법에서 비롯되고 상평창은 물가안정을 위한 흑창이나 의창에서 비롯됐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천조에도 비슷한 제도가 있으며 특히 사창은 주자께서 시행한 사업이나 일부 지역에 국한된 것으로 들었습니다. 상평창과 사창을 결합한 이 제도를 널리 전파한다면 조선의 모든 백성들이 주상전하의 덕을 칭송할 것이며, 관아의 재정은 풍족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국적으로 통일된 교환 가격을 정할 필요가 있겠는가?”
“작황에 따라 곡가와 면포 교환비율은 매년 변동하고 지역마다 가격이 다르니 전혀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한 지역에서 면포나 쌀이 비싸면 다른 지역에서 흘러들어오기 마련입니다. 그저 시장 가격에 맞춰 그보다 약간 싸게 교환하는 것만으로 족합니다.”
“자넨 매년 큰 이득을 얻으면서도, 그리고 빈민들에게 구호사업도 별로 하지 않으면서도 주변 백성들에게 성인군자 소리를 듣더군. 자네 부친이 시켰겠지?”
“물론입니다. 비록 유배 중이오나 제 아비가 임금과 백성을 사랑하는 뜻만은 여전하십니다. 아비도 우연히 알았는데 기존 사창과 다른 이 사창은 장사를 하면서도 다 같이 이득을 나누는 방식입니다. 사창 때문에 고리대 이익이 줄었다고 불만을 품던 지주들도 요즘은 별 말이 없을 겁니다. 면포와 쌀을 교환하는 양이 늘어 오히려 전체 수입이 많아졌거든요.”
“많은 이들이 이 사업에 참가하면 곡식 보유량이 늘어서 흉년에도 잘 대비할 수 있겠지. 그건 그렇고, 수원부와 주변 고을 아전들이 요즘 살맛이 났더군. 듣자하니 전라좌수영 진무들도 그렇고.”
내수사 관원의 눈빛이 조금 차갑다고 느낀 이민호가 더욱 말조심을 했다. 말 한 마디에 따라 목숨이 오락가락할 수도 있었다.
“조정이나 양반 입장에서 토호들을 억제해야 한다는 뜻은 충분히 알겠습니다. 저도 무변의 아들에 불과하나 그래도 본색이 양반이라 토호들의 발호를 앉아서 지켜볼 수만은 없습니다. 그러나 관아에서 일하는 아전들의 농간과 부정으로 인한 비효율이 너무 심하지 않습니까? 아전들이 녹봉을 못 받으니 부정을 저질러도 고을 수령들은 적당히 눈 감고 넘어가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에 대한 침해가 지금보다 더할 수가 없습니다.”
“맞아. 특히 공납 문제에서 심각하지. 조정 입장에서야 전세를 올릴 수 없으니 쉽게 세금을 올리는 간편한 방법이긴 한데, 아전들의 농간에 백성들이 너무 고달프게 됐어. 자네 좋은 생각 있는가?”
이민호는 공납이란 말을 듣자마자 즉각 대동법을 떠올렸다.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시행되는데 150년 넘게 걸렸다는 기억이 났다. 백성들은 환영하겠지만 당연히 아전이나 토호들의 반발이 심했다.
“공납은 농지가 아닌 사람을 기준으로 세를 거두니 전세가 아닌 인두세 개념입니다. 이것을 농지 단위로 쌀로 조금씩 걷으면 아주 쉽게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도를 바꾸는 과정에서 지주들의 반발이 무척 심하겠지요.”
“지주들 대부분이 양반들이라 더 어려워. 공납은 양반들은 다들 빠져 나가고 양인들이 내야 하니 토지 기준으로 납세하면 양반들이 손해 본 기분이 들 거야.”
수확량의 일정 부분을 바치는 전세는 갖가지 특례로 인해 조선에서 보통 1할에 못 미친다. 유럽이나 일본에 비해 훨씬 적은 농지세 비율이었다. 그러나 전세를 올리려고 하면 백성들이 곤궁해진다는 양반들의 상소가 빗발치니 전세 인상은 불가능했다. 대동법도 비슷하게 반발이 심하리라는 것은 누구나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양반과 소작민을 함께 불러서 물어보십시오. 지주가 아닌 소작농에게 공납 대신 쌀을 추가로 부담하라고 하면 소작농들은 기뻐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주에게 내라고 강제해도 세월이 흐르면 결국 전세처럼 공납미도 소작농들이 내게 돼 있습니다. 시행 과정에서 어차피 양반 지주들은 손해를 안 본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소작농들이 공납 때문에 들일 바로 그 시간에 땅을 더 경작하게 되니 지주들에게도 이익입니다.”
“그게 과연 그렇게 될까?”
“다만 중간에 공납을 두고 농간을 치던 아전이나 공납물을 대신 바치는 육의전 상인들이 크게 반발할 것입니다. 조정 대신들이 상인들에게 일정한 양을 상납 받는 관례가 있으니 조정 대신들이 앞서서 반대할 것 같습니다.”
“흠. 그 관계는 잘 아니까 해결할 수 있지.”
주어가 빠졌는데 그게 내수사인지, 조정인지, 왕실인지 이민호는 알 수 없었다.
“듣던 대로 자넨 과연 신동이로군. 부친의 말을 듣고 생각하는 수준이 아니야.”
“퇴계 선생과 율곡 선생, 남명 선생, 그리고 음. 그 외에도 너무나 많은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과 견주어 저는 비교조차 안 됩니다. 금상 들어서 인재가 마치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성군이 나면 길가에 돌이 채일 듯이 인재가 많이 난다더니 바로 그렇습니다. 이 모두 주상 전하의 공덕입니다.”
“맞아. 앞으로 국운이 크게 융성할 거야. 하하하!”
크게 웃던 내수사 관원이 차를 들었다. 이민호는 5년 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부산포부터 한양까지 일패도지해서 임금이 의주까지 쫓겨난다는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았다.
“차도 아주 괜찮군 그래. 구수한 맛도, 청아한 맛도 없이 그저 텁텁한데 이상하게 입에 맞는군.”
“요즘 보성에서 생산하는 녹차입니다. 입에 맞으신다면 나리께서 식사 때 생선 반찬을 많이 드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맞습니까?”
“어? 맞네. 허허! 대단하군.”
“보성에서 생산하는 차 종류가 여러 가지입니다. 주로 드신 음식 종류에 맞춰 각각 다른 차를 선택해 드신다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싫지 않으시다면 가시는 길에 몇 가지를 조금씩 싸드리겠습니다.”
“고맙네. 듣자 하니 자네 요즘 경전을 공부하면서 활쏘기 연습을 한다고? 문과인지 무과인지 모르겠지만 자네가 과거에 급제한 다음에는 크게 쓰일 일이 있을 걸세. 부디 앞으로도 몸 보중하고 항상 주상전하께 충성하게.”
이민호는 아주 잠시 움찔했다. 그러나 말 타는 것은 현대인이 승용차를 모는 것처럼 흔한 일이었고 활쏘기는 선비의 기본 소양이었다. 조선에서 말 타기와 활쏘기를 연습한다 해서 역모를 꾸민다고 의심할 사람은 없었다.
“양반 상민을 떠나 주상전하의 백성으로서 당연한 말씀입죠. 이건 천조에서 들여온 비단입니다. 귀한 분이 오실 줄을 몰라 집에 가지고 있는 세 필만 드리겠습니다.”
“나는 뇌물을 안 받네만, 와! 이 광택 좀 봐. 역시 뭐든 중국제가 최고야!”
현대 대한민국에서 살았던 이민호는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환관의 말이 맞았다. 당시에 중국의 기술은 최고조에 달했고, 조선과 일본 등 주변국들은 물론 유럽도 따라가지 못했다. 이 시대 국제무역의 결제수단인 은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인 나라가 명나라와 그 후의 청나라였다. 비단으로 조선과 일본의 은을, 도자기로 유럽의 은을, 벽돌차로 몽골의 말을 싹쓸이해 갔다.
“고맙네. 자네가 장성해서 본격적으로 활동할 때만 기다리겠네. 비록 내가 가진 힘이 적더라도 반드시 자네에게 보탬이 될 걸세.”
“고맙습니다. 미욱한 저를 키워주신다면 전수 나리께서도 크게 보람을 느끼실 수 있도록 견마지로를 다하겠습니다.”
조금 비굴한 발언이긴 했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못할 말이 없었다. 이민호는 이 위기가 지나가면 최대한 빨리 조선에서 탈출하거나 스스로를 지킬 힘을 갖춰야겠다고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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