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pire of the Warm Sea RAW novel - Chapter 921
* 921화 *
101. 1624년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됐다. 지난해에 우르반 8세가 교황으로 즉위하고 나서 고산국과 교황청의 관계가 많이 개선됐다. 새 교황은 마르틴 루터가 번역한 독일어 성경을 불태우라고 명령해서 여러 나라를 긴장시켰지만 외교 분야에서는 주고받음이 확실한 편이었다.
바그다드를 두고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 해를 넘겨 진행됐다. 고산국에서는 아라비아 동해안을 영토로 편입할 때 공언한 대로 이 전쟁에서 중립을 지켰고, 페르시아에서 감사의 의미로 페르가나 말 2천 마리를 왕도에 선물로 보냈다. 오스만 제국이 90년 동안 점령했던 바그다드를 1월 14일에 페르시아가 탈환했다.
네덜란드가 독립전쟁을 진행하는 중에 에스파냐의 자금줄을 차단하기 위해 1623년 12월에 대서양으로 나섰다. 목표는 브라질에서 생산되는 설탕의 집결지인 상 살바도르 다 바히아였다.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모두 고산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나라였지만 현재 국제정치 상황에서는 싸울 수밖에 없었다.
네덜란드 서인도회사에서 규합한 함대가 브라질로 향하는 경로를 확인하던 이민호가 예조 참의로부터 보고를 받았다. 첫 보고부터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므부투가 은동고 왕국의 여왕과 결혼한다고?”
“예, 전하. 덕택에 콩고에 이어 이번에 은동고도 비교적 평화롭게 흡수했다고 합니다.”
은동고는 현대 아프리카의 남서부 앙골라였다. 왕의 호칭인 은골라를 포르투갈 노예상인들이 지명으로 오인해 유럽에 앙골라라는 이름으로 잘못 알려졌다.
아프리카 왕국이 꾸준히 영토를 확장하면서 한 해에 대여섯 번씩 청첩장이 날아왔다. 전쟁 대신 평화로운 방법인 정략결혼으로 아프리카를 통일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므부투는 다 늙어서도 끊임없이 여인을 늘려갔다. 청첩장이 올 때마다 이민호는 적당한 예물과 함께 주로 예조 관리를 보내 축하해주었다.
므부투 자신은 아직 펄펄하다고 주장하지만, 고산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므부투 사후를 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후계자를 정하라고 므부투를 강하게 압박했다. 결국 고산국에서 유학한 경험이 있는 왕자 세 명과 공주 한 명이 후계자 후보로 선정됐다.
“여왕 이름이 아나 은징가라면 세례를 받은 모양이군. 그런데 신부 나이가 40인데도 결혼한다고 했어? 젊은 여자 좋아하는 므부투가 별 일이네.”
“예전에 노예무역을 하던 포르투갈 르완다 요새를 은동고 군대가 공격하다가 외교교섭 기간 중에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미인으로 소문난 것도 있지만 지금 아프리카 왕국은 곳곳에서 전쟁을 하는 바람에 신부의 나이를 따질 경황이 없습니다.”
“부주하느라 예비비가 남아나지 않아. 곧 남아프리카와 경계가 닿겠군.”
“전하! 약속대로 남아프리카를 넘겨주기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아프리카 왕국의 수도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적당한 교통수단이 부족합니다. 해군이 빈약해서 해로로 이동하기도 어렵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을 완전히 통일할 때까지 므부투가 해군을 늘리기 어려웠다. 30만이나 되는 거대한 규모의 지상군을 유지하기도 벅찼기 때문이다. 흑색화약은 자체 생산하고 있지만 아직도 전마는 고산국에 절반 이상을 의존했다.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전쟁을 하거나 무력 대치중이라 병력을 줄일 수도 없었다. 은동고의 여왕과 결혼하면서 남서쪽에 배치했던 병력을 절약할 수 있게 된 므부투는 당분간 한숨 놓게 됐다.
“참의는 남아프리카를 우리 영토로 남겨두고 싶나?”
“풍토병과 주둔 비용 때문에 넘겨주는 것이 맞습니다만, 지하자원만 채취하기에는 위치가 너무 아깝습니다.”
“아깝지. 그럼 우리 영토로 삼을까? 므부투는 반대하지 않았잖아.”
“아, 아닙니다. 저는 반대입니다.”
먹기는 싫고 남 주기는 아까운 계륵 같은 지역이 어디에나 있었다. 영토 확장을 주장하는 관리나 군인들도 장기적인 병력 주둔에 필요한 예산을 뽑아본 다음에는 바로 입장을 바꾸곤 했다.
그런 지역이 또 있었으니, 바로 중앙아시아 카자흐 북부와 동부 지역이었다. 토르구트 족은 볼가강 유역으로 이주한 후에도 여전히 오이라트 부와 연결을 유지하면서 오이라트 전체의 주도권을 쥐길 원했다. 또한 5대 달라이 라마 나왕 롭상 갸초와 손잡고 티베트 권력의 중앙집권화를 지원해주고 있었다.
당연히 중간 길목인 카자흐 북부와 동부 지역, 길이만 만리가 넘고 한반도의 수십 배나 되는 면적에 토르구트 족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토르구트 족은 고산국이 이 지역을 영토로 편입해주길 청원했지만 이민호는 그 땅을 카자흐 칸에게 돌려주되 통행권만 유지하라고 지시했다.
“지금 욕을 먹더라도 후손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막대한 인력과 비용을 투입해 영토로 만들 수는 있어. 그런데 그게 후손에게 과연 좋은 일일까?”
“아닙니다. 괜히 주변에 적을 만들어서 후손들에게 부담을 떠넘길 필요가 없습니다.”
“건국 이래 지금까지 우리가 가져도 문제없는 땅만을 영토로 편입했다. 아니면 문제가 될 소지를 철저히 없애든지.”
“그렇습니다, 전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 선대의 의무라고 해도 그 영토가 언제까지나 영역 내에 남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유사 이래 위대한 정복자들의 이름은 오래도록 남았지만 그 땅은 다시 원래 주인이나 이웃에게 돌아갔다. 새로 획득한 영토를 지켜야 하는 부담 때문에 오히려 제국의 멸망을 앞당긴 경우도 흔했다.
백성을 보내 거주시키더라도 확장된 영토를 영구히 지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일본이 조선과 만주국에 식민정책을 실시했으나 태평양전쟁 패전 이후 바로 쫓겨났다. 현대 중국이 티베트와 위구르족 거주 지역에 수많은 한족을 보냈어도 완전한 영토로 획득했다고 보기 어려웠다.
그래서 고산국은 시베리아나 북미에서 그랬던 것처럼 원주민들에게 큰 혜택을 줘서 아예 백성으로 받아들였다. 아니면 일본처럼 단기간에 부흥할 수 없도록 철저히 짓밟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했다.
“티베트 개혁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토르구트에서 병력을 지원해준 덕에 롭상 갸초가 귀족 계급에게서 세습 토지를 몰수하고 사병을 완전히 해체했습니다. 영세 농민과 소작농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얻어 토지 개혁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마치 공산정권이 수립된 직후 지주의 땅을 빼앗아 소작농들에게 나눠준 것과 비슷한 토지개혁이 티베트에서 전개되고 있었다. 이때는 당연히 하층민들의 인기와 지지를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세금이 늘어나거나 협동농장으로 개편되면 하층민들은 다시 땅의 노예로 돌아간다.
“아주 잘되고 있군. 그런데 참의는 뭘 걱정하지?”
“다만 롭상 갸초의 야심이 너무 커서 세속보다 종교의 영역이 지나치게 확장될 듯합니다.”
“티베트인들이 평화와 구도를 원한다는데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지. 우리가 간섭할 일도 없고.”
문제는 티베트 불교가 몽골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데에 있었다. 많은 몽골인들이 출가할 일이 멀지 않았다.
토르구트 족도 불교를 숭상했다. 조만간 토르구트의 타이지 코오를룩이 롭상 갸초를 달라이 라마로 선포하고, 달라이 라마는 코오를룩에게 칸의 직위를 주기로 약속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코오를록이 가진 유일한 야망이 오이라트의 통일이었고, 칸의 직위는 이를 위해 필요했다.
3대 달라이 라마 소남 갸초가 몽골에서 최초로 달라이 라마의 칭호를 획득했고 4대는 건너뛰었으니 이는 후대에 붙여진 것이다. 머지않아 롭상 갸초가 5대 달라이 라마로서 티베트 최초로 성과 속을 아우르는 최고 지배자로 확립된다.
“늦은 감이 있지만 토르구트와 카자흐, 오이라트와 몽골, 티베트 사이에 다자간 국경조약이 필요할 거야. 예조에서 준비해두도록.”
“어명을 받들겠습니다.”
이들 모두 명목상 독립국들이었지만 고산국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는 나라들이었다. 이민호는 넓은 영토에 비해 인구가 적은 이 유목민 국가들이 오랜 전쟁으로 국력을 소모하기보다는 내실을 충실히 다지길 원했다.
“오이라트의 주도권 경쟁에서 손을 떼라고 내가 타이지를 따로 불러 설득하겠다. 긴 병참선을 유지하는 것이 토르구트는 물론이고 우리에게도 부담이 너무 크거든.”
“하오나 유목민들이 제대로 통합돼 기병군단을 형성하면 언제든 제국으로 급성장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지나치게 커지지 않도록 서로 싸우게 하는 식으로 꾸준히 견제해야 한다는 것이 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역대 중국의 전통적인 이이제이를 활용하라는 건가? 필요 없어. 보병과의 전투를 감당하기 어려워진 때부터 유목민 기병의 시대는 사실상 끝났거든. 승마보병으로는 여전히 쓸 만하겠지.”
“토르구트 하나만 해도 기병을 모으면 20만이나 됩니다, 전하. 전성기의 몽골제국에 못지않습니다.”
“토르구트가 영토를 확장할 이유가 없어.”
토르구트족이 강하긴 해도 주변이 온통 잠재적인 적국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고산국에 계속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화약무기의 성능을 잘 알고 있기에 군사력이 급속히 강화된 주변국에 대한 압박을 자제하고 있었다. 토르구트가 스텝 지역의 주요 세력으로 자리 잡은 이후 노가이족과 크림한국뿐만 아니라 최근에는 심지어 카자흐의 큰, 중간, 작은 부족동맹마저도 화승총으로 무장했다.
토르구트는 정치와 무역으로 고산국과 강하게 결합됐을 뿐만 아니라 지도부에서 고산국의 행정과 교육 제도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주변국들보다 훨씬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유목보다 농업의 비중이 더 높았다. 타이지 토오를룩은 내실을 다지면서 외부에 대한 세력 투사는 오직 남동쪽 오이라트와 티베트로 제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영토 확장이 아니라 같은 종족 내의 권력다툼에 가까웠다.
“고남시 샛별 초등학교 5학년 3반 박경호! 네가 감히 국왕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새로운 미각 이론을 세운 놈이냐?”
“후, 후엥~”
초등학생과 몇몇 연구자들을 대상으로 연 조촐한 시상식에서 이민호가 수상자인 어린이를 놀렸다. 시상식에 참가한 아이의 부모와 담임교사, 실제 실험을 이끈 의과대학 교수들이 입을 가리며 웃음을 참았다.
“왜 우느냐?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나보구나. 그렇지! 네놈 때문에 국왕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고 전국의 교과서를 바꾸는데 엄청난 비용이 들게 생겼다. 모두 네놈 탓이다.”
“자,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진실을 찾으려 노력했을 뿐입니다!”
“오? 그래? 그럼 울음을 그쳐야지.”
“훌쩍!”
이민호는 몹시 즐거웠다. 초등학교 생물 교과서에 사람의 혀 그림을 그려놓고 짠맛과 단맛, 신맛, 쓴맛을 더 민감하게 느끼는 부위가 정해져있다고 설명한 것이 이미 30년이 넘었다. 그리고 매운맛은 미각세포가 아닌 통각세포를 통해 느낀다고 적었다. 이민호가 예전에 대한민국에서 배운 그대로였다.
그런데 이 꼬마가 혀의 부위별 미각세포가 특정한 맛에 반응하는 차이가 크지 않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리고 사람의 미각은 짠맛과 단맛, 신맛과 쓴맛 외에도 감칠맛을 따로 느낀다는 실험결과를 담임교사에게 제출했다. 초등학생의 호기심에서 시작된 엉성한 실험결과는 교사와 교장을 설득하고 이어서 고남 의과대학의 연구과제가 되었다.
결국 미뢰와 미신경, 미각세포에 대한 연구가 크게 진전되는 기반을 갖추게 됐다. 실험을 주도한 의대 교수들은 맛의 부위별 민감성 외에도 온도와 습도, 후각과 촉각이 맛에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리고 의대 교수들은 초등학생이 지목한 다시마육수에서 감칠맛의 주요 성분인 글루탐산을 추출하고, 화학자들까지 연구에 가담해 글루탐산을 인공적으로 제조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가장 쉬운 제조법으로 밀의 글루텐 성분을 가수분해하는 것이었다. 이보다 효율이 좋은 박테리아 발효법은 아직 생각하지 못했다.
“경호야! 진실보다 강력한 권위는 없단다. 국왕이나 유명한 과학자가 내린 결론에 의문이 생기면 누구나, 언제든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전하! 나라에 수많은 생물학자와 의사선생님들이 계시는데 이런 간단한 진실이 왜 지금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의 생명을 우선하는 의사들 입장에서 맛을 느끼는 부위 따위는 크게 중요한 이론이 아니라고 여겼겠지. 하지만 식품업계에는 매우 중요한 이론이다. 네가 발견한 미각 이론 덕택에 제품의 모양과 성분이 조금 바뀔지도 모른다.”
맛을 연구한 의대 교수들은 감칠맛의 주성분인 글루탐산나트륨 MSG를 조미료로 사용할 것을 정부에 제안했다. 교수들은 이 조미료가 인체에 해를 끼칠 가능성을 두고 장기적인 연구에 들어갔으나 아직은 특별한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
음식문화 전반을 담당한 혜진이 무척 기뻐한 것으로 이번 실험과 발견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었다. 혜진은 단 며칠 만에 적절한 조미료 투여량을 파악해냈다. 맛의 균형을 잡아주는 인공 감미료의 발견은 인류의 음식문화사에서 큰 진전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고산국에 일부 분야를 제외하고 특허권 제도가 아예 없어서 초등학생에게 경제적인 보상을 해주기 어렵다는 데에 있었다. 더더욱 글루탐산 제조법은 워낙 간단해서 비밀을 오래 보장하기 어려웠다. 이럴 때는 국가에서 보상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국왕은 박경호에게 상장을 수여해 과학 분야에서의 뛰어난 업적을 증명하고 부상으로 일만 원을 하사하겠노라.”
“에엑! 너무 많습니다.”
특허권 제도가 제대로 운영된다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었을 텐데, 겨우 1만원에 꼬마가 무척 기뻐했다. 천리마의 뼈에 상금을 준 고사와 정반대 같아서 이민호는 몹시 씁쓸했다.
“사탕 사먹으라고 주는 돈이 아니다. 학교나 연구기관에 속하지 않은 너 같은 어린 과학자가 독립적으로 연구를 수행하려면 많은 비용이 들 것이다. 이것 외에도 새로운 연구를 할 때마다 시청에서 연구비를 타도록 해라.”
“감사합니다, 전하!”
이민호에게 중요한 것은 미각 이론의 수정이나 화학조미료의 발견이 아니었다. 어린이를 비롯한 모든 백성이 잘못된 권위에 언제든 도전할 수 있고, 또한 그런 이들에게 용기를 북돋는 사회적 분위기가 드디어 갖춰졌다는 사실이었다. 담임교사와 교장, 그리고 의대 교수들은 어린 초등학생의 주장이라고 무시하지 않고 진지하게 검토한 덕택에 미각 이론을 수정하고 인공조미료를 개발하는 큰 수확을 올릴 수 있게 됐다.
이런 분위기는 결국 후손들의 왕권을 합리적으로 제한하면서 국가적 효율을 극대화할 것으로 이민호는 기대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성경 말씀도 있지만, 인간이 자유로울 때 진리를 더 쉽게 발견해낸다는 것이 이민호의 확고한 신념이었다.
“박경호 학생을 천재 과학자로 키워낸 선생님들은 최고의 교육자들이오.”
“과찬이십니다, 전하.”
“아니오. 만약 쓸데없는 짓한다고 꾸중했다면 장래 훌륭한 과학자가 될 학생의 인생이 바뀌었을 것이오.”
담임교사와 교장에게는 훈장을 서훈하고 상금을 지급했다. 실제 실험을 진행한 의대 교수들도 마찬가지로 흡족한 포상을 받았다.
과학자 혹은 일반인들에게 새로운 발견과 발명을 할 동기를 부여하고 지원해주는 것이 정치가의 임무라고 이민호는 생각했다. 임진왜란 기간 중에 연사가 가능한 조총을 직접 발명해서 어전에서 발표했던 선조 임금은 신하들로부터 세종대왕 같은 성군이라는 칭찬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신들에게 핀잔을 듣고 나중에 실록 편찬과정에서 사관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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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연재 못해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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