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ding Maker RAW novel - Chapter (87)
엔딩메이커-87화(87/473)
< 제29장 – 헬 게이트 >
제29장 – 헬 게이트
성천사 레나.
밝고 상냥하며 자애로운 여인. 누구보다 성녀라는 이명이 어울리는 자애의 천사.
그녀가 지옥의 문을 열었다.
엔디미온에 수많은 마물들을 풀어놓았다.
하지만 그 모든 사실보다 코델리아는 다른 것에 흥분했다.
눈을 크게 뜨며 레나에게 다가섰다.
“레나!”
코델리아가 알고 있는 레나의 얼굴이 아니었다.
시네마틱 무비에 나왔던 죽어가던 그녀의 얼굴과도 달랐다.
금발은 그대로였지만 하얀 색이었던 피부가 옅은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맑고 푸른 두 눈이 있어야 할 곳에는 붉고 검은 눈이 있었다. 흰 자위 대신 검정이 가득했고, 붉은 눈동자 역시 마치 뱀의 그것처럼 길게 찢어져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
레나는 본디 성천사인데.
선조회귀를 통해 천사의 힘을 손에 넣은 지상의 천사인데.
“가까이 오지 마요. 가까이 오면 안 돼요.”
레나가 급히 뒷걸음질 쳐 코델리아의 손길을 피했다.
코델리아는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어 유더를 돌아보았다.
레나가 어째서 지금처럼 되었는지는 알지 못 하지만, 적어도 어떤 상태인지는 아는 코델리아였기 때문이다.
‘악마병.’
지옥의 기운에 잠식된 존재가 걸리는 병이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지옥의 기운을 단번에 쐬면 그 순간 죽음을 맞이했지만 일부 정신과 육체가 강인한 자들은 악마병에 걸렸다.
악마병의 효과는 단순했다.
악마가 된다.
보통은 이지도 없는 하급한 마물이 되었지만 일부, 정말 고결하고 강대한 정신과 단련된 육신을 가진 이들은 이지를 가진 악마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레나는 악마병에 걸려 있었다.
그리로 말미암아 유더는 보다 완벽한 해답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지옥에서 탈출하셨군요. 그 과정에서 지옥의 문이 열렸고요.”
레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곤 제국에서 악마와 싸우다 지옥에 끌려가게 되었어요. 그곳에서 싸우고 또 싸운 끝에 간신히 탈출할 수 있었지만··· 그 여파로 지옥의 문이 열리고 말았어요.”
레나가 무척이나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파라곤의 비극으로 아버지처럼 생각한- 아니, 아버지 그 자체였던 스승님뿐만 아니라 사랑하던 이들 모두를 잃은 그녀였다.
그런데 그런 자신이 스스로의 손으로 파라곤의 비극을 다시 한 번 초래할지도 모를 지옥의 문을 열어버렸다.
견딜 수 없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이번 일을 해결해야만 했다.
‘악마병 때문에 천사의 힘을 제대로 쓰지 못 해. 죽기 직전에 악마병이 나은 건 지나치게 힘을 소진해서고.’
앞뒤가 맞았다.
레나는 스스로를 희생해 지옥의 문을 닫은 뒤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 것이었다.
“지옥의 문을 닫아야 해요. 닫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레나가 간절한 어조로 말했다.
마치 스스로의 잘못을 고해 바치는 것만 같은 표정과 목소리였다.
“레나 잘못이 아니에요.”
코델리아가 말했다.
그러자 레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제 잘못······.”
“아니에요. 아무튼 아니에요. 레나가 일부러 문을 연 게 아니에요. 레나는 좋은 사람이고, 지금도 어떻게든 문을 닫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맞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괴로운 표정 짓지 말아요. 저랑 유더가 도와줄게요. 같이 문을 닫고 신나게 웃으며 돌아가요.”
거의 쏟아내듯이 말한 코델리아는 레나의 손을 잡은 뒤 미소지었다.
하나하나 따져보면 결국 대책 없는 말에 불과했지만 레나는 코델리아를 따라 웃었다.
어색하게 시작했지만 지옥의 문이 열린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것이 코델리아를 더욱 미소짓게 하였다.
활짝 웃은 그녀는 레나의 어깨를 안으며 말했다.
“할 수 있어요. 우리 유더는 굉장하거든요. 유더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거예요. 그렇지?”
이번에도 대책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강한 믿음이 실린 그 말에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일단 상황을 점검하도록 하죠. 레나, 아까 힘을 보충할 방법이 있다고 했죠?”
어느새 이야기를 주도하기 시작한 유더였다.
레나는 바로 답하는 대신 코델리아와 유더를 돌아보았고, 이내 다시 미소지었다.
‘란디우스랑 같이 있는 것 같아.’
터무니없을 정도로 긍정적인 동시에 언제어디서나 안심하고 등을 기댈 수 있는, 믿음직한 방벽과도 같은 남자.
“엔디미온의 대마법진을 이용할 생각이었어요.”
레나는 그대로 허공에 손을 놀려 마법을 펼쳤다.
그러자 허공에 구현된 엔디미온의 전도 위에 하얀 빛으로 된 복잡한 도형이 그려졌다.
“고대의 하이 엘프들은 엔디미온에서 데몬프린스와 최후의 결전을 펼치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고··· 급기야는 자신들의 수도 자체를 무기화시켰어요.”
수도에 거하는 모든 시민들의 마력을 단번에 흡수시킨 뒤 마법진을 발동, 집중되고 증폭된 힘을 데몬프린스에 맞서 싸울 한 사람에게 주입한다.
“아직 엔디미온에는 상당량의 마력이 저장되어 있다는 걸 발견했어요. 술식을 발동시킬 수 있다면··· 어떻게는 천상의 봉인을 펼칠 마력을 모을 수 있을 거예요.”
그럴싸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유더는 레나의 이야기에서 문제점을 느꼈고, 코델리아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원작에서 레나가 사용한 방법.’
그리하여 결국 레나가 죽음에 이르고 만 방법.
그러니 저 계획만으로는 안 되었다.
무언가 변조를 가해야만 했다.
“잠깐, 이 문장대로면 힘을 모을 대상은 천사여야만 하지 않습니까?”
잠시 벨라지오와 함께 존재감이 흐릿해져 있던 카플란이 허공에 그려진 전도를 보며 말했다.
제도 아카데미의 고고학 교수답게 고대어에 능한 그였다.
“그건······.”
아픈 곳을 찔리기라도 한 듯 잠시 주저한 레나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네, 이 힘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천사의 인자를 가지고 있어야만 해요. 비록 악마병에 걸린 저지만··· 그래도 천사의 인자까지 잃은 것은 아니에요.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거예요.”
미소로 말을 맺은 레나였지만 유더와 코델리아는 속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었다.
레나가 목숨을 잃은 이유.
악마병에 걸린 레나는 지금 제대로 된 천사가 아니었다. 집중된 성스러운 힘에 레나 자신도 큰 타격을 입고 말 터였다.
그러니 계획을 바꿔야 했다.
그리고 유더와 코델리아에게는 방법이 있었다.
‘내가 할 거야.’
코델리아가 유더에게 눈빛으로 말했다.
비록 아직 선조회귀를 하지 않았지만 천사의 인자를 가지고 있는 그녀였다.
악마로부터 마녀의 힘을 다루기는 하지만, 마녀화를 하지 않으면 성스러운 힘에 타격을 입을 이유도 없었다.
‘꼭 할 거지?’
‘꼭 할 거야.’
코델리아의 두 눈에 마치 불이 인 것 같았다.
때문에 유더는 인정했다.
지금의 코델리아를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가능한 코델리아에게 무리한 방법은 피하고 싶은 유더였지만, 지금은 코델리아가 옳았다.
코델리아가 레나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해결책이었다.
“해보자.”
“나한테 맡겨.”
씩하고 매력적인 미소를 지은 코델리아는 바로 레나에게 자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고, 유더는 카플란을 돌아보았다.
“카플란 경,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제가요?”
“예, 마법진을 발동시키기 위해서는 카플란 경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마법진을 운용하기 위한 콘솔을 조작해야 하니까요.”
엔디미온에는 처음 온 유더였지만, 하이엘프들의 마도왕국 마젤란에 처음 온 것은 아니었다. 다른 곳에 있는 마젤란의 유적에서 이미 비슷한 종류의 마법진을 접해본 적이 있었다.
‘레나가 오래 걸린 건 혼자서 모든 걸 처리해야했기 때문이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카플란이라면 하이엘프들의 고대어로 구성된 콘솔도 무리없이 조작이 가능할 터였다.
“역시 카플란 경과 함께해서 다행이에요.”
유더의 말에 카플란은 흠칫하더니 이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맡기시죠. 비슷한 것을 연구서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네, 믿을게요.”
카플란의 어깨를 두드린 유더는 코델리아와 레나 쪽으로 다가섰다.
레나는 코델리아의 말에 조금 놀란 얼굴이었지만, 의심하는 대신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부담이 클 거예요.”
“괜찮아요. 이렇게 보여도 엄청 튼튼하니까.”
헤헤 웃으며 가슴을 탕탕 두드린 코델리아는 바로 유더를 돌아보았다.
“유더, 의식을 발동하면 악마들도 눈치를 챌 거야. 그러니 놈들의 시선을 다른 곳에 돌릴 필요가··· 표정이 왜 그래?”
“아니, 네가 작전이란 걸 세운 게 신기··· 죄송합니다. 제발 때리지 마세요.”
유더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주먹을 꽉 말아쥐며 흥 소리를 낸 코델리아였지만 이내 얼굴을 풀었다. 애당초 레나를 위해 일부러 친 장난임을 알아서였다.
“레나, 천상의 봉인을 마법진으로 부탁드릴게요.”
이제와서 벼락치기로 천상의 봉인처럼 고위 마법을 배우는 건 절대로 무리였으니까.
코델리아의 부탁에 레나도 미소를 보였다.
“네, 바로 준비할게요.”
불과 몇 분 사이에 분위기 완전히 바뀐 일행이었다.
지옥의 문을 닫고 엔디미온의 사건을 해결한다. 레나의 목숨을 구한다.
“할 수 있어.”
작게 말한 유더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작전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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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디미온의 마법진을 발동시키기 위해서는 지하도시의 모퉁이에 자리한 아홉 개의 마법석을 모두 활성화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개중 여섯 개는 이미 레나가 활성화를 시킨 상태였기 때문이다.
카플란이 콘솔을 조작하고 레나가 천상의 봉인의 마법진을 그리는 동안 유더는 도시 외곽을 돌며 마법석을 활성화 시켰다.
질풍이십사보의 경지가 한층 높아진 유더가 작정하고 숨어 다니자 하급한, 그것도 제대로 된 지휘 체계를 갖추지 못한 마물들로는 유더의 그림자조차 포착할 수 없었다.
‘좋아, 순조로워.’
마지막 아홉 번째 마법석도 활성화시켰다.
이제 중앙의 탑으로 돌아가서 레나와 합류, 악마들의 주의를 끌 양동작전을 시작하면 되었다.
“유더!”
“레나!”
탑 1층에 도달하니 레나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마법진 그리는 일이 막 끝났기 때문이다.
정말로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이대로만 진행하면 성공적으로 지옥의 문을 닫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역시 무리였다.
마법석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돌아다니는 동안에도 시간이 흘렀다.
지옥의 문이 마침내 1단계를 넘어 2단계로 변화를 시작했다.
아아아-!
귀곡성이 지하도시 전체를 뒤흔들었다.
지옥의 사기가 훨씬 더 강해졌고, 지독한 음기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지옥의 문 역시 보다 커졌다.
균열이 더 크게 벌어져 이제는 정말 문처럼 보였다.
그리고 보다 많은 마물들이 건너오기 시작했다.
이명을 가진 악마 역시 모습을 보였다.
거리가 멀었다.
지옥의 문과 탑 사이에는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명확히 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지옥견들이 끄는 거대한 마차 위에 강대한 기운을 발산하는 락토가 서 있었다.
평범한 락토가 아닌, 이명을 가진 강력한 악마였다.
놈이 등장한 순간 지하도시의 대기가 다시 한 번 요동쳤다.
그 등장만으로 솜털이 쭈뼛쭈뼛 치솟았다.
“반다이젤.”
유더와 레나가 거의 동시에 말했다.
유더에게 있어 놈은 영웅전기2 중반부에 등장하는 보스였고, 레나에게는 지옥에서 몇 번이나 자신을 뒤쫓은 끈질길 추적자였다.
‘놈의 시선을 끌어야 해.’
보통 강한 녀석이 아니었다.
무턱대고 의식을 발동시키면 마법진의 힘이 코델리아에게 집중되기도 전에 탑이 박살날 수 있었다.
그러니 놈과 싸워 시간을 벌어야 했다.
놈이 탑에 접근하지 못 하도록 하는 것이 유더 자신과 레나의 임무였다.
“3분만 버티면 돼요.”
유더의 말에 레나는 미소를 보였다.
“네, 3분.”
“정말로 길고 긴 3분이 되겠지만요.”
“그러게요.”
지금의 레나는 정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다섯 영웅들 가운데 하나인 그녀였다.
비록 악마병에 걸렸다 한들 그녀는 여전히 파라곤 왕국의 비극을 끝낸 영웅이었다.
‘묘한 기분이네.’
영웅전기1편의 영웅과 함께 싸운다.
보호받거나,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대등한 위치에서 함께 한다.
‘나도 살짝 미치긴 했네.’
이 와중에 가슴이 두근거리다니.
“가요, 유더.”
“네, 레나.”
유더와 레나는 지옥문을 향해 똑바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반다이젤이 그것을 느꼈다.
지옥의 문 앞에 서서 멀리 보았고, 미소를 머금었다.
“레나.”
반다이젤은 이명을 가진 악마였다.
그가 등장한 순간 무질서했던 마물들의 무리는 하나의 군대로 탈바꿈 하였다.
모두가 일시에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직 거리가 있었다. 사이에는 건물 수십 채가 도열해 있었다.
하지만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3분이에요.”
“3분.”
어떻게든 되겠지.
씩 웃은 유더는 구천구문의 힘을 활성화시켰다.
레나 역시 양손에 마력을 집중시켰다.
“코델리아.”
유더가 무의식 중에 말했고, 그 말이 신호탄이 되었다.
유더와 레나가 지면을 박찼다.
동시에 반다이젤이 크게 외쳤고, 지옥의 마물들이 땅을 울리며 돌진했다.
콰가가가가가-!
거기에 더해졌다.
땅울림에 굉음이, 지하도시에 어둠을 단번에 몰아낼 정도로 강하고 아름다운 빛이.
아홉 개의 마법석에서부터 일시에 빛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지면이 빛났고, 강대한 고대의 마법진이 가동하기 시작했다.
마물들이 잠시 주저했다.
하지만 반다이젤은 아니었다.
놈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느지 명확히 파악하지는 못 했지만, 당장 움직여야 한다는 사실만은 잘 알고 있었다.
“부숴라! 파괴하라! 모두 쓸어버려라!”
반다이젤의 일갈에 마물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다이젤 본인도 커다란 날개를 펴며 마차를 박차올랐다.
그리고 유더와 레나가 각자의 역할을 하기 위해 흩어졌다.
탑으로 몰려드는 수많은 마물들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레나뿐이었다.
그러니 자연 유더의 역할은 고정되었다.
“3분.”
반다이젤을 상대로 1라운드.
“코델리아.”
마치 기도라도 하듯 다시 한 번 코델리아의 이름을 읊조린 유더는 그대로 돌진을 개시했다. 탑을 향해 똑바로 날아가기 시작한 반다이젤을 향해 몸을 날렸다.
흑룡십자격!
시작부터 대뜸 최강의 기술을 날렸다.
강대한 검은 십자가가 허공을 부수고 나아가자 반다이젤이 돌진을 멈췄다.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검은 십자가에 쇠채찍을 휘둘렀다.
콰가강!
검은 십자가가 단번에 분쇄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기가 찢어졌고, 지면 위로는 채찍의 궤적을 따라 불꽃이 일었다.
이명을 가진 악마.
봉인되지도 않고, 지옥에서 막 나와 힘이 넘치는 괴물.
놈이 미소를 지었다.
검은 십자가가 분쇄된 자리 너머에 위치한 유더를 포착하였다.
“안녕.”
유더가 말했고, 놈이 광소했다. 검은 기파를 불꽃처럼 일으키는가 싶더니 유더를 향해 돌진했다.
츠확!
쇠채찍이 다시 허공을 누볐다.
그리고 그 궤적 안에 있던 모든 것들이 파괴되었다.
콰르릉! 쾅!
뇌성이 아니었다. 건물들이 일제히 붕괴하며 난 소리였다.
유더는 지면을 박찼다. 무너지는 건물 잔해를 박차며 달리고 또 달렸다.
‘회피에 집중하자.’
아웃복서처럼 행동하자.
정면 대결은 승산이 없었다. 기동력으로 놈을 농락해야 했다.
더 빠르게.
조금 더 빠르게!
쾅!
거대한 망치가 유더가 방금까지 서 있던 자리를 파괴했다.
반다이젤의 오른손에 자리한 워해머였다.
반다이젤의 키는 7미터 남짓.
유더에게 있어서는 거인이나 다름없는 놈이었지만 결코 느리지 않았다.
쾅!
다시 굉음이 터졌다.
이번에는 유더였다. 질풍과 선풍을 일으키며 반다이젤과 거리를 벌리는 대신 오히려 좁혔다.
단순히 도망만 쳐서는 놈의 시선을 끌 수 없었다.
혈랑지옥참.
붉은 검기가 반다이젤의 허리를 베었다.
얕았다.
하지만 피를 흘리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쥐새끼가!”
격노한 반다이젤이 노성과 함께 돌아서며 유더에게 채찍을 뿌렸다.
날카롭고 빨랐다.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다.
때문에 유더는 피하지 않았다. 쇠채찍의 궤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콰직!
땅이 분쇄되었다.
하지만 유더는 그렇지 않았다. 요정의 발걸음으로 일격을 무시했다.
공간을 넘어 공격을 지나친 뒤 그대로 질주했다.
“노옴!”
반다이젤이 날개를 펼쳤다.
빨랐다.
그러니 이쪽은 더 빨라져야만 했다.
질풍이십사보 흑풍도래.
칠흑의 바람이 불었다.
건물과 건물 사이를 오가는 검은 질풍이 바람을 부수고 갈랐다.
“우오오!”
반다이젤이 더욱 속도를 높였다. 쇠채찍으로 공간 그 자체를 찢어발겼고, 사자후를 토해 대기뿐만 아니라 검은 질풍을 뒤흔들었다.
“크윽!”
달리던 유더가 튕겨져 나갔다. 파도처럼 밀려드는 파동을 온전히 피하지 못 해 바닥을 굴렀고, 반다이젤이 그런 유더의 앞에 나타나 문답무용으로 망치를 휘둘렀다.
쾅!
굴러서 피했다.
하지만 한 번이 한계였다.
놈이 다시 쇠채찍을 휘두르자 이번에는 피할 재간이 없었다.
쇠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유더를 핏물로 만들기 위해 쇄도했다.
요정의 발걸음은 이미 사용한 상태였다.
때문에 다른 것을 해야만 했다.
어떻게든 놈의 공격을 피해야만 했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시간이 없었다.
시간이 걸리는 흑룡십자격으로 받아치는 것은 무리였다.
공간을 뒤덮는 쇠채찍을 몇 걸음만으로 피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찰나.
시간의 틈바구니.
유더는 계산했다.
아니, 계산하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만은 코델리아처럼 본능적으로 직감하였다.
신기한 일이었다.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찰나 속에서 생각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구결을 외우는 것도 가능했다.
그렇기에 유더는 행동했다.
질풍이십사보가 아닌 천하삼십육보에 구천구문의 구결을 더하였다.
성십자 지르기를 흑룡십자격으로 진보시켰듯이 천하삼십육보에 새로운 힘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
콰가가강!
마치 천둥이 치는 것 같았다.
무시무시한 쇠채찍의 연격이 주변 일대를 휩쓸었고, 모든 것을 파하였다.
하지만 반다이젤은 미소 지을 수 없었다.
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모든 것이 아니었으니까.
맹렬한 파괴의 폭풍 속에서 건재한 이가 하나 있었으니까.
유더가 서있었다.
멀리 이동한 것이 아니었다.
본래 서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자리했다.
천하삼십육보는 모든 방위에서의 공격을 회피하기 위해 모든 방위로 뻗어나갈 수 있는 보법이었다.
거기에 구천구문의 힘이 더해졌다.
그리하여 유더는 피할 수 있었다.
쇠채찍의 연격이 제아무리 폭풍우 같다 할지라도 결국엔 하나의 선이 만들어내는 공격이었다.
그 선이 쏟아지는 방향을 정확히 포착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하나의 선을 완벽히 피할 수 있다면.
반복한다.
어느 방향으로든 신형을 날릴 수 있는 천하삼십육보로 연속해서 선이 그리는 궤적을 벗어난다.
그리하여 마침내 폭풍 그 자체를 피해낸다.
“커헉.”
유더가 거친 숨을 토했다. 연이어 입술을 따라 피가 흘러나왔고,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기까지 하였다.
‘아직은 무리야.’
제대로 다룰 수 없었다.
작금의 공격을 피해낸 것 자체가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반다이젤은 당황했다.
하지만 놈은 이내 이성을 되찾았다.
유더가 기적같은 움직임을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은 주저앉아 있었다.
“죽어라.”
상투적인 말.
유더는 주저앉은 채 헉헉거리며 그런 놈의 망치를 보았고, 아예 바닥에 드러누웠다.
한 사람의 이름을 읊조렸다.
“코델리아.”
시간이 되었다.
3분이 지났다.
탑이 빛나기 시작했다.
반다이젤도 그것을 알았다.
탑에 강대한 힘이 집중된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당장은 눈앞이 유더를 죽이는 것이 급했으니까.
탑을 돌아보는 우행 따위는 저지르지 않았다.
그저 한결 같이 망치를 든다.
내려쳐서 눈앞의 적을 으깬다.
옳은 행동이었다.
지금까지 반다이젤의 목숨을 지켜준 고마운 철칙이었다.
하지만 그랬기에 반다이젤은 보지 못 했다.
지옥의 문을 닫는 것보다 유더의 목숨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여인이 다가오는 것을.
엔디미온의 힘을 얻자마자 마법진을 발동시키는 대신 주먹을 움켜쥐고 지면을 박차 여인이 돌진해오는 것을.
“유더어!”
쾅!
굉음이 작렬했다.
반다이젤도 돌아볼 수밖에 없었지만 그때는 이미 늦어있었다. 강대하기 짝이 없는 무형의 힘이 반다이젤을 강타해 날려버렸다.
콰가가가!
반다이젤의 거체가 바닥을 구르며 건물들을 부쉈다.
그리고 코델리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전신이 순백의 빛으로 뒤덮인 그녀는 그대로 유더 곁에 착지했다.
“야! 괜찮아? 야!”
“괜찮, 괜찮아.”
걱정해주는 것은 고마웠지만 멱살을 당기다보니 오히려 숨 쉬기가 어려웠다.
“봉인, 빨리······.”
유더가 코델리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달려와 준 것은 고마웠지만, 서둘러 지옥의 문을 닫아야 했다.
엔디미온의 힘이 유지되는 것은 길어야 수십 초 남짓일 터였다. 지금이라도 다시 탑으로 돌아가 레나가 탑 최상층에 설치한 천상의 봉인의 마법진을 발동시켜야 했다.
하지만 유더가 채 말을 끝맺기도 전이었다.
반다이젤이 다시 몸을 일으켜세웠다.
기상과 동시에 강대한 기파를 날렸고, 코델리아는 급히 손을 휘둘러 놈의 기파를 막아냈다.
콰가강!
무시무시한 굉음이 일었고, 코델리아가 비명을 삼켰다. 엔디미온의 힘이 너무나 강대한 탓이었다. 이대러 힘을 유지하면 그것만으로 코델리아 자신이 망가질 터였다.
유더도 그것을 파악했다.
때문에 다시 무어라 말하려 했지만 코델리아가 더 빨랐다.
그녀는 돌연 매력적인 미소를 짓더니 유더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야.”
“어?”
“너 나 믿지?”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일까.
유더가 순간 멍한 표정을 지은 그때 기파를 맞고 날아갔던 반다이젤이 다시 건물 잔해들을 부수며 몸을 일으켜세웠다.
이제는 시간이 없었다.
유더는 코델리아를 보았다.
코델리아는 송곳니가 살짝 보이는 미소를 지은 채 유더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 푸른 눈동자에 유더는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
“그럼 저지를게. 카플란은 루크가 챙길테니 걱정말고.”
“어?”
거기까지였다. 코델리아는 이번에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저지른다.
유더가 믿어주니 그대로 저질러 버리겠다.
코델리아는 똑바로 서서 반다이젤을 보았다.
놈과 유더에게 동시에 말했다.
“탑에서 지도를 보다가 알았는데, 여기도 용맥이 흐르더라?”
용맥이 흐른다.
갑자기 무슨 말일까.
갑자기 왜-
이해했다.
깨달았다.
그랬기에 유더는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야! 야야!”
안 돼! 야! 설마! 야!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이미 믿는다고 말해버렸다.
“지옥의 문을 닫는 방법 두 번째.”
지옥의 문이 열린 장소 그 자체를 없애버린다.
“덤으로 악마들도 같이 조지고.”
반다이젤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유더는 코델리아를 말리는 대신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코델리아가 송곳니를 빛내며 사납게 웃었다. 엔디미온의 힘을 모조리 모아 칼라마이트의 창을 만들더니 그대로 지면을 향해 내리 꽂았다.
엔디미온의 힘 그 자체를 용맥에 때려박았다.
그로인해 일어나는 것.
코델리아이기에 저질러 버릴 수 있는 일.
“씨발 쾅.”
코델리아가 우아하게 말한 그 순간.
무지막지한 굉음과 함께 용맥이 폭주했다.
지하도시 엔디미온 최후의 날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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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9장 – 헬 게이트 > 끝